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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경기아트프로젝트: 시점時點·시점視點 – 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 / 이 우주에 남긴 ‘소나무 한 그루’

김성호

이 우주에 남긴 ‘소나무 한 그루’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들어가는 글  
모든 소년과 소녀는 예술가이다. 자신의 원초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미술과 음악을 배우면서 예술의 꿈과 희망을 지속했기 때문이다. 그 꿈을 청년에 이르기까지 간직하는 이들이 대개 예술가에 이르는 길을 선택하고 수련을 거치면서 결국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혹자는 대학에서 미술 전공을 하고, 공모전에 출품하고 개인전을 하면서, 혹자는 음악 전공을 하고 콩쿠르에 나가고, 개인 연주회를 하면서 미술가로, 음악가로 살아간다. 어떤 이는 위대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당장 이루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소소한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삶에 애정을 가지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예술가로서 살아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예술가로서의 유명세를 치르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유명세를 차치하더라도, 청년기로부터 50대를 넘은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예술가로서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은 어떤 면에서 예술가로서의 대외적 위상을 이미 넉넉하게 실천하면서 살고 있는 작가들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이곳 경기도에도, 예술에 대한 소년기의 꿈을 지속하면서 청년이 되고 ‘예술가 되기를 방해하는 삶의 파고’를 헤쳐가면서 결국 미술가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미술가로 살고 있는 성인들이 있다. 누구인가? 일일이 거론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이들이 있겠지만, 경기도미술관의 이번 하반기 기획전, 《경기아트프로젝트 : 시점時點》(2019)은 수원 지역을 중심으로, 수원, 산본, 서울로 이어지는 아래의 공간에서 청년기 예술 활동을 펼쳤던 미술인들을 추적한다.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1981~1984, 수원), 〈수리미술연구소〉(1988~1990, 산본), 〈소나무갤러리〉(1990~1992, 서울)로 이어지는 공간을 중심으로 청년기에 소그룹 예술 활동을 펼쳤던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현재 수원뿐 아니라 각 지역에서 중견과 중진으로 활동하고 있는 미술가들이다. 
경기도미술관의 이번 기획전은 ‘예비 예술가 또는 이미 예술가’로 살았던 ‘이미 어른이 된 이들’의 청년기의 기억을 ‘지금, 여기’에 소환하고 재구성한다. 그들의 기억 속에 남겨진 빛바랜 필름을 함께 돌려보면서 현재 중진 미술가들의 청년기 혹은 청소년기의 예술적 활동을 추적해 보는 것이다. 왜? 미시적으로는 수원의 현대미술사를, 거시적으로는 경기도의 현대미술사를 정리하는 아카이브로 남기고자 하는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기획전은 수원과 경기도의 현대미술사를 구성하는 일련의 전시와 연구들에 대한 세부 섹션을 조명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전시는, 1980-1990년대 수원의 실험미술을 탐구했던 기획전 《그것은 바로 그것이 아니다》(2017)와 달리 1980년대의 몇 소그룹 운동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까닭이다. 또한 경기 소그룹 미술을 탐구했던 『경기도 근·현대 소집단 미술 활동의 흐름 연구』(2004) 그리고 경기도의 ‘아트 맵’을 통해 경기도 미술의 위상과 현황을 총체적으로 살펴보았던 기획전 《경기미술프로젝트 - 경기도의 힘》(2010)과 《경기아카이브_지금》(2018)에 나타났던 방대한 역사의 일부를 미세하게 접근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 글은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 〈수리미술연구소〉, 〈소나무갤러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현 중진 작가들의 청년기 예술 실천의 면모를 더듬어 보면서 오늘의 수원과 경기도 미술을 있게 한 과거를 비평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


I.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1981~1984, 수원) : 동네 맏형 성배와 동생들의 예술 실험실   
1981년부터 경기도 수원에 소재했던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Andromeda Art Studio)〉는 김성배가 아버지의 유산으로 마련하게 된 2층 집을 작업실로 사용하게 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성배가 사용했던 작업실 공간이자, 실제로 일반 취미생을 대상으로 미술을 가르치는 화실이었던 이곳을 ‘미술 소그룹’이라고 지칭하기에는 어려운 몇몇 이유가 존재한다. 그 까닭은 당시 미술 소그룹에서 흔했던 어떠한 미술 선언이나 강령도 없었고, 회원 목록도 없었고, 모임에 대한 성격 규정이나 정관도 없었던 자유로운 모임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희한하고 엉뚱한 동네 형’이 만든 작업실이자, 미술을 가르치던 화실이었으며, 어린 후배들이 그곳에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자칭 예술가’와 예술가의 길을 준비하는 ‘예비 예술가들’의 사랑방 모임이었다. 즉 청년 김성배의 예술 기질과 그것을 기이하게 여기면서도 흥미를 가지고 함께 장소를 방문하던 동네 후배들과 어우러진 비정기적 모임이었다. 가히 ‘맏형 성배와 동생들의 아지트’라 불러도 무방한 셈이다.  
