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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민녹주 / 삶에 유착된 생명의 심연

김성호

삶에 유착된 생명의 심연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1. ‘풍경화 아닌 풍경화’, 죽어서 열리는 검은 회화! 
안개가 자욱한 듯한 희뿌연 대기 위에 떠오르는 검은 물체는 무엇인가? 어떻게 보면 그것은 아침 녘 기지개를 켜면서 기상하고 있는 ‘늠름한 위용(威容)의 산마루’이거나 물안개가 가득한 강가에 우뚝 서 있는 ‘기개(氣槪) 넘치는 암벽’이다. 때로 그것은 작은 돛단배 한 척을 자신의 품 안에 안고 힘차게 요동치는 검은 강물처럼 보이거나 계곡 사이를 낙하하는 폭포가 바위와 맞부딪혀 떨어져 나온 포말(泡沫)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호숫가에서 졸고 있는 외로운 한 그루의 버드나무이거나 비바람에 몸서리를 치는 수풀의 슬픈 몸짓 또는 중력(重力)을 향하여 추락하고 있는 천사의 거대한 날개일 수도 있겠다. 아서라! 어떤 이에게 그것은 땅속에 튼튼히 뿌리내린 채, 중력에 저항하며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한 쌍의 식물이거나 허공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거대한 꽃잎일 수도 있겠다. 그게 아니라면,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염원하면서 하늘과 땅을 잇는 기도의 다리 혹은 동서의 통합을 희망하면서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소통의 다리!   
위와 같이, 화가 민녹주의 ‘제목이 없는 검은 회화’를 대면하면서 관객이 얻은 지각의 결과와 인식의 층 그것이 낳은 해석의 폭은 넓고도 다양하다. 그러한 까닭은 무엇보다 그녀의 표현주의적 추상이 잉태한 이미지가 연상하게 만드는 ‘얼룩’과 같은 효과 때문이다. ‘얼룩’이란 “액체 따위가 묻거나 스며들어서 만들어진 자국”이다. 얼룩은 본질적으로 ‘의도되지 않은 실수’와 ‘그것의 흔적’이라는 개념을 배태한다. 즉 ‘얼룩’은 필연과 대적하는 ‘우연’, 뜻밖의 결과를 만든 ‘비의도’ 그리고 허물과 실책으로 귀결된 ‘흔적’을 낳는다. 
얼룩은 화가 민녹주가 자신의 회화 속에서 어떠한 형상도 특별히 의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특정한 메시지도 담아내려고 애쓰지 않았기 때문에 귀결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의도하지 않는 의도’, ‘비의도의 의도’의 결과인 셈이다. 그녀가 작가 노트에서 “내가 화면에서 만드는 형상이 의도한 것이 아닌 것처럼 관객, 타인도 나의 의도와 별개로 그들의 일상에서 얻어지는 이미지를 보기를 바란다”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작가 민녹주의 ‘의도하지 않은 의도를 지향하는 검은 회화’는 관객 앞에서 무한히 변주된다. 깊은 슬픔에 잠긴 관객에게는 ‘침잠과 위무(慰撫)의 회화’로,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에 나선 이에게는 ‘희열과 열락(悅樂)의 회화’로 다가선다. 
“예술 작품의 완성은 저자의 생물학적 죽음이 아닌 개념적 죽음으로써 가능해진다”는 의미의 바르트(Roland Barthes)의 「저자의 죽음(La mort de l'auteur)」(1967)과 “예술 작품은 저자의 의도와 달리 관객의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는 의미의 에코(Umberto Eco)의 『열린 작품(Opera aperta)』(1962)의 개념을 그녀가 자신의 회화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구현했다고 우리는 평가해 볼 수 있겠다. 그것은 ‘화가 민녹주가 개념적으로 죽음으로써 비로소 열린 검은 회화’라 할 만하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회화란 ‘저자의 의도가 처절하게 죽음으로써 새롭게 열린 무엇’이라 평가해 볼 수 있겠다.     





2. 비연속의 생명? 
화가 민녹주는 이번 개인전의 제목으로 《생명의 비연속성에서》를 내세웠다. 왜 민녹주는 ‘생명’을 ‘비연속성’과 등가로 위치시키고 있는 것일까?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인생의 시간(durée de la vie)’을 특별히 ‘지속(Durée)’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처럼, ‘생명’이란 ‘연속’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즉 베르그송의 ‘지속’이란 인간 현실계에 존재하는 체험적 시간(durée vécue)으로, 이질적인 새로움(nouveauté hétérogène)과 변화(évolution)가 연속된 시간이다. 따라서 지속은 비반복적(non-répétition)이고 예측불가능(imprévisible)하다. 이 지속은 과거로 돌이킬 수 없고 끝없이 미래로만 흘러가는 비가역적(irréversible) 시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지속에 대한 견해가 민녹주의 아래의 작가 노트 속에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시간의 돌이킬 수 없는 성질”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베르그송의 ‘비가역적 시간’으로서의 지속과 같은 것이다.  
 
