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서문│Street Sculpture 2019 / 색을 입은 조각

김성호

색을 입은 조각

김성호(커미셔너, 미술평론가, Kim, Sung-Ho)


I. 새로운 장소와 변주하는 장소성 
고양조각가협회가 주최, 주관하는 고양국제야외조각전 《Street Sculpture 2019》가 어느덧 19회를 맞이했다. 푸르른 가을, 보름간의 일정으로 ‘고양공원 녹지와 스타필드 고양 광장’에서 펼쳐진 이 전시는 이전까지 전시 장소로 사용되었던 ‘일산호수공원’ 주변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장소성’을 실험한다. 그것은 하나의 모험이다. 익숙했던 장소를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새로운 계획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발생하게 될 시행착오는 19년에 이르는 전시 개최 경험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돌발변수이다. 장소 소유자와의 새로운 협의, 장소 변경에 대한 타당한 이유와 당위성 모색, 새로운 장소성에 대한 새로운 계획과 실천이 요청된다. 
우선 여유로운 산책로와 볼거리 가득한 ‘일산호수공원’에서의 그간의 전시는 가을의 다른 행사들과 어우러진 ‘종합 축제 속의 한 행사’였다는 점에서 ‘야외조각전’만의 위상을 찾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관람객 유입이 용이하고 시민들과 소통하는 ‘거리 조각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에는 좋은 측면이 있었으나 이들 관객이 온전히 야외조각전 관람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별화된 야외조각전만의 위상 찾기가 절실한 과제였던 셈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올해 전시의 새로운 장소인 ‘고양공원 녹지’는 쇼핑복합시설인 ‘스타필드 고양’과 마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올해의 전시는 오히려 번잡한 도시의 일상 속으로 파고든 성격이 강하다. 여유와 여흥을 즐기는 차원은 이전의 장소와 일맥상통하지만, 새로운 장소는 ‘소비를 즐기는 도시의 일상’이라는 맥락으로 보다 더 깊이 들어간 셈이다.  
특정 장소에 오랫동안 관성화된 그간의 전시는 ‘같은 장소(컨텍스트)’에 ‘같은 유형의 전시(텍스트)’를 통해서 일말의 상투적인 전시 유형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반면에, 새롭게 찾은 또 다른 장소는 이전 장소성에 대한 ‘탈맥락화(decontextualization)’를 실천하고 다양한 새로운 시도를 열어 두는 ‘재맥락화(recontextualization)’의 공간으로 자리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스타필드 고양이라고 하는 거대한 쇼핑복합시설은 이러한 탈맥락화에 있어서 관건이다. ‘거리 조각제’에서의 이러한 상황은 크라우스(R. Krauss)의 조각의 '확장과 복합(complex)과 관련한 이론'에서 보듯이, 조각이 자신과 상이한 건축과 만나기 위해 ‘조각과의 공유 지점’을 만드는 비건축(not-architecture)으로 중성화하는(neuter) 전략을 취했던 것을 상기하게 만든다. 즉 그것은 고양호수공원이라는 풍경으로부터 스타필드 고양이라는 건축으로 이동하게 되는 탈맥락화이면서, 이전의 '비풍경(not-landscape)'으로 중성화하는 전략으로부터 올해의 '비건축'으로 중성화하는 전략을 새로이 취해야 하는 재맥락화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올해의 조각전, 《Street Sculpture 2019》가 맞닥뜨리는 ‘새로운 장소’라는 화두는 탈맥락화와 재맥락화를 통해서 ‘장소성’에 관한 문제의식을 지속적으로 변주한다. ‘변주하는 장소성’인 셈이다. 특별히 올해는 ‘스타필드 고양’을 전시의 중심 공간으로 활용하지는 않고 그 앞에 펼쳐진 광장과 고양공원 녹지를 중심으로 전시를 펼쳤지만, 내년부터는 이 건축의 내부 공간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스타필드 고양 광장’과 ‘고양공원 녹지’라는 올해 전시의 새로운 장소는 건축을 ‘복합 쇼핑몰’ 기능으로부터 ‘예술 공간’으로 변모시킬 뿐 아니라, 고양공원 녹지와 주변에 새로운 예술 공간으로서의 가능성마저 실험하는 것이라 하겠다.    