다만 이곳에서 주인 김성배와 후배 몇몇의 창작 활동이 이루어졌고, 《습작전》(1981-83)이라는 이름의 일련의 전시가 열렸다는 점에서 창작 공간이자 전시 공간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울러 이 사랑방 모임에 모이던 후배들과 함께 꾸린 ‘세미나’로 이름 붙여진 독특한 공부 모임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 연구소는 아틀리에, 전시장, 사랑방, 공부방이라는 일련의 이름에 부합하는 다양한 성격을 지닌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맏형 김성배는 이 모임의 주인이자 대외적 감투 없는 회장인 셈이었다. 그는 당시 수원의 미술 선배들이나, 예술가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존재였을 뿐 아니라, 지역의 많은 이들에게는 예술가인 양 활동하는 이상야릇한 괴짜로 간주된 존재였다. 그는 동네 후배들에게 아버지의 작고로 인해 일찍 유산을 물려받은 자본가였고 카페를 운영하는 부르주아이거나 수원역 앞에서 속옷 가게를 운영하는 생계형 사업가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후배들에게, 독학으로 예술을 공부하고 창작 활동을 펼치는 괴짜 예술가이면서도 미술수첩을 들고 다니며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현대미술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친절한 선배이기도 했다. 그는 동네 동생들에게 서구의 미술을 번역해서 소개해 주는 동네의 엘리트였기도 했다: “여러 후배들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겸재 정선, 폴 세잔(Paul Cézanne), 백남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등 플럭서스(Fluxus), 그리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에 관한 세미나 등 원서를 번역하면서 나름 열심히 활동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서구 미술을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라는 ‘이도 저도 아닌’ 특이한 장소에서 ‘세미나’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이 세미나는 1982년 1회부터 1984년까지 5회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인터뷰에 따르면 연구소 구성원 중 황민수가 주도적으로 이 세미나의 실무를 맡아 영문, 한글로 작업했다고 한다. 제1차 세미나(1982. 1. 31, 목우화실, 수원)에서 ‘회원 아닌 회원’들은 다빈치의 작품 <광야의 성 히에로니무스(St Jerome)>(1482)를 모사했던 김성배의 그림을 두고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제2차 세미나(1982. 3. 27,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 수원)에서는 다빈치의 작품과 세계관에 대한 토론을 진행했다. 첫 세미나를 이어 두 번째 세미나에 이르기까지 다빈치의 작품을 분석하는데 집중했던 까닭은 미술가이자 기술자이며 조각, 건축, 수학, 과학, 음악,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빈치를 현대의 예술가들이 본받아야 할 르네상스적 인물, 즉 ‘종합적 지식인’의 모습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김성배는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는 당시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아포리즘(aphorism)을 표방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천재 예술가 다빈치로부터 나온 다음의 아포리즘, 즉 경구(警句)를 기억하고자 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적용해야 한다. 시도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해야만 한다.' 즉 동네 형 김성배로서는 이론뿐 아니라 실험과 실천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다빈치의 종합적 태도로부터 자신의 후배들이 ‘예술 실천’을 위해서 새겨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김성배의 발언은 ‘종합적 예술 실천’을 도모하는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의 명징한 목표 의식에 대한 하나의 반증이다: “그러나 첫째로 나는 멀리 나아가기 전에 어떤 실험들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노력이란 처음에는 경험을 고려하고 다음엔 실험을 통한 경험이 반드시 그러한 방법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추리 표시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 노력과 경험 그리고 실험과 경험은 다빈치의 이론과 실천, 종합적 지식인으로서의 예술가상을 배우려는 예비 예술가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예술가상에 대한 좌표 설정과 관련한 세미나를 거쳐, 제3차 세미나(1982. 4. 24,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 수원)에서는 예술 활동에 있어서 보다 더 실천적인 맥락을 드러낸다. 이 세미나에서 작가 황민수가 「미술 작품의 존재 방식 - 오브제(Object) 미술을 중심으로」를 발표했던 것은 그 맥락 중 일부이다. 실험미술이란 서구에서나 한국에서나 여태껏 ‘지금도 여전히 가능한 하나의 태도나 범주’로 간주되어 옴으로써 탈평면류의 여러 시도들을 암묵적으로 지칭할 뿐, 특정 장르를 지칭하거나 한 시기별 미술을 통칭하면서 사용되는 것을 꺼려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실험미술이란 대개 1960-70년대, 앵포르멜과 단색조 회화 사이에 위치한 오브제미술, 설치, 행위예술을 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새로운 실험과 실천을 지향하는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의 청년 예술가들에게는, 오브제와 관련된 1970년대의 ‘실험미술'에 관한 실천은 간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현재 남아 있는 자료는 발견할 수 없지만, 제4차에서 5차에 이르는 세미나(1983-1984)에서는 서구에서 1960년대 유행했던 오브제 미술의 기원을 알렸던 1910년대의 마르셀 뒤샹의 작업과 더불어 개념적 퍼포먼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주제로 심층적인 학습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실재의 논리적 그림”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명제들(propositions)은 논리적 형식을 재현할 수 없다. 논리적 형식은 그 자신을 명제들에서 반영한다.”는 유명한 철학적 아포리즘을 통해서 명제를 통해서 세계를 묘사할 수 있지만, 명제를 통해서 명제와 사실이 공유하는 논리적 형식을 묘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참, 거짓을 따질 수 없는‘미학의 명제들’은 말하여질 수 없고 다만 보일 뿐이다. 이건용의 이벤트라 명명한 개념적 퍼포먼스는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침묵을 동반한 보임의 미학과 그 명제들’을 신체와 시각을 통해 계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김성배가 1960년대 후반부터 〈AG〉와 〈ST〉 그룹의 구성원으로 주도적인 활동을 펼쳤던 작가 이건용을 만나게 되면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실험적 퍼포먼스의 의미들을 두루 배우고 조형적인 시도를 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후배들에게 그저 ‘독학으로 미술을 배우고 예술을 하는’ 동네형 김성배는 수원에 살고 있었지만, 미술 현장에서 중앙으로 간주되는 서울을 오가면서 실제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쳤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만 할 것 같다. 
