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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역파도(counter wave)展 - 이경호 / 봉다리의 새로운 여행 - 〈흑 백〉 연작

김성호

봉다리의 새로운 여행 - 〈흑 백〉 연작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1. 프롤로그
작가 이경호는 그동안 퍼포먼스, 조각, 설치,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유형의 장르를 넘나들며 예술과 자본, 삶과 죽음, 생태적 주제와 관련한 은유와 비판적 풍자의 조형 언어로 발표해 왔다. 《2004광주비엔날레》에서 실제 뻥튀기 기계를 소재로 삼아 달, 거짓말, 가난이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혁명 속에서 스러진 광주 시민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던 작품, 〈달빛 소나타〉, 2010년 《광주민주화혁명 30주년 기념전》에서 10원짜리 동전을 광주 시민으로 은유했던 작품, 〈순환〉, 2014년 심장 수술 직전에 금으로 도금한 10원짜리 동전을 전시장에 설치했던 작품, 〈헛되고 헛되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리고 2014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다보스포럼’에서 언급했던 “통일은 대박이다”란 메시지에 대해 풍자적 비판으로 응수했던 작품인 〈Jackpot!〉 등은 대표적이다. 
이렇듯 그의 작업은 동시대의 사회적 요청에 화답하는 은유와 비판적 풍자의 작업으로 특징된다. 더불어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와 같은 생태적 문제의식을 화두로 작업을 진척해 나가고 있다. 2009년부터 생태 사상가 토마스 베리(Thomas Berry, 1914-2009) 연구를 시작했고 연구 모임 ‘지구와사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생태 문제와 지구법 그리고 동물법 등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면서 작업하고 있다. 
작가 이경호는 이번 전시에서 일명 ‘봉다리’ 연작 중 새롭게 시작한 작품 〈흑 백〉을 선보이는데, 이 작품에는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사회적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특히 그는 이번 전시에서, 전시 장소인 세종문화회관이 위치한 광화문 일대의 장소성에 주목한다. 촛불과 태극기가 가득 찼던 곳, 영광과 분노와 억울함이 한데 어우러진 곳, 지금도 제각기 다른 발언들로 넘쳐 나는 이곳에서 그는 신작 〈흑 백〉을 통해서 봉다리가 담아내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의식을 구체화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천천히 살펴보자.  


2. 봉다리 
작가 이경호는 이번 전시에서 공간을 둘로 나누어 작품을 선보인다. 한 방에는 그동안 지금까지 발표했던 조각적 설치 및 퍼포먼스를 기록한 아카이브형 영상 작품과 더불어 애초부터 작품으로 기획되었던 영상 작품들을 여러 개의 모니터로 선보이는 것이고, 나머지 한 방에는 자신의 일명 ‘봉다리 시리즈’를 기록한 사진 작품을 배경으로 실제 여러 봉다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설치 작품을 대규모로 선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봉다리’라니? ‘봉(封)다리’는 사전에는 “경기, 전남 지역의 사투리”로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경기, 전남뿐 아니라 경상도, 강원도는 물론이고, 일부이긴 하나 충청도에서 두루 사용되는 방언이다. ‘봉지(封紙, plastic bag)’가 표준어인데, 이것의 변용인 ‘봉대(封袋)’란 말에서 봉다리라는 말이 생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작가는 봉지라는 표준어를 놔두고 굳이 왜 봉다리라는 방언으로 자신의 작품을 지칭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경기 이남’을 두루 아우르는 방언인 만큼, 모두에게 친밀한 용어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이 땅에 여전히 남아 있는 지역주의와 연관된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용어로도 적합한 까닭이다. 그뿐만 아니다. 봉다리는 작가 이경호가 자신의 작품 속에 담고 싶은 최근의 주제 의식인 ‘놀이와 유희, 기억, 이데올로기, 환경과 생태’ 등의 개념을 한데 아우르기에 매우 유효한 매체이다. 자신의 창작을 위한 훌륭한 제재(題材)이자 매우 단순하고도 풍성한 질료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 봉다리가 어떤 관심으로부터 촉발되었고 이경호의 작품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3. 봉다리 비행 - 〈Somewhere〉 연작  
작가 이경호의 창작에 있어서, 봉다리는 다음과 같은 어린 시절의 경험을 소환한다. “초등학교 때 집에까지 오는 길에 돌이나 나뭇가지, 봉다리 등 버려진 것들을 집까지 발로 차서 가지고 왔었다. 오는 도중에 개울이나 수챗구멍에 빠져서 아쉽게 이별을 한 것들도 있었지만 우리 집 마루 밑엔 무언가 늘 수북이 쌓여 있었고 그 인연들을 보면서 그냥 뿌듯해했다.” 버려진 것들을 발로 차며 집에까지 가져오던 ‘소년기의 목적지 있는 놀이’는 한편으로 수집 놀이이자, 어떤 면에서 운동이었고 때론 노동이기도 했다. 이 봉다리는 그가 훗날 청년이 되어 프랑스의 미술학교에 재학하던 중 방학 때마다 떠났던 유럽 무전여행 중에 일련의 ‘창작을 위한 실험’으로 소환되기에 이른다. ‘소년기의 놀이와 운동’이 ‘청년기의 유희적 창작 수련’으로 소환된 셈이다.    
