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된 지꺼림 : 지껄임과 짓거리 사이의 ‘기억 회화’
김성호(Kim, Sung-Ho)
‘지꺼림’! 작가 하태형이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전에 없는 단어다. 의미를 유추하게 만드는 이 단어의 친구들은 있다. 지껄임 혹은 짓거리! 그런데 ‘구속된 지꺼림’이라니? 이 말 또한 그가 사용하는 말인데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필자는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그림을 다음처럼 칭하기로 한다. ‘구속된 지꺼림 : 지껄임과 짓거리 사이의 기억 회화’라고.
I. 검거나 희거나
하태형의 그림은 검다. 아니 검거나 희다. 여기서 보조사 ‘거나’는 “어느 것이 선택되어도 차이가 없는 둘 이상의 일이나 상황을 나열”할 때 쓰곤 한다. 이처럼 그의 회화는 검은 그림이 되어도, 흰 그림이 되어도 별 차이가 없는 경계에 위치한 ‘회색조’를 지향한다. 시지각적 표현으로 말하면, ‘희멀겋다’와 ‘거무튀튀하다’ 사이를 오가는 그림이다. 그러니 그의 ‘검거나 흰’ 그림은 검정과 하양 사이의 무수한 층들을 지나는 모호한 지점 ‘어디’에서 서성인다. 때로는 ‘검거나 흰’ 때로는 ‘검지 않거나 희지 않은’ 경계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셈이다.
작품을 보자. 캔버스 위를 밀치고 다닌 희멀건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가필한 거무튀튀한 선묘 그림은 희고 검은 몸을 서로 뒤섞으면서 경계의 언저리를 서로 나눈다. 그것이 무슨 형상인지는 알 길이 없다. 구름 같기도 나무 같기도 한 형상은 상징주의적 구상과 표현주의적 추상의 몸을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캔버스 천의 외곽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는 사각의 배경을 남긴 검은색 그림은 또 어떠한가? 화면 중앙에 칠해진, 채 마르지 않은 검은색 물감이 중력에 따라 낙하하면서 빈 배경 안에 검은 얼룩을 남기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하태형의 그림은 희멀겋거나, 거무튀튀하다. 그의 그림 안에는 ‘깨끗하지 않은 하양과 더러운 검정’이 서로의 몸을 뒤섞는다. 너저분해 보일 정도로 얼룩진 희멀건 그림, 또는 탁하고 거무스름한 그림은 정도는 다를지라도 전체적으로 메마르고 황폐한 분위기를 잉태한다. 누추한 곤궁(困窮)과 비루한 피폐(疲弊)가 오가는 그의 그림은 ‘묵시적(默示的) 종말’의 풍경마저 포개 놓는다. 하태형이 자신의 그림을 두고 “어둡고 칙칙한 지옥과도 같은 그림”이라 칭할 정도니까 말이다. 그곳에는 번뇌와 갈등, 불안과 절망이 싹트고, 처연한 우울과 고통의 비애가 자라며 통분(痛憤)이 일렁인다.
아서라! 희멀겋거나 어둠침침한 그의 그림 앞에서 무엇 때문에 당신이 눈물을 왈칵 쏟으려 하는가? 하양과 검정 사이의 그 ‘불투명함과 모호함’이 당신을 그토록 못 견디게 했는가? 아니면 그 탁한 심연(深淵)의 깊이에서 당신과 가족의 말 못 할 참담한 과거를 떠올렸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투박한 혼성의 질료가 엉켜진 어두운 캔버스 위에서, 박제된 채 희미하게 바스락거리는 마른 풀잎에 당신의 여린 마음을 빼앗겼는가?
