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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안│소마 특강 / 조각이 모여 만든 조각

김성호


《조각_조각》展  연계, 11월 소마 특강, 2019. 11. 27(수) 10:00-12:00, 소마미술관 세미나실 

조각이 모여 만든 조각
Sculpture made of Pieces  



강사 김성호(미술평론가, 2020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




I. 들어가는 글
이 글은 소마미술관의 기획전 《조각_조각(Pieces_Sculpture)》과 연계한 주제로 멀티플 아트(multiple art)를 이야기하는 강의안으로 작성되었다. 즉 '조각(pieces)이 모여서 만들어진 조각(sculpture)'을 지칭하는 이 멀티플 아트는, 이번 전시의 기획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점, 조각, 덩어리, 구축물이 조각으로 확장된 칸딘스키 버전”과 맥락을 함께 한다. 멀티플 아트를 두루 살펴보는 이 글이 이번 전시를 이해하는데 있어 적으나마 청중께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47회 베니스 비엔날레(1997. 6.15~11.9)에 한국 작가의 대표성을 띠고 강익중, 이형우의 작업이 선정된 적이 있다. 강익중은 이미지가 담긴 3인치 크기의 패널 총 1만 1천 4백 84개를 벽에 부착한 〈부다...〉, 〈한자 배우기〉 시리즈물을, 이형우는 각기 다양한 이미지를 담고 있는 테라코타와 목각의 입방체를 바닥에 늘어놓은 〈완전한 있음〉을 선보였다. 특히 휘트니미술관 큐레이터 유진 사이에 의해 기획된 ‘백남준과의 2인전’을 계기로 세계적 작가로 부상한 강익중의 작업은 주목된다. 그의 백남준식 ‘비빔밥론’은 무수한 증식의 방법을 사용한 혼합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창출하는, 즉 이질성과 동질성의 구분을 하나의 그릇 안에서 뒤섞어 버리는 최근의 혼성, 해체 담론을 닮아 있다. 우리는 흔히 그러한 미술의 유형을 멀티플(Multiple)이라 부른다. 이것은 기실 오리지널과 복제의 문제를 담고 잉태된 개념이지만 최근 ‘복제 없는 복수’로까지 확장되어 그 개념의 진폭을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본고는 현대미술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멀티플 현상을 진단, 검증하고 그 의미를 추적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하고 있다. 미술에서의 멀티플 현상의 생성과 그 진행 과정은 어떠했는지 또 그 추이를 풀이하는 철학적 담론은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본고에서 필자는 그것을 증식에서 해체의 과정으로 이동하는 흐름으로 파악하는데, 그것은 벤야민과 데리다의 논의에 기초하고 있다. 복제의 증식과 복수의 해체는 어떻게 변별되고 뒤섞여 있는지, 그 논리는 창작의 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전망은 어떤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것은 미술 현장에서 멀티플을 시도하는 작가들의 옥석을 가리기 위한 비평적 관점을 스스로 수립해 보고자 하는 ‘필자의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II. 멀티플의 시작 - 조각의 조각 
멀티플(multiple)의 사전적 정의는 ‘많은 부분으로 이루어진, 다수의, 병렬의’라는 의미와 함께  ‘대량생산한 미술품’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결국 복수(複數, plurality)의 의미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미술에서 멀티플의 애초 용어의 시작은 에디션(edition, 한정판)의 의미를 담은 복제(複製, reproduction)의 개념으로 먼저 사용되었다.  
이러한 복제와 연관된 멀티플 유형들은 1950년대 중반부터 등장했다. 1955년 아감과 팅글리는 파리의 화상, 드니즈 르네에게 멀티플 제작을 의뢰했다. 다니엘 스포에리는 파리에서 에디션 M.A.T(Editions Multiplication Arts Transformable)를 설립하고 알렉산더 칼더, 마르셀 뒤샹, 만 레이, 장 팅글리, 빅토르 바자렐리 및 다른 미술가들의 작품을 1백부 한정판으로 하여 적당한 가격을 매겼다. 그러나 다니엘 부흐홀츠(Daniel Buchholz)가 ‘아방가르드로서의 멀티플 아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단어 자체가 미술사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966년 파리의 드니즈 르네 화랑에 의해 에디션으로 제작된 작품을 기입하면서 처음이었다. 여기서 멀티플에게 기대했던 효용력은 원작과 마찬가지로의 오리지널리티와 그 구매력이었다.  
