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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강현아展 / 미완의 ‘들숨 날숨’

김성호

미완의 ‘들숨 날숨’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것 - 들숨 날숨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것이 있다. 크기가 너무 작거나 커서, 입자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혹은 이동 속도가 너무 빠르거나 느려서 볼 수 없는 세계! 가시광선이 보여 주는 세상만 볼 수 있는 인간의 지각 능력과 시공간의 물리적 한계로 인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쉽게 망각한다.  
공기는 대표적이다. 모든 인간이 ‘들숨, 날숨’을 통해 그것을 항상 가까이 경험하고 살면서도 보이지 않는 까닭에 우리는 그 존재를 망각하고 산다. 지구의 생성기부터 함께 존재해 왔고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존재인 공기! ‘들숨 날숨’은 공기라는 물질을 폐(肺) 안으로 들여오는 흡기(吸氣)와 폐 밖으로 내보내는 호기(呼氣)를 반복함으로써 생명을 영위하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이 ‘들숨 날숨’은 공기의 물질적 존재를 인식하는 최소의 방식임과 동시에 공기의 출입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는 필수적 장치이다. 특히 이 ‘들숨 날숨’은, 근육이 없는 까닭에, 스스로 수축과 이완을 할 수 없는 ‘폐’가 주의의 횡격막과 늑골의 상하 운동의 도움을 받아 흉강(胸腔)의 부피를 조절하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온몸으로 실천하는 생명 유지 장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 강현아는 미세 먼지와 스모그가 창궐하는 오늘날 현대 문명의 시대에 “맑은 공기를 잃어가며 인간들이 만들어낸 대처 대안들을 바라보며” 이번 개인전을 마련했다. 즉 “인간을 위협하는 미세 먼지에 대처하기 위해 또 우리의 폐를 보호하기 위해” 개발한 공기청정기나 가습기 등 ‘기계의 현대적 표준화’가 야기한 여러 폐해를 되돌아보고 점차 오염되어 가고 있는 자연환경과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노력에 대한 진지한 ‘생태적 문제의식’을 미술의 언어를 통해서 성찰한다. 
이번 전시에서 강현아는 ‘푸른 하늘 사진을 부착한 박스 안에 공기청정기를 설치한 작품’인 〈하늘하늘 박스〉나 ‘식물을 흙 속에 매장하고 가마로 구워 선반 위에 설치한 작품’인 〈살랑살랑 선반〉을 통해 자연의 오염, 복원, 보존에 관한 생태 미학을 선보인다. 또한 ‘분절된 자연목에 모터를 달아 움직이게 한 작품’ 〈도르르도르르〉와 ‘길거리 잡초들을 심은 화분들을 설치한 작품’인 〈솔솔 화분〉를 통해서 ‘자연과 인공의 공생(symbiosis)’에 관한 생태 미학을 전하기도 한다. 
특히 작가는 사물과 생명체의 움직임을 재미있게 표현한 의태어와 의성어를 작품 제목으로 제시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변질하고 있는 ‘현대 문명 속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지나치게 심각하게 경고하기보다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을 친밀한 방식으로 권유한다. 이러한 친밀한 방식의 권유는, 마치 ‘들숨 날숨’처럼 항상 함께 했음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간과했던 ‘자연 생태의 존재’를 재성찰하는 작가 강현아의 다채롭고도 흥미로운 작품들을 통해 구체화된다. 사진, 공예, 조각, 설치의 방식뿐만 아니라 자연 오브제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키네틱 조형 언어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작품별로 살펴보자. 


강현아, 전시 전경, 2019


II. 흔적 복원으로부터 - 〈하늘하늘 박스〉 &  〈살랑살랑 선반〉
여기 육면체 ‘하늘 상자’가 있다. 하늘 상자? 〈하늘하늘 박스〉라는 제명의 이 작품은 작가 강현아가 직육면체 박스의 내부를 ‘구름이 있는 푸른 하늘 사진’을 프린트한 시트지로 붙여 꾸미고, 박스 안에 공기청정기를 설치해 틀어 놓은 작품이다. 공기청정기 위에는 하얀 풍선 하나가 바람에 둥둥 떠다닌다. 박스 외부는 나무색 그대로인데 그 표면 위에서 레이저로 새겨진 큐알(QR) 코드 하나가 관객을 맞이한다. 관객이 스마트폰으로 이 큐알 코드를 인식하게 되면, 이것은 작가의 홈페이지에 준비해 놓은 영상들과 연동된다. 홈페이지에는 길거리에 놓인 에이콘 실외기에서 흐르고 있는 물을 자양분 삼아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자라는 잡초를 기록한 영상을 필두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촬영한 영상에 볼록 렌즈 효과를 사용해서 나뭇잎이 마치 호흡을 하듯이 부풀어 올랐다가 꺼지기를 반복하는 영상 그리고 독일의 한 주택 앞의 화분과 정원에 똑같은 볼록 렌즈 효과를 반복하는 영상이 연동되어 있다.      
설치적 조각과 영상이 혼성된 작품 〈하늘하늘 박스〉는 이번 개인전의 전체 주제인 ‘들숨과 날숨’의 메시지를 ‘한 편의 시’처럼 전한다. 생각해 보자. 푸른 하늘은 태양의 고도가 높은 낮 동안에 햇빛이 지구의 대기 중 기체 분자와 부딪혀 파장이 짧은 푸른색이 반사되면서 보이는 현상이다. 태양의 고도가 낮아지는 이른 아침과 저녁 무렵에는 햇빛이 대기층을 지나는 거리가 멀어지면서 파장이 긴 붉은색을 반사하여 붉은 노을을 만드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현상은 ‘보이지 않는 대기를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자연의 장치’인 셈이다. 물론 이것은 대기가 맑을 경우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공기청정기 위 ‘하늘하늘’거리는 풍선을 통해, 맑은 대기를 그리워하는 현대인의 간절한 소망을 전하는 ‘한 편의 시’라 할 것이다. 공기청정기를 통해서 임시로 가능한 ‘맑은 공기의 대리 체험’에 안위하면서 말이다.    
 
