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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김명우 / 시놉티콘의 눈으로 추적하는 디지로그 위트

김성호


 시놉티콘의 눈으로 추적하는 디지로그 위트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작가 김명우는 미디어 영상과 설치를 통해서 오늘날 GPS와 SNS처럼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횡행하는 첨단 미디어의 정보 시대를 풍자적으로 비판한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하이테크놀로지의 미디어가 인간의 소통을 위해 쓰이면서도 인간 욕망이 낳은 허위 정보의 온상이 되거나 인간의 감시를 위한 체제로 남용되는 현실은 작가 김명우에게 있어 풍자적 비판의 대상이다. 그가 구사하는 풍자적 비판은 디지털 미디어 영상과 아날로그 미디어 설치가 함께 어우러진 ‘디지로그 위트’로 부름직하다.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시각적으로 구현되는 것인가? 


II. 감시의 눈, 과시의 장 - 파놉티콘, 시놉티콘, 판시놉티콘, 
오늘날 미디어의 눈은 사방팔방에 있다. 초국가적 현대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지배자가 들여다보는 파놉티콘(panopticon)의 세계는 이제 옛말이다. 그들이 세계의 데이터를 은폐하고 홀로 독점하던 전체주의적 감시 체제의 빅 브러더(Big Brother)의 시대는 종말을 맞이했다. 여전히 그러한 노력이 지배자들로부터 지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내부 고발 그리고 해킹과 폭로가 연동하는 위키리크스 (Wikileaks)와 같은 저항 세력은 어디든 존재한다. 게다가 하이 테크놀로지의 수혜와 정보의 생산이 ‘있는 자’로부터 ‘모든 이’로 전환되는 이 시대에, 감시의 주체에서 대중은 소외되지 않는다. 이제는 피감시자의 역할에만 그쳤던 대중도 “동시(syn)에 감시(opticaon)한다”는 뜻의 시놉티콘(synopticon)의 세계, 나아가 작가 김명우가 언급하는 판시놉티콘(pan-synopticon)의 세계가 펼쳐진다. 
유념할 것은 오늘날 시놉티콘은 오프라인에서는 GPS와 같은 위치 추적 장치인 감시 체제, 즉 ‘파놉티콘의 디지털 버전’으로 출발했고, 온라인에서는 SNS와 같은 민주적 소통 체제로 출발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우리는 온라인상의 SNS가 ‘민주적 소통과 다중심 소통 체제 - 허위와 과장 그리고 기만의 정보 생산과 유통 - 상호 감시 체제’로 점차 그 위상이 변모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작가 김명우는 이와 같은 ‘변질되어 가는 미디어의 위상’에 주목한다. 특히 ‘허위와 가장 그리고 기만의 정보 생산과 유통’에는 ‘과시’라는 인간의 욕망이 자리한다. 그것은 ‘과도한 보이기’의 욕망이다. 
작품 〈When I met him〉(2013)을 보자. 이 작품은 세 명의 유명인의 초상과 QR 코드 이미지가 중첩된 세 개의 캔버스로 이루어진 연작으로, 관객은 각 작품의 QR 코드를 통해 링크되는 세 편의 싱글 채널 영상을 관람할 수 있다. 각 영상은 ‘가짜 인맥을 과시하는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담고 있다. 우리는 종종 오인한다. 고급 승용차 앞에서 찍은 사진이나 유명인과 함께 한 타자의 일상에 대해 엿보기를 시도하면서 그것이 진실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그는 SNS가 야기하는 오도된 진실과 허위의 진술을 삐딱하게 바라보면서 그것을 비트는 위트를 시도한다.  
또 다른 작품 〈Scan & Scroll, Flow & Floor〉(2013)에서 그는 부산하게 움직이는 손의 다양한 제스처를 담은 싱글 채널 영상을 선보인다. 영상 속에서 손의 움직임과는 반대 방향으로 흩어지는 파편적 텍스트들은 사실과는 거리를 둔 조각난 정보들이거나 무의미한 정보들로 은유된다. 민주적 시스템 속에서 무수히 생산되는 대중의 정보는 그의 말처럼 “쉽게 습득하고 쉽게 잊어버리는 지식의 단편들”일 뿐일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미디어 영상은 진위조차 판별할 수 없는 무수한 파편적 정보들에 대한 풍자적 진술인 셈이다. 미디어가 생산하는 이미지란 마치 작품 〈Perfect World〉(2017)에서 선보이고 있는 ‘SNS상의 이미지들을 무작위로 콜라주해서 모은 무수한 파편적 이미지’처럼 ‘그저 무의미한 것들의 집합체’일지도 모른다. 그곳에 잠입한 네티즌들은 가상의 공간에서 작품명처럼 완벽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지만, 현실계에서 그것들은 성취되지 못하고 나락으로 미끄러지는 것이 다반사이다. 그것은 ‘과시’의 장으로부터 출발했으나 어렵지 않게 ‘상호 감시’의 대상이 된다. 