II. 구속된 지꺼림: 지껄임과 짓거리, 속박과 구원 사이
관객이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처연한 아름다움’은 하태형의 작품 곳곳에 자리한다. 추상적 화면 속에서 정물과 풍경에서 그리고 상황극처럼 꾸며진 재난의 풍경 속에서 말이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은 지극히 주관적인데도, 다수의 관객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시지각이 이끄는 ‘감정의 울림’을 경험한다. 그것은 대개 슬픔과 우울과 관련한 감정이다. 때로는 질박한 화면 속 ‘누추한 어디’에서 싹트는 비애미(悲哀美)로, 때로는 생채기가 가득한 화면 속 ‘비루한 어디’에서 자라난 비장미(悲壯美)로, ‘감정의 울림’은 그렇게 작동한다.
그의 작품에 스며든 비애미와 비장미는 어디에서 그리고 무엇으로부터 연원(淵源)하는 것일까? 그의 작가 노트를 보자: “80년대부터의 작업이 몇 시간 만에 사라지는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던 2013년 겨울 어느 날. 그나마 형체라도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그림과 현재의 작업 서너 개를 들고 서울 북촌에 위치한 ‘갤러리 제이콥1212’ 에서 2019년 12월 12일 개인전을 오픈합니다. 몇 안 되는 그림으로는 저의 그림 세계를 읽어낼 수는 없어도 대략으로라도 가늠할 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글에 달린 ‘제목 아닌 제목’은 “비로소 구속된 지꺼림이 자유롭다!”이다. 구속된 지꺼림? 글로만 본다면 그의 작품에 나타난 비애미와 비장미는 ‘구속된 지꺼림’에서 나온다. 사전에 없는 단어 ‘지꺼림’이 과연 무엇일까? 소리 나는 대로라면 ‘지껄이다’의 활용형인 ‘지껄임’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것은 “약간 큰 소리로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짓”처럼 ‘말하다’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또한 하태형의 ‘지꺼림’은 ‘짓거리’의 의미마저 공유한다. “몸을 놀려 움직이는 동작. 주로 좋지 않은 행위나 행동”을 가리키는 ‘짓’을 더욱 낮잡아 부르는 ‘짓거리’는 그의 작업 자체를 스스로 ‘별 볼 일 없는 무엇’처럼 겸허히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그가 작가 노트에서 “겹겹이 쌓고 또 부수다 보니 재만 남는다. 참으로 의미 없다”고 토로하고 있듯이 자신의 창작 자체를 ‘무의미한 무엇’으로, 그리고 창작 주체인 자신을 ‘무의미한 무엇을 만드는 사람’으로 겸손히 지칭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물론 그의 표현과 달리, 그가 만드는 ‘무의미’ 속에서 관객이 저마다 자신의 기억을 소환하고 ‘유의미’를 건져 올리니 값진 작업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구속된 지꺼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번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기록한 작가 노트에서 보듯이, 2013년 겨울 어느 날 맞닥뜨린 작업실 화재가 안겨준 불가항력의 재난과 관계한다. 화재에 의해 전소된 작업실에 남겨진 “형체라도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그림”에서 그는 ‘빛’을 보았을 것이다. ‘내 의지로 만들었던 무수한 그림’을 태우고 ‘내 의지로 만들 수 없었던 그림’을 덩그러니 몇 개 남기고 사라진 화마(火魔)! 작가 하태형에게 있어 그놈은 감사(感謝)를 받을 은인이다. ‘큰 상처’를 남기고 갔으나 그보다 더 값진 ‘또 다른 예술의 가능성’을 그에게 주고 갔으니까.
