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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김현주, 조광희 / 손손 수수- 手手 垂手

김성호

손손 수수 - 손에 대한 기억과 손의 대화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 나의 손
그룹 〈A.C Clinamen〉(조광희, 김현주)의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인 《손손 수수- 手手 垂手)》가 5월 9일부터 8월 2일간의 일정으로 도봉구민청에서 열렸다. 이 프로젝트는 도봉문화재단과 도봉구청이 후원하는 《2019문화다양성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펼쳐졌다. “나의 손이 너의 손에 드리우다”라는 주제 아래 “108명의 시민이 참여하여 만드는 손의 대화법 2019”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이 프로젝트는 ‘시민 참여형 커뮤니티 아트’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이 글은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는지 살펴보면서 그것이 오늘날 소통이 화두가 된 시대에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석한다. 


II. 나의 손이 너의 손에 드리우다. 
상기의 주제가 지닌 메시지는 간명하다. 나라고 하는 주체와 너, 그(그녀)들이라고 하는 또 다른 주체(들)인 타자가 ‘손’을 화두로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자는 것이다. 특히 이 주제는 “나의 손이 (너의 손에) 드리우다”를 천명함으로써 소통에 있어서 나라는 주체의 적극적인 행위를 너의 참여보다 강조한다. “너에게 다가간다, 너를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인다, 너와 대화한다 그리고 너에게 소통의 기쁨을 준다”는 순차적인 의지의 표명이 하나의 주제 안에서 명징하게 선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 면에서 이번 주제는 커뮤니티 아트를 지향하는 그룹 〈A.C Clinamen〉의 불특정 다수를 향한 초청 메시지가 된다.   
한편, 《손손 수수- 手手 垂手》라는 프로젝트명에서 병렬 배치되고 있는 한글과 한자의 조합은 ‘손을 화두로 한 소통의 의지’를 반복적으로 확인한다. ‘수수 수수(手手 垂手)’라고 하는 동음(同音)이 반복되는 한자를 ‘손손 수수’라는 이음(異音)으로 이어지는 한글 뒤에 배치함으로서 그 뜻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전달하려고 시도한다. 우리는 여기서 프로젝트 주제와 프로젝트명이 의미를 공유하고 있는 두 단어 ‘드리우다’와 ‘수(垂)’를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여기서 한자 ‘수(垂)’는 ‘드리울 수’로 무엇인가를 “늘어뜨리고” 누군가에게 “베풀고 전한다”는 ‘능동의 소통’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프로젝트는 시민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각자의 손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고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인터뷰 과정은 텍스트, 사진, 영상으로 기록하고 시각화한다. 시민들의 열띤 호응 때문일까? 애초에 108명의 시민과의 대화를 목표로 했으나 실제 참여자는 120명으로 늘어났다. 인터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다양했다. 
이 그룹의 기억을 따라가 보자: “120명의 시민들 중에는 독거로 노년에 고독한 삶을 보내며 구청 로비를 서성이시던 노인분도 계셨고, 고3 수험생활에 지친 여고생, 베트남 전쟁 당시 부상당한 전우들과 끔찍했던 전쟁의 기억을 여전히 손에 간직한 할아버지, 사업 실패 후 정육점 일을 시작하면서 손이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하고 소중하다는 40대의 가장, 친구와 보드게임을 하거나 놀아줄 때 행복하다는 9살 초등학생, 가난했던 결혼 생활로 단 한번 자기 자신을 위해 손을 사용하지 못했다는 할머니, 손으로는 주로 하트를 만들어 인사한다며 손짓으로 순간 가슴을 뭉클하게 해주셨던 발달장애인 등 이분들이 들려주신 손의 이야기는 세대가 다르고 하는 일이 다름에도 많은 이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며 자신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데 충분했다.” 이처럼, 그룹 〈A.C Clinamen〉은 “나의 손이 너의 손에 드리우다”를 내세우며,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손에 관한 시민들의 기억’을 채집하고 기록하려고 만났던 사람들로부터 거꾸로 ‘소통에 관한 주요한 메시지와 소중한 의미’를 되돌려 받는다. 달리 말해 그룹의 입장에서 ‘나의 손이 너의 손에 드리우는’ 도움 주기를 실천하려는 프로젝트가 예기치 않게 ‘너의 손이 내 손에 드리우는’ 도움 받기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겠다.      