    
Trace of Sand〉, 모래, 링크된 싱글채널영상(페이크다큐), 가변 크기, 2016


〈Dig〉, 디지털기기, 6개 모니터 아이피니티 싱글채널영상설치, 가변 크기, 2015


〈Scan & Scroll, Flow & Floor〉, 싱글채널 영상, 멀티모니터 가변 크기, 싱글채널영상, 멀티모니터 가변크기, 2013



III. 디지로그 위트 
김명우는 초미디어 사회가 야기하는 상호 감시의 시놉티콘의 세계에 드리운 위장과 허위의 ‘과시’를 풍자적 비판으로 조롱한다. 그 조형 전략은 아날로그적 미디어 설치와 디지털 미디어 영상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디지로그 위트’로 부를 만하다. 
작품 〈Dig〉(2015)는 6개의 모니터 아이피니티 싱글 채널 영상과 첨단의 디지털 기기를 마치 오래된 유물을 발굴한 것처럼 배치하여 전시함으로써 언젠가 지금의 첨단 기기도 ‘과거의 유산’처럼 간주될 미래를 상상한다. 미디어의 빠른 발달 속도에 대한 풍자적 비판인 셈이다. 모래로 페이크 다큐가 연동되는 QR 코드를 정성 들여 만들고 있는 퍼포먼스 영상 설치 작품 〈Trace of Sand〉(2016) 또한 이러한 디지털 매체의 빠른 진전을 ‘디지로그 위트’의 방식으로 성찰한다. 
작품 〈Social blue〉(2014)는 또 어떠한가? 특정 인물을 상징하는 도장과 그 인물의 SNS로 링크되는 QR코드의 병치를 통해서 인간 주체의 정체성을 표방하는 '옛것'과 '새것'의 범주를 설정하는 오늘날의 인식을 재론한다. 현재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에 대한 구분이지만 훗날은 어떠한 구분으로 미디어를 범주화할 것인지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은 미래가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위장된 진지함 혹은 과장된 신중함’의 태도로 동전을 하나둘 쌓아 올리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설치 영상 작품 〈Build _Tower of Life〉(2015)는 ‘가치’에 관한 과거와 현재의 다른 의식 구조를 하나의 작품 안에 ‘디지로그 위트’로 뒤섞는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인간의 편안한 세상을 성취하기 위해 점점 더 빨라진 속도에 몸을 싣고 사는 오늘날 현대인의 존재적 인식은 어디까지 다가서 있을까? 목적지만 설정하고 운전자가 직접 차량을 조작하지 않아도 빠른 속도로 이동이 가능한 ‘자율 주행 자동차’는 이미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고, 언제 어디서나 편리하게 컴퓨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비쿼터스(Ubiquitous)의 세계는 우리의 현실 속 깊은 곳까지 침투해 들어와 있다. 가상이 끊임없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현실에 간섭하는 시대가 바야흐로 열린 셈이다. 
질주하는 미디어 사회에 대한 김명우의 체험적 인식과 관조적 태도는 조금 삐딱하다. 장밋빛 미래를 설계하는 인류의 테크놀로지 발전사의 현장에서 때론 둔탁하고 어찌 보면 어설프지만, 이 시대에 거침없이 똥침을 넣는 위트를 발휘한다. 작가 김명우가 언급하는 비릴리오(P. Virilio)의 ‘질주학(Dromologie)’에 대한 냉철한 성찰을 삐딱하고도 어느 정도 어설픈 ‘디지로그의 위트’로 발현하는 셈이다. 그는 안다. 현실은 늘 아름다운 무지갯빛 꿈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음을 말이다. 또한 민주적 시스템이라 홍보되는 초미디어가 ‘가진 자’의 독점으로 오염되고 있는 냉혹한 현실을 말이다. 
작가 김명우는 냉혹한 현실에 대처하는 ‘디지로그 위트’라는 유쾌한 방식을 찾아 자신의 미디어 아트의 세계를 펼친다. 그의 디지로그 위트의 방식이 때론 헐겁고 때론 여물지 않은 상상으로 출발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그의 예술 세계에 대한 신뢰는 있다. 최첨단의 미디어가 한 치의 오차 없이 실행되고 있는 초미디어 사회인 오늘날 삐딱한 디지털 미디어와 아날로그 미디어가 삐걱대면서 만나는 풍자적 비판이 가지는 위대한 힘을 우리가 모두 기대하는 까닭이다. 마치 독일 식민지 체코 프라하 지역의 어정쩡한 독일어로 『변신(Die Verwandlung)』(1916)이라는 소설을 썼던 카프카(Kafka)의 문학으로부터 들뢰즈(G. Deleuze)와 가타리(F. Guattari)가 소수문학(littérature mineure)이라는 위대한 담론을 펼쳐내었듯이 말이다. ●

출전/
김성호.  「시놉티콘의 눈으로 추적하는 디지로그 위트」, 김명우 작가론, 광주문화재단 레지던시 비평 매칭, 자료집,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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