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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최숙 / 달은 별을 먹지 않는다

김성호

달은 별을 먹지 않는다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우주 소녀’ 화가  
작가 최숙은 ‘우주 소녀’이다. 몸은 지구라는 현실의 지평 위에 있지만, 우주론을 탐닉하면서 우주를 노래하고, 몸은 이미 중년이지만, 마음은 하늘의 별을 헤면서 낭만을 이야기하는 소녀인 까닭이다. 최숙의 회화는 이러한 그녀를 닮았다: “나는 우주를 욕망한다. 우주야말로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이상적이고 공상적이면서 가장 본질적이고 실제적 존재다. 오랜 시간 ‘나’라는 물음은 자연스럽게 그 근원과 본질을 찾아 ‘우리’라는 우주적 시공간으로 확장되었다.”
최숙의 작품 〈심연의 우주〉를 보라! 빛을 가둔 심해(深海)처럼 빛을 여는 은하(銀河)의 심층(深層)처럼 푸른빛으로 일렁이는 이 작품은 암초와 해저 동굴과도 같은 심해의 초현실적 풍경을 담고 있는 작품 〈심연의 바다〉와 쌍둥이이다. 지구 깊숙한 심해와 우주 깊숙한 성운(星雲)은 ‘같은 모양의 다른 존재’인 것이다. 
나비의 나약한 날갯짓이 머지않은 시간 뒤에 태풍을 일으킨다고 했던가? 마치 이러한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의 과학 이론을 시각화한 것처럼 보이는 작품인 〈나비로부터의 우주〉는 미시적 세계로부터 거시적 세계로 뛰어넘는다. 이 작품에서 선보인 화려한 무늬를 지닌 푸른 나비의 날갯짓은 또 다른 작품, 〈나비로부터, 다시 나에게〉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이란성 쌍생아처럼 보이는 두 작품은 혹자의 의견에 의하면 “다르고도 같다.” 즉 ‘유사한 모양의 다른 존재’라 할 것이다. 전자가 미시계로부터 거시계로 확장하는 모양새라면, 후자는 미시와 또 다른 미시 사이의 대화를 이끈다. 
우리는 또 다른 한 쌍을 이룬 〈꽃으로부터 우리〉와 〈꽃으로부터 나〉라는 제목의 두 작품을 만난다. 그것은 원래 하나의 캔버스와 또 다른 캔버스를 옆으로 이어서 기다란 화폭의 작품으로 제작되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작가가 그중에서 한 작품의 위아래를 뒤집어서 두 작품이 하나로 쌍을 이루는 형식을 고안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나의 쌍을 이룬 이 두 작품에는 우주의 심연을 상기시키게 만드는 푸르른 배경 안에서 화면의 반을 차지할 만큼 거대한 ‘붉은 꽃’ 하나가 만개한 채 자리한다. 마치 양귀비처럼 보이는 그 꽃의 중심에는 짙은 어둠과 함께 암술의 유혹이 자리한다. 이 두 작품에는 꽃가루를 받은 암술이 씨방에서 씨를 만들어 씨방을 여는 또 다른 탄생의 순간을 그린 작품과 암술이 수술들에 둘러싸여 그 유혹을 기다리면서 고즈넉이 자리한 작품이 쌍을 이루고 있다. 붉은 꽃의 주변에는 사람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실루엣들이 유영하듯이 자리한다. 이러한 이유로 붉은 꽃은 마치 생명체의 커다란 근원처럼 보이고 사람은 그 근원으로부터 에너지를 받는 존재처럼 보인다. 
작품들을 자세히 보자. 〈꽃으로부터 우리〉와 〈꽃으로부터 나〉는 결국 꽃으로 상징된 ‘대우주의 거시계’와 우리, 나로 대별되는 ‘소우주의 미시계’가 지속적으로 상호 간섭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의 문제에 대해서 성찰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빨간 꽃잎 안에 무수한 사람의 얼굴 형상이 모여 있는 또 다른 작품 〈꽃, 나비 날다〉는 마치 생명의 잉태와 소통이 하나로 어우러진 작품처럼 보이지 않는가?  


