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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한지민 / 달을 먹은 그림자 - 상처에 대한 위로

김성호

달을 먹은 그림자 - 상처에 대한 위로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라이노컷과 소멸법 드로잉 
한지민은 판화를 자신의 주 작업으로 펼치는 작가이다. 최근작 20여 점을 선보이는 이번 개인전에서 그녀는 라이노컷(linocut) 또는 리노컷이라는 기법을 선보인다. 이 기법은 “리놀륨(linoleum)판에 드로잉을 한 후 조각도로 파내고 롤러에 잉크를 입혀 찍어내는 볼록판화 기법”의 한 종류이다. 리놀륨판은 “리녹신이라는 물질에 나뭇진, 고무, 코르크 가루 등을 혼합하여 두꺼운 종이 형태로 눌러 만든” 까닭에 건축 내부 자재에 곧잘 사용되기도 하는데, 내구성, 내열성, 탄력성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표면이 고르고 재질이 부드러워 판화에서 다양한 질감을 표현하기 쉽다. 이것은 고무보다는 딱딱하고 나무보다 부드러워 부드럽고 섬세한 표현을 하기에 제격이다.  
한지민은 이번 전시에서 이러한 라이노컷 기법을 이용한 ‘소멸법 드로잉’을 주요한 조형적 표현으로 선보인다. 즉 판화지 위에 하나의 판으로 판화를 찍고 또 같은 판을 수정하고 찍기를 거듭함으로써, 하나의 원판에 새겨진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소멸해 나가는 기법인 ‘소멸법’은 원판 한 장으로 변화하는 이미지를 계속해서 기록해 나갈 수 있다는 특장점이 있다. 마치 그것은 같은 판화의 장(場) 안에서 발생하는 시간성과 내러티브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생로병사를 거치면서 태어남과 죽음에 이르는 생과 닮아 있다. 또한 그것은 창작 활동을 통해 무수히 많은 작품(판화)을 생산하고서 그 창작의 주체인 예술가(원판)는 서서히 죽어가는 예술의 속성과도 닮아 있다. 예술가가 생산한 예술은 영원하고 예술가는 소멸하는 만고불변의 진리! 
이 같은 ‘라이노컷에 의한 소멸법 드로잉’은 한지민의 이번 개인전 제목인 ‘달은 먹은 그림자’라는 주제 의식을 이해하는데 십분 도움이 된다. 주체는 죽고 주체가 관계한 대상이 영원히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이 아니라면 ‘주체가 아닌 주체’가 만든 시뮬라크르(그림자)가 대상(달)을 점유하면서 영향을 미친다는 것?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좌)한지민, 유랑의 문_Embossed on Linoleum _59.5x 75.5cm _2018
(우)한지민, 유랑의 문_Linocut _70 x 100cm _2018


한지민, Two Breaths_ 70 x 100cm_ Linocut_ 2019



II. 달을 먹은 그림자      
한지민의 이번 개인전 주제인 ‘달은 먹은 그림자’에는 그림자의 주체가 ‘누구 혹은 무엇’인지를 유추하게 만든다. “달을 먹은 게 도대체 누구(무엇)야?” 우리는 여기서 “달을 갉아 먹는다”는 의미의 월식(月蝕, lunar eclipse)이라는 천문학적 현상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월식이란 “태양, 지구 그리고 달이 태양-지구-달의 위치로 배열되어 지구의 그림자에 달이 가려지는 현상”이다. 그런 면에서 ‘월식이란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먹은(먹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월식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한지민의 개인전 주제인 ‘달을 먹은 그림자’를 ‘달을 먹은 지구의 그림자’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실제로, 한지민은 이번 전시에서 개기월식(皆旣月蝕, total lunar eclipse) 장면을 중심에 배치하고 전후의 부분월식 모습을 좌우로 배치하여 8개의 패널로 구성한 〈Scene Eight〉(2019)라는 작품을 선보인다. 주목할 만한 것은 달의 변하는 모습을 눈동자로 대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안구(眼球) 전면에 홍채로 둘러싸인 검은 동공(瞳孔)을 달의 형상으로 대치함으로써, 마치 지구에서 사람이 월식의 현상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상황을 유추하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 안구로 들어오는 빛의 양을 조절하는 ‘홍채’가 지닌 민무늬근의 오묘한 형상은 마치 우주의 이미지처럼 보이고, 그 안의 동공은 월식으로 인해 변하는 달의 형상과 겹쳐지면서 작품 자체를 ‘내 눈 안의 우주’처럼 보이게 만든다. 
우리는 간과한다. 실제로 일식이 월식보다 자주 일어나지만, 일식은 지구상의 극히 한정된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반면, 월식은 달이 보름달일 때, 지구 어디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에 월식이 더 자주 관측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 우리는 자주 간과한다. 월식이 “지구의 그림자에 의해서 달이 가려지는 현상”임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서 간신히 빛나는 존재임을 알면서도 그 빛을 발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그림자로 가려 놓은 지구(은유적으로는 지구인)가 자기가 한 일에 시치미를 떼면서 “달이 왜 그러냐”고 여러 차례 수군거려 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절에 지구(인)는 자신의 가해를 이해하지 못했으니 자신으로부터 받은 피해자인 달의 ‘변덕스러운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우주가 움직이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을 원시의 시대에는 월식, 특히 개기월식을 신의 분노와 같은 것으로 이해했을 테고, 적어도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가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했던 16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월식은 그저 불안한 세계의 징조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달이 왜 그러지?”라는 질문이 늘 가능했다. 
근대 이후, 지구에 사는 우리는 모두 안다. 달의 그 불안한 변주가 사실 ‘지구의 그림자 폭탄’ 때문에 생겼던 사실을 말이다. 상처를 준 이(지구)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상처를 받은 이(달)는 오랫동안 그 사실을 기억한다. 자신의 상처와 불안한 증후의 근본 원인을 말이다. 
한지민의 작품 〈Scene Eight〉(2019)은 소멸 기법으로 만들어진 상처의 흔적들이자 불안한 증후의 과정이다. 또한 그것은 이번 전시에서 ‘상처받은 달’이 잠시 되기로 작정한 작가 한지민이 달에 감정 이입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한마디로 그녀가 대면하고 있는 현실로부터 받은 상처와 불안한 내면의 고백을 상징처럼 선보이는 메타포(metaphor)라고 할 수 있겠다.  
 

