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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홍준호 / ‘규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김성호

규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1. 프롤로그
작가 홍준호의 작업은 구겨진 종이 위에 빔프로젝터로 사진 이미지를 투사하고 그것을 다시 카메라로 촬영하는 과정을 거쳐서 완성된다. 구겨진 종이의 피부 위에 투사된 사진은 굴곡진 종이 위에서 원래의 본 모습을 잃고 왜곡된다. ‘엄격한 모방의 원칙에 기초한 이상적 인체(canon)’를 통해서 미술사 속 거장의 조각을 구겨진 종이 바탕 위에 드리우는 홍준호의 작업은 굴곡진 바탕으로 인해 그 이미지가 뒤틀린 채 관객에게 제시된다. 실제의 왜곡과 은폐가 만드는 그의 새로운 조형 실험은 사진 매체의 독특한 존재 조건을 실험하면서 이미지의 존재에 관한 문제의식을 진중하게 성찰한다.
이번 전시에서 홍준호는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을 제시한다. 자신의 비언어적(non-verbal) ‘사진 작업’을 자신 스스로 언어적(verbal) 진술로 설명하고 분석적으로 해부하던 이전의 창작 태도로부터 한발 물러나 이미지를 덩어리째 던지고 그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의 의미를 관객 스스로 찾기를 기대한 것이라 하겠다.




2. 구겨진 종이 위에서
‘구겨진 것’은 버려진 것의 지표(index)이다. 그것은 기념하여 고이 간직해야 할 ‘보존의 자격’을 상실하고 버려진 ‘배제된 것’이자, ‘잔여물’이며, 쓰임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불필요한 ‘잉여물’이다. 이처럼 ‘구겨진 것’ 위에 펼쳐지는 그의 ‘사진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20세기 미술이 아방가르드를 기치로 이전의 ‘이즘(-ism)’을 버리고 ‘새로운 것(nouveauté)’을 찾아 나섰던 이데올로기의 시기에서 늘 목도되었다. 이즘의 교체를 지속해서 맞이했던 당시에는, “새로운 것이란 기존의 것을 변형하고 변용하는 곳에서 꽈리를 틀기보다 다시 폐허 위에서 새로운 싹을 틔우는 것”이라는 믿음이 20세기 미술가들에게 있었던 까닭이다.
바야흐로 21세기 미술에는 ‘새로운 것은 이제 없다.’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와 그들의 신념이었던 천재성, 독창성의 개념은 점차 미약해지다가 20세기를 거치면서 이미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독창성(originalité)'에 관한 담론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창의성(créativité)'의 존재 여부를 묻는 말만이 미미하게 존재할 따름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구약 성서의 아포리즘(aphorism)을 다시 꺼내어 반추하는 오늘날 시대에 창의성은 작가 개개인의 미시적 세계에 대한 질문들로 넘쳐난다.
이러한 시기에 작가 홍준호는 무슨 이유로 ‘버려진 무덤’ 위에서 자신의 예술을 찾고 있는가? 그의 작업에서 ‘구겨진 종이’는 절실함의 극한 속에서 잉태한 것이었다. 즉 그것은 뇌출혈로 인해 돌아가신 할머니의 죽음을 목도하고 자신과 아버지도 동일한 질병으로 죽음의 문턱에 다가섰던 극한의 체험으로부터 기인한다. 현실계 속 ‘존재의 끝을 알리는 죽음’을 체험한 이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단지 주검을 목도하는 ‘타자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생의 끝’을 인식할 따름이다. 사물로서 구겨진 종이는 이생에서의 쓰임새라는 존재적 소명을 다하고 생을 마감하는 ‘죽음에 대한 인식’을 불러온다. 그것은 바르트(R. Barthes)의 유명한 언명 “거기에 있었다(Çà a été)”라는 완료형의 사건을 ‘지금, 여기’에 소환하여 시각화하는 사진의 존재론적 차원과 공유한다. 
작가 홍준호가 이번 전시에서 내세우는 전시 부제인 ‘규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독일의 철학자 니체(F. W. Nietzsche)의 초상을 구겨진 종이 위에 투사하여 사진으로 표현한 작업인 〈Hallucination〉 연작이 중심에 자리한다. ‘환각’ 또는 ‘환영’으로 번역되는 이 제목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라는 ‘선언 아닌 선언’으로부터 기인한다. 즉 신을 죽이는 상징적 사건을 상상함으로써 ‘신에 대한 타살’을 이론적으로 실천한 니체의 철학적 성찰을 통해서 규범과 제도, 가치, 도덕으로부터 탈주하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자신의 작업 속에서 천명한 셈이다.
니체가 종교와 같은 ‘최고 가치’의 상실을 의도적으로 유발하면서 회의론의 나락으로 빠지면서도 끝내 견지하려고 했던 것은 비극적 상황에서도 잃지 않으려 했던 디오니소스적 긍정이자 ‘초인(Über-mensch)’의 삶이었다. 구겨진 종이와 같은 ‘죽음의 땅’ 위에 이미 고인이 된 철학자 니체의 초상을 소환해서 푸르거나 붉은빛이 도는 중간 색조와 맞물려 놓음으로써 신의 죽음의 의미를 성찰하는 홍준호의 〈Hallucination〉 연작은 의미심장하다. 구겨진 종이 위에 올라선 왜곡된 초상이 유추케 하는 비관적 회의주의와 더불어 디오니소스적 낙관주의 사이를 서성이는 까닭이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홍준호가 할머니의 죽음을 목도하고 자신도 뇌출혈로 인해 생사의 갈림길 앞까지 갔던 체험과 아버지 또한 동일한 질병으로 인해 얻어진 장애를 가족과 함께 견디어 내는 체험을 녹여냄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리라.
그런 면에서 그의 최근 작업은 작품 심층에 담긴 근본적인 미학이 무엇인지를 존재론적으로 성찰하고 되묻는 작업이라 할 만하다. 폐허의 ‘구겨진 종이’ 위에 새기는 그의 사진 작업은 적어도 칸트식의 도덕에 대한 ‘정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란 부재한다. 간혹 ‘니힐리즘(nihilism)’의 망령이 서성이는 것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이러한 허무주의적 비극을 대면하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이 언제나 그 안에서 꿈틀대고 있다고 할 것이다.