멀티플은 이렇듯 일반적으로 ‘에디션을 갖는 삼차원의 입체 작품’에 적용되는 것, 즉 입체  작품이 복수 제작되는 경우를 흔히 지칭한다. 이것은 올덴버그가 1991년 멀티플 회고전 카탈로그에서 멀티플이라는 용어가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에디션’으로 제작되는 ‘조각’의 ‘작은 규모’를 지칭한다”고 파악한 것의 연장선상에서 인식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에디션’, ‘조각’의 단어 외에 ‘크기’의 새로운 언급을 하면서 기존 멀티플 개념을 제한적으로 축소하고 있지만 말이다. 멀티플의 개념은 뒷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최초의 적용과는 달리 그 개념이 확장되고 있는 현상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똑같은 에디션 개념을 가지고 있는 판화에는 일반적으로 적용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판화의 출발 자체가 기본적으로 개별체의 유일함을 내세우기보다는 무수한 복제과정에 의미를 두고 있는 미술외적 장르였기 때문이다. 판화에서 한정판의 개념은 예술의 영역을 넘겨보며 생긴 것이 아니던가? 예술의 오리지널리티를 중시하는 고급 미술로부터 출발한 조각이 대중으로부터 출발한 판화를 미술의 서자(庶子) 취급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당연히 멀티플은 초판, 재판의 과정을 가지며 한정판을 가지고 있는 인쇄 매체임에도 다량 제작된 서적들과도 변별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기존의 조각이 다시 주조되는 과정과도 별리된다.  
에디션을 지닌 복제물, 즉 멀티플의 시발점은 원작, 오리지널리티의 효용 가치를 표방하며 ‘대중에게 수용의 용이함’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다니엘 브흐홀츠의 다음 글을 보자.
“멀티플은 60년대의 정치 사회적 맥락에서 ‘접근 혹은 수용의 용이함’과 ‘발명’, ‘탐구’의 정신과 함께 알려졌다. 그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예술을 만들기 위한 정치적, 예술적 충동을 구현하였다.”
그러니까 멀티플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다리품을 팔아 작품이 있는 물리적 장소에 관자가 현존해야만 향수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회의 혹은 반론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용의 용이함을 위해 멀티플의 필요성을 요청한 주체는 기실 일반인이 아닌 미술 취미를 이루고자 한 호사가들이거나 이들의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한 실리적 목적에 공감하는 화랑과 콜렉터, 작가와의 담합 논리에서 비롯되었다. 원작의 복제물을, 에디션이라는 한정판에 규정해 두는 조건으로, 오리지널리티로 간주하는 인증 제도는 이러한 담합 논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일반에게 수용의 용이함’이라는 겉치레적인 목적을 내세우며 복제의 멀티플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은 벤야민의 두 가지 용어를 빌려 언급해 보면 ‘제의적 가치’가 사멸되고 ‘전시적 가치’만 지니고 있는 복제물에 ‘제의적 가치’를 억지로 부여하려고 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까 에디션의 조건이란 마치 ‘루터의 면죄부’와도 같은 ‘이권 챙기기’ 수준의 목적을 숨겨둔 담합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복제물을 오리지널리티로 인정하려는 기존의 관습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벤야민이었다. 그로부터 유출하면 멀티플에 원작에의 의미 부여가 불가능해지는데 그것은 한 가지 요소의 결여 때문이다. 그의 말을 보자. 
“고도로 성취된 복제에서도 무엇인가 한 가지 빠져나간 것이 있다. 즉 예술작품의 〈이곳, 그리고 지금 das Hier und Jetzt〉-작품이 존재하는 그곳에서의 일회적 현존이다.”
