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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이유 / ‘물질 흔적’으로서의 질료적 회화

김성호

‘물질 흔적’으로서의 질료적 회화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I. 프롤로그 - 최근작으로부터 
작가 이유(Lee Eu)의 최근 작업은 〈마티에르(Matières)〉, 〈제스트(Gestes)〉, 〈회화에 관한 질문(Peinture en question)〉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진행되고 있다. 
세 가지 범주의 작업 모두 물감이 지닌 질료를 특수한 태도와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어떤 면에서는 이전의 추상회화가 고민하던 평면성이라는 매체의 고민으로부터 그 위에 얹어지는 질료에 대한 고민으로 이동하고 있는 작업이라고 평할 수 있겠다. 
우리는 작가 이유의 최근 연작인 〈회화에 관한 질문〉이 함유한 ‘회화 미학’을 논하기 위해서 이전 작업인 두 연작, 〈마티에르〉와 〈제스트〉 시리즈를 소환해서 먼저 더듬어 보기로 한다. 


II. 질료에 대한 두 가지 탐구 - 마티에르와 제스트
첫째, 작가 이유의 〈마티에르〉 연작을 살펴보자. 
2012년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캔버스 위에 미디엄과 아크릴로 제작한 추상 회화로, 정형화된 파상형(波狀形) 패턴, 즉 마루와 골을 일정하게 만드는 물결 모양의 패턴 혹은 비정형의 운무(雲霧)나 거센 바람의 비(非)파상형 패턴, 즉 마루와 골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드는 비규칙의 패턴이 혼재한 화면을 선보인다. “규칙성을 갖는 평면적, 공간적인 배열”을 우리가 패턴이라고 부를 때, 그의 마티에르 연작은 정형화되었든, 비정형화되었든, 리듬으로 연속된 동형 반복을 통해서 다분히 ‘패턴화된 추상’을 선보인다. 
유념할 것은 작가 이유의 ‘패턴화된 추상’에는, ‘마티에르’라고 하는 연작의 제목처럼, 시뮬라크르(simulacre)로서의 이미지보다 질료로서의 이미지가 보다 더 강화되어 있다. 즉, 가상, 허상의 존재로서의 이미지보다 질료와 그것의 물질감이 보다 더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한다. 베르그송(H. Bergson)에 따르면, 이미지란 “사물과 표상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로 드러나거나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matière)로서 나타난다. 즉 “물질은 이미지들의 전체”이자 물질로 된 이 세상은 이미지들의 총체이다.  
‘이미지는 곧 물질’이라는 ‘베르그송’식의 사유는 작가 이유의 〈마티에르〉 연작 도처에 산포(散布)되어 있다. 그녀의 작품에서 마티에르란 물감과 미디엄이라는 질료가 이미지를 만들면서 남긴 흔적들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진술을 보자: “화면에 담은 마티에르의 움직임은 나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스케치북에 풀어내던 손끝의 ‘끄적임’들을 팔과 온몸으로 담아 낸 흔적이다. 붓의 결이 만든 선의 리듬은 마티에르의 볼륨과 화면의 여백 사이에서 호흡을 찾아간다.” 그렇다. 작가 이유가 말하는 ‘마티에르의 볼륨과 화면의 여백’은 그녀의 〈마티에르〉 연작이 이미지와 물질이 납작하게 붙어 있는 존재임을 증언한다. 어떻게? 
보라! 작가 이유는 캔버스의 화면 위에 물감이나 미디엄을, 물결 모양으로 질질 끌고 다니면서 흔적을 남긴다. 작가에 의해 끌려다니던 물감은 붓이나 스퀴지의 행로 옆으로 볼록(凸)의 이미지를 남기고, 붓이나 스퀴지의 몸체에 묻혀 끝까지 끌려 나온 물감은 오목(凹)의 이미지를 남긴다. 즉 캔버스의 납작한 평면 위에 물감과 미디엄을 남긴 구불구불한 선묘 이미지는 채움(이랑, 마루)과 비움(고랑, 골)이 연접하면서 만들어낸 ‘물질의 흔적’인 셈이다. 달리 말해 그녀의 〈마티에르〉 연작은 그려진 것(채움의 공간)과 지워진 것(비움의 공간)이 하나의 화면을 구성하는 ‘물질 흔적으로서의 질료적 회화’인 것이다.    