3. 우상의 해체
작가 홍준호의 사진 작업에서 구겨진 종이 위에 메이킹 포토(making photo)의 조형 언어를 실천하게 된 계기는 ‘시뮬라크르(simulacre)로서의 사진’이라는 존재론적 질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사진의 매체적 특징과 미술에서의 사진의 위상학적 정체성을 되묻는 질문은 종이를 구길 대로 구기는 극단의 목표 지점을 지향하면서 종이의 표면 위에 올라 있는 잉크를 모두 해체하고 탈각시켜 결국 이미지를 소멸시키는 일련의 실험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그것은 홍준호에게 있어 사진의 2차원 평면 이미지로서의 시뮬라크르일 따름이지만, 삼차원의 조각적 속성을 공유하는 ‘사진’이 ‘비(非)사진’ 사이의 경계 지점까지 다녀오는 값진 여행이었다.
사진 속에 담긴 이미지는 대개 그가 해외의 박물관, 미술관을 다니면서 직접 촬영한 조각상들이거나 자연사 박물관에서 살펴볼 수 있는 박제들이다. 특히 그가 진행한 〈Deconstruction of Idols〉 연작은 실재를 둘러싼 이미지의 현현(顯現)에 대한 이미지 논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도 그럴 것이 우상(Idol)과 성상(Icon) 사이의 이미지 논쟁을 거치면서 용인된 오늘날 동방정교회와 로만 가톨릭교회의 ‘성상 수용’의 관습은 실제로 이코노클라즘(iconoclasme)이라고 하는 ‘성상 반대파(혹은 우상 배척파)’와의 피비린내 나는 오랜 싸움 이후에 얻은 열매였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우상과 성상 사이의 차별적 인식은 오늘날 이미지(image)의 고대 그리스 어원인 에이콘(εἰκών, Eikon)과 에이돌론(εἴδωλον, Eidolon) 그리고 판타스마(φάντασμα, Phantasma)의 초기 흔적을 더듬는다. 이러한 이미지의 어원들은 현재에 이르러 에이돌론이 아이돌(Idol)로, 에이콘이 아이콘(Icon)으로 판타스마가 판타지아(Fantasia)로 각기 특성을 달리하며 현실에 대응하는 이미지가 지닌 여러 속성으로 확장해 왔다.
홍준호는 ‘지금, 여기’에서 한낱 에이콘(아이콘)일 뿐인 조각상을 에이돌론(아이돌)로 간주해 온 고대인의 신화적 유산과 헛된 믿음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구겨진 종이 위에 올라선 이미지의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서 일일이 세부적 이미지를 ‘리터칭’하는 작업을 거치고 수정, 보완해서 최종적으로 작업을 마감하는 수고스러운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다. 관성화된 사회의 원활한 통제를 위해서 우상을 공고히 하는 인간의 욕망은 얼마나 음험하고 무서운가? 이미지란 한낱 죽음, 부재와 맞물린 허상이지 않던가? 보라! 이미지의 라틴 어원인 ‘이마고(imago)’는 고대 로마 시대 장례식 때 ‘주검에 착용시켰던 마스크(masques mortuaires)’ 혹은 ‘사자(死者)의 초상(le portrait d'un mort)을 지칭한다. 문화이론가 드브레(Regis Debray)가 잘 고찰하고 있듯이, 이미지란 원래 출발부터 부재와 죽음과 깊이 연동되는 정체성인 것이다.
홍준호의 또 다른 작품 〈Era review on Death〉 연작은 그가 자연사 박물관을 다니면서 촬영했던 동물 박제의 이미지를 구겨진 종이 위에 겹쳐 놓은 것이다. 죽어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인간에 의해서 그러지 못하는 동물 박제의 슬픈 눈동자가 보이는가? 죽음을 통제하고 소비하는 살아있는 인간의 야만스러운 욕망을 화질 높은 이미지와 선명함으로 더욱 더 강조하는 그의 작업은 어떤 면에서 섬뜩하기까지 하다. 가히 동물의 주검을 강제로 되살려 놓은 표피적 이미지를 통해서 죽음을 소비하는 야만적인 인간의 욕망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이라 하겠다. 홍준호의 작가 노트에도 이러한 허망한 이미지에 덧씌우는 인간의 권력과 그것을 둘러싼 덧없는 욕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그것을 해체하려는 작가의 태도가 잘 담겨 있다.