김성배의 초기 예술 활동은 1970년대 〈AG〉 그룹과 〈ST〉 그룹의 미술 활동으로부터 일정 부분 영향을 받은 것으로 훗날 평가되고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김성배의 회화와 설치 작업에서는 〈AG〉 그룹을 이론적으로 견인했던 평론가 이일의 ‘환원과 확산’이라는 창작 경향이 나타나고, 퍼포먼스 작업에서는 〈ST〉 그룹이 선보였던 퍼포먼스 위주의 실험과 같은 양상이 두루 나타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의 초창기, 김성배의 작업 <안에서 밖으로-행위>(1982)는 이건용이 '이벤트(event)'로 지칭했던 다양한 개념적 퍼포먼스를 재해석하고 있는 작업을 일정 부분 계승한 것처럼 보인다. 김성배는 자신의 작업실인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의 내부와 외부를 잇는 붉은 실을 통해서 퍼포먼스와 설치를 실험했는데, 실과 같은 최소한의 매체만을 사용한 채 특별한 도구 없이 신체를 매개로 한 퍼포먼스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퍼포먼스는, ‘안’과 ‘밖’의 장소적 개념 그리고 신체의 행위 이면의 사회적 문제의식에 대해 질문하는 이건용의 작품 〈장소의 논리〉(1975)를 닮아 있다. 이건용이 땅바닥에 원을 그리고 원 밖에 서서 손가락으로 원의 중심을 가리키며 ‘거기’라고 외치고 다시 원 안에 들어가 ‘여기’라고 외친 후 원 밖으로 나가  등 뒤로 원을 가리키며 ‘저기’라고 외치는 일련의 신체적 행위를 통해서 장소의 개념을 드러내듯이, 김성배 또한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 건물 안에서의 개념적 신체 행위와 더불어 붉은 실을 통해 건물 밖에서의 퍼포먼스를 이어 장소의 개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김성배가 화면 위에 단순하게 선긋기를 실험한 작품 <선 긋기>(1982)는 이건용의 <신체 드로잉>(1976)을 연상하게 만든다. 이건용이 신체를 제한하는 극한 상황을 설정하고 선긋기를 시도하는 신체 드로잉은 화면의 앞, 뒤, 옆, 그리고 신체의 다리 사이, 양팔, 어깨를 구속하면서 팔의 궤적이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드로잉을 실험하듯이, 김성배는 이 작품에서 연필 선의 간격을 느슨하게 하거나 촘촘하게 만들면서 일련의 ‘신체로 가해지는 드로잉’의 강도를 실험한다. 각 드로잉 밑에는 ‘32, 78, 150, 527, 2300’이라는 텍스트가 각각 기록되어 있는데 이 숫자는 선긋기를 실행한 숫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32라는 숫자 위 선 드로잉은 선의 간격이 넓은 가느다란 선묘이지만, 2300이라는 숫자 위 그것은 두꺼운 선들이 촘촘한 밀도를 이루고 이루면서 짙은 검은색 면을 이룰 뿐만 아니라 작가의 신체적 압력마저 과도하게 실린 까닭에 결국 화면은 드로잉의 한계를 견디지 못하고 찢어지고 만다. 
김성배는 또 다른 작품 <버찌 퍼포먼스>(1982)에서 창작의 유희적이고 개념적인 드로잉을 선보이는데, 이브 클랭(Yves Klein)이 모델의 몸을 붓으로 대신한 탁본 드로잉 연작인 <인체 측정(Anthropométries)>(1960)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브 클래의 작품이 드로잉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매체를 뒤섞는 작품이었다고 한다면, 김성배의 작품은 버찌를 자신의 신체로 압력을 가해 짓이겨 만드는 단순한 유희적 제스처로, 회화의 ‘주체와 매체’ 그리고 ‘그린 것과 그려진 것’에 대한 관계를 실험하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진흙그림(드로잉)>(1983)은 산에서 채취한 진흙을 한지 위에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만든 드로잉이다. 양상은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이건용의 퍼포먼스 작품 〈달팽이 걸음〉(1979)에서 선보인 ‘그린 것과 그려진 것’, ‘그리기와 지우기’, ‘필연과 우연’에 대한 개념과 연동된다. 
그러나 김성배의 작품뿐 아니라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의 ‘회원 아닌 회원’, 즉 ‘느슨한 구성원들’의 작품은 이러한 개념적 퍼포먼스 외에도 유희적인 즉흥 퍼포먼스나 표현주이 평면 회화 그리고 자유로운 형태의 오브제 설치가 혼재한 것들이었다: “여기서 전시한 작품들 중에는 평면 회화는 물론 설치작업과 즉흥적인 퍼포먼스를 하는 등 상당히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형태의 작업들을 발표하였지요. 당시 미술연구소 안에 탁구대가 놓여있어 가끔 탁구도 치고 세미나 할 때는 책상으로 쓰다가, 전시회 작품발표 매체로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실제 탁구대에서 잠도 자기도 했습니다.”
위의 진술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탁구대는 작품 설치를 위한 오브제로 사용되기도 하는 등, 그들의 창작 활동과 발표는 형식을 탈피한 자유로움 자체를 특징으로 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에서의 작품 활동은 ‘세미나’를 통한 학습과 병행되면서 《습작전》이라는 이름의 제1회, 제2회 전시회를 통해서 소개되었다. 이후 제3회 전시회부터는 ≪안드로메다전≫이라는 이름으로 제4회 전시회는 ≪안드로메다 월드아트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선보였다. 
여기서 제1회 전시는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다빈치의 작품을 주제로 한 두 번째 세미나와 연동하여 진행된 것이었다. 10명 정도가 참여했던 이 전시에는 작품뿐 아니라 작품 명제도 많은 부분 남아 있지 않다. 당시의 청년 예술가들이 선보이고 소수의 동료들이 관람하는 방식으로 전개된 이 전시는 작품을 창문에다 붙여 설치하는 등, 이름 그대로 ‘습작전’의 범주 안에 놓이는 것들이었다. 