II. 색을 입은 조각, 색을 안은 조각  
올해의 전시 주제는 ‘색을 입은 조각(Sculpture in COLOR)’이다. 조각이 색을 입은 것이 특별한 주제가 될 수 있겠는가? 야외에서 흔히 보는 조형물과 조각의 피부에 얹힌 색을 우리는 미술 현장에서 수도 없이 보아왔지 않는가?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색과 조각의 만남은 어색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는 안다. 이러한 ‘채색 조각(polychrome sculpture)’은 르네상스기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조각 재료 자체가 지닌 자연색 위에 어떠한 색을 첨가하려는 노력을 방기하면서 비롯된 것임을 말이다. 그것은 ‘르네상스 조각이 모범으로 삼은 고전 고대의 조각들이 대개 자연색이었다’는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실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최근에서야 밝혀졌다. 
최근 과학은 고대 그리스 조각들 표면에 남겨진 안료를 분석해서 원래는 그것이 채색 조각임을 밝혀냈다.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 조각은 채색 조각이었으나 많은 부분 전쟁으로 망실되고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대부분 로마 시대의 대리석 모작이었던 까닭에 이러한 자연색에 대한 오인이 기정사실처럼 인식되어 온 셈이다. 아울러 최근 복원된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상(Statua di Augusto da Prima Porta)〉처럼 고대 로마 시대의 조각 또한 색으로 되어 있었던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대 이집트, 신석기, 구석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조각은 대개 채색 조각임이 밝혀졌다. 우리는 최근에서야, 최초의 조각이라 알려진 구석기 시대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Venus of Willendorf)’가 단순히 석회석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표면에 안료를 입은 색조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 탈채색 조각, 즉 질료 자체가 지닌 자연색을 조각의 색으로 간주해 온 역사는 전체 미술사에서 르네상스기로부터 근대 조각에 이르는 짧은 역사 동안 진행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로댕(A. Rodin)으로 대표되는 근대 조각은 분명코 색과 담을 쌓은 존재였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회화가 눈속임 기법을 통한 ‘회화의 조각화(彫刻化)’를 버리고 2차원 평면이라는 ‘자기 매체의 결정성’ 안으로 잠입했지만, 조각은 이미 르네상스기부터 로댕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조각의 회화화(繪畵化)’를 거부하면서 색의 도입에 거부 반응을 보여 왔음을 우리는 안다.
이처럼 조각이 오랫동안 채색 조각을 지향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재현 이미지(조각)를 통해서 원본(조각의 재현 대상)의 외형뿐만 아니라 내면까지도 아우르고자 했던 ‘진정한 유사성으로서의 에이콘(eikon) 또는 에이돌론(eidolon)’을 만들고자 했던 까닭이었다. 그런 면에서 조각에서 ‘색’이란 자연 혹은 일상의 것이자, 자연으로부터 온 대상을 완벽히 구사하기 위한 조형 도구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동시대 조각에서의 ‘색’은 스미스(D. Smith)나 칼더(A. Calder)에 의해 본격화된 이래 팝아트 이후 엘리트 미술의 종결을 고하는 지표이기도 했다. 즉 동시대 ‘색채 조각’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벗고 ‘인간을 위한 예술, 혹은 일상 속 예술’로 자리하는 것이자, 조각 고유의 고고함으로부터 색이라는 오염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조각 스스로 유연해지고자 하는 ‘현대 조각의 자기반성(not-sculpture)’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올해의 전시 주제 ‘색을 입은 조각’은 그래서 조각 전시에서 특별하지 않지만, 여전히 유의미한 화두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조각 재료 자체의 자연색에 집중하면서 조각 표면 위에 물감을 입히는 것 자체를 지양하는 작가들이 있지만, 그들 역시 채색 조각을 ‘조각의 이단’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많은 부분 ‘색’은 조각 안에 깊이 들어와 있는 주요한 요소임을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Street Sculpture 2019》의 참여 작가들은 돌, 나무와 같은 자연의 질료가 지닌 ‘자연색’뿐 아니라 스테인리스 스틸, 알루미늄, FRP, 시멘트, 각종 오브제 등 ‘인공의 조각 재료가 지닌 색’을 드러내기도 하고, 표면 위에 물감을 칠하거나 기계로 도장(塗裝)하는 방식으로, 또는 색판을 덧입히는 방식으로 인공의 색을 조각 재료 위에 뒤덮기도 한다. 재료가 지닌 자연색은 그 자체로 공기와 접촉해 녹이 슬거나 빛이 바래고 색이 변하기도 하고,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서 그 발색을 달리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 특정 부분만 작은 표면 위에 입혀진 색이 전체 조각의 분위기를 주도하거나 조각체의 내부와 외부의 색을 달리하거나 주변 풍경을 조각체 안에 끌어들이기도 한다. 가히 ‘색을 입은 조각’이자 ‘색을 안은 조각’이 되는 것이다.  