장기금, 70대, 베트남 전쟁 참전, 김영숙, 70대, 주부 


정예은, 창서초 3 


III. 빈방과 빈손으로부터 - 예술 민주주의   
《손손 수수- 手手 垂手》 프로젝트는 빈방에서 출발했다. 
구민청 로비 옆의 비어있는 한 공간을 어떠한 예술로 채울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룹 〈A.C Clinamen〉의 고민도 다음의 발언처럼 ‘빈 곳’에 대한 채움의 갈망으로 시작되었다: “구민청이라는 공공의 장소에 의자와 테이블이 놓이자 구민청은 지역의 배회하는 노인들의 쉼터, 학교 수업 후 아이들이 뛰어노는 장소, 동네 엄마들의 커뮤니티 공간 등 다양한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이 되었다라고 생각하는데 그 곳에 유일하게 빈 공간이 예술로 채워지면서 저는 그 빈 공간에서 예술이 이러한 공공의 장소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지속적인 예술 공간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룹의 발언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 그룹이 ‘빈 곳’을 ‘예술 공간화’하는 프로젝트를 계획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지속 가능성’이었다. ‘빈 곳이 지속적으로 예술로 채워지는 가능성’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빈 곳을 지속적으로 채울 예술’을 ‘빈 것’에서 발견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이들은 ‘빈방(빈 곳)’을 지속적으로 채울 예술을 타자의 ‘빈손(빈 것)’에서 찾고, 불특정 다수의 ‘빈손’을 그들의 ‘빈방’에 초대했다. 빈방을 빈손으로 채운다고? 그것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그렇다. 구청 건물 내에 위치한 ‘빈방’은 ‘빈손’으로 온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채우는 작업실이 되었다.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그룹 〈A.C Clinamen〉이 준비했던 ‘손에 대한 질문’에 답하면서 자신의 ‘빈손’에 담긴 추억을 소환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커뮤니티 아트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움을 손길을 보내는 대외적 민원 해결 장소인 구청의 ‘공적 공간’은 개인의 손길에 주목하면서 내밀한 기억 속 경험을 꺼내는 ‘사적 공간’이 되었다.  
그런데 개인의 내밀한 빈손에 관한 추억을 서로 이야기하는 이러한 커뮤니티 아트가 ‘예술 민주주의’와 무슨 상관인가? 
주지하듯이, '예술 민주주의(démocratie artistique)'는 '문화 민주주의(démocratie culturelle)’란 용어로부터 기원한다. ‘문화 민주주의’는 프랑스에서 '1981년 문화부장관으로 취임한 ‘자크 랑(Jack Lang) 시대’(1981~1993)에서 추진했던 문화 개발(développement culturel)이라고 하는 새로운 정책 방향을 견지하는 주요 개념‘이었다. 이 개념은 고급예술의 수용에 있어서의 대중화를 주창하는 ‘문화의 민주화(démocratisation culturelle)’의 개념과 대비된다. 즉 ‘문화의 민주화’는 순수한 고급 예술의 향유가 어느 지역, 연령에서 소외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문화 예술의 수용의 문제’에서 제기된 관념이다. 이와 달리 ‘문화 민주주의’는 ‘문화 예술의 생산의 문제’에서 제기된 개념이다. 즉 일반 대중 혹은 국민을 문화, 예술의 단순 수용자가 아니라 문화 생산에 적극 참여하는 생산 주체로 인식하는 개념인 것이다. 이로써 이전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구분하지 않는 개념과는 궤를 달리하는 새로운 대중과 주체 개념이 생성된 것이다. 
이를 원용하는 ‘예술 민주주의’는 다음처럼 정리된다. ‘모든 사람을 위한 예술(Art for everybody)’이라는 ‘예술의 민주화’로부터 ‘모든 사람에 의한 예술(Art by everybody)’라고 하는 ‘예술 민주주의’로의 이상론적인 변주의 담론, 즉 예술 수용자가 예술 창조의 주체가 되는 담론이 실천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손손 수수- 手手 垂手》 프로젝트는 전문가 그룹인 〈A.C Clinamen〉이 준비한 예술의 장(場)에 비전문가인 시민들이 예술 생산의 공동 주체로 참여함으로써 ‘예술 민주주의’를 성취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윤채민, 창도초 5 윤선진, 40대, 정육점 운영 