한지민, Scene Eight(부분) _ Linocut_ 70x100cm each_ 2019



III. 초현실주의적 데자뷔
한지민의 ‘달을 먹은 그림자’전은, 작가의 언급처럼, “순간순간 계속되는 삶의 변화와 상실이 야기하는 감정들을 신화적 공상과 일상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토대로 제작되었다.” 그녀가 언급하고 있듯이, 상실, 상처, 불안과 같은 감정들은 일종의 “기시감(旣視感)처럼 인과가 불명확한 감정들”을 추적하면서 맞닥뜨린 “두려움 혹은 욕망과 같은 뿌리 깊은 지점”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두려운 욕망’이라고 칭할 수 있는 이 ‘근원적인 감정 덩어리’는 마치 그녀가 언급한 ‘기시감’처럼 명확히 규정하고 설명하기 애매한 ‘무엇’이다.   
기시감이라니? 이 용어는 불어 데자뷔(déjà vu)에 대한 번역이다. 이 말은 직역하면 “이미 보았다”이고, 의역하면 “체험하지 못한 상황 앞에서 이미 체험한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처음 접하게 되는 대상, 장소, 사건과 같은 것을 이미 어디선가 본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일련의 착각 현상”을 지칭한다. 이러한 현상은 지각 장애, 심리적 혼돈 혹은 감정의 응고 상태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념할 것은, 데자뷔의 상황을 시각화하는 한지민의 작업에서, 그 내용은 ‘다분히 미시적이거나 신화적이고 그 형식은 다분히 초현실주의적’이라는 점이다. 즉 그녀의 작품은 딱히 규정하기 애매한 ‘감정의 덩어리’가 잉태시키는 미시적이거나 신화적인 내용이 초현실주의적 형식을 만나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한마디로 ‘초현실주의적 데자뷔’라 할 만하다.    
작품 〈들여다보기〉(2018)는, 독수리 혹은 칠면조의 머리로 보이는 세 형상이 클로즈업된 채, 세 개의 패널에 나뉘어 만들어진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파충류와 조류가 뒤섞인 어떠한 생명체이다. 그것도 아닌가? 들여다보면 볼수록 분명히 어디선가, 언제인가 본 것은 같은데 딱히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형상 안에서의 미끄러짐’, 즉 ‘초현실주의적 데자뷔’의 상황이 이 안에서 무수히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과 이상의 혼재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초현실주의의 조형 언어’는 제격이다. 마그리트(R. Magritte) 작품에서의 현실적 크기의 전복과 에른스트(M. Ernst) 작품에서의 주체의 분열과 혼종을 우리는 한지민의 작품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작품 〈우아한 침묵〉(2017)에서 보듯이, 새의 날개를 지닌 반인반조(半人半鳥)의 사람은 상상과 신화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인간 주체로 등장한다. 또한 작품 〈The Road〉(2017)와 〈깊고 가득한〉(2018)에서처럼 새들을 상반신에 뒤집어쓴 형상의 인간 주체나, 작품 〈우린 여기에 있다〉(2017)와 〈가려진 숨결〉(2017)에서처럼 새와 물고기인 듯한 미상의 생물체와 한 그루의 나무를 마치 모자처럼 함께 쓰고 있는 형상의 인간 주체 역시 신화적 인간 주체로 보인다. 작품 〈Bones Tree〉(2016)에서 새들의 날개를 마치 낙하산 삼아 추락하고 있는 한 인간은 또 어떠한가? 그녀의 작업에서 이 모든 혼종의 주체는, 신화적인 내러티브라는 내용과 초현실주의의 조형 언어라는 형식이 합체하면서 신비롭게 드러난다.  