이러한 놀이로부터 창작 실험으로 이동한 변환의 지점에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가 자리한다. 파리의 다락방에 거주하던 1988년 20대의 유학 시절, 가위에 눌렸던 악몽을 여러 번 경험했던 이경호는 그것을 극복하는 ‘척사(斥邪)’나 ‘액(厄)막이’의 방식으로 슈퍼마켓 ‘모노프리(Monoprix)’산(産) 비닐봉지에 눈 두 개를 그려 넣어 한동안 다락방 창문에 걸어 두었다. 기다란 손잡이를 가진 모양에 부릅뜬 두 개의 눈, 이러한 형상을 한 채 바람에 날리고 있는 비닐봉지! 그것은 부적(符籍)의 용도로서 족했을 것이다. 
작가 이경호는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이 봉다리를 자신의 창작으로 끌어들인다. 〈Somewhere〉라는 이름의 시리즈가 그것이다. 이 연작은 그가 유럽 여행 중 현지 상점에서 산 물건을 임시로 담았던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각 여행지의 풍경을 배경으로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또는 바닷물 속에 빠져 있거나 누군가에 의해서 우연히 날리는 모습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사진도 있다. 이러한 유럽 여행 당시 시작된 작업은 국내 및 아시아, 미국 등 다양한 국가에서의 해외여행으로 이어지면서 차츰 체계적인 양상으로 변모되어 간다.  
그러한 양상 중 하나는 비닐봉지의 색의 분별에 관한 것이었다. 대개는 검은색이었다. 경주(2006~19)뿐 아니라, 중국 홍콩(2006)과 북경(2009), 미국 마이애미(2010), 일본 나오시마(2011), 중국 시안(2018), 이탈리아 베니스(2018),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2019)가 그랬다. 다른 색도 사용되었다. 노란색은 북경의 만리장성에서 사용되었고, 흰색은 천안문 광장, 북경 천국의 사원(2009), 이탈리아 피사(2017)에서, 빨간색은 중국의 특별행정구 마카오 카지노와 홍콩(2006)에서 검은색과 함께 사용되었고, 파란색은 러시아 하싼의 북한 접경 지역(2009)과 프랑스 베르사유(2019)에서 그리고 물에 녹는 연두색(Green) 봉다리는 모나코 카지노에서 사용되었다. 이렇듯 그는 일정 부분 같은 장소에서는 같은 색의 비닐봉지를 사용해서 평생 이어질 이러한 프로젝트에 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자 노력해 오고 있다. 최근에는 이것을 ‘석유 덩어리’로 상징화하는 까닭으로 주로 검은색 봉다리를 작업에 사용하고 있다. 
이 시리즈에서 또 하나의 변모되어 가는 양상은 해외의 여행지 풍경을 바탕으로 주인공처럼 날고 있는 비닐봉지를 단순히 컷 이미지로 담았던 사진 작업에 부가하여 ‘드론(drone)’을 활용해서 촬영한 동영상을 추가, 병행함으로써 봉다리의 여행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테크놀로지의 점진적인 발전의 시기를 거치면서 가능해진 것인데, 이 〈Somewhere〉 시리즈가 앞으로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만나 어떠한 모습으로 변주될 것인지 충분히 기대해 볼 만하다. 