전작들을 재난 쓰레기와 폐허로 되돌리고 자유로웠던 창작의 의지마저 ‘구속’했던 화재 사건 이후 작가 하태형이 비로소 자유로워진 걸까? 여기서 ‘구속(拘束)’이란 “행동이나 의사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속박”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한편,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여 구원”했다는 기독교 전승 속 ‘구속(救贖)’의 의미 또한 일정 부분 공유한다. 하태형의 언어, ‘구속된 지꺼림’ 안에는 이와 같은 속박과 구원의 두 의미가 한데 녹아 있다. 그는 그 ‘구속(拘束/救贖)의 사건’ 이후, ‘내 의지로 만들 수 없었던 그림’을 ‘내 의지로 구현하고픈 욕망’이 꿈틀대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불에 태워지고 그슬린 ‘사건의 흔적’, 그 미묘한 상황을 자신의 창작 안에 담고 싶어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가? 그림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좋아하는 그놈과 씨름할 때조차 있지 않던가? “그림이 내 맘처럼 됐으면 좋겠다”는 투정 아닌 투정이 비단 그만의 것일까? 그는 맘처럼 따라주지 않는 작품을 두고 고민한다. “이번에는 여백이나 공간에 대한 소화 능력에 대해 한계를 느낀 그림이다. 말 그림 부분을 제외하고 잘라내고 살짝 덧칠하고... 드로잉도 편치만은 않다”, “가다 막히고, 날씨 탓인가? 집중이 안 되는 날”과 같은 작가 노트에 드러낸 자조(自嘲) 섞인 고백은 창작에 매달려 사는 그에게 일상이다.
하태형은 자신의 작품 앞에서 좋은 작품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고민한다. 오늘도 그는 습관처럼 붓을 잡는다. 날마다 속박과 구원 그리고 지껄임과 짓거리 사이에서 창작하는 일이 그가 세상을 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 “머릿속이 복잡하다. 숨 막힐 듯 지저분한 작업실만 들어오면 세상이 보이고 내가 보인다. 습관처럼 붓을 잡는다. 구속된 지껄임이 자유롭다.”
III. 기억 회화: 존재를 성찰하는 표현주의 조형 언어
‘지껄임’과 ‘짓거리’ 사이에 위치한 하태형의 ‘구속된 지꺼림’은 캔버스 위에서 회화용 물감과 건축용 미디엄이 혼재되고 회화와 자연 오브제가 그리고 칠하기와 닦아내기 또는 쌓기와 부수기 그리고 태우기가 지속해서 교차한다. 오려내기의 조형 언어가 침투할 때도 있다. “보통은 화면을 잘라내지 않고 완성까지 끌고 가던가 아니면 덮고 다시 그리든지 하는데...”라는 작가의 말처럼, 대개 그는 흡족하지 않은 결과를 낳은 작품과 사투를 벌이면서 수정해 가거나 아예 그 위를 물감으로 과감하게 뒤덮는데, 때로는 그림의 일부를 잘라내기도 한다.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라. 묵은 땅을 갈아엎고 씨를 뿌려라(예레미야 4:30)”라고 하는 성서의 전언을 실천하듯이, 작가 하태형은 물감으로 뒤덮어 폐허가 된 지층 위에서 ‘같은 그림을 다시 시작’하거나,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 내버리라. 네 백 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 5:27-28)”라는 성서의 교훈을 실천하듯이, 작업 중인 회화를 오려내 ‘전혀 새로운 그림’으로 변주해 내기도 한다. 한 예로 그는 최근 전시에서 캔버스 전면에 배치된 비행기 오브제를 제거하고 대신 불에 탄 그림을 돌돌 말아서 ‘만들어진 오브제(objets créés)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화재 사건에 대한 체험으로부터 점차 자신의 조형 언어를 찾아가고 있는 하태형의 그림에는 ‘예술과 예술 작품의 존재’에 관한 ‘미시적 서사로부터 거시적 서사에 이르는 존재론적 성찰’로 가득하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메타포(metaphor)’와 맞물리는 것이다. 개인 소사뿐 아니라 인류의 사회사를 성찰하는 그의 최근 연작인 〈Eden Down〉은 사회적 대재앙과 숱한 사건들이 낳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해 나가는 정화작용으로서의 메타포이길 자처한다. 하태형이 부식한 철판들을 이어붙이고 용접해서 만든 배를 캔버스 위에 걸어 올리면서 세월호 사건을 기렸던 것을 이해할 만하다. 그가 이름 모를 들풀들을 꺾어 질곡(桎梏)의 황토빛으로 가득한 화면 위에 올려 헌화했던 까닭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인간이 부재한 옷가지를 철선들을 엮어 인공 보철처럼 감싸 안아 지탱시킨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필자는, 고난과 비애의 시간으로부터 점차 화해와 치유를 만들어가는 지층을 피부 가득 떠안은 하태형의 그림을 ‘기억 회화(Painting of Memory)’로 부르기로 한다. 베르그송(H. Bergson)이 이미지를 ‘잠재적인 기억(mémoire virtuelle)으로부터 현실화되어 나타나는 존재’로 살피고 있듯이, 하태형의 ‘기억 회화’는 망각이라는 잠재적 상태를 점차 벗고 현실로 떠오르는 그림이다. 이 기억은 허상이 결코 아니라 실재이다. 베르그송이 기억에서 유발하는 모든 이미지를 물질(matière)로 정의하듯이 현실의 지평으로 떠올리는 하태형의 ‘기억 회화’는 물질이자 곧 실재이다. 하태형은 직접 체험한 화재 사건을 재현하듯이 캔버스 위에서 ‘질료의 구축-훼손과 해체-상처와 흔적’을 반복하는 화면을 만들어 나간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미디엄이 또 다른 미디엄과 반복적으로 중첩되는 그의 ‘기억 회화’는 캔버스가 출렁일 만큼 수많은 질료의 층을 지닌 채 ‘물질 회화’로서의 변모를 거듭해 나간다.