Matière, acrylique et médium sur toile, 97 x 130 cm, 2016


둘째, 작가 이유의 또 다른 연작 〈제스트〉는 어떠한가? 
‘몸짓’이라 번역 가능한 이 연작은 2015년부터 시작되었는데, 〈마티에르〉 연작과 동일하게 캔버스 위에 미디엄과 아크릴로 제작한 추상 회화다. 다만 다르다면, 콜라주 기법으로 제작된 작업이라는 것이다. 즉 이 〈제스트〉 연작은 필름지와 같은 평면 위에 즉발적인 붓질로 ‘물감과 미디엄의 얇은 백색 혼합체’를 무수히 만들고 그것들 위에 롤러나 붓으로 색을 입힌 후 떼어내서 빈 캔버스에 옮겨 자유롭게 배치하여 붙여 만든 회화다. 여기서 ‘물감과 미디엄의 얇은 백색 혼합체’는 붓질의 순간이 물감이라는 질료로 응고된 무엇이다.  
콜라주가 원래의 공간으로부터 다른 공간으로 옮겨져 원본의 맥락을 탈각시키고 새로운 이미지의 위상을 성취하는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라는 미학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이 〈제스트〉 연작은 ‘콜라주 아닌 콜라주’를 실천하는 작업이라고 하겠다. 즉 대개의 콜라주가 작가가 만든 것이 아닌 이미지(예를 들어 잡지 이미지, 다른 작가의 원본적 이미지)를 빌려와 자신의 예술의 장에 옮겨 놓는 것이라 한다면, 작가 이유의 ‘콜라주 아닌 콜라주’는 자신이 만든 ‘붓질의 흔적’ 혹은 ‘붓질 모듈’ 즉 ‘물감과 미디엄의 얇은 백색 혼합체’를 자신의 또 다른 예술의 장인 빈 캔버스로 옮겨 놓는 것이다. 달리 말해 다른 시공간에서 이루어진 붓질 행위를 데페이즈망이라는 ‘추방(追放) 혹은 장소 전이’를 통해서 무수한 ‘붓질 모듈’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빈 캔버스’라는 새로운 예술의 장소에서 새로운 이미지로 재조합하는 ‘콜라주 아닌 콜라주’를 실천한다. 그것은 콜라주(collage)와 데콜라주(décollage)가 그리고 데벨로페(développer)와 엥벨로프(envelopper)가 서로 대립하면서도 양자를 하나의 장(場) 안에서 뒤섞는 작업이 된다. 
이처럼, 가장 기초적인 ‘붓질의 흔적’을 조형 언어로 삼는 작가 이유의 〈제스트〉 연작은 ‘고착화된 붓질의 흔적’을 ‘그때, 거기’에서 ‘지금, 여기’에 새롭게 이식하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다. 달리 말해 ‘붓질’을 과거의 좌표에서 탈주시켜 ‘지금, 여기’의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유연한 붓질로 되살려내는 것이라 하겠다.  


Gestes, acrylique et médium sur toile depuis 2015



III. 질료에 대한 또 다른 탐구 - 회화에 관한 질문 
이제 그녀의 최근작인 〈회화에 관한 질문〉을 살펴보자. 
여기 물감이 있다. 아니, 물감 덩어리! 그것은 ‘캔버스의 표면 위에 부어진 상태에서, 작가 이유가 붓이나 스퀴지와 같은 도구를 운용하는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변형되면서 자신의 모양을 만들어 간 ‘물감 덩어리’다. 아니, 질료 덩어리! 달리 말해서 그것은 작가가 주도하는 방향과 달리 중력에 순응하는 물감이 캔버스를 둘러싸고 흐르면서 스스로 형태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점에서 ‘자체 발생적 물감 덩어리’이자, ‘엷은 물감 위에 작가가 남긴 붓질의 흔적’을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물감이 지워내면서 만든 ‘자발적 질료 덩어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작가 이유가 캔버스 위에 물감과 미디엄을 포진(布陳)시키면서 만든 두께를 지닌 ‘질료 덩어리’는 다른 차원에서 물감 스스로 중력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몸을 변형해 가면서 만들어 낸 ‘자발적 회화’가 된다. 
작가 이유가 말하고 있듯이, “이 작업은 콜라주 기법이 생략되고, 캔버스에 바로 물감이 얹히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캔버스 위에 얹히거나 발라진 형상이 예전에는 콜라주의 형상으로 따로 옮겨져 연출된 것이었다면 이번 작업은 물감을 캔버스에 직접 붓고, 붓이나 스퀴지 같은 도구를 활용해 펴면서 모양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회화에 관한 질문〉 연작은 이전의 콜라주의 방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변화시킨 작업을 직접적으로 화면과 대화하게 만든 작업이라 풀이할 수 있겠다. 
한편, 이 연작은 캔버스를 지지대로 설정하기보다 캔버스와 캔버스가 놓이는 벽을 한꺼번에 회화의 대상 안으로 포섭하는 작업이다. 대개의 회화가 캔버스의 프레임 내부에 모인 물감들의 제스처와 그것이 만든 이미지에 집중된다고 한다면, 〈회화에 관한 질문〉 연작은 캔버스 프레임 내부는 물론 외부의 맥락 모두를 회화의 지지대로 유입시킨다. 그래서 캔버스의 앞면과 더불어 윗면과 옆면은 물론이고 캔버스 프레임 외곽에 위치한 벽과 같은 공간 역시 ‘회화의 표면’이 된다. 
자! 벽에 걸린 캔버스를 물감 덩어리로 덮친 형국을 상상해 보라. 〈회화에 관한 질문〉 연작 속 물감 덩어리는 마치 생물체처럼 캔버스의 표면뿐 아니라 옆면을 점유하면서 벽을 타고 스멀스멀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물감 덩어리, 질료 덩어리는 회화의 바탕을 넘어 스스로 ‘회화’가 된다. 작가의 손을 이탈한 물감 덩어리가 스스로 중력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몸을 변형해 가면서 만들어 낸 ‘자발적 회화’로서 말이다.  
생각해 보자. ‘작가 주도의 시간’과 ‘물질 주도의 시간’이 질료 위에 쌓이고 있는 이 작업은 다음과 같은 ‘회화에 관한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 “창작 주체가 만드는 회화와 질료 자체가 생성하는 회화 사이의 변별점은 존재하는가?”, “추상 회화 안의 메시지는 의식이 관여한 것인가, 아니면 무의식이 창출하는 것인가?”, “오늘날 동시대 추상 회화가 지닌 새로운 가능성은 무엇인가?”
따라서 작가 이유의 〈회화에 관한 질문〉 연작은 여러 질문을 통해서 ‘회화하기의 근원적 본질’에 대해서 성찰하게 만든다. ‘회화하기의 근원적 본질’? 그것은 단순히 물감이 도포된 화면으로부터 물감 덩어리가 자라는 화면을 아우르면서 창작자의 생산된 회화와 질료 스스로 생산하는 회화, 즉 ‘물질 흔적으로서의 질료적 회화’ 모두를 아우르는 성찰이다. 