하늘하늘 박스, 2019

또 다른 작품 〈살랑살랑 선반〉은 이름 모를 풀잎과 잡초 그리고 나뭇잎들을 평평한 흙판 위에 살짝 묻은 후, 유약을 바르지 않은 채 고온으로 가마에서 구워서 만든 다수의 테라코타(terracotta) 판들을 목제 선반 위에 올려 설치한 것이다. 마치 ‘화석(fossil)’처럼 보이는 이것은 그 자체가 화석화된 ‘체화석(體化石)’의 유형과 닮아 있는 것이지만, 실제 식물은 사라지고 그 흔적만이 남았다는 점에서 ‘흔적화석’의 존재적 측면과 연동되기도 한다. 즉 “그때 그곳에 살아 있었다”라는 ‘생존 흔적에 대한 복원’ 혹은 간략히 말해 ‘흔적 복원’으로서의 존재적 차원 말이다. 이 작품은 고생물학과 지질학의 양상을 모방한 시뮬라크르일 따름이지만, 개념적으로는 오염된 자연과 위협받는 생태에 대한 그간 인간의 복원 노력이 정당했는가를 되묻는 반성의 성찰처럼 읽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마치 자연을 흙으로 싸서 염(殮)하고 화장(火葬)한 장례의 결과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 강현아의 작품 〈하늘하늘 박스〉와 작품 〈살랑살랑 선반〉은 작금에 당면한 자연의 손상과 오염의 흔적을 복원하는 인간의 노력에 대해서 질문한다. 미세 먼지의 고통을 임시로 벗어나려는 공기청정기 발명과 같은 인간의 노력은 결국 멸종되어 가는 자연물을 박제화하여 자연사 박물관에 보존하는 사후 대책만을 강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시적 제목을 지닌 두 작품은 ‘자연의 생존 흔적에 대한 복원’을 실천했던 인간의 그간 노력에 대한 시적 은유임과 동시에 비판적 풍자라고 할 수 있겠다.    