그것은 다분히 표현주의적이다. 헤쳐진 질퍽한 물감 덩어리와 메마른 오브제가 혼재되고, 거친 갈필의 흔적이 화면 위를 아픈 상처처럼 끌고 다닌다. 쌓이고 부서진 동시에 덧칠되고 닦여 나간 그 물감들의 대화를 한 층씩 쌓아 나가면서 하태형은 세계를 대면하는 자신의 ‘표현주의 언어’를 심층의 어디에선가 꺼내 흩뿌린다. 주절거리는 혼종의 언어는 불투명함과 모호함 속에서 싹트고 자란다. 추상화 속 알 수 없는 기호가, 정물로 흩뿌려진 채소들이, 화분 속에 피어난 이름 모를 식물이, 갯벌에 피어난 들꽃이 그리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을 들판이 말이다.
IV. 에필로그
작가 하태형은 이번 개인전에서 2013년 화재 사건으로 불에 탄 이전의 그림들을 가져와 정리하고 신작 몇 점을 새롭게 선보이면서 여전히 ‘구속된 지꺼림’을 이야기한다. 거친 이미지와 텍스트가 엇갈리고, 알 수 없는 모호한 기호들이 화면을 점유하는 작품들로부터 인물과 정물, 식물과 풍경이 다채롭게 펼쳐지는 그의 회화는 우리의 작명 ‘기억 회화’처럼, 많은 것을 기억하고 많은 것을 껴안고자 한다.
아! 상처를 남긴 흔적은 기억을 늘 곁에 두고 산다고 했던가? 내 몸과 피부에 각인된 피학(被虐)은 내 맘에 상처의 흔적을 남긴 채 아물어 간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에 남긴 상처들은? 그 또한 아물기 위해서는 상처를 곱씹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픔 뒤로 슬픔이, 그리고 상처 뒤로 회한이 뒤따르지만, 그 속에서 하태형은 희망을 본다. “어떤 아픔이나 상처도 나아짐을 전제로 진행되는 과정이며 순리이다. 그리고 그것은 작지만, 또 다른 한 번의 정화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내가 껍데기이고 꽃이며 세월호이다”라는 작가의 이전 언급은 이번 전시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상처를 보듬어 안고, 치유하는 일을 오늘날 화가의 최소한의 책무처럼 간주하는 하태형은 오늘도 붓을 잡는다. 왜? 아래의 작가 노트는 오늘도 그가 창작에 매진하는 이유를 우리에게 살며시 엿보게 한다.
“작업하면서 매 순간 갈등하고 절망하고 욕망과 함께 희망을 느낀다. 살아 있음을 느낀다. 거기까지다. 그렇게 끝난다. 그래서인지 작업하는 동안 내 그림이 보이질 않는다. 질린다. 피곤하다. 생소하다. 또 다른 캔버스를 연다.”
김성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