즉 애초에 복제 개념으로 출발한 멀티플은 역사적 사건뿐 아니라 소유권에 복속되어 있는 ‘시공간성’과 더불어 본체(body)로서의 하나의 사물(thing)이라는 '유일성'이 관습적 인증 태도와는 달리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원본의 현존성’을 결여한 에디션은 진품성(authenticity, originality)의 특성을 상실한다. 벤야민이 그토록 강조하는 ‘아우라의 상실’을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III. 복제의 멀티플, 증식(multiplication)의 조각
여전히 복제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에도 작품이 오리지널리티를 유지하는 경우 또한 있다. 필자는 그것을 미니멀리스트의 작품에서 발견한다. 이 논의는 아주 주요하다. 애초의 멀티플의 출발은 에디션을 통해 원본의 효용성을 유지하려는 즉, '나도 어느 작가의 진짜 작품을 가지고 있어'라는 ‘원본 소유권의 인증을 에디션에도 부과하는 관습이나 제도’로서 복제물에 관심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 작품의 오리지널이 여러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반면에 미니멀아트는 복제물들이 하나의 장소성(site)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앞서의 멀티플과 달라진다. 달리 말하면 ‘하나의 장소에 모여 있는 복제물들이 하나의 작품(만)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틀(규칙)에 의한 같은 모양이라는 동형 동질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복제물임에도 그것은 애초에 에디션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단지 ‘증식을 이루는 동형 동질의 개별체’가 하나의 원본을 형성하는 구성 요소가 될 뿐이다.     
도날드 저드(Donald Judd)의 작품을 보자. 똑같은 단위의 입방체들이 복제되어 전시장의 벽면이라는 한 장소에 병렬의 방법으로 부착되어 있다. 저드의 작품에서는 개별체가 오리지널이 아니라 개별체의 군집이 오리지널이 된다. 이것은 역설적인데, 왜냐하면 미니멀아트의 증식성은 의도적으로 오리지널에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그것을 파기하려는 태도를 갖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스트들은 ‘조각에서의 입체파적 미학의 기초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전개의 방법론을 구사한다. 즉 입체주의의 관계적(relational) 기초를 거절하고 통합적 형태(integral gestalt)가 된다. 도널드 저드의 벽에 붙은 입방체의 증식은 그 낱낱의 단위로 보이는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전모로서 일거에 보이는 것이 된다. 그런 면에서 미니멀아트가 표방하는 증식의 멀티플은 벤야민의 복제와 관련한 논의가 산출하는 ‘전시적 가치’를 여실히 보여주면서도 그가 우려한 아우라의 상실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물론 원본의 복제가 작품 안으로 다른 복제물들과 한 덩어리로 편입되어 들어온다는 연유 탓이다. 미니멀아트의 증식으로서의 멀티플은 그것이 복제로부터 출발하였음에도, 군집의 형식으로 하나의 ‘원작’을 생성하는, ‘전시적 가치’를 발휘하면서도 유일성으로서의 ‘제의적 가치’를 동시에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범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정한 틀(shape)의 규칙을 부여한 전체성 안에서 가능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주드에 대한 마이클 프리드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설명되어질 수 있다. 
“그는 동일한 단위의 반복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전체성(wholeness)의 종류에 관심 갖는데 그 대상의 전체성을 보장하는 것은 틀의 구체화(shape)라는 단일성이다. 즉 한눈에 즉각적으로 파악되어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 즉자주의(literalism)인 것이다.”
이처럼 사물성(objecthood)의 표명이 개별체의 군집이 이루는 구체화를 통해서 실현된 것으로 보았듯이 환원적 증후군의 형식을 빌은 입방체가 전체성을 담지하기 위해서 시도해야 할 것은 틀의 규칙을 지니려는 증식의 논리를 수행하는 길이다. 칼 앙드레의 바닥에 깔린 그 획일적 개별체들의 모임이나 솔 르윗의 모듈 입방체들, 세라의 반복적으로 쌓아올려진 철판들을 함께 살펴볼 만하다. 
팝아트의 경우에도 무수히 복제된 개별체가 구체화의 장소인 ‘틀의 논리가 작용하는 장(field)’에 여전히 기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전체성을 드러내려는 일련의 틀에 관한 고찰은 뒷부분 IV장 ‘복수의 멀티플, 해체의 구조’에서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단지 미니멀아트 유형과 다르다면, '팝아트는 미술 작품이라는 원작의 복제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사물 혹은 현실이란 원본으로부터의 복제를 시도'하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미학자로서 출발했던 벤야민은 복제 시대의 예술을 상품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생산물로 간주한다. 그런 까닭에 의도적으로 파기하려는 원본이란 오리지널리티는 팝 아티스트들의 뜻대로 그들의 작품 안에서 파기되고 분절되어 상품의 가치로 환원된다. 그래서 마를린 먼로의 유일성은 앤디 와홀(Andy Warhol)의 작품 안으로 들어와 아우라의 상실을 초래하며 와해된다. 그의 〈브릴로 상자〉(1964-)를 들여다보자. 기성 제품인 브릴로 상자를 실크 스크린의 기법으로 똑같이 복제해 놓은 그의 작품은 사물인가? 작품인가? 이것은 이미 상품화된 복제의 양상을 다시 복제의 방식으로 미술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논점을 제공한다. 물론 ‘사물로부터의 복제’인지, 예술가에 의해 작품으로 형성된 원작으로부터의 복제인지에 대한 구분은 주요하다. 