기민성, 창도초 5,  서의찬, 창도초 5, 이영호, 창도초 5 




IV. 손에 대한 기억   
‘빈방’에 ‘빈손’으로 온 ‘예술 비전문가’인 시민(들)은 ‘예술 전문가’ 그룹이 던지는 질문들에 답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예술 생산에 참여함으로써 ‘예술 민주주의’를 성취한다. 
그룹이 준비했던 대화는 “당신의 손은 주로 무얼 합니까”, “당신의 손은 무엇을 만질 때 기분이 좋습니까”와 같은 질문처럼 ‘내 손이 자주하는 일’. ‘내 손이 긍정적인 기분을 주는 것’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내 손이 잘한 일, 내 손이 후회한 일, 내 손이 바라는 것, 내 손이 움켜쥐고 놓지 못하는 것, 내 손을 펼쳐 놔주고 싶은 것. 내 손이 필요한 곳은 어디(누구)’ 등 손에 관련된 여덟 개의 질문들이었다. 이러한 질문들은 ‘예술 비전문가’인 일반 시민들이 소통의 아트 프로젝트를 통해 ‘예술 민주주의’ 성취를 향한 여행길에 시동을 거는 발화점이 된다. 
시민들은 이 ‘빈방’에서 자신의 ‘빈손’을 들여다보면서 ‘빈손’에 얽힌 자신의 과거를 소환한다. 유념할 것은, 그들이 단순히 질문에 대한 답을 강요받은 인터뷰이(interviewee)의 역할을 떠 앉거나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고민을 토로하는 내담자(來談者)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는 채 ‘빈손’으로 왔던 여행객이었으나, 질문에 답하고 ‘손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룹 〈A.C Clinamen〉의 아트 프로젝트에 은연중에 발을 담그는 ‘예술 참여자’가 된다. 처음에는 ‘수동적인 참여자’였으나 점차 ‘손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능동적인 참여자’가 된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단순한 ‘예술 수용자’가 아니라 커뮤니티 아트를 성취하는 ‘예술 참여자’이자 공동의 아트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예술 생산자’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들은 ‘예술 민주화’를 체험하는 단계를 넘어 ‘예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증언자가 되는 셈이다. 
‘예술 민주주의’의 성취!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아버지와 딸, 친구, 자매, 부부, 직장 동료 등과 같이 이미 서로 관계를 맺고 알고 지내온 사람들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고 때로는 현장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 파트너가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시민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예술 참여자에서 예술 생산자로 자리 이동한다. 빈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그것의 내러티브를 직조하는 과정 속에서 참여자가 “자신의 손이 행했던 미시적 사건들을 떠올리거나 지금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 혹은 자신과 연결된 다양한 주변의 사람들과 경험된 시간이 내재하고 있는 가치들이 무엇인지 새로이 발견하고 질문하는 시간”을 경험하는 까닭이다. 
시민 참여자들의 ‘손에 대한 기억’은 다양하다. 
불안증으로 인해 손을 물어뜯은 상처를 늘 지니고 사는 50대 주부, ‘육(六)손’으로 인해 손가락 하나를 제거해야만 했던 어머니의 손에 남겨진 상처를 기억하는 20대 대학원생, 운전대를 잡은 손에 못이 박이도록 버스를 몰아야만 했던 40년 운전 경력을 회고하는 70대의 노인, 손에 잡은 지폐를 세면서 틀리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던 과거를 떠올리는 40대의 발달장애인, 어버이날 봉사활동으로 1000인분의 설거지를 하면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던 경험을 떠올리는 60대의 자원봉사자. 이들에게 ‘손’은 미래의 나은 삶을 위해 분투하면서 맞닥뜨려야 했던 ‘쓰라린 상처’를 기억하는 무엇이다.  
그뿐만 아니다. 손은 기분 좋았던 일들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공작을 위해 진흙을 만질 때, 그저 유희거리로 슬라임이란 완구를 만질 때, 잠이 들면서 인형을 만질 때, 너무도 귀여운 강아지를 쓰다듬을 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연필을 잡을 때, 어린이 참여자는 기분 좋은 손의 기억을 침이 닳도록 이야기한다. 
손이 어찌 좋은 것들만 기억하겠는가? 베트남 전쟁 당시 부상당한 전우를 결박해야만 했던 손의 아픈 기억을 평생 간직하며 사는 70대의 노인이 있고, 오래전 어린 아들의 뺨을 때렸던 나쁜 손에 대한 기억으로 현재까지 마음 아파하는 70대의 주부도 있다. 동생을 때렸던 손, 친구를 괴롭혔던 손 때문에 후회하는 초등학생도 있다.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회한은 오늘을 살게 하는 힘이다. 어린 시절 집안 가게의 금고에서 돈을 훔쳤던 못된 손에 대해서 머쓱해하며 이야기하는 배우의 지금 마음은 어떠한가? 그리고 걸인에게 적선하려다 남의 시선 탓에 머뭇거리던 손을 후회하는 40대의 공무원의 오늘날 마음은 어떠한가? 흙과 도자기를 만지면서 살고 싶은데 컴퓨터 자판만 두들기며 사는 30대 회사원의 지금 마음은 또 어떠한가? 마음으로 꿈꾸는 내일은 지난날의 과오와 회한을 되새기는 가운데 다가온다.  
여기 지난날의 ‘손의 기억’을 되새기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다: “아빠의 손은 되게 부드럽고 따뜻해요.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 날 제 손을 꼭 잡으시는 거예요. 그 느낌이 잊혀지지 않아요. 아빠가 제 손을 꼭 쥐고 안 놓으시는 거예요. 저는 ‘다시 올게’라고 하면서 나왔는데…. 말하지 않아도 아빠가 잡아주고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전달이 되거든요. 아빠 손을 좀 더 잡아드리지 못한 것. 그게 후회돼요.”(〇〇〇, 40대 영어강사) 그래서일까? 더 이상의 후회를 막고자 노력했던 ‘손의 과거’를 떠올리며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제가 어렸을 때 사고를 많이 쳐서 부모님과 거리가 있었어요. 대화를 많이 안했어요. 한참 관계가 안 좋았을 때 어른들이 다 주무실 때 밤에 집에 들어갔는데 제가 그 때 방에 들어가시는 아버지 팔목을 잡고 얘기 좀 하자고. 그 때 아버지를 잡은 제 손이 기억나요.” (△△△, 이재훈, 20대, 공익근무요원) 
그렇다. ‘손의 기억’은 ‘손의 대화’를 이끈다. 