제1회 《습작전》에서 몇 작품을 살펴보면 김성배의 개념적 드로잉 혹은 회화인 <선 긋기>(1982) 외에도 푸른색 계열의 표현주의적 추상 작품인 김석환의 <수채화>(1982)가 눈에 띈다. 문석배의 작품 <무제-설치>(1982)는 인물 사진 콜라주를 앨범처럼 꾸민 작품이다. 이상원의 <무제-사진>(1982)은 반쯤 펼쳐진 사진을 두루마기처럼 말아서 양쪽에 끈을 달아 못 위에 걸어놓은 작품이다. 이러한 방식의 설치는 ‘프레임으로 완성되는 평면 작업과 제작 방식’을 거부했던 1970년대 프랑스의 그룹 〈쉬포르, 쉬르파스(Support Surfaces)〉의 설치 개념을 계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뿐만 아니라, 장지성과 김진로의 공동 작품인 <무제_입체>(1982)는 사진 콜라주와 페인팅이 어우러지고 쇠갈퀴의 앞부분을 떼어 나무 패널 위에 붙인 발견된 오브제를 한데 조합해 놓음으로써, 마치 미국의 네오 다다(Neo-Dada) 작가 라우젠버그(Robert Rauschenberg)의 컴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의 미학을 잇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2회 《습작전》에서는 앞서 살펴본 김성배의 〈버찌 퍼포먼스〉(1982)와 같은 개념적 퍼포먼스를 통해 만들어진 회화처럼, 문석배의 작품 〈무제-드로잉〉(1982)은 세밀한 물고기 이미지와 단순한 인물의 측면을 병치한 형상주의 회화라 하겠다. 반면에 조금은 다른 형식으로 된 전원길의 작품 〈거울과 손〉(1982)은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에 있는 거울에 손바닥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오리냐크(Aurignac) 시대에 구석기인이 동굴 속에 남긴 ‘손바닥의 각인’처럼 유희적인 회화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단순한 형식의 신체적 표현을 통해 대상 혹은 자연과 접촉하려는 ‘자연미술’의 정신을 잘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황민수의 작품 <친구의 가방>은 친구의 가방을 메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담담히 기록함으로써 유희적이고도 단순한 개념을 사진 이미지 위에 무겁게 않게 살포시 얹어 놓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3회 전시인 《안드로메다전》의 자료는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참여 작가 명단이나 당시의 예술적 환경을 인터뷰에 근거해서 추론할 따름이다. 김성배가 만든 당시의 포스터와 앞에서 살펴보았던 김성배의 작품 〈진흙그림(드로잉)〉(1983)이 남겨져 있을 따름이다. 제4회 전시인 《안드로메다 월드아트 프로젝트》 역시 마찬가지이다. 제3회 전시의 경우처럼 김성배가 만든 포스터와 작품 한 점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포스터는 태양계 행성들 일부를 마치 배구공처럼 일렬로 붙여 만든 이미지로 표현되었고 출품작 〈드로잉〉(1984)은 달걀형의 화면 안에 표현주의적 색채가 다분한 푸른 회화 한 점만이 남아 있다.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의 공식적인 활동 기간은 1984년 종료되었다. 이후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 공간은 김성배 개인 작업실 및 창고로 사용되었으며, 활동을 함께 하던 작가들은 1988년 수리미술연구소 개관 전까지 수원에서 개최되었던 전시에 참여하며 각자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1984_김성배_진흙드로잉


II. 〈수리미술연구소〉(1988~1990, 산본) : 동문 혹은 동료들의 공생과 융합    
안드로메다의 시간은 짧았다. 안드로메다에서의 공식적 활동은 1981년부터 1984년까지였으나, 1984년 이후로는 여하한 사정으로 인해 개인 작업실과 창고로 사용하게 되면서 일명 ‘새로운 예술 실험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1988년 김성배가 수원의 작업실을 정리하고 경기도 군포시의 수리산 아래 작업실을 새로 마련하게 되면서 수원에서의 예술 실험은 또 다른 도시인 군포에서 맥을 잇기에 이른다. 김성배는 군포 작업실을 수리산의 이름을 따서 〈수리미술연구소(Suri Art Institute)〉로 작명했다. 
앞에서 우리가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를 ‘작업실, 전시장, 사랑방, 공부방, 예술 실험실’로 지칭했던 것처럼, 〈수리미술연구소〉 또한 위와 같은 용어들로 지칭할 수 있겠다. 다만, 〈수리미술연구소〉에서는 안드로메다에서 운영했던 ‘세미나’가 사라지고 김성배의 개인 작업실과 더불어 ‘구성원 아닌 구성원들’의 전시가 열리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수리미술연구소〉의 구성원들이 ‘구성원 아닌 구성원들’이라고 한 까닭은 먼저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의 구성원처럼 특별히 강령이나 규정이 없는 ‘느슨한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유가 그것이다. 또한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가 수원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수리미술연구소〉의 경우 수원을 떠나 있었던 까닭에 수원 지역 작가가 아닌 다른 작가들이 동참하는 경우가 보다 더 늘어났던 이유도 한 몫을 더했다고 할 것이다. 구성원들의 범위가 보다 더 느슨해지게 된 셈이거나 또 다른 관점에서는, 보다 더 확장된 셈이다. 
특히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 시절 개최된 《습작전》의 경우, 수기(手記)로 만든 전시 포스터나 전시 자료만 남기면서 대외적인 전시보다 대내적인 전시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수리미술연구소〉 시절에 개최한 전시를 보면, 모두 인쇄된 리플릿(leaflet)을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대내적 전시보다 대외적 전시에 보다 집중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수원의 ‘동네 선배와 후배’로 구성된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의 구성원들의 특징과 달리 ‘타 지역의 신진 예술가들’을 구성원으로 수용하면서 ‘탈지역화’를 도모하고 있는 특징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그러한 까닭에 이 글은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의 활동을 살펴보는 이전 섹션에서 ‘동네 맏형 성배와 동생들의 예술 실험실’이라는 소제목을 달았지만, 〈수리미술연구소〉의 경우, ‘보다 느슨해진 구성원과 보다 확장된 소그룹’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문 혹은 동료들의 공생과 융합’이라는 소제목을 통해서 구성원들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소제목에서 ‘동문’이 수원 중심을 의미한다면, ‘동료’는 탈수원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동문은 어떠한 구성원이고 동료는 어떠한 구성원들을 지칭하는가? 흔히 수원의 예술가들에게 회자되는 말 중에 수원의 학맥은 “어떤 고등학교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규정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수원의 오래된 고등학교의 전통은 수성고와 수원고가 양대 산맥을 이루면서 많은 수원의 예술가들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동문은 10대의 시절을 함께 나눈 고등학교 선후배들이 맺은 동네 형, 동생의 맥락과 공유한다. 한편 동료는 이러한 수원의 지역성을 탈주하는 확장된 20대 또래의 신진 작가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자기반성이자 자기 성찰’ 그리고 ‘우리의 개념을 보다 확장하고 융합하는 무엇’을 지향한다. 가히 공생과 융합이라고 할 만하다. 