‘봉다리의 비행’을 추적하는 이경호의 〈Somewhere〉 시리즈는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의 저서 『지구의 정복자(The Social Conquest of Earth)』의 표지로 사용된 바 있는 인상파 화가 고갱(Paul Gauguin)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D'où venons-nous ? Qui sommes-nous ? Où allons-nous ?)〉(1897)라는 작품의 제목이 상기시키는 주제 의식을 탐구한다. 봉다리를 통한 ‘소년기의 놀이와 운동’이 ‘청년기의 유희적 창작 수련’을 거쳐서 이제는 ‘봉다리의 자유로운 비행’을 추적하고 ‘여행지의 기억을 소환’하면서 ‘봉다리’를 생로병사의 ‘인간 존재’에 대한 메타포로 삼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생태학의 관심사’로 견인하며 인간 존재에 관한 끊임없는 성찰을 도모하기에 이른 것이다. 





4. 봉다리 여행 - 〈Traveler〉 연작과 새로운 작업 〈흑 백〉
해외 각지에서 ‘봉다리의 자유로운 비행’을 추적하던 〈Somewhere〉 시리즈는 화이트큐브에 들어와 ‘봉다리의 구속된 비행’을 관찰하는 새로운 시리즈인 〈Traveler〉 연작을 낳기에 이른다. 이 연작은 복수의 봉다리를 화이트큐브에 직접 가져와 흩뿌려놓고 선풍기를 통한 인공 바람으로 비행을 강제하는 동시에 CCTV 카메라로 그것을 추적하면서 달과 같은 영상으로 변환하는 일종의 ‘인터랙티브 설치, 퍼포먼스, 영상이 뒤섞이는 미디어아트 작업’이다. 
2006년 갤러리 세줄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이 작품은 선풍기 바람에 날리는 ‘봉다리’가 CCTV카메라와 프로젝터 사이에 포착될 때마다 피드백 효과로 달의 영상 속에서 율동하듯이 회전 운동을 선보이면서 그 모습을 변형하고 변주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봉다리는 화이트큐브의 구속된 여행 속에서, 비록 협소한 개념이지만, 영토의 경계를 넘나드는 탈영토화를 수시로 경험한다. 보이지 않는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기! 2006년 《상하이비엔날레》와 《상하이아트페어》, 《퀼른아트페어》에서 다른 버전으로 선보인 이 작품은 올해 세종문화회관 전시에서는 인터랙티브 영상을 제외한 새로운 유형의 작업으로 소개된다. 
〈흑 백〉 이란 제명의 이번 작품은, 기존의 봉다리 연작 사진들이 벽면에 전시된 전시장 전체를 수십 개의 검은 봉다리와 흰 봉다리가 유영하듯이 돌아다니는 작품이다. 기존의 〈Traveler〉 연작을 구성하는 여러 조형 문법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법만을 전시함으로써 이 시리즈물을 새롭게 재정의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의 제목은, 흑과 백이란 단어 사이에 쉼표(,)나 가운뎃점(ㆍ) 또는 빗금(/)과 같은 문장 부호 자체를 없앰으로써 “양자가 구분이 없거나 서로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흑과 백은 그레마스(Greimas)의 언어 기호학에서 언급되듯이 ‘대조적 관계(une relation de contrariété)’에 놓인 반대어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 사이에 문장 부호를 없앴다고 하더라도 구분이 되지 않거나 다르지 않다고? 작품 제명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작가의 발언을 들어보자. 

“이번에는 흑색과 백색의 봉다리로 요즘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 남과 북, 동서(영호남), 좌우 대립의 색깔론 등을 풍자하는 설치로 흑묘, 백묘가 전부인 것이 아니라 경제 성장만 생각하고 앞만 보고 달려온 절름발이 나라에서 이제 화합해서 바로 걸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꿈을 꿔 보기를 제안합니다. 사람이 먼저인 나라, 문화가 있는 나라, 그래서 동물도 자연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환경이 되길 기대합니다.” 