그러나 필자가 언급하고자 하는 복제는 미술 작품으로 편입되어 들어온 최초의 원작에 대한 복제로부터 논의가 시작된다. 벤야민의 언급처럼 아서 단토 또한 “예술 작품의 모사는 예술 작품이 아니다”라고 선언적으로 말하고 있듯이 원작에 대한 복제는 이미 그 오리지널리티를 상실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것이 하나의 장소성을 담보하고 증식의 이미지로 나타날 경우 그 군집으로서 원작의 효능을 발생시킨다는 것이 논의의 초점이었다. 팝아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브릴로 상자라는 실제 사물을 복제의 대상으로 삼은 와홀의 작품은 그 군집의 이미지 자체로 그 스스로 원작이 된다. 아더 단토가 “예술 작품은 오직 예술가에 의해서 존재한다”고 언급했듯이...(그러나 이것은 다른 에디션을 다른 장소에 갖고 있는 경우에는 달라진다. 와홀의 브릴로 상자의 경우에도 무수한 에디션을 통해 복제되었다. 필자의 논점은 이것을 논외로 할 경우의 브릴로 상자라는 작품에 대한 언급으로 국한된다.)
결론적으로 III장에서 필자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애초에 오리지널의 범위를 넓히려는 시도를 가지고 출발한 복제의 멀티플이 오리지널리티를 상실하는 반면, 오리지널리티를 의도적으로 부정하려는 출발을 보인 미니멀아트, 팝아트의 경우는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한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결론을 유도케 하는 요인들은 복제의 ‘창작 주체’와 복제물을 존재케 하는 ‘장소성’ 등 두 가지로 대별된다. 


IV. 복수의 멀티플, 해체(deconstruction)의 조각
복제를 통한 미니멀아트, 팝아트의 경우는 개별체보다는 군집의 형식을 품은 전체를 통해서 멀티플 의미의 주요성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해체적 양상의 멀티플로 넘어오면 달라진다. 해체에서는 원본의 범위가 넓고 모호하다는 점에서 오리지널리티의 개념조차 수립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의 논의의 초점은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탐구보다는 해체의 것으로만 풀이되는 일련의 미술에서의 양상들이 기실은 멀티플에 근간한다는 분석이 요지가 될 것이다. 이것은 앞서의 논의를 큰 폭으로 전환시키는 부분이 된다는 점에서 주요하다. 
해체에서는 개별체를 전체에 매개시키려는 태도를 상실하게 되는데 이것은 ‘다르다’와 ‘연기하다’가 합쳐진 차연(差延, différance)이라고 하는 데리다의 용어가 작용하는 탓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유래한 동일성(identity)의 논리에 대한 신뢰라는 전통을 거부하려는 태도로 그 어떠한 형태의 주장도 자체에 또 다른 해체를 부여한다. 즉 의미의 결정을 끊임없이 연기하려는 태도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 관점은 데리다의 「Signature, Event, Context」에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가능한 조건들이란 문맥의 전후 관계(contextualism)에서 보다는 되풀이(iteration)를 통해서 발견되어질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데리다가 언급하는 산종(散種, dissenminate)의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것이 원전의 권위가 그 이후의 무제한적인 해석의 자유로운 유희에 의해 사라진 지점에 있다는 점에서, 원작에 대한 복제로부터 출발한 멀티플아트에 적절히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 된다. 해체의 멀티플은 원전을 산종, 즉 흩뿌리기의 방식을 취한다. 일상어식으로 이야기하면 해체의 멀티플은 조리 있게 이야기하기를 포기하는 태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까? 복제를 벗어나 복수로 출발하는 해체의 멀티플은 그런 면에서 원전의 범위가 무한대로 확장된다.    