Peinture en question, acrylique et médium sur toile, depuis 2019



III. 에필로그 - 다시 최근작에서   
작가 이유의 최근작 〈회화에 관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자. 이 작업은 그녀가 이전부터 진행해 오고 있는 〈마티에르〉와 〈제스트〉라는 두 연작이 골몰하고 있는 질료에 대한 성찰을 계승하면서도 ‘질료에 개입하는 창작자의 이미지 생산’과 ‘질료 자체가 만드는 이미지 생산’에 관해서 질문한다. 그것을 우리는 가히 ‘회화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질문’이라 평할 수 있겠다. 
서구에서 20세기 추상 미술은 아방가르드, 엘리트주의, 국제주의, 중심 지향주의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의 주역이었다. 세월이 바뀌어 다원주의가 지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맞이한 21세기 미술 현장에는, 단토의 언급처럼, ‘예술 작품이 되도록 하는 양식(style)’이 특별히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국내 추상 회화의 영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위협을 받는 아방가르드 추상 미술’의 과거의 명맥을 잇고자, 오늘날 포스트 단색화로 지칭되는, 일군의 추상 미술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실험하는 여러 유형의 추상 미술이 회화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작가 이유의 추상 회화는 질료의 본질과 그것의 변주에 대해 깊이 성찰한다. 특히 묽은 물감이 야기한 우연한 효과, 즉 ‘창작자가 만든 붓질의 흔적을 지우면서 창작자가 주도하는 방향과 다르게 질주하는 묽은 질료의 변이’를 목도했던 작가 이유의 입장에서 이러한 질료에 대한 깊은 성찰은 필수적이다. 작가 이유는 “그림 앞에 선 관객이 이미지와 물리적인 관계를 갖기”를 원한다. 작가 이유의 작업이 ‘마티에르’, ‘제스트’와 같은 단계를 거쳐 ‘물질 흔적으로서의 질료적 회화’ 혹은 ‘질료의 자발적 회화’를 성찰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 상황은 그녀의 추상 회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도 남는다. 
작가 이유의 최근작 〈회화에 관한 질문〉 연작 앞으로 돌아온다. ‘질료적 회화’ 혹은 ‘질료의 자발적 회화’를 가시화하는데 있어서 ‘질료’는 작가 이유에게 가장 주요한 미적 개념이 된다. 질료는 “관객의 발걸음이나 빛의 변화에 따라 살아 숨 쉬고, 그림자로 그 존재를 증명하는 물질”이자, 어떠한 회화든지 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회화 바탕’인 까닭이다. 여기서 작가 이유의 회화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 갈 것인지에 대해 가늠하기 쉽지는 않지만 적어도 ‘질료’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들을 던지면서 ‘질료적 추상 회화’를 천착해 나갈 것이라는 예견은 충분히 가능하다. ●

출전/
김성호.  「‘물질 흔적’으로서의 질료적 회화」, 이유 작가론, 대구예술발전소 비평 매칭, 자료집,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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