위의 작가 진술에서 우리는 “남과 북, 동서(영호남), 좌우 대립의 색깔론을 풍자하는 설치”라는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흑과 백은 분명히 대조적 관계 속 반대어이지만, ‘흑 백’이라고 문장 부호 없이 표현한 제목에서처럼, 전시는 “대립의 색깔론을 풍자”하기 위해서 대립의 선명함을 무너뜨린다. 검은 봉다리와 흰 봉다리가 섞여 무작위로 인공 바람에 의해 날아다니는 풍경은 과연 어떠할까? 보기에 따라 그것은 마치 신인상주의 점묘법의 ‘시각적 혼합, 병치 혼합’처럼, 실제로는 회색이 아니지만, 마치 회색의 봉다리를 보는 것 같은 착시에 빠지는 효과를 창출한다. 
앞서 살펴본 그레마스의 기호학에서 흑백의 ‘대조적 관계’는 서로의 관점에서 검정/검정 아님(S1/non-S1)’, 하양/하양 아님(S2/non-S2)’ 식으로 ‘자기반성적’으로 성찰하는 모순적 관계(une relation de contradiction)를 통해서 변형된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이경호의 새로운 작업 〈흑 백〉은 검은 봉다리와 흰 봉다리가 끊임없는 혼성의 움직임을 통해 회색의 효과를 창출하게 된다. 즉 그레마스의 기호학으로 말해서, 흑과 백이 ‘검정/하양 아님(S1/non-S2)’의 만남이나 ‘하양/검정 아님(S2/non-S1)’의 만남을 지속함으로써 양자 간 회색의 효과를 누리게 되는 ‘상보적 관계(une relation de complémentarité)’를 형성하게 된 셈이라 할 것이다.
이렇듯 적대를 이루는 흑과 백의 ‘대립적 관계’를 화해시키고 소통을 도모하는 일은 이론적으로 간단하다. 양자가 자기반성을 통해서 서로 일보 양보하고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둘 사이의 공통적 요소인 회색으로 접점을 찾으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제는 늘 다른 법. 현실계에서의 실천이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관객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부터 화합을 주선하는 이경호의 새로운 작품을 작가의 의도대로 읽어줄까? 이 또한 쉽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까지의 전시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다수의 관객은 ‘화이트큐브에서의 강제되고 구속된 비행’이나 ‘좌우 이데올로기의 화합’이라는 작가 이경호의 의도를 머리로 이해를 할 테지만, 가슴으로는 ‘봉다리의 자유로운 비행’으로 이 작품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러한 관객의 감상평을 현장에서 자주 들은 바 있다. 실내의 공간을 천천히 유영하듯이 날아다니는 봉다리의 ‘비정형화된 비행’에 많은 관객이 감정이입하고 공감하면서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자신의 정형화된 일상을 탈주하고픈 욕구를 느끼는 까닭일 것이다. 


5. 봉다리 생태 운동 - 탈(脫)양비론과 생명주의 
작가 이경호의 봉다리는 작품 〈Somewhere〉에서 ‘자유로운 비행 속 특정 공간을 탈주’하고,  〈Traveler〉에서 ‘구속된 여행 속 영토를 탈주’하며, 이제는 작품 〈흑 백〉에서 ‘이데올로기’를 탈주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봉다리의 탈주 운동은 정형화된 규범과 제도를 벗어나는 비정형화의 운동이다. 그것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정할 수 없는 운동이다. 흑과 백 중 어느 편에 머물지 않고 그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유연한 운동이다. 