이것을 미술 현장을 통해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복제와 복수의 멀티플 양상을 세세히 나누어 보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할 것 같다. ‘복제는 복수를 잉태하고 복수는 복제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둘의 연관관계는 유비의 관계로 꼬여 있다. ‘복수는 증식의 양상인 복제가 아니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한정판이 없는 복제의 미술이나 ‘복제를 흉내 내는 미술’로, 더 나아가 복제의 양상은 전혀 없이 복수로만 제시하려는 해체의 것으로 표방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의 선상에서 최근의 복제의 양상이 전무(全無)한 복수 체계를 유지하는 해체의 양상까지를 필자는 멀티플 아트로 여전히 풀이한다. 왜냐하면, 아주 ‘극소수의 예’를 제외하고서는 해체의 양상이 멀티플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인 ‘일정한 틀’의 구조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크라우스가 모더니즘의 특성을 언급하여 상정한 그리드(grid), 즉 격자(格子)의 구조일 것이다. 멀티플을 표방하는 회화, 평면 미술은 필자의 견해로는 이 구조 속에 대부분 속해 있다. 모더니즘이 ‘회화의 종말’을 선언 받은 이래 로드코의 막막한 색면 회화로, 말레비치의 〈흰색위의 흰색〉이란 절대주의로, 다시 그린버그의 세례를 받은 평면성에로 회화의 환원 운동은 계속되어 종국에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수없이 반복되는 패널의 추상으로 가쁜 호흡을 지속한다. 이러한 흐름의 귀결은 “모든 회화는 관계적(relational) 성격을 가짐과 동시에 회화적 환영에서 거의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화면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는 언급에 답을 제시하려는 태도처럼 보인다. 즉 멀티플은 회화 자신의 대상성을 제거하든가 지지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고민이 도달한 지점, 회화의 자기 분석적 응답이 최근 채택하는 하나의 방법론이 되었다. 회화가 멀티플에 이르기 위해 선택한 그리드는 캐스팅이나 기계 공정에 의해 복제가 가능했던 틀의 대치용 형식으로 기능한다. 미니멀아트에서 차갑게 보이는 이 증식의 논리가 수행되었던 흔적을 되돌아보면, 해체적 양상으로 나서는 작가들이 선택하는 격자 구조가 그들의 작품을 증식과 해체의 사이에 애매하게 걸터앉게 한다.   
강익중의 멀티플을 들여다보자. 작가의 일상을 패널에 매일 다른 이미지로, 언어로 새겨 넣는 그의 작업이 무수히 많이 생산되어 그들의 군집이 후에 하나의 작품으로 편입된다는 점에서 그의 멀티플은 해체를 향하고 있음에도 방법론상은 여전히 일정한 틀을 유지하는 증식의 논리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론적 틀이 없어 보이는 토니크랙(Tony Cragg)의 멀티플 작품은 어떠한가? 그러나 그 또한 다른 형태의 틀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색(色)의 순차적 배열’이라고 하는 시각적 틀이다. 거리나 폐자재에서 수집된 플라스틱 파편들이 그의 작품에 부분으로 편입될 때 색을 구분한 병치의 방법으로 노랑에서 짙은 빨강으로 파랑으로 이르는 그러데이션이 보이는 〈스펙트럼〉이 그 대표적 예가 될 듯싶다. 혹은 플라스틱 색상의 구분에 의해 그룹별로 모아놓은 작품 〈다섯 가지 오브제-다섯 가지 색〉이나 폐자재 더미를 흰색과 검은색으로 구분해서 집적하는 단순한 작업도 색에 의한 틀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 된다. 
또한 앞서 살펴본 아르망(Arman)의 경우에는 크기가 다른 동형, 동종의 오브제들을 집적시켜 '복제를 흉내내는 멀티플' 전략을 실현했던 것 외에도 '복제의 양상 없는 해체적 복수의 멀티플' 전략을 드러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그의 쓰레기와 각종 폐오브제를 무작위로 집적한 〈쓰레기통(La Poubelle)〉 혹은 〈충만(Le Plein)〉 연작이다. 그는 '비어있음에 대항한 가득참의 미학이라는 멀티플 전략을 제시'함으로써 1960년대 중반 당시의 산업화 사회를 통렬히 은유해 낼 수 있었다. 한편, 세자르(Cézar)는 반대의 방식, 즉 압착기로 자동차나 산업 폐철을 짓이겨 한 덩어리로 만들어내는 〈압착(Compression)〉 시리즈를 통해서, 아르방의 '복수체(複數體)를 밖으로 확장하는 채우기'의 방식과 달리 '복수체를 안으로 응축하는 채우기'의 방식으로 당대의 사회를 또한 통렬히 은유해 내었다. 아르망이 그의 〈쓰레기통〉과 같은 멀티플 작업을 투명한 큐브나 실내의 막힌 공간을 단순히 그 틀로 삼았다고 한다면 세자르는 그의 압착 시리즈의 멀티플 작업을 입방체의 형태 그 자체를 틀로 삼았다고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세자르의 멀티플 작업은 그저 쌓기만을 시도했던 아르망의 멀티플 전략을 내부로 잠입하는 공간 지향성으로 살짝 비틀어 낸 셈이 된다. 
