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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전동민전 / 도시 야경의 이면 - ‘가산혼합의 회화 실험’과 빛의 미학

김성호

도시 야경의 이면 - ‘가산혼합의 회화 실험’과 빛의 미학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도시인이여! 가슴이 답답할 때 당신은 어디를 가는가? 도심 깊숙이 들어가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거나 커피숍에서 수다를 떨거나, 즐거운 공동체의 회합에 나가 고단한 심신을 달래는가? 혹 도심을 떠나 홀로 산을 오르거나 강가에 낚싯대를 드리우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도심의 전망대 위에 올라 당신의 번잡한 일상이 있었던 공간을 멀리서 관조하며 사색에 빠질 수도 있겠다.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는 기쁨을 맞이하려면, 야경(夜景)이 제격이다. ‘도시 야경’은 복잡다기한 도시인의 일상과 칙칙한 콘크리트 풍경을 묵직한 침잠(沈潛)의 어둠 속에 가라앉히면서도 다시 화려한 ‘인공의 불빛 향연(饗宴)’으로 아름답게 되살려 내기 때문이다. 그렇다. 도심의 야경은 아름답다. 사람들은 이러한 도시 야경을 바라보면서, 한낮의 뜨겁고 분주했던 도시의 삶을 식히고 위무하는 시간을 향유한다. 


I. 도시 야경 
작가 전동민은 ‘도시 야경’을 화제(畵題)로 삼는다. “낮에 보는 도시의 고층건물들은 복잡하고 무질서한 모습이지만 밤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둠과 불빛, 색채만이 남는다.” 그가 느끼는 낮의 세계는 숨 막히는 공간을 드러내지만, 밤의 세계는 숨통을 열어주는 공간을 만든다. 생각해 보라. 태양광이 모든 것을 점유하고 거침없이 포진하는 낮의 세계에선 숨을 공간이 별로 없다. 간신히 도시의 그늘을 찾은 이들이 잠시 동안 쉼의 공간을 만들 따름이다. 이처럼 낮의 세계에서 여유의 그늘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모든 것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낮의 시공간에서 사람들은 은폐와 위장의 내면세계로 들어가 자신을 가둔다. 반면에  밤의 시공간에서는 그 내면세계에 걸어둔 은폐의 빗장을 스스럼없이 풀어 젖힌다. 어둠이 그것을 도와 사물과 존재들에게 쉼의 공간을 주기 때문이다.     
작가 전동민은 도시의 야경을 보기 위해 ‘높은 곳’에 오른다. 도시 주변 야산(野山)의 산마루와 도심 속 전망대의 언덕을 오른다. 그의 말대로 “높이 올라갈수록 늘어나는 인내의 시간만큼 더욱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도시 야경을 화폭에 담았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위치한 남산과 롯데타워가 한눈에 들어오는, 관악산에서 조망하는, 서울 풍광을 담은 작품 〈서울 야경〉(2019)은 가히 환상적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과 그곳에 떠 있는 달 그리고 전경에 짙은 어둠이 드리운 관악산의 산자락과 그곳에 드문드문 자리한 조명들 사이에는 ‘커다란 빛의 바다’가 자리한다. 바로 서울의 밤 모습이다. 또 다른 작품 〈광화문 야경〉(2019)은 광화문 거리를 고층 건물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다. 칠흑 같이 어두운 서울 하늘을 이고 있는 원경 아래에 자리한 광화문광장과 그곳에 이르는 10차선 도로를 ‘노란색 강’으로 만든 자동차 불빛의 물결과 더불어 분홍, 오렌지, 노랑, 파랑의 색색의 형광색으로 가득한 울긋불긋한 조명의 건물들은 장관이다. 가히 ‘환상의 동화 나라’와 같다고 하겠다.  
‘높은 곳’이 아닌 도심의 ‘낮은 곳’에서 바라보는 서울 야경은 어떠한가? 근접한 서울 야경은 더욱 더 화려한 모습을 드러낸다. 작품 〈안국동에서 바라보는 서울 야경〉(2019)은 짙은 어둠을 품은 하늘이 빌딩 사이에 살포시 머리를 내민 채, 화면 전체가 울긋불긋한 조명들로 가득 찬 도시 풍경의 속살을 눈앞에서 맞닥뜨리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 거리/ 70 x 100cm / 한지 위에 채색 기법/ 2015 