〈꽃, 나비 날다〉

최숙의 또 다른 작품 〈Cosmos DNA〉는 어떠한가? 거기에는 사람의 손바닥과 노란색 꽃송이가 함께 자리한다.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은 ‘가을을 품은 꽃(cosmos)’과 우주(cosmos)의 개념을 횡단한다. 따라서 관객은 ‘국화과의 한해살이풀’이라는 화훼(花卉)로서의 코스모스와 ‘질서와 조화를 지니고 있는 세계’라는 우주로서의 코스모스 사이를 오가는 셈이다.
‘우주 소녀 화가’의 최숙의 작품은 이처럼 우주와 인간이, 대우주와 소우주가, 거시계와 미시계가 한데 어울려 창출하는 환상적인 모습을 마치 표현주의 회화처럼 자유로운 붓질과 거침없는 표현으로 담아낸다. 게다가 초현실주의 작품처럼 작품 곳곳에 ‘상징’을 배치한 채 말이다. 여기에서 강조해 둘 것은, 작가 최숙의 이러한 조형 표현이 무엇보다 ‘인간 존재의 근원과 실존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비로부터의 우주〉


II. ‘별 헤는’ 화가  
작가 최숙은 ‘별 헤는’ 화가이다. 윤동주가 그의 시(詩) 〈별 헤는 밤〉에서 별을 헤아리면서 ‘추억과 사랑, 쓸쓸함과 동경 그리고 시와 어머니’를 담았듯이, 그녀 또한 회화를 통해서 우주의 별을 헤아리며 ‘마음속 무엇들’을 담아낸다. ‘마음속 무엇들’? 그것은 최숙이 우주를 화폭에 담고 별들을 헤아릴 때마다 꿈틀거렸던 무엇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녀도 확연히 알지 못한다. 그러한 까닭에 그녀는 오늘도 붓을 들어 ‘깊은 마음속의 그것’이 무엇인지를 되묻기를 지속한다. 
그런데 시인과 화가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별 헤는 행위’는 과학적으로 아이러니이다. “빛의 속도로 1년 동안 가는 거리”를 광년(光年)이라고 할 때, 지구에서 보고 있는 별은 최소 4광년 이상이 걸리는 시간 이전에 있었던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보는 별이란 이미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거기에 없으나 여기서는 내 눈앞에 펼쳐져 볼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희한한 존재! 그렇다. 별은 모순의 존재이다. 이러한 까닭에, 별의 존재론은 인간 현실계에서의 존재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의 부존재’를 논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과학이 이미 그러한 사실을 밝혔음에도, ‘이미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별’을 바라보는 시인이나 화가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별은 원래 낭만과 신화(神話)의 존재이지 않았던가? 1969년 인류가 최초로 달 표면에 발을 디뎠을 때, 그곳에 계수나무와 토끼는 없었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곳에 여전히 “계수나무가 자라고 옥토끼가 방아를 찧는다”라고 믿고자 한다. 과학이 우주 속 실재를 증명하는 순간 낭만과 신화는 힘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을 우리는 안다. 
‘별 헤는 화가’ 최숙은 드넓은 우주를 과학이 하나둘 밝혀 나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화의 세계를 갈망한다. 작품 〈기억 이전의 시간들〉에는 이러한 신화의 세계관이 넘실댄다. 커다란 말의 두상 좌편에 예지자의 모습으로 자리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형상, 그리고 그 아래 앙증맞은 모습으로 서 있는 나약해 보이는 소녀의 모습은 신과 동물 그리고 인간이 혼재된 역사 이전의 원역사(Primeval history) 또는 신화의 세계관을 드러내기에 족하다. 여기서 인간은 어떠한 모습인가? 어린 소녀로 대표되는 나약한 인간상!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문명을 쌓아 올리면서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지 않았던가?   
최숙의 또 다른 작품 〈호모 사피엔스〉를 보라! 화면 우측을 거의 다 차지하는 지적 능력의 인간에게 더 이상의 나약함이란 없어 보인다. 짙은 청색의 강인한 인물상은 이러한 사실을 웅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공동체와 국가를 만들어 지배력을 강화하고 도구를 만들어 문명을 구축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최숙의 작품 속 인물상의 눈으로부터 떨어지는 푸른 물줄기는 과연 무엇인가? 눈물? 그렇다. 강인한 인간 존재에도 슬픈 사건이 있고 의지하고픈 그리운 대상이 있다. 신화 세계의 과거, 영혼 세계의 미래는 인간이 의지할 그러한 대상이다. 인간에게 신화는 그렇게 왔고 영혼은 그렇게 소멸하고 부활할 것이다. 
여기 영혼을 노래하는 한 인간이 있다. 작품 〈영혼으로 부르는 노래〉에 등장한 피리 부는 사람이 보이는가? 고깔모자를 쓰고 지금 한창 피리 연주에 여념이 없는 주인공은 이성으로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이지만 한편으로 호이징거(J. Huizinga)가 언급하는 감성으로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이기도 하다. 고깔모자의 풍각쟁이 피리 연주가! 생각나는 이가 없는가? 최숙의 이 작품은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이 시로 쓴 동화 ‘하멜른(Hameln)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연상시킨다. 하멜른이라는 마을이 쥐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는데, 이 사나이가 나타나 쥐떼를 퇴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약속했던 돈을 받지 못하자, 하멜른 마을의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사라졌다는 엽기와 같은 이야기! 그러나 안심하시라! 최숙의 작품에서 피리 부는 남자와 함께 사라질 존재는 없다. 그는 영혼으로 노래하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영혼으로 부르는 노래〉