“결정되는 이미지는 실재와 비실재의 혼재로 그것들을 읽어내려는 나의 작업 의지이다. 시간의 돌이킬 수 없는 성질과 인간관계성들에서 표피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결국, 나의 삶과 유착된 생명의 심연에 기인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왜 민녹주는 생명을 비연속성과 관계 짓고 있는 것일까? 위의 작가 노트에서 우리는 그녀가 언급하는 “인간 관계성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르그송의 ‘지속’이 ‘한 인간 주체의 실존’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인 만큼, 주체의 생존 자체가 지속을 여는 개념인 까닭에,  인간 주체가 죽는 순간, 지속이란 무의미한 개념이 된다. 반면, 민녹주가 바라보는 생명은 ‘한 인간 주체의 존재’보다 ‘인간 주체의 관계성’에 주목하는 것에서 발현된다. ‘한 인간 주체의 죽음과 또 다른 주체의 탄생’은 그녀가 바라보는 생명의 비연속성 개념을 풀이하는 반증이다. 즉 “시간의 돌이킬 수 없는 성질”(연속성)과 “인간 관계성들”(비연속성)을 한데 아우르면서 후자의 ‘비연속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민녹주의 작가 노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생명의 비연속성이란) “나의 삶과 유착된 생명의 심연에 기인하는 것들”이란 결론은 의미심장하다.
그렇다. 나는 연속적 존재이지만, 인간관계 속 너와 나는 비연속적 생명이자 비연속적 삶으로 만나고 헤어진다. ‘나라는 주체’와 언제나 관계하는 타자란 근본적으로 “나의 삶과 유착되는 생명의 심연”으로부터 기인한다. 들뢰즈(Gilles Deleuze)가 베르그송의 '지속'의 본질을 '연속보다 공존'으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을 이해할 만하다. 죽음이란 내 것이 아니라 늘 타자의 경험일 뿐이듯이 모든 인간은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언제나 죽음을 간접 경험하며 산다. 그런 면에서 사회적 인간관계 속에서 인생은 ‘비연속의 생명’과 깊이 연동된다고 하겠다.  