II. 도시 야경의 이면 
이번 전시에서 전동민은 도시 야경을 ‘한 풍경 안에 두 이미지가 쌍(雙)으로 된 작품’를 선보인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는 우리가 앞서 보았던 이미지이고 또 하나는 전시장의 불을 껐을 때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같은 작품의 또 다른 이미지’이다. 어둠 속에서 이미지가 보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작품 표면에 입힌 ‘축광(蓄光)도료’ 때문이다. 말 그대로 ‘빛을 모아두는 도료’인 축광도료는 “일광, 자외선, 전등 따위에 노출되면 빛에너지가 도막에 축적되어 광원이 없어도 어두운 곳에서 장시간 빛나는 도료”이다. 물감으로 칠해진 회화의 표면 위에 축광도료를 부분적으로 덧칠해서, 전시장의 불이 꺼졌을 때 빛을 머금었던 도료가 발광하면서 이미지가 떠오르는 절묘한 효과를 고려한 이중 회화인 셈이다. 
실제로 관객은 10분 정도의 간격으로 순차적으로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는 자동 조명 장치를 통해서 이러한 이중 회화를 감상할 수 있는데, 어떤 관객은 먼저 어둠 속에서 축광도료가 만든 회화를 보다가 나중에 밝은 조명 속에서 화려한 색감의 회화를 보게 되지만, 또 다른 관객은 그 반대의 흐름으로 작품을 보게 되기도 한다. 만약 바쁜 일정으로 혹은 여하한 사정으로 관람을 서둘러 마치고 나서는 관객이 있다면, 그의 이러한 이중 회화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경우마저 있을 수 있다. 그럴 경우, 전동민이 이중 회화 속에 비장하게 숨겨둔 의미를 읽을 기회를 놓치게 되는 셈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전동민의 전시는, 마치 하나의 이야기 속 또 다른 이야기를 삽입시킨 ‘액자 소설’처럼, ‘이중의 내러티브를 지닌 액자 회화’의 의미를 지닌다. 하나의 내러티브는 한지 위에 물감을 입힌 전형적인 한국화의 조형 방법론 위에 형광도료를 얹어 현대화시킨 ‘이미지(image)의 언어’라고 한다면 또 하나의 내러티브는 축광도료가 발화시키는 가시광선 이면의 ‘이미저리(imagery)의 언어’라고 할 수 있겠다. 흔히 심상(心像) 으로 번역되는 ‘내적 형상’인 이미저리는 전동민의 작품 속에서 ‘외적 형상’인 이미지와 하나의 쌍을 이루면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 구성을 통해 그것의 숨겨진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한다.  
생각해 보자. 축광도료로 덧칠해진 이미지는 어떤 면에서 가시광선의 반사광으로 포착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빛을 품고 있는’ 돌연변이와 같은 존재이다. 태생적으로 구조적 질서 안에서 포착되지 않는 탈구조의 삐딱한 존재이자, 제도의 경계 너머를 횡단하면서 늘 다른 차원의 엉뚱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특별한 존재이다. 그런 면에서 ‘물감-형광도료-축광도료’가 한지의 바탕 위에서 한데 만나는 전동민의 회화는 ‘이미지(물감)를 극대화하는 다른 이미지(형광도료)’와 ‘이미지(물감) 위에 숨겨진 또 다른 이미지(축광도료)’를 한 겹의 쌍으로 결합한 것이라 하겠다. 달리 말해, ‘다른 이미지’와 ‘또 다른 이미지’가 ‘이미지와 이미저리’의 쌍으로 결합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전동민은 이번 개인전에서 왜 이러한 이중 장치를 마련했을까? ‘눈에 보이는 이미지’ 너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이미저리’의 존재가 있음을 함께 사유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며 그 이미저리, 즉 ‘숨겨진 이미지’ 혹은 ‘비가시성의 이미지’가 전하는 오늘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고자 한 것이다. 달리 말해 ‘도료의 매체적 실험’ 안에 담긴 메타포가 무엇인지를 성찰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따라서 관객은 전동민이 그리는 ‘도시 야경’을 통해서 ‘도시 야경의 이면의 존재’를 생각해 보는 것이자 ‘그것의 메타포’를 무엇인지 상상해 보고,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찰해 보기에 이른다. 그의 새로운 이중 회화는 “역동적인 빛의 대비가 더욱 살아나도록 하기 위한” 단순한 의도로 시작되었고, ‘숨겨져 있다가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축광도료의 이미지’를 통해서 “도시가 품은 수많은 사람, 사물들의 색채가 생명력을 발하는 순간을 표현”하려는 목표를 설정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이미지와 이미저리’ 혹은 ‘보이는 이미지와 보이지 않는 이미지’에 관한 우리의 해설은 그가 의미 부여를 시도하는 ‘도시 야경의 이면’이라는 차원에서 매우 주요하다. 그의 이중 회화가 특별히 화려한 수사(修辭) 없이도 밝은 도시 이면의 ‘어두움’, 깨끗한 도시 이면의 ‘더러움’, 반듯한 도시 이면의 ‘위반의 범죄’, 편안한 도시 이면의 ‘소외와 좌절’이나 그 반대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가시계(可視界)의 이면’에 대해서 성찰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까닭이다.   
 