한지민, 들여다 보기_Linocut_각 40 x 40cm_2018



IV. 소멸 - 상처에 대한 위로와 영원한 치유 
인간과 동물 사이의 ‘혼성 주체’ 또는 인간의 ‘주체 분열’은 우리가 망상이나 공상을 통해 잠재의식 속에 곧잘 잠재우던 신화적 주체였다. 그것은 분명코 ‘지금, 여기’를 탈주하는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주체이지만 몽상 속에서는 언제나 데자뷔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물론 그것은 작가 한지민이 무의식 속에서 체험하고 있는 다분히 비밀스럽고 미시적인 세계 속에서의  분열적 주체로서의 자화상이다.     
분열적 주체는 몽상과 현실의 접점에서 불안, 상처, 상실을 자양분으로 삼고 자라는 주체이다. 그곳에는 이번 전시의 주제인 ‘달을 먹은 그림자’에서처럼 가학의 주체를 망실한다. 달에게 왜 어두워지냐고 염려하면서 자신의 그림자에게 탓을 하는 지구는 ‘자신이 한 가학적 일을 알지 못하는 분열의 주체’이다. ‘현실 속 비현실’을 헤매고 있는 이 분열의 주체는 비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분열되고 소멸한다. 
작품 〈At This Moment〉(2019)에서 임팔라(impala)로 불리는 큰 뿔이 달린 영양(羚羊)을 포획하고 있는 치타의 모습은 순간 속에서 정지한 채 자신의 모습을 잃어간다. 영양을 잡아먹는 치타는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의 질서 속 강자이지만, 이내 자신의 가학적 주체를 망실한다. 한지민이 소멸법으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판화의 질서 속에서 피해자(영양)는 가해자(치타)의 모습과 하나의 주체처럼 ‘소멸 혹은 분열되면서 합체 아닌 합체’를 한다. 이러한 극적인 순간을 하나의 판 안에서 매우 정밀하게 묘사해 나가는 한지민의 소멸법은 결국 가해와 피해, 주체와 타자를 분열시키고 종국에는 그것을 자연 속의 먼지의 존재처럼 소멸시킨다. 이처럼 ‘소멸’은 부재에 이르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면서도 ‘상실에 대한 위로와 영원한 치유’라는 메시지를 함의한다.   


한지민, At This Moment (1)_ 장지에 Linocut을 이용한 소멸법 드로잉 , 아크릴 채색_ 68.5 x 203.7cm_ 2019


작품 〈행복한 슬픔〉(2018)을 보자! 이곳에 등장하고 있는 인간은 가해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게 탈주하고 있는가? 아니면 소멸하고 있는 것인가? 숲속의 하이에나처럼 보이는 금수의 위협으로부터 탈주하고 있는 한 여인은 마치 승천하듯이 같은 자세로 자유로운 해방을 누리다가 점차 소멸해 간다. 소멸은 영원한 자유인가? 작품 제목이 상기시키는 것처럼, 위협으로부터 탈주는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주체는 언젠가는 소멸이라는 또 다른 슬픔에 직면한다. 생각해 보자. 삶이라는 것은 ‘희로’ 혹은 ‘애락’과 같은 양가적 감정의 대치가 연속되는 일상을 사는 것이기에 삶 자체가 어찌 보면 ‘불안한 해방/자유로운 불안’이자 ‘행복한 슬픔/슬픈 행복’이다. 그러니 앞서의 우리의 질문 “소멸은 영원한 자유인가?”는 “소멸은 영원한 자유가 아니던가?”라는 질문으로 대치된다. 소멸은 잠시의 슬픔이지만 영원한 자유이니까 말이다. 그것은 상처에 대한 치유를 거듭하고, 수많은 슬픔 속에서 가끔의 행복을 찾아 나가는 인간 주체의 사회적 삶과 연동된다.  


한지민, 행복한 슬픔 _Linocut을 이용한 소멸법 드로잉  _각 100x70cm_2018

글을 마무리하자. 관객은 한지민의 작품 속에서 마치 안개에 의해 사라지듯, 점차 해체되고, 미세하게 파편화되어가는 모습을 ‘하나의 판으로부터 잉태된, 같으면서 다른 이미지들’을 비교해 가며 살펴볼 수 있다. 양각으로 새겨진 이미지를 음각으로 해체시켜 점진적으로 소멸에 이르게 만드는 이러한 ‘소멸법’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작가 한지민은 ‘현실 속 인간 주체의 삶’을 은유한다. ‘달을 먹은 그림자’라는 주제는 이러한 은유들을 ‘하나의 사건을 두고 전개되는 시간의 내러티브’와 함께 ‘상처에 대한 위로와 치유’와 연관된 여러 키워드로 풀어 나가게 한다. 현실 속 비현실, 실재와 가상, 주체와 대상, 가해와 피해, 소멸과 자유, 슬픔과 행복, 초현실적 데자뷔와 같은 개념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개념들이 향후 그녀의 작업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재조합되어 우리에게 새로운 미학으로 나타날지 자못 기대된다. ●


출전/
김성호,  「달을 먹은 그림자 - 상처에 대한 위로」,  한지민 작가론, 자료집, 2019
(2019 양주시립미술관 레지던시 입주 작가 비평 매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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