III. 달은 별을 먹지 않는다.  
‘우주 소녀’이자 ‘별 헤는 화가’인 최숙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간상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모두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신화 속 인물처럼 그려지기도 하고, 이지적인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작품 〈오래된 신화〉를 보자. 여기서 인간은 파랑새로 은유된다. 회청색의 우주적 기운이 일렁이는 배경을 두고 파랑새 한 마리가 사람처럼 등을 세우고 서서 우주의 어딘가를 멀리 내다보는 것 같은 장면은 마치 신화 속 인간의 모습과도 같지 않은가? 그 모습은 어찌 보면 그리스신화의 디오니소스 (Dionysus)와 아폴론을 오가는 신의 모습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편으로 형벌을 받고 장님이 되어 존재의 슬픔을 노래해야만 했던, 그리스 신화 속 음유시인(吟遊詩人, troubadour)인 타미리스(Thamyris)의 우울한 초상일 수도 있고, 반대로 철학자 니체(F. W. Nietzsche)의 절대적이고 초극적(超克的)인 존재인 초인(超人, Übermensch)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 최숙에게서 인간이란 때로는 불완전한 모습으로 서성이고 때로는 이지적 모습으로 초연한 존재이다.  
그런데, 작가는 왜 전시 제목을 “달은 별을 먹지 않는다”라고 지었을까? 이 제목은 우리에게 “달이 태양의 일부나 전부를 가리는 천문학적 현상”인 ‘일식(日蝕, solar eclipse)’을 쉽사리 떠올리게 한다. 별이란 ‘스스로 빛과 열을 내는 항성(恒星)’을 지칭하는데, 태양계에선 항성이란 태양이 유일하다. 따라서 ‘일식’의 구문적 의미가 “해를 갉아 먹는다”인 점을 상기한다면, 위의 제목은 “달은 해를 먹지 않는다”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겠다. 주지하듯이, 일식은 ‘태양-달-지구’ 순으로 놓여서 달이 태양을 가릴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더 정확히 말해 일식은 달의 그림자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 경우에 지구에 사는 우리 눈에는 해의 전부(개기 일식) 또는 일부(부분 일식)가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런데 태양은 자전을, 지구와 달은 공전과 자전을 매우 빠른 속도로 지속하기 때문에, 일식은 아주 드물게 일어날 뿐만 아니라 그 기간도 짧다. 그래서 작가는 “달은 별을 먹지 않는다”라고 표현했을까?
아니다. 생각해 보라. 일반적으로 별은 태양과 같은 항성뿐 아니라 지구와 같은 행성(行星) 또한 지칭한다는 점에서 최숙의 작품에서 별의 개념은 우주의 ‘항성과 행성에 이르는 모든 존재’로까지 확장되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최숙은 모든 별이 실제로는 그 격이 다른 존재이지만, 우주 안에서 서로 ‘공생(symbiosis)’의 존재임을 말하려고 한 까닭이다. 그래서 최숙의 작품에서 “달은 별을 먹지 않는다”는 표현은 공생의 메시지를 전하는 하나의 아포리즘(aphorism)으로 작동한다.  
자! 이제 최숙의 작품 〈다시 신화 밖으로 걸어 나오다〉를 보자. 이 작품은 앞서 살펴본 〈오래된 신화〉의 내러티브를 잇는 작품이다. 이전에 고즈넉이 서 있던 파랑새는 이 작품에서 두 다리로 성큼성큼 어디론가 걸어가는 중이다. 제목처럼 ‘신화 밖으로’ 나가는 중이리라. 그러나 여기서 ‘신화의 탈주’란 ‘구조화되고 고착화된 고전적 신화’로부터의 탈주이지 우리가 살펴본 ‘상상과 낭만의 신화’를 벗어나는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다. 