〈수리미술연구소〉가 2년 동안 개최한 3회의 전시를 먼저 전시명으로만 살펴보더라도 당시 〈수리미술연구소〉의 이러한 관심이 잘 드러나 있다. 
1회 전시 ≪쌀. 보리. 콩≫은 한국의 주요 작물을 전시명으로 내세워 한국적 상황 속에서의 현대미술 실천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다른 것들의 조화와 상응이 무엇인지를 탐색한다. 특히 전시 리플릿에 로고 형식으로 표기된 텍스트 ‘M. I. W’는 남성(Man), 나(I), 여성(Woman)의 이니셜의 조합으로, 같은 존재의 다른 유형으로서의 존재가 조화를 이루는 상황을 고민하고 실천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특히 ‘M=I, W=I, 따라서 M=W’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삼단논법, 즉 ‘대전제와 소전제의 두 전제가 하나의 결론으로 이루어진 연역적 추리법’을 드러냄으로써 남성과 여성 작가의 차이와 조화를 한데 아우르는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1회 전시의 참여 작가가 김성배, 김진로, 명혜경, 이윤숙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관심의 발로를 이해할 만하다. 당시 리플릿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회화, 회화적 설치, 조각, 조각적 설치 등이 한데 어우러진 출품작들의 경향을 참조할 때, ‘나’는 각기 다른 정체성으로 대별되고, ‘우리’는 각기 다른 정체성의 조화와 상응을 도모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미술의 다양한 조형 언어의 조화와 상응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려는 당시의 노력을 유추해볼 수 있다.  
2회 전시 ≪맨 벽-토≫에서는 미술의 원초적 상황 혹은 날것으로서의 창작 언어가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것이 없는 벽’이라는 뜻의 ‘맨 벽’과 가장 원초적인 ‘흙(土)’이라는 용어가 조합된 전시명도 그러하지만, 1회 전시와 마찬가지로 회화, 회화적 설치, 조각, 조각적 설치와 같은 장르적 혼성이 엿보이면서도, 가장 근원적인 질료적 특성이 어떻게 미술과 맞물릴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윤숙의 당시 참여 작품인 〈원형 철판, 흑〉(1989)은 진흙 덩어리를 손으로 으깨어 주먹밥처럼 만들어 바닥에 원형으로 늘어놓고, 둥그런 철판을 원 끝 부분에 세워놓음으로써 마치 ‘연자(硏子)매’와 같은 형상을 구현했다. 연자매가 일반 맷돌과 달리 커다란 크기의 맷돌로 ‘사람 대신 소나 말이 돌리게 되어 능률을 높인 만큼’ 흙과 철이라는 근원적 질료가 만나 문명을 이루었던 것처럼, 그녀의 작품 속에서 이러한 조형의 질료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 것인지를 탐구한다. 자연(흙)의 바탕 속에서 인공(철)이라는 날것의 만남과 역사가 어떻게 서로 만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또 다른 출품작인 오점균의 1989년 작품은 물을 가둬놓고 살아있는 미꾸라지를 풀어놓은 것으로 살아있는 생물체를 미술에 끌어들이는 실험을 도모했다. 이러한 경향은 서구의 1960년대 퍼포먼스에서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양상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하겠다. 이후 1990년대 국내 미술에도 날것의 돼지고기나 생선이 등장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청년 미술가 오점균의 이러한 실험은 매우 선구자적인 것이라 하겠다. 
오점균의 〈축!! 남북 축구경기_현장 퍼포먼스〉(1989) 또한 흥미롭다. 1989년 10월 이탈리아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남북이 처음으로 만나 경기를 펼쳤는데, “당시 한국은 전반 18분에 터진 황선홍의 골을 끝까지 지켜내면서 북한을 1-0으로 눌렀다.” 당시를 기념하는 오점균의 작품은 〈수리미술연구소〉의 맨 벽에 파란색의 골대를 그리고 걸레받이 위에 초록색의 잔디를 그려 넣은 후, 붉은색 물감을 묻힌 축구공을 발로 차서 맨 벽에 물감을 묻힘으로써 ‘공이 그린 그림’을 만든다. 젊은 치기가 만든 즉흥 퍼포먼스인 셈이지만, 맨 벽에 회화의 바탕을 만들고 붓이 아닌 공으로 회화를 창출했다는 점에서 잭슨 폴록의 ‘드리핑(dripping)’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회화’가 무엇인지를 재기발랄한 방식으로 실험했다는 평가가 가능하겠다. 어떤 면에서는 ‘슈팅(shooting)으로 만든 회화’라 할 만하다. 이 작업은 일본의 네오 다다(Neo-Dada) 미술가인 유시오 시노하라(Ushio Shinohara)가 ‘권투 장갑에 먹물을 가득 입혀 벽에 붙인 기다란 종이 위에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동하면서 복싱을 거듭했던 일명 복싱 페인팅(boxing painting)’을 연상케 하는 퍼포먼스 페인팅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출품작들은, 김성배가 추상화가 그려진 캔버스의 프레임으로 커다란 자연목과 재단된 나무를 조합하여 벽에 비스듬히 기대게 만든 후 커다란 조개를 밑에 받친 작업이나, 안원찬이 비정형의 캔버스 천에 그려진 추상화를 벽에 걸고 왼쪽에 물감이 칠해진 자연목을 세워 놓은 작업으로 이어진다. 두 작품 모두 나무라는 자연적 질료와 인공의 회화를 ‘회화적 설치’의 방식으로 만나게 하면서 《맨 벽-토라》는 전시명을 유감없이 시각화한다.   
3회 전시 ≪융합·21C≫는 제목만큼 혼종적이다. 전시 리플릿 내용이 전시에 참여했던 작가의 작품과 더불어 전시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도록에만 선보인 작가의 작품으로 두 범주가 구성되었을 뿐 아니라, 출품작들의 탈장르적 양상과 더불어 매체의 혼종과 융합이 시도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3회 전시는 1회 전시 ≪쌀. 보리. 콩≫과 2회 전시 ≪맨 벽-토≫의 주제 의식을 두루 이어받는다. 즉 손으로 흙을 주물럭거려 토우처럼 만든 이윤숙의 작품과 같은 2회 전시에서의 출품작 양상이나, 캔버스를 떼어내고 프레임에만 알록달록 물감을 칠한 김진로의 작품, 구멍난 벽을 활용한 명혜경의 작품처럼 1, 2회 전시에 두루 드러났던 ‘자연과 인공’, ‘탈매체와 탈장르적 혼종’과 같은 주제 의식을 한데 아우르는 작업들도 있었다.  