III. Street Sculpture의 장기적 비전 
크라우스가 조각의 확장에 관한 이론을 제기한 이래, 현대 조각의 화두인 확장과 복합은 풍경과 건축뿐 아니라 일상을 통합한다. 단토(A. Danto)가 진단하는 미술종말 이후의 다원주의 미술의 시대에도 일상과 예술의 융복합은 단연코 화두이다. 조각의 융복합의 관점에서 색이란 무엇인가?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색’은 실상 자연으로부터 왔다. 따라서 색은 오늘날 현대 조각의 화두인 확장과 융복합의 대상이기보다 조각 본연의 모습에 대한 복원을 의미한다.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모더니티가 예술을 위한 예술, 혹은 엘리트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갈라놓은 일상의 복원을 의미한다. 색은 인간만이 대상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동물의 색 인지는 인간의 차원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색이란 인간만이 인지 대상에 대해 실행하는 의미화 작용이 된다. 인간의 일상 소통을 점유하고 있는 ‘색의 인지를 통한 비언어적 소통 방식’은 인간이 처했던 역사와 사회적 맥락에 따라 그 의미 작용이 상이하지만, 많은 부분 공유의 폭을 넓혀 왔다. 예를 들어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의 구분이나, 남녀를 의미하는 색을 통한 이데올로기 표식 장치, 금지를 의미하는 붉은색, 죽음을 의미하는 검은색’처럼 색이 담당하는 비언어적 소통은 ‘시각을 통한 의미화 작용’이라는 시각예술 본연의 일반화된 소통 방식과 맞물려 있다. 
《Street Sculpture 2019》의 주제 ‘색을 입은 조각’은 현대 사회에 하나의 메시지를 전한다. 색은 조각 본연의 특성 중 하나였기에, 현대 조각의 색에 대한 모색이란 본질적으로 ‘현대 조각의 자기반성’이자 원래 하나였던 조각과 색을 통해서 예술과 일상(혹은 자연)의 복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전시는 ‘창작 조형 체험, 세미나와 조각 작품에 대한 작품 설명 프로그램 등을 통하여 시민과 함께 호흡하며 체험하는 전시’를 도모함으로써 이러한 예술과 일상의 복원을 꾸준히 전개한다. “예술이 있어 쾌적하고 살기 좋은 고양을 만드는데 기여하고자 마련된 전시”라는 고양조각가협회의 공식적인 기획 취지는 이번 전시 주제인 ‘색을 입은 조각’과 맞물려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어떤 면에서 낯선 환경, 새로운 협상 주체, 행사를 위한 예산의 변화, 국내외 작가 비율의 변화 등 올해의 난제와 시행착오를 개선하기 위한 모색 등 차기년도의 《Street Sculpture 2020》뿐 아니라 장기적 비전 차원에서 향후의 행사를 위한 당면한 과제는 무수히 많다. 보다 면밀하게 올해의 상황들을 검토하고 분석함으로써, 향후의 행사가 본연의 취지를 살리면서도 더욱더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튼튼한 토대를 마련해 나가길 기대한다. ●


출전/
김성호,  「색을 입은 조각」,  서문, 전시 카탈로그, 2019
(Street Sculpture 2019 展, 2019. 9. 28~ 2019. 10. 13. 고양 스타필드광장)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