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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이창희 / 모듈을 확장하는 환경 속의 조각

김성호

모듈을 확장하는 환경 속의 조각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이창희의 최근 작업은 세 개의 시리즈로 구성된다. 〈Holes〉, 〈Rhythmic Ruler〉, 〈걸어가다〉와 같은 제목으로 펼쳐지는 세 범주의 작업이 그것이다. 이 세 범주는 자세히 보면 조각의 볼륨과 매스를 형성하는 근원적인 두 개의 대립항인 요철(凹凸)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은 세 개의 형(形)으로 구체화되어 있다. 즉 구멍(○), 큐브(□), 시옷(ㅅ)과 같은 기호로서의 모듈이 그것이다. 구멍에 기초한  〈Holes〉 시리즈는 웜홀과 같은 우주적 시공간의 은유처럼 간주되며, 큐브에 기초한 〈Rhythmic Ruler〉 시리즈는 율동감을 지닌 유연한 ‘자(ruler)’로 현시되고, 시옷에 기초한 〈걸어가다〉 시리즈는 힘찬 걸음을 내딛고 있는 인간 군상의 다리로 형상화된다. 근원적 우주적 세계로부터 현실계로, 더 나아가 인간 사회의 내면으로 깊이 내려앉는 느낌이다. 일견 상이해 보이는 세 범주의 작업은 이창희의 조각 세계를 어떻게 하나로 연결하는가? 

〈Holes〉 - 전환과 소통 
조각체 안에 큼직하게 자리한 구멍을 통해 존재의 근원적 성찰을 선보이는 이창희의 〈Holes〉시리즈는 마치 헨리 무어(H. Moore)가 선보였던 투과체 조각의 21세기 버전처럼 보인다. 납작한 입방체의 두께를 커다란 구멍이 관통하고 있는 작품들은 입방체의 모서리를 지지대로 삼고 마름모꼴로 세워져 있거나, 겹겹이 겹쳐진 직육면체를 관통하는 구멍들을 안고 쌍의 형상으로 세워져 있기도 하다. 대개 거대한 덩치를 선보이는 이 시리즈 작품이 모뉴멘트적 특성을 견지하고 있으면서도 환경과 대치하지 않으면서 그 속에 편안히 거주할 수 있도록 만드는 요인은 구멍이라는 조형 요소 때문이다. 조각체에 숨 쉴 공간을 허용하는 구멍이 볼륨과 매스의 긴장을 해체함과 동시에 관자의 시선을 조각과 환경 사이에서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구멍에는 전환과 소통의 미학이 내재한다. 
전환? 이 마법과 같은 구멍의 존재론적 위상은, 결핍과 결여의 네거티브 형상임과 동시에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무한 생성의 포지티브 공간을 중첩시킨다. 구멍은 프로이트(S. Freud)의 주장처럼 남근이 부재한 결여의 차원임과 동시에 크리스테바(J. Kristeva)의 주장처럼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무한 생성의 원천인 코라(Cora)의 공간으로, 충만한 존재의 차원이기도 하다. 마치 폰타나(L. Fontana)가 캔버스의 표면을 베어냄으로써 표면의 심층으로 빠져나가는 해체의 네거티브의 공간을 통해 2차원 회화의 공간적 한계를 벗어나는 포지티브로의 전환을 시도했던 것처럼, 이창희의 조각은 구멍의 공간을 통해서 3차원 조각의 공간적 한계를 탈주하는 부재로부터 존재로의 전환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소통은? 작가 이창희는 구멍을 통로로 인식한다. 보라. 관객은 그의 작품 속 구멍을 통해서 변하는 풍경과 환경을 인식한다. ‘구멍’이 조각과 환경 사이에서 서로의 연결을 도모하는 ‘통로의 공간’으로 기능하면서 ‘환경 속 조각’뿐 아니라 ‘조각 속 환경’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통로의 공간’으로서의 구멍의 위상을 극대화하여 ‘시공간의 통로’와 같은 은유로 확장한다. 
그가 애초에 이 〈Holes〉 시리즈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사과 속에서 발견한 벌레 구멍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사과 표면에 있는 벌레가 사과의 정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표면을 따라가는 것보다는 사과를 파서 사과의 중심을 지나가는 쪽이 빠르다. 이 때, 사과에는 중심을 관통하는 벌레 구멍이 생기게 되는데, 이 벌레 구멍은 사과의 표면보다 고차원적이면서 서로 다른 사과의 표면을 잇는 최단 경로가 된다.” 그의 이러한 상상은 ‘구멍’을 “우주에서 먼 거리를 가로질러 지름길로 여행할 수 있다고 하는 가설적 통로”인 ‘웜홀(Wormhole)’, 즉 ‘시공간 통로’의 세계로 변주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창희의 〈Holes〉 시리즈가 내포한 미학은 구멍이라는 조형 요소가 함유하는 네거티브와 부재의 차원을 포지티브와 존재의 차원으로 바꾸려는 ‘전환의 미학’이자, 이것과 저것을 상호 연결하려는 ‘소통의 미학’이라는 정의가 가능해진다.    