한편, 자동차를 무수히 분해하여 그 파편들을 늘어놓고 집게가 달린 와이어로 서로의 파편들을 잇는 홍성도의 작업도 서로의 연계 고리를 만들어주고자 하는 틀에 대한 집착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해체적 양상을 관계 맺기의 형태로 보여주는 틀은 집게 달린 와이어가 되는 셈이다. 또 보자.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가보자. 백남준의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는 비디오 설치 조각인 〈다다익선〉(多多益善)은 비디오모니터의 증식이라는 멀티플의 기본적 전략을 구사한다. 수평적 시각이라는 관람의 위치를 역전한 작품으로 유명한 〈Fish Flies on Sky〉 또한 이러한 틀의 범위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는 비디오 이미지의 해체 양상을 연계해 주는 틀이 모니터의 획일적 구축에 의해 연계되는 셈이다.  
이러한 혼합의 양태는 해체의 또 다른 현상, 즉 ‘혼성’의 방법론이다. 혹자의 주장대로 이러한 현상을 해체의 것으로 풀이하는 것은 온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를 표방하는 미술의 위치는 대부분 증식과 해체간의 거리를 이동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상태로 존재한다. 결국 결과물로 인해 정체가 일거에 완성되지 않는 노정의 작업들인 셈이다.  


V. 창작의 장에서의 멀티플 아트 - 조각의 조각 
멀티플을 탐구하고 시도하는 작업 현장을 살펴보면 미니멀리즘 유형의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경우보다는 현재의 담론을 담고 있는 해체적 양상의 멀티플에 많이 천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필자가 반복적으로 그 특성을 살펴본 바와 같이 해체를 멀티플이게 하려는 일련의 시도, 즉 개별체들을 엮는 일정한 틀이 작가들에게 주요한 창작의 기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여전한 작업을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론이 되는데, 최근 해체의 멀티플은 격자식, 모자이크식의 구성을 통해서 이미 해체된 파편들에 일률적인 질서를 부여하려 시도한다. 이유는 완전한 해체의 모습을 미술이라는 그릇 안에 담아내기에는 미술의 공간은 여유가 없으나 역설적이게 그것을 ‘일정한 틀’이라는 날실에 꾀어 한 덩어리로 만든 후 담아놓기에는 미술의 공간은 여전히 남아있는 탓이다. 이러한 틀의 사용에 있어 창작자들은 흔히 격자틀 구성이라는 '미니멀리즘의 전략'이나 모자이크식 구성이라는 혼성의 전략을 작업상 편의의 방식으로 채용하기도 한다. 우무길이나 장혜홍의 작업이 그러하다. 
특히 격자틀에 의한 구성 방식을 수행하는 일련의 작가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멀티플의 특성에 매료된다. 그것은 ‘보이는 작품의 재배치나 전시 공간에 대한 디스플레이의 무제한적 적용의 가능성, 이동 운송 방식의 편의성이나 창작 방식의 용이함과 효과적 운용체계’라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창작에 있어 안일한 태도를 수반하기 쉬운데, 특히 회화의 장을 확장하려는 태도로 멀티플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이 멀티플이 구태의 것으로 나타나기 십상이다. 분리된 캔버스나 이형 캔버스(shaped canvas)에서 그 크기를 줄이고 수를 늘리면서 천착하게 되는 멀티플은 낱낱이라는 개별체에 대한 관심으로 전체에 대한 관심은 후차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여기에는 단지 개별체에 창작 의지를 부여해도 디스플레이를 통한 증식 구조의 틀을 수행한다면 여전히 해체의 담론을 담아낼 수 있다는 단순한 발상이나 무책임한 작업 태도가 동승하기도 한다. 강익중식의 작업이 방법론적으로 단편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지적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작업이 이러한 비난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일상의 삶과 같이 수행하는 엄청난 수의 규모, 즉 양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격자의 유형은 하나의 평면을 격자틀로 구분해 이미지를 그 틀 안에 하나씩 그려 넣은 황영성의 최근 작업이나 곽덕준의 회화도 서로 닮은 구석이 있다. 신경희의 작업 또한 이러한 작업 방식을 취한다. 그녀의 멀티플 전략은 탐구하는 기억이나 일상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기억의 표층 위로 떠오르는 화면’을 구성시키는데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혹은 격자를 벗어났지만 개별체들로 형상을 이어주는 모자이크식의 방법론을 구사하는 안윤모의 경우도 같은 유형으로 속해 들어간다. 