 〈오래된 신화〉


그렇다! 걸어 나가는 파랑새는 따뜻한 신화 속에 거하는 존재이면서도, 한편으로 오늘날 탈신화된 인간 주체를 은유한다. 물론 그것은 작가 최숙의 또 다른 초상이기도 하다. 파랑새 머리 위에 자리한 ‘작가만의 상징인 안테나’를 보라! 이 안테나라 불리는 상징은 최숙의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작가 최숙이 그리는 인간은 자신의 안테나를 통해서 세상을 읽는 탈신화의 주체이면서도 옛 신화를 버리지 않는 따뜻한 인간 주체이다. 이러한 인간 주체는 냉철한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가슴은 따뜻하다. 이러한 인간 주체는 삶과 예술에서 공생의 가치를 소명처럼 지니고 사는 존재라 할 것이다. 
‘달’은 스스로 빛조차 생산하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태양광을 반사하면서 공생의 빛을 비추는 존재임을 상기할 일이다. 인간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 주고 여전히 계수나무와 옥토끼가 거할 수 있도록 낭만을 품어 안는 존재이다. 그러한 달의 마음을 지닌 예술이란 따뜻한 공생의 마음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주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의 말처럼 지구는 드넓은 우주 속의 작디작은 “창백한 푸른 점(a pale blue dot)”일 따름이다. 그 ‘작은 점’ 지구에서 정복과 쟁취에 목숨을 건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이건의 관점에서 인간 사이의 쟁투는 부질없는 일이다. 
최숙의 작품 세계에서 무엇보다 주요한 사실이 있다. 그녀가 우주를 통해서 모색하는 ‘공생’의 의미가 단지 신화와 낭만의 차원에 국한해서 탐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의 최숙의 작가 노트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그것은 모든 존재의 다름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존중에 기초한 것이다: “나는 오히려 우주에 대한 과학적 접근으로 우주 신비가 하나둘 밝혀지는 과정에서 지구가 얼마나 작은 별에 불과한지, 인간을 비롯한 다른 모든 존재들이 우주에서 온 대단하면서도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래서 더욱 지구라는 작은 별에서 우리 인간들이 모든 다름을 존중하고 공존으로 가는 길을 노력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숙의 이번 개인전 주제인 “달은 별을 먹지 않는다”라는 의미는 결국 ‘인간학’으로 귀결되는 셈이다. ‘다른 모든 것들과 공존하는 인간학’으로서 말이다. 우리는, 아래와 같은 최숙의 작가 노트에서 이러한 공존의 의미를 곰곰이 곱씹어볼 수 있을 것이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변방의 작고 푸른 별 / 아직 우리에겐 꿈이 있다. / 나로부터 우리,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꿈. / 많은 사람이 다름과 차이를 넘어서 공존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다. / 내 그림도 간절함이 저 우주 심연에 닿아서 누군가를 위한 위로와 축복의 노래가 되면 좋겠다. / 사피엔스를 위하여, 이 땅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위하여 바치는 영혼의 노래. / 달이 별에게 그렇듯이”


출전/
김성호,  「달은 별을 먹지 않는다」,  전시 카탈로그, 2019
(최숙 -달별展, 2019. 11. 5 ~ 2020. 3. 15, 유리섬 맥아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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