V. 에필로그 - 손의 대화 
《손손 수수- 手手 垂手》 프로젝트는 ‘시민 관객’ 아니 ‘예술 참여자’ 더 나아가 ‘공동의 예술생산자’의 빈손으로부터 ‘손의 기억’를 끄집어내면서 ‘손의 대화’를 이끈다. 즐거움과 기쁨, 후회와 회한, 슬픔과 애증이 교차하는 ‘손의 기억’! 그리고 이어지는 ‘손의 대화’! 관객이 수동자의 역할에서 능동자의 역할로 ‘손의 대화’에 참여했듯이 그룹 〈A.C Clinamen〉은 홀로 오거나 단체로 온 관객(들)의 빈손에 자신의 빈손을 드리우지만 이미 인터뷰어(interviewer)의 위상을 벗고 상담자의 역할을 던져버린 채, 마치 ‘오랜 친구’처럼 ‘손의 대화’에 참여한다.  
이 프로젝트가 이끄는 ‘손의 대화’는 ‘손의 기억’을 음성으로 되뇌고 문자로 되새기면서,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그리고 상담자와 내담자가 서로의 역할을 바꾸면서 천천히 친구가 된다. 이들이 남기는 ‘친구로서의 대화’는 텍스트가 담긴 액자로 ‘빈방’의 벽에 하나둘 채워진다.    
아서라! 그것만이 아니다. 《손손 수수- 手手 垂手》 프로젝트는 ‘비언어인 손의 언어적 아카이브’뿐만 아니라 ‘비언어인 손의 무언극’을 이끌면서 동시에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한다. 즉 ‘비언어의 비언어적 시각화’를 실천하는 셈이다. 보라! 손을 마주하거나 맞잡는 사진들을 그리고 손을 포개어 안은 또 다른 손의 표정과 ‘무언의 시각 언어’를 말이다. 때로는 어린 아이의 손을 감싸 안은 아빠와 엄마의 두 손이, 때로는 손톱에 짙은 매니큐어를 바른 손을 감싸 안은 누군가의 두 손이. 그림자놀이를 하듯 맞잡고 손가락으로 형상을 만든 어린 친구들의 손이, 엄지를 치켜 올린 누군가의 손을 악수하는 모양으로 말아 쥔 노년의 손이 ‘거기에 그렇게’ 저마다 ‘손의 무언극’을 펼친다. 말은 없으되 마음의 메시지는 있는 ‘비언어의 비언어적 시각화’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출력된 사진 또한 빈방을 하나둘 채우고, 영상으로 편집되어 모인 손들은 ‘깊은 침묵’ 속에서 ‘가볍지만 깊은 대화’를 나눈다.  
흥미롭게도 이 사진의 주체는 대개 시민 관객(들)이지만, 많은 부분 하나의 주체는 ‘시민 관객’이지만 또 하나의 주체는 그룹 〈A.C Clinamen〉의 ‘누군가’라는 사실이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손의 대화’에 참여한 ‘예술 전문가’와 ‘예술 비전문’ 사이의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이 완성되는 지점이다. 손의 대화는 그렇게 펼쳐지고 그렇게 마무리된다. 
우리는 깨닫는다.  《손손 수수- 手手 垂手》 프로젝트에서 ‘빈방’을 방문했던 ‘빈손들’이 남긴 흔적 속에서 우리가 건져 올리는 주요한 의미를 말이다. 우리는 이제 안다. ‘손의 기억’을 ‘여기, 지금’에 소환하는 ‘손의 대화’들이 그(녀)들만의 것이 아님을 말이다. 또한 그들의 육성을 텍스트로, 사진으로 그리고 영상으로 확인하면서 우리의 내면을 돌아보고 있음을 말이다. ●     

출전/
김성호.  「손손 수수 - 손에 대한 기억과 손의 대화」, 『손손 수수- 手手 垂手』, 카탈로그, 2019
(그룹 〈A.C Clinamen〉(조광희, 김현주), 손손 수수- 手手 垂手전, 2019. 5. 9~8. 2, 도봉구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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