3. ‘인물화 아닌 인물화’, 비의도의 회화! 
민녹주의 ‘검은 회화’는 인간관계 혹은 인간과 맺은 타자의 관계 지평 속에서 ‘생명의 비연속성’을 가시화한다. 첫 단락에서 살펴본 ‘풍경화 아닌 풍경화’뿐 아니라 또 다른 연작인 ‘인물화 아닌 인물화’에서 이러한 생명의 비연속성과 무수한 관계 지평이 유감없이 발현된다.  
그녀의 인물화를 보라. 거기에는 코와 입의 형상이 뭉개진 채, 퀭한 눈을 지닌 미간(眉間)이 넓은 인물상이 기괴한 모습으로 자리한다. 때로는 좌우가 비대칭인 눈을 지닌 채, 때로는 정면과 측면이 뒤섞인 채, 때로는 붉은 선이 좌우의 얼굴을 가로지른 채, 기묘한 형상의 인물상이 관객을 불안한 표정으로 응시한다. 그녀의 ‘인물화 아닌 인물화’ 연작은 대개는 단독 초상이지만, 두 명을 쌍으로 묶어 배치하거나 군집의 멀티 초상으로 격자무늬 속에 가두어 두기도 한다. 거기에는 고독과 우울 그리고 그로테스크의 불안이 어른거린다. 우리가 ‘인물화 아닌 인물화’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민녹주의 표현주의 풍의 ‘인물화 아닌 인물화’는 종이나 캔버스 위에 검정 아크릴 물감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때로는 오일 물감의 극명한 흑백 대비처럼, 때로는 수묵의 농담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하는 짙거나 옅은 얼룩을 상흔처럼 남긴다. 캔버스나 종이의 지지대 안으로의 물감의 침투와 그 위의 얹힘이, 물감의 뭉침과 풀림이 그리고 형상의 추상적 환원과 구상적 확산이 겹쳐지는 그녀의 인물화에는 경계와 경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변주의 변주’를 아프게 거듭한다.  
민녹주의 ‘인물화 아닌 인물화’는 우리의 삶의 이야기처럼 분절적이고 파편적이다. 생각해 보라! 인생에는 늘 우연과 단절, 비연속이 개입해 들어온다. 지드(Andre Gide)가 언급했듯이, 레시(récit)라 불리는 이야기 속에는 새로운 일들이 우연처럼 개입하는 단절과 비연속의 내러티브가 중심축에 자리한다. 반면에 로고스가 이끄는 담화(discours)의 세계에는 연속의 논리와 이성의 질서가 자리한다. 민녹주의 회화를 문학으로 비유할 때, 담화가 아니라 ‘레시’인 것은 물론이다. 레시의 세계에는 나의 삶과 너의 죽음이, 나의 행복과 그의 불행이 그(녀)들의 새로운 사건과 사고가 불연속적으로 튀어나온다. 의도하지 않은, 아니 의도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의 내러티브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민녹주의 ‘인물화 아닌 인물화’를 ‘비의도의 회화’라 부르기로 한다. 보라! ‘얼룩’의 정체성이 계획되지 않은 실수나 비의도와 연계되듯이, 얼룩의 개념이 가득한 그녀의 회화를 우리는 ‘비의도적인 회화’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얼룩을 우연의 효과와 자동기술법으로 이어나가는 초현실주의 작가의 창작의 태도와 맞물리면서도 다른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이란 우연에 기대지만 ‘무의식으로 연속’해 나가는 기법인 반면에, 민녹주의 검은 회화는 우연에 기댄 채, 철저하게 ‘무의식’ 속에 침잠한 채 명상하듯이 그리는 그림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작가 진술에 귀 기울여 볼 만하다: “화면은 이미지를 낳는다. 하나의 이미지는 또 다른 형상을 탄생시킨다. 그것은 실재와 무관하기도 반영하기도 하며 순환 속으로의 행보이다. 삶의 모호함과 관념화된 것들의 불편함은 생명체적인 형상들과 더불어 던지고 묻고 접근한다. 이는 나의 정서와 육체가 호흡하는 심리적 역학의 흔적이다. 그곳엔 내력을 갖고 있다.” 






4. 에필로그 - 생명의 심연
우리에게 회자되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아포리즘(aphorism)은 작가 민녹주의 ‘검은 회화’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향이다. 인생이 흔히 ‘지속’으로 풀이되지만, 관계의 지평에서 인생은 ‘불연속’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녀의 회화에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은색은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인생과 생명’의 훌륭한 메타포로 자리한다. 우리의 인생이 예측 불가능한 미래의 시간 앞에 타자와의 관계 속에 불쑥 찾아오는 불행과 슬픔, 사건과 사고에 맞닥뜨려야만 하듯이, 그녀의 회화는 우연이나 실수처럼 들어온 ‘얼룩’을 적극적인 회화의 표현 언어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불연속적인 인생의 내러티브와 연동된다.   
생각해 보자. 어떤 면에서 예술은 입증해야 할 하나의 이념이다. 그것은 임시성(éphémère)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의지이다. 예술이란 영원성의 차원을 예술 창작 행위라는 임시성에 가져오는 것과 임시성의 예술 창작물로부터 영원성의 차원이 발현되길 기대하는 내용으로 오가면서 변주된다. 즉, 영원성(예술 가치)→ 임시성(예술 창작 행위) + 임시성(예술 창작물)→ 영원성(예술 가치)이 되는 것이다. ‘영원성으로부터 임시성으로(de l'éternité à l'éphémère)’ 혹은 ‘임시성으로부터 영원성으로(de l'éphémère à l'éternité)’라는 두 개념 모두 인간의 예술 행위를 강조한다.
‘생명의 심연’이라는 키워드를 화두로 삼아, 임시성으로부터 영원성의 개념으로 확산하는 그녀의 회화가 얼룩으로부터 경계를 넘어 풍경과 비풍경은 물론, 사물과 동물, 인물과 비인물 그리고 형상과 비형상 사이를 오가면서 만드는 ‘비의도적인 회화’의 의미는 드넓다. 해석의 다양성 중에서도 우리가 유념할 것이 있다면, 여러 방향에서 ‘다시 읽기’로 전개되기를 기대하는 그녀의 회화가 언제나 깊은 ‘생명의 심연’으로부터 발현되어 변주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 

 
출전/
김성호,  「삶에 유착된 생명의 심연」,  전시 카탈로그, 2019
(민녹주 - 생명의 비연속성에서展, 2019, 10, 24. -2019. 12. 26, 리각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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