이러한 유행적인 멀티플 구성이 1회, 2회 개인전을 막 치르는 미술대학 졸업 세대에서, 특히 회화의 장에서 많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행의 흐름을 부지런히 배우려는 태도인가? 방법론상의 고민이 다다른 지점일까? 많은 부분 이것은 최근 스타의 작업 방법론을 마치 모델처럼 사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무리하게 소화하려는 것처럼 보이거나, 검증된 조형 방법론의 의미에 그저 자신의 작업을 편의적 용도로 의지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실험, 모색 없이 전시장에 쌍둥이 같은 격자의 멀티플을 구사하는 그들의 작업은 앞으로 시리즈화를 시도하는 안일한 방향을 설정해 주기도 한다. 이것은 작업의 충분한 조형화 검증이 이루어지기 전에 작업상의 수월함, 재료비의 절감, 운송의 편리함, 구체적 조형 계획 없이 수행될 수 있는 즉자성의 반영, 이미지의 통일성과 다양화를 동시에 시도할 수 있는 편리한 이점들에 몸을 던진 꼴이 되기 십상이다. 
또한 위에서 논구한 시도들과 달리 드넓은 창작의 장에서는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조차 모호하게 끝 간 데 없는, 그래서 그저 해체만을 드러내려는 작업 또한 존재한다. 앞서 해체의 장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러한 양태는 어떠한 이즘을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에도 개념만이 주요해질 뿐 미술로서의 존립 당위성은 소멸되기 쉬운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사물의 가치를 드러내는 ‘미술의 장’ 안에서 본 논의를 적절하고도 긍정적인 양상으로 드러내주는 방법론적 모색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것을 ‘균열, 반복, 계보(Ruptures, Repetions, Genealogies)'라는 증식의 방법론이 아니라 해체의 방법론에서 출발하되 해체를 혼성이게 하려는 연관적 방법론에서부터 출발하여야 가능하리라 판단한다. 그러나 그 연관적 방법은 해체의 개별체를 연결하는 끈을 매듭짓거나 강화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느슨하게 하기, 희미하게 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단절의 관계를 내포하려는 것이 아니기에 지움의 과정 그래서 연계의 끈이 희미하게 흔적을 드러내는 방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방향이 보이는 작가들이 앞서 언급한 몇 작가들에게서 발견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단지 해체만을 시도하려 한다면 이어서 미술로서의 입장 또한 해체되고 마는 탓이다. 이것이 평면이든 입체이든 간에 미술이 존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성립 조건이 된다. 부서져 나가는 개별체들을 간신히 잇는 가운데서 이 담론은 성공적이지는 않지만 실패하지 않는 수행이 가능해지리라 보인다. 
쉽게 말해 결속 구조가 강한 격자의 틀에서 벗어나 다른 틀을 찾아야 하리라 보인다. 앞서의 색(色)이라는 틀이거나 집게라는 틀처럼 말이다. 조금 더 본 논의의 가능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영상의 영역과의 상호 침투로 하나의 가능성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영상의 특성상 시간성이 반영되어 있는 터라 하나의 시각적 공간에 해체의 단편들을 한꺼번에 드러내기가 처음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비디오 모니터를 다수로 집적해서 설치의 영역으로 치환하고 멀티플을 수행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을 의미한다. 관자가 투여하는 시간의 과정 속에서 그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연결하기, 그로 인한 멀티플을 성과적으로 드러내기와 같은 방식이 요청된다. ‘희미한 연계성으로 완성되는 영상 매체의 시도’는 이것이 증식의 멀티플이든 해체의 멀티플이든 기존의 창작 방법론을 새롭게 전개시키는 시발체가 될 것으로 보인다.