그렇다면 이경호의 봉다리가 선보이는 것은 극단의 ‘흑백논리’를 탈주하는 멋진 운동이 아닌가? 그럴 수 있다. 봉다리 자체가 이러한 정해진 흑백논리를 탈주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봉다리가 예전의 ‘보따리’와 같은 역할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다는 점은 대표적 예라 할 것이다. ‘보따리’는 종종 서구의 ‘포장과 이동 수단’인 박스(Box)와 비견되는데, 박스가 ‘정해진 용량의 그릇’의 의미를 지닌다면, 보따리는 ‘용량에 맞추는 그릇’이라는 점에서 그 정체성을 달리한다. 짐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자신의 몸집을 달리 하는 보따리는 봉다리와 얼추 닮아 있다. 봉다리 또한 담는 물건의 모양에 맞추어 포장의 외형을 변형하거나 입구를 봉해서 포장의 크기를 줄이거나 늘일 수 있다는 점에서 박스의 ‘경직된 포장 용기’의 정체성을 탈주하는 ‘유연한 무엇’이 된다. 그렇다. 손바닥 크기로 접혀 몸집을 줄인 채로 있다가도 물건의 크기에 따라 이내 몸집을 키워 올리는 ‘뼈 없는 비닐 근육’으로 변주를 거듭하는 유연한 무엇이다. 그것은 담아왔던 물건을 비우고 난 얇은 껍질로 남아 버려지는 임시적 존재로서 마치 ‘허무한 우리네 인생’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유롭다. 바람에 몸을 맡겨 자유로운 비행에 나서기도 하지 않는가? 그렇다. 봉다리는 ‘포장을 위한 유연한 그릇이자, 이동의 편의를 위한 임시 가방’이다. 그것은 ‘봉다리’로부터 찾을 수 있는 유연한 정체성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봉다리는 어찌 보면 그것은 흑도 백도 모두 틀린다고 양자를 부정하고 비판하면서 유연한 정체성이라는 이유로, 회색 지대에 머무르는 양비론(兩非論)이 아니던가? 정말 그런가? 이경호는 이 양비론에 있지 않다. 굳이 언급하면 좌우의 대립 중 좌측에 있는 편이며, 다수와 소수의 대립 중 소수에 있는 편이며, 환경과 문명의 대립 중 환경에 있는 편이며 그 환경 중에서도 ‘생태 지향의 인간 환경’에 있으려는 입장이라고 하겠다. 
여기에 매우 주요한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작가 이경호는 환경오염의 주범이자, 수거되고 버려져야 마땅할 쓰레기인 이 봉다리를 왜 ‘생태 지향의 인간 환경’의 입장에서 폐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 안으로 가져오는 것일까? 이 봉다리, 즉 비닐봉지(plastic bag)는 그야말로 플라스틱 쓰레기가 아니던가? 그는 말한다: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더 무섭게 만들어 직시하는 것이다. 내 작업이 그런 역할을 했으면 한다.” 그렇다. 그의 청년기였던 파리 유학 시절, 악몽을 퇴치하고자, 부릅뜬 두 눈을 그려 척사의 용도로 비닐봉지를 사용했던 것처럼, 작가 이경호는 환경오염과 파괴의 상황에서 그것과 관련한 메시지를 ‘더 무섭게 만들어 직시’하고자 환경 파괴의 주범이라고 평가받는 봉다리를 ‘생태 운동’의 주요한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역설이지만 새로운 개념을 낳는다. 
봉다리 생태 운동? 오랫동안 ‘구속 없는 자유로운 비행’으로 봉다리를 탐구했던 이경호는 2000년대에 이르러 이 봉다리를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화석 연료, 그의 표현대로 ‘석유 덩어리’로 보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봉다리 연작 속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 이른다. 기존의  야외에서 펼쳤던 〈Somewhere〉 연작에서부터, 실내 공간에 들어온 〈Traveler〉 연작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작품 〈흑 백〉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생태의 문제의식은 곳곳에 스미어있다. 또한 그는 봉다리 연작 외에도 이러한 생태 지향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이미 진행했고 또 새롭게 기획하고 있다. 특히 작가 이경호에게 있어서, 결혼 후 아들 찬유를 낳고 책임감 있는 아버지가 된 경험, 생사를 오가던 심장 수술을 받았던 경험은 생명의 소중함과 인류의 책임을 강렬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는 현재 전기차로 자신의 자동차를 바꾸면서 ‘최소한 나로부터의 출발’을 다짐하면서 이러한 생태 운동의 선두에 선 미술가로 자리하게 된다. 아들에게 물려 줄 미래의 환경은 어떠해야만 할까? 이러한 질문을 화두로 삼은 것이다. 
지구 온난화를 촉발하는 화석 연료, 그것의 상징인 봉다리! 그것은, ‘이곳, 저곳에 머물지 않는 자유로운 비행’과 ‘유연한 정체성’으로 인해 감내해야만 했던 양비론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이제 결연하게 탈주한다. 작가 이경호가 이 봉다리를 미술 생태 운동을 이끄는 한 주역으로 재무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


출전/
김성호,  「이경호展 / 봉다리의 새로운 여행 - 〈흑 백〉 연작」,  전시 카탈로그, 2019
(역파도(counter wave)展-샌정, 이경호, 이민혁, 이탈, 제여란, 2019, 10. 23~12. 15,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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