한편, 제3의 전시에는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리플릿에 “다음의 빈칸에 적합한 말을 고르시오”라는 비교적 엉뚱한 사지선다형 질문이 표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지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예술은 □ □, 그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객관식 질문에 대한 답의 예시로 “① 밥줄, ② 호흡, ③ 사랑, ④ 직관”을 제시해 놓았다. 사람마다 달리 대답할 내용을 마치 정답을 강요하는 객관식 질문 유형으로 표기해 놓았다는 점에서 관객에게 오늘날 대학에서의 예술교육 향방과 예술 현장에서의 미술에 대한 성찰과 같은 다양한 문제의식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러한 점에서 1회로부터 3회에 이르는 모든 전시가, 일정 부분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모두 이 장의 소제목에 나타난 ‘공생과 융합’을 실천했다고 평가해 볼 수 있겠다. 
 

수리미술연구소_맨벽토-오점균_1989


수리미술연구소_박가혜_1989




III. 〈소나무갤러리〉(1990~1992, 서울) : 신세대 미술가의 네트워크와 소그룹 전시 공간    
김성배의 후배 전원길이 수원 동수원사거리에서 운영하던 화실(1987~1997)에 한 취미생이 있었다. 미술애호가이자 부유한 화교 중국인 외과 의사였던 ‘장신유’가 미술가를 후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소유한 서울에 있는 공간 하나를 선뜻 내놓은 것! 1990년 5월 11일 〈소나무갤러리〉의 출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종로구 동숭동의 번듯한 건물 3층에 자리한 건물은 이전의 수원, 산본으로 이어지던 ‘수도권이지만 여전히 지역’이었던 젊은 작가들의 사랑방이자 공부방이며 전시 공간인 일명 아지트가 서울로 자리이동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것이 바로 〈소나무갤러리〉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대표는 건물주인 중국 화교 ‘장신유’였으나, 공간 운영을 제안 받은 전원길이 미술 현장에서의 경험이 많은 김성배에게 관장을 맡김으로써 김성배로부터 시작되었던 모임이자 공간이 새로운 형태로 확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나무갤러리〉라는 공간에 대한 작명은 김성배의 작품 <下下(하하) 소나무>로부터 가져왔다. 김성배 관장은 비록 길지 않았던 재임 기간(1990. 5~1992. 2)이었으나 전원길, 이윤숙, 강영순, 장지성 등 수원을 중심으로 맺은 후배들을 운영위원으로 위촉하여 수원으로부터 시작되었던 모임의 특성을 갤러리라는 이름 아래 확장한다. 미술 현장에 있어서 소위, 변방으로부터 중앙으로의 진입을 자연스럽게 이룬 셈이라 할 것이다.   
수원의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 군포의 〈수리미술연구소〉 그리고 서울의 〈소나무갤러리〉로 이어지는 공간의 변화는 단지 물리적 공간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간의 공간이 ‘유무형의 모임과 공간’으로 지칭되는 특성을 지닌 채 전개되어 왔던 까닭이다. 다만 ‘동네 맏형과 동생들의 예술 실험실’이나 ‘동문 혹은 동료들의 공생과 융합’으로 전개되어 왔던 어느 정도 편협했던 ‘모임과 공간’의 특성이 장소를 서울로 이전하게 되면서 대변혁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 지점이었으나 한편으로 그것은 모임의 지속을 위해서는 부정적 지점 역시 없지 않았다. ‘옛 모임의 구성원과 정신’이 여전히 중심축에 자리했지만, 그것은 여하한 사정으로 흔들리게 되는 계기 역시 이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으로? 이러한 계기 중 하나는 ‘작품 창작과 연구 그리고 구성원들 간의 친목적 연대’라는 취지가 뒤섞인 공간으로부터 작품 발표를 목적으로 하는 ‘전시 중심’의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초래한 이전의 모임의 특성에 대한 변화였다. 또 다른 하나는 〈소나무갤러리〉가 전시 공간에 집중하다보니 이전의 모임의 특성이 지속적으로 연계된 전시로 이어지기보다 서울의 타 소그룹의 전시 활동을 지원하게 되면서 ‘수원 중심의 작가군’과 ‘서울의 작가군’이 ‘따로 같이’ 활동하는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몸은 하나인데 두 주체가 같은 공간을 나눠 쓰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 셈이다.   
물론, 개관 기념전은 ‘수원권’, ‘서울권’에 대한 구분이 특별히 없었다. 개관 기념전에는 수원, 산본 및 경기도권 작가뿐 아니라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신진 작가들이 대거 유입됨으로써 모임의 변화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개관전 1부 전시 ≪호랑이에서 돼지까지≫는 〈소나무갤러리〉 기획으로 총 4부로 구성되어 진행되었고, 개관전 2부 전시 ≪1990 발상의 전환-밀물·썰물전≫ 또한 총 4부로 나눠 진행되었다. 개관전에는 전원길, 이윤숙 등 수원권 작가뿐 아니라 문범, 박상숙, 신옥주, 강상중, 원인종, 문주 등 서울 및 타 지역 작가들을 두루 아우르는 청년 작가 60여 명이 참여하였다. 