VI. 나오는 글
복제, 복수의 사이에는 ‘반복’이라는 멀티플의 주요한 용어가 끼어 있다. 멀티플의 시작이 에디션을 두고 행한 복제물에 원작의 효용 가치를 부여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벤야민에 근거한 논의는 오리지널리티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리지널리티는 하나의 장소성을 담보하는 유일성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의 장소로 복제를 통한 복수의 개별체들이 군집하는 미니멀아트는 오리지널리티를 애초에 의도하지 않음에도 그것을 획득한다. 원작의 복제를 시도하는 미술이 이제는 사물에 대한 복제를 시도하는 팝아트를 보여준다. 여기서 원본의 효용은 모조로 치부되고 그 아우라를 상실하지만 작가의 작품으로부터 출발하여 무수히 복제되고 반복 증식된 군집체는 원작으로 하나의 오리지널리티의 권리를 부여받는다. 
이제 멀티플은 복제를 흉내 내거나 아예 ‘복제하고는 상관없는 복수성’ 마저 끌어안고 확장을 시도한다. 증식의 논리에서 해체의 논리에 접어들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완전한 해체에 대한 두려움은 잔존한다. 방법론상의 병렬, 집산, 대비라는 수열적 배열의 자기 증식론은 그런 면에서 해체를 유지하면서도 미술이게 하기를 기대하는 마지막 매개체가 된다. 그러나 이제 연계의 고리를 ‘증식’에 매지 말고 ‘해체’에 매어 두기를 행하기, 그래서 희미하게 그 끈을 드러내기를 수행해야 되리라 보인다. 이것이 더 풍부한 가능성을 여는 것이라 본다. 
그러나 필자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영상 매체와의 관련하여 고찰한 ‘희미하게 관계 맺기’라는 방법론조차 현 문화의 진지한 고찰과 더불어 창작자의 자기 검증이 선결되지 않는다면 하나의 실험적 유희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완성의 가능성을 항상 남겨두는 최근 멀티플의 위치는 증식에서 해체의 사이를 끊임없이 배회하거나 이동 중인 정처 없는 현재진행형의 미술로 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필자의 논의가 이번 전시 《조각_조각》전을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현대 조각의 의미를 성찰하는데 있어 작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


참고문헌 
Benjamin, Walter, '기계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차봉희 역, 『현대사회와 예술』, 문학과 지성사, 1980. 
Buchholz, Daniel, '아방가르드로서의 멀티플 아트', 『가나아트』, 1995. 3/4월호.
Danto, Arthur C., 'The Last Work of Art : Artworks and Real Things', in Theoria, XXXIX, 1973.
Derrida, Jacues, 'Signature, Event, Context', in Margins of Philosophy, Paul Bass(trans.), London : Routledge and Kegan Paul, 1985.
Francblin, Catherine, Les Nouveaux Réalistes, Paris : Editions du Regard, 1997.
Fried, Michael, 'Art and Objecthood', in Minimal Art: A Critical Anthology, Gregory Batt ock(ed.), New York: E. P. Dutton, 1968.
Krauss, Rosalind E., Passages in Modern Sculpture, 윤난지(역),『현대조각의 흐름』, 예경, 1998.
Osterwold, Tilman, Pop Art, Wolf Fruhtrunk(trans.), Paris & Köln : Taschen, 2001.
Rubin, William, Frank Stella, New York: The Museum of Modern Art, 1970.
국립현대미술관, 『Tony Cragg』, 삶과 꿈, 1997.

***주석 생략 

출전/

김성호. 조각이 모여 만든 조각, 조각_조각연계, 11월 소마 특강, 자료집, 2019. 11. 27() 10:00-12:00, 소마미술관 세미나실

 


김성호 Kim, Sung-Ho
파리1대학교에서 미학 전공으로 미학예술학박사를 취득했다. 모란미술관 큐레이터, 미술세계 편집장, 쿤스트독미술연구소장, 성남문화재단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겸임교수, 2014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전시총감독, 2015바다미술제 전시감독, 2016순천만국제자연환경미술제 총감독, 2018다카르비엔날레 한국특별전 예술감독으로 일했다.
현재 여주미술관 관장, 2020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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