살랑살랑 선반, 2019


III. 공생으로 - 〈도르르도르르〉 &  〈솔솔 화분〉 
작가 강현아는 독일의 한 고고학박물관에서 일 년 남짓 복원 관련 일을 하면서 ‘인공적 노력의 한계’를 절실하게 체험한 적이 있다. 이러한 체험은 그녀의 작업에서, 흔적을 남기고 소멸하는 것들을 인위로 복원하는 일보다 그 소멸 자체에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를 마련한다. 자연과 생태 복원에 대한 작가 강현아의 자기반성이 ‘복원의 불완전함에 대한 자각’으로 이끈 셈이다. 강현아는, 인간이 자연의 오염과 훼손을 원상 복구하는 주역이 결코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 주역은 생성소멸과 순환을 통해 자가 치유하는 자연이다. 다만 인간은 자연 복원에 할 수 있는 노력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러한 관점은 표피적으로는 생태학자 머천트(Carolyn Merchant)의 ‘근본생태학(Radical ecology)' 중 반(反)인간주의, 반이성주의를 신조로 한 생태 중심주의를 이념으로 삼는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이나 정신생태학(Spiritual ecology)과 연동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반인간주의의 생태 운동을 지속하는 방식은 오늘날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효율적이지 않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반성의 주체인 까닭이다. 머천트는 인간의 이성을 회복시키는 사회생태학(Social ecology)’을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이것은 인간과 이성을 거부되거나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모두를 위해 더욱 진보시켜야 할 무엇으로 간주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강현아의 작업에 나타난 관점은 이러한 사회생태학의 관점과 맞물리는 것이다.  
사회생태학의 관점에서 이번 전시의 출품작인 〈도르르도르르〉와 〈솔솔 화분〉을 살펴보자. 이 작품들은 생태 복원에 대한 인간의 자기반성의 차원을 성찰한다. 전자는 자연의 지속적 생명력과 인공의 소멸을 대비시키고, 후자는 자연의 본성과 인간의 자연적 유용성을 대비시킴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공생(共生)’을 요청한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자. 
작품 〈도르르도르르〉는 이번 전시에서 주요 작품으로 간주된다. 전시장 중앙에 가장 큰 규모로 자리한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가로수로 식재되는 자연목을 이등분으로 자른 후 모터를 장착해서 서로를 이어 붙여 ‘생성’의 움직임을 부여한 것이다. 즉 자연(자연목이라는 개별 자연이 확장하는 자연)과 인공(모터를 통한 인간의 자연 복원)의 개념을 시적인 장치를 통해서 대비시킴으로써 양자가 상호보완적으로 필요한 ‘공생’의 존재임을 피력하는 것이다. 
특히 이등분으로 절단한 후 모터를 장착하여 재결합한 자연목은 모터에 의해서 뿌리 부분이 회전하면서 우리에게 낯설고도 기괴한 나무의 움직임을 선보인다. 기계적 회전 운동을 통해서 죽은 자연에 생명력을 부여하려는 작가의 의도는 가히 성공적이다. 나무 아래쪽 바닥에 설치한 널찍한 수조는 바닥을 검은색으로 마감하여 ‘흑경(黑鏡)’의 효과를 배가시킴으로써 수면 위에 나무의 전체 모습을 투명하게 반영함으로써 마치 신수(神樹)의 형상처럼 보이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회전하는 나무뿌리는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그 아래 설치한 널찍한 수조의 수면을 건드려 파동을 일으킨다. 이처럼 죽은 자연을 부활시켜 작동시키는 인간의 테크놀로지는 한정적이지만 유의미하다. 자연의 영원성을 상기시키는 목적을 위해 희생하기 때문이다. 
이 상징적인 설치물은 〈도르르도르르〉라는 작품명처럼, 모터의 기계음을 내면서 쉼 없이 돌아가는 특이한 자연 존재를 성찰하게 만든다. 즉 ‘자연과 인공적 복원’이 합치한 복합체처럼 선보이고 있는 이것은 자연(의 본성)이 지닌 영원성을 강조하는 장치로 고안된 것이지만, 자연과 인간(공)의 ‘공생’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읽히기도 한다. 자연목과 대비되는 인공의 모터를 결합함으로써 인간의 자연 복원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양자 간의 ‘공생’의 화두를 성찰하는 까닭이다. 
강현아의 또 다른 작품 〈솔솔 화분〉은 매우 단순하다. 길거리에 보이는 잡초들을 채집해서 화분에 담아 전시한 것이다. 잡초란 화훼(花卉)나 식용, 또는 약용의 목적과 같은 유용성의 차원에서 인간에게 불필요한 존재로 간주하여 배제하거나 방치한 자연이다. 달리 말해 인간으로부터 버려진 자연이라 하겠다. 이 버려진 존재를 화분에 담아 이름도 예쁜 ‘솔솔 화분’으로 전시장에서 소개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의미는 중의적이다. 하나는 자연이란 인간의 목적과 상관없이 원래부터 “스스로 그러한” 상태로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에게 줄곧 관심의 밖이었던 잡초마저 인간에 의해 화분 안에서 새로운 보살핌과 돌봄의 대상으로 편입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르르도르르, 2019


IV. 에필로그 - 미완의 들숨 날숨
자연 속 모든 개체는 생로병사와 생성소멸을 거치면서 종국에 소멸한다. 단지 자연의 본성만 영원히 지속될 뿐이다. 자연 속 모든 존재가 공평하게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크로노스(kronos)’라는 객관적인 시간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항력이다. 다만 우리는 지금이라는 현재에서 ‘카이로스(kairos)’라는 주관적 시간에 주목한다.  
작가 강현아의 이번 개인전은 소멸하는 모든 것들의 크로노스의 시간을 예술이란 카이로스 시간 속에서 탐구하는 것이다. 인간이 예술의 임시적 존재에 영원성의 의미를 부여했던 것처럼, 임시성은 ‘미완’이라는 한계에서 영원성을 지향하는 생명을 이어간다. ‘하늘하늘, 살랑살랑, 도르르도르르, 솔솔’ 같은 의태어와 의성어는 미완의 상태로 언젠가는 끝나게 될 임시성의 시간을 은유한다, 영원성을 지향하는 임시성이란 ‘미완의 한계’라는 점 때문에 매력적이다. 따라서 전시에서는 ‘자연의 영원성’과 ‘인간(인공)의 임시성’을 대립으로 설정하기보다 상호 공생해야 할 존재로 고찰한다. 마치 ‘들숨 날숨’이 근육이 없는 폐가 주위의 횡격막과 늑골의 도움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또 그것이 임시적인 존재인 생명체 내외부의 교통으로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듯이, 자연과 생태 환경은 인간의 생존에 있어 필수적인 ‘공생’의 존재이다. 
작가 강현아는, 이번 개인전에서, 자신이 만든 ‘미완의 들숨 날숨’에 관객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어떠한 대안적 답을 내놓으라고 강권하기보다 그저 자신의 ‘들숨 날숨’을 함께 나누길 조용하게 권유하는 중이다. ●       

출전/
김성호,  「미완의 ‘들숨 날숨’」, 전시 카탈로그, 2019
(강현아展, 2019. 2019. 9. 18 ~ 10. 1, 갤러리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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