그런데, 이 개관기념전 이후 진행된 전시 자료를 살펴보면, 개관기념전처럼 모두 ‘서로 더불어’라는 취지와 꼭 부합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따로 같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법하게 일정을 나눠 진행된 ‘다른 전시 기획 주체에 따른 병렬적 전시의 연속’이었다. 예를 들어, 개관 기념전 이후에는 바로 전시의 기획 주체가 〈소나무갤러리〉가 아닌 중앙의 소그룹이거나 개인전 등으로 이어졌다. 달리 말해, 타 그룹의 전시를 위해 전시 공간을 대관해 준 것이었다. 건물주인 장신유의 제안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1990년 여름에 열렸던 전시 ≪보고서/보고서-5. 썬데이 서울≫은 서울의 소그룹 〈MUSEUM〉이 기획한 전시였고, 이어 열렸던 전시인 ≪포스트모더니즘 페스티발≫은 ‘신세대 예술 운동 협회’가 기획한 탈장르의 융복합 전시였다. 같은 해 가을에 개최된 전시 ≪SUB CLUB-Underground≫ 또한 서울의 소그룹 〈SUB CLUB〉이 기획한 것이었다.  
〈소나무갤러리〉의 자체 기획은 1990년 개관기념전 이후 없다가 1991년에서야 시작되었다. 전시 ≪초기위치 초기온도≫는 〈소나무갤러리〉의 기획으로, 총 3부로 나눠 개최되었다. 이 전시에는 김성배, 김영섭, 이윤숙, 전원길 등 수원권 작가들이 대거 참여한다. 특이한 점은 여기에 건물주인 중국 화교 장신유가 전시 작가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공을 불문하고 미술 창작을 하고 있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뭉친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할 만한 대목이다. 또한 〈소나무갤러리〉의 기획으로 이어진 다음 전시는 ≪융·합 21세기≫였다. 이 전시는 〈수리미술연구소〉의 기간에 지향했던 일련의 ‘공생과 융합’ 지향의 전시 중 3회 전시였던 ≪융합·21C≫를, 제목의 표기 일부분이 다르지만, 고스란히 계승한다. 이 전시 또한 김성배, 이윤숙, 전원길 등 수원권의 작가들이 대거 참여한다. 흥미로운 것은, 제목이 지향하는 지향점을 반영하듯이, 수원권 작가만이 아니라 서울 작가들 또한 다수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 전시는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 이후 〈수리미술연구소〉의 ‘함께 다같이’라는 모임의 성격을 계승하려는 취지가 잘 드러난 전시라고 하겠다. 특히 이 전시의 카탈로그에는 ‘룬 카트린네(스웨덴)’의 글이 실렸는데, 관련하여 필자에게 살펴볼 자료가 없는 관계로 당시의 작품 경향을 이 글에서 분석할 수 없는 점은 아쉬운 점이다. 
한편, 우리는 이 글에서, 〈소나무갤러리〉의 1990년 개관 이래 자체 기획이 표방하는 융복합에 대한 관심이나, 1990년 〈소나무갤러리〉에서 개최되었던 ‘신세대 예술 운동협회’가 기획한 전시 ≪포스트모더니즘 페스티벌≫이 가시화한 ‘탈장르의 융복합 지향성’에 주목할 일이다. 융복합 담론이 200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유행을 이어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소나무갤러리〉의 1990년대 초반의 ‘융합’이란 전시명은 당시의 미술 현장에 비해서 매우 선구적이라 할 것이다. 1990년 당시에는 융합 담론을 잉태케 한 당시의 현재적 맥락에 대한 연구가 더욱 중요했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국 상륙과 맞물려 급부상한 포스트구조주의 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분석 그리고 그것의 조형적 실천에 대한 과제 등이 관건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1980년대 말-90년대 도시 문명 사회의 미술 문화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상황뿐 아니라 국내 미술 현장에서의 최고의 화두였다. 당시의 미술 현장을 ‘낡은 모더니즘과 험악한 리얼리즘 미술의 대립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단색화를 위시로 한 추상미술과 민중미술로 대표되는 형상미술의 대립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담론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요청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모더니즘의 장에서도 리얼리즘의 장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자유롭고도 복합적인 문화 담론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 셈이다.  
1990년대를 열어젖힌 〈소나무갤러리〉의 일련의 전시 활동은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황 속에서 장르의 벽을 넘어서고 있는 다원적 미술의 경향을 드러내었다. 다음의 말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황 속 창작은 이제 문화적 맥락에 대한 성찰을 요청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창작 공간의 논리는 더 이상 재료와 그 재료에 대한 지각을 바탕으로 한 매체 개념으로부터 성취되지 않는다. 그 대신 문화적 맥락 안에서 대립하는 양상의 개념들의 총체성을 통해 구성된다.”
1990년대 들어 등장한 ‘신세대’라는 창작 주체는 1970년대 실험미술의 기치를 이어받은 것이다. 즉 1969년 현실동인 제1선언 AG(1969)와 (ST 1971)의 활동처럼 제도권 예술의 유형화를 반대하면서도, 1990년대 신세대 창작 주체는, 1970년대 저항적 실험미술을 이끌었던 기존의 세대와 다른 자신들만의 조형 언어를 주저 없이 내세웠다. 달리 말해, 현실 참여, 정치 저항과 같은 담론과는 멀찌감치 멀어진 채, 자유롭고 혼종적인 창작의 언어를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놀이처럼 행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신세대 감수성이란 이데올로기와 모더니즘으로 표방되는 공격적이고 무거운 모든 것들을≪융·합 21세기≫ 거부하고 ‘자유, 유머, 유희, 천박함, 키치적 통속성, 대중주의, 언더그라운드 문화, 소비문화’를 선호하는 것은 물론 ‘충격, 그로테스크, 파편적 분열’마저 기꺼이 껴안는 것이었다. 
이처럼 미학적 대중주의와 탈형식을 감행하는 신세대 미술은 여러 소집단을 등장시켰다. 난지도(1985), 메타복스(1985), 로고스와 파토스(1986), 인간시대(1986), 현상전(1986), 레일리떼(1987), 프핀트 컨셉(1987), 뮤지엄(1987)처럼 1980년대 중후반으로부터 시작해서, 대개 1~3년 안에 소멸했던 소집단이나 황금사과(1990), 선데이 서울(1990), 서브클럽(1990), 커피 코크(1990), 오픈 앤드 온(1990), 뉴키드 인 서울(1991)처럼 199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소집단의 자유로운 창작과 형식 실험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국적 미술 운동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들의 활동은 대개 카페 및 프로젝트형 공간을 중심으로 전시 활동을 펼치면서 다원화된 복수의 가치를 모색했다.  