시카고 야경/ 162x 131cm / 한지 위에 채색 기법/ 2016

서울 야경/ 162 x 131cm / 한지 위에 채색 기법/ 2015 



III. 회화의 매체 실험이 지향하는 빛의 미학 
전동민의 최근작이 도시 야경을 담은 ‘이중 회화 장치’를 통해서 본질적으로 ‘가시계의 이면’을 성찰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초기의 작업을 살펴보면 명확해진다. 그의 초기작은 “열상(熱像)카메라를 통해 드러나는 사람과 사물의 내면을 열로써 감지하고 작품으로 옮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열상카메라’, ‘열화상카메라’, ‘열적외선카메라’ 등으로 불리는 이것은 “생물과 물체가 각각의 고유한 온도에 따라 적외선 형식으로 방출되는 복사에너지를 검출하여 그 온도 분포를 영상화하는 카메라”를 가리킨다. 이 카메라는 가시광선이 아닌 적외선을 감지하는 까닭에 태양광이 없는 밤에도 사람과 물체의 위치 및 동태를 파악할 수 있고, ‘가시광선에서 육안으로 결코 볼 수 없는 것’ 또한 포착할 수 있다.  
전동민은 초기작에서 이러한 사물의 적외선을 추출하는 열상카메라로 풍경을 기록하고 그것을 자신의 회화적 언어로 번안했다. 바다가 방사하는 원적외선(열선)을 노란색 바다 풍경으로 번안한 그의 작품 〈바다〉(2013)와 〈물결 속으로〉(2014)을 보라! 이 작품들에는 극지방에서 관찰되는 오로라(aurora)와 같은 빛의 마술적 향연으로 넘쳐 난다. 한색과 난색이 현기증 나게 부딪히는 바다를 그린 작품 〈다른 세상〉(2014)이나 붉은 계곡물과 푸른 바위가 만나는 작품 〈계곡 속으로〉(2013)는 또 어떠한가? 이러한 초기작들에는 현실을 그렸으되 현실 너머의 초현실이 화면 안에 판타지의 세계로 깊이 들어온다.  
이러한 작품들은 열상카메라가 포착한 이미지를 변주하고 왜곡하는 방식으로 극대화된다. 형태는 보다 더 단순해지고, 변형될 뿐만 아니라, 일반 물감에 병치하는 형광 물감의 사용을 통해서 화면은 더욱더 오색 창연한 화면을 구사하게 된다. 그는 〈여의도 야경〉(2016), 〈삼성동 야경〉(2016), 〈잠실동 야경〉(2017)처럼 서울 여러 곳의 야경은 물론이고 부산, 광주의 도시 야경을 실험한다.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 런던, 뉴욕 등 서구의 화려한 도시의 곳곳을 횡단한다. 보라! 눈이 시릴 만큼 분홍색 에펠탑이 멋들어진 〈파리 야경〉(2017)이나 동화 풍경 같은 〈독일 야경〉(2017) 그리고 공상과학만화 속 풍경 같은 〈두바이 야경〉(2017)은 강렬한 형광색이 내뿜는 화면 속에 보색이 맞부딪히면서 생동감 넘치는 야경을 창출한다. 이러한 조형적 특성은 분명 현실 속 도시이면서도 마치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진단한 시뮬라시옹의 세계가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서울 야경/ 130x 388cm / 한지 위에 혼합 채색/ 2019 