“진화론과 과학의 발전으로 서구 형이상학을 통해 지탱하던 신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에 여전히 남아 죽음의 공포를 이용해 장사하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 동물원과 자연사 박물관을 통해 인간이 동물(자연)의 생과 사를 관장하며 죽음으로 장사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종교 성상과 자연사 박물관에 박제를 소재로 상을 왜곡하고 환영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4. 에필로그 
작가 홍준호는 기본적으로 사진의 이미지에 천착하는 사진작가이자 사진의 유형화된 범주를 끊임없이 탈주하기 위해 조형적 실험과 성찰을 지속하는 멀티 미술가이다. 그의 다음 말대로 그의 다양한 실험들은 매우 특별하거나 비장한 상황 속에서 출발하고 이어진 것들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자원과 돈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Digital Being(숫자로 관리되는 존재)’ 전시를 시작으로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담아낸 ‘Homo Ludense(유희적 인간, 2016)’, ‘Sad Lucid Dreaming(슬픈 자각몽, 2017) 전시를 통해서 돈보다는 꿈꾸고 사랑하던 시각예술가로서의 꿈에 첫발을 내디뎠다. 나는 죽음의 경험을 토대로 나의 트라우마를 놀이와 같은 유희로 풀어내고 동시대에 발생하는 왜곡된(그릇된) 사회 현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형상을 왜곡시켜 실존하지 않는 환영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글에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은 그의 다양한 연작들과 실험들은, 홍준호의 위의 진술로 간략히 대신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필자의 또 다른 글에서 또 다른 방향으로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진 연작들에 담긴 무거운 메시지들이 풍기는 음울한 분위기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사진 이미지로 빗대는 현대 사회와 현대인에 대한 메타포도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런데도 필자가 보기에 그의 창작에 있어서 하나의 관건이 있다면 지나치게 분석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창작의 방식이 조금 더 풀어지고 느슨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는 작가 스스로 ‘명징하게 말을 할 수 없는(혹은 말하지 않아도 될) 새로운 어떠한 작업’이 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필자가 보기에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제명 아래, “빛의 색을 일부러 마치 물감을 혼합시킨 듯 시도”하는 이번 전시는 그런 면에서 하나의 중간 기점이라 할 것이다. ●

출전/
김성호,  「규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전시 카탈로그, 2019
(홍준호 - 규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展, 2019, 10. 08~10. 15, W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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