〈소나무갤러리〉를 전시 공간으로 삼아 활동했던 1990년대 초반의 소집단 전시는 뮤지엄의 ≪보고서/보고서-5. 썬데이 서울≫, 서브 클럽의 ≪SUB CLUB-Underground≫, 커피 코크의 ≪커피.Coke전≫ 오프 앤드 온의 ≪OFF AND ON≫, 서브 클럽의 ≪SUB CLUB_MADE IN KOREA≫ 등이 있었고, 그 외 ‘신세대’라 불리는 이들을 포함한 청년 작가들의 전시 또한 있었다. 
이처럼, 1990년 당시 〈소나무갤러리〉의 전시 주체는 20-30대 작가들이 주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신세대 미술가의 네트워크와 소그룹 전시 공간’으로 정초된다. 특히 수원으로부터 발화되었던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 산본으로 옮겨진 〈수리미술연구소〉에까지 계승되었던 ‘작업실, 전시장, 사랑방, 공부방, 예술 실험실’의 정체성을 모두 잇는 것은 아니지만, 수원을 중심으로 활동한 예술 동료들이 꾸리는 전시장, 사랑방, 예술 실험실의 역할을 서울에 확산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또한 이 〈소나무갤러리〉의 작가들이 직접 모여 의논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던 까닭에 이전의 느슨했던 ‘구성원’들이 보다 긴밀한 관계의 ‘구성원’으로 회원의 위상이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1990년대 수원에는 경기문화예술회관(1991-현재), 장안미술관(1991-1996) 등이 개관했으나, 전문 전시공간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이고, 개인 화랑의 경우 개관과 폐관을 거듭했던 탓에 새로운 서울에 진출한 예술 공간으로서 〈소나무갤러리〉의 역할을 매우 지대한 것이었다. 다만, 서울의 청년 작가의 활동과 수원권 중심의 작가들의 활동이 결합된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부분 ‘따로 같이’ 분할된 채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이 소그룹이 지향하는 결속력 자체가 완전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나무갤러리〉에 대한 또 다른 유의미한 평가 또한 있다. 부산의 다다갤러리, 일본 동경의 큐(Q) 갤러리 등과 긴밀한 교류를 도모함으로써 수원으로부터 서울로의 확산은 물론이고 대내외적 교류를 통해서 지역에서의 미술 활동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한 활동이었다고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슈룹 월드아트프로젝트_소나무갤러리_1992


융합21세기_소나무갤러리_1991


나오는 글 
우리는 앞에서 수원을 중심으로 발화되었던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1981~1984)로부터, 산본의 〈수리미술연구소〉(1988~1990), 서울의 〈소나무갤러리〉(1990~1992)에 이르는 소그룹 미술 활동을 순차적으로 살펴보았다. 우리는 일련의 세 중심축을 ‘동네 맏형 성배와 동생들의 예술 실험실 → 동문 혹은 동료들의 공생과 융합 → 신세대 미술가의 네트워크와 소그룹 전시 공간’으로 해설하면서 변모되는 흐름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한편, 〈소나무갤러리〉는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운영되었는데, 우리가 이 글에서 1992년까지 살펴본 까닭은 1992년 전원길이 관장을 이어받게 되면서 이전의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실험 공간의 특성보다는 다른 공간으로 조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나무갤러리〉는 현재 전원길이 안성에 자신의 작업실이자 프로젝트형 전시를 도모하는 공간을 마련하게 되면서 〈대안미술공간 소나무〉로 변환, 계승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라는 희망의 우주로부터 싹을 틔어 〈수리미술연구소〉를 거쳐 현실의 지평 속에서 이식과 성장을 지속했던  〈소나무갤러리〉라는 소나무 한 그루의 생명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이 역사를 가히 이 글의 제목처럼 우주에 남긴 소나무 한 그루’로 간략히 정리해 볼 만하다.  
‘이 우주 속에 남긴 소나무 한 그루?’ 물론 여기서 ‘우주’나 ‘소나무’는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와 〈소나무갤러리〉에 대한 은유이다. 또한 우주적 상상력과 소나무가 당면한 현실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시대명서 ‘이’를 포함하는 ‘이 우주’는 안드로메다가 지향했던 우주적 상상력을 포함하면서도 수원에서 서울에 이르는 이 땅의 현실적 공간을 지칭한다. 
소나무 한 그루의 유산은 지속되고 있다. 안성의 〈대안미술공간 소나무〉로, 수원에서 〈슈룹(Shuroop)〉과 〈무경계 프로젝트〉로 말이다. 특히 1990년 김성배를 주축으로 결성한 미술 소집단 ‘슈룹’의 활동은 〈소나무갤러리〉의 활동과 병행되면서 새로운 중심축으로 자라나게 된다. 1992년 〈소나무갤러리〉에서 개최된 ≪슈룹 월드아트 프로젝트≫는 이러한 두 축의 접점과 새로운 중심축에 대해서 이해하게 만든다. 
수원의 소년과 소녀들은 우주를 보면서 우주를 상상했고, 청년으로 성장한 그들은 소나무를 심었다. 이제 그들은 50대를 훌쩍 넘거나 60대를 맞이한 중진이 되었다. ‘이 우주에 남긴 소나무 한 그루’는 유산으로 남아 슈룹으로 무경계프로젝트로 이어지면서 또 다른 세대가 참여하면서 새로운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1980-90년대 소그룹 미술 운동이 야기한 문화 담론, 신진과 기득권 사이의 사회학, 지역과 중앙의 문화학’ 등 구체화된 또 다른 관점에서의 다양한 해석은 여전히 남겨진 과제이다. 그런 면에서 경기도미술관의 이번 하반기 기획전, 《경기아트프로젝트 : 시점時點》은 이러한 다양한 해석을 견인하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 

출전/
김성호,  「이 우주에 남긴 ‘소나무 한 그루’」,  전시 카탈로그, 2019
(경기아트프로젝트: 시점時點·시점視點 – 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展, 2019, 10, 29. -2020. 2. 2, 경기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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