광화문 야경/ 130x 194cm / 한지 위에 혼합 채색/ 2019

전동민은 자신의 작가 노트에서 다음처럼 진술한다. “(열상카메라를 통한) 이런 작업은 사물 혹은 생명에 대한 이면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단초가 되었고, 화려한 풍경 뒤에서 느껴지는 사물이 발하는 차가운 심상의 어두운 색과 생명이 발하는 역동적인 빛의 대비와 오묘한 조화와 생동에 흥미를 갖고 작업에 이르렀다.” 우리는 여기서 ‘사물 혹은 생명에 대한 이면’, ‘사물이 발하는 차가운 심상의 어두운 색과 생명이 발하는 역동적인 빛의 대비’와 같은 ‘무엇의 이면과 무엇과의 대비’와 관련한 대비적 개념의 만남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작가 전동민은 납작한 이차원 평면의 회화의 정체성, 그것도 한지에 채색이라는 동양화적 정체성이라는 한계를 끌어안고 다양한 매체 실험을 펼친다. ‘열상카메라’가 보는 세계를 변주하고 도달한 ‘일반 물감과 형광도료 그리고 축광도료의 맞부딪힘’과 같은 강렬한 시각적 실험은 작가 전동민으로 하여금 현실을 초현실의 지평으로 변주하거나 초현실을 현실 속에 가져오는 일을 주저하지 않게 만든다.     
우리는 안다. 작가 전동민의 이러한 ‘색으로 접근하는 빛에 대한 실험’은 탄탄한 동양화적 수련과 더불어 대상에 대한 변화의 과정을 주목하면서 잉태시킨 실험의 결과라는 점을 말이다. 항공기의 시선으로 바라본 〈서울 야경〉(2017)은 분명 경도와 위도 속에 자리한 살아있는 지도와 같은 객관적 현실이다. 
4개의 색 필터로 하나의 화면을 나누고 시공간의 의미를 탐구한  〈시간과 공존 사이〉(2017)나 광주를 하나의 화면 속에 사계절로 나눠 탐구한  〈사계절–광주 전경〉(2017)과 같은 작품은 그의 작품이 무엇보다 시공간적 맥락(context) 안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사계절–광주 전경/ 131 x 824cm / 한지 위에 채색 기법/ 2017 


보라! 서울의 고지도를 역사의 씨줄(緯)로 꿰매고 ‘지금, 여기에서의 작가적 해석’을 날줄(經)로 삼아 삼아 새롭게 해석한  〈고조선부터 대한민국까지 서울의 모습〉(2016) 은 도시 야경이라는 테마에 천착하기 전에 작가의 본질적 관심이 무엇이었는지를 여실히 살펴보게 만든다. 그것은 전동민의 회화에서 ‘역사와 시간의 흐름 속 존재의 변화적 위상’에 대한 고민이 그 무엇보다 먼저였음을 반증한다.  
‘색으로 탐구하는 빛의 변화’에만 집중하고 있는 듯이 보일 수 있는 작가 전동민의 형식적 실험은 실상 이러한 공간의 시공간적 맥락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그러한 점에서 작가 전동민의 앞으로의 미래적 향방에 대해 신뢰하게 만든다. ‘감산혼합(減算混合)의 물감을 가지고 빛의 가산혼합(加算混合)을 탐구하고 종국에 자신만의 빛의 미학을 성취하려는 그의 회화적 매체 실험’이 빛을 발하기를 기대한다. ●

출전/
김성호,  「도시 야경의 이면 - ‘가산혼합의 회화 실험’과 빛의 미학」,  전시 카탈로그, 2019
(전동민 - 안녕? Seoul -야경 이야기展, 2019. 11. 5 ~ 11. 14, 갤러리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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