이창희,〈Holes〉


〈Rhythmic Ruler〉과 〈걸어가다〉 - 미술의 사회 속 변주 
그의 시리즈 작품 〈Holes〉이 입방체 속에 커다란 구멍을 위치시켰다는 점에서, 조각의 기초적인 조형 요소를 그 자체로 드러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또 다른 시리즈 작품인 〈Rhythmic Ruler〉과 〈걸어가다〉 또한 조각의 가장 기본적인 모듈을 그 자체로 가시화시킨다. 두 작품 모두 ‘입방체의 연접’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 분석에 있어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구체적으로 전자는 두 개의 입방체들의 연접(L, V)과 율동적인 변주(〜, 〰)로 변화를 주었다면, 후자는 인체의 다리를 연상케 만드는 두 개의 입방체들의 연접인 시옷(ㅅ)의 형상으로 변주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미니멀아트의 기수인 모리스(R. Morris)가 선보였던 입방체와 입방체의 연접(L자형 빔)의 제작 방식과 변주의 설치 방식(L, ━, ∨, ∧)과 매우 유사하다. 주지하듯이, 모리스는 같은 모양의 L자형 빔을 눕히고 세우고 걸쳐 놓는 방식으로 조각과 그것이 놓이는 '장(field)' 사이에서 발생하는 외관적 '상(image)'에 주목하고 보이는 것에 대한 변주를 실험했다. 이와 달리 이창희는 모리스가 선보였던 입방체의 배열과 연접의 방식뿐만 아니라 관성적인 인식의 대상을 매우 단순하면서도 역동적으로 변주해 낸다. 


이창희,〈Rhythmic Ruler〉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작가 이창희는 작품 〈Rhythmic Ruler〉에서 ‘길이를 재는 자’를 율동감 있는 형상으로 유연하게 변주하거나, 작품 〈걸어가다〉에서 ‘걸어가는 사람의 다리’만을 빌려와 시옷(ㅅ)의 형태로 연접된 입방체를 만들고 이것을 역동적인 형상으로 실감나게 변주한다.  즉 작가 이창희의 미적 대상인 ‘자’와 ‘사람의 형상’을 가장 기초적인 모듈인 입방체로 치환하여 빌려오고 그것을 연접시키고 변주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우리의 관성적인 인식을 배반시키는 미학을 실행하는 것이다. 
작품을 보자. Rhythmic Ruler 시리즈는 표면에 눈금을 지닌 직육면체가 길게 드러누워 있거나 육면체들이 연접한 형태(ㄱ, L)로 또는 삼각자의 모습(△)으로 세워져 있거나 눕혀져 있기도 하다. 어떤 작품은 고리 모양(◎)으로 연결되어 ‘자로서의 기능’을 아예 상실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눈금 자체는 그의 작품이 탐구하는 미적 대상이 ‘자로서의 정체적 위상’을 지닌 것임을 드러낼 뿐, 애초부터 자로서의 기능은 탈각된 존재이다. 게다가 이 시리즈의 다수는 물결 모양으로 변주되거나 아예 뫼비우스띠처럼 뒤엉켜 있기도 하다. 우리로 하여금 ‘자에 대한 관성적 인식’을 배반시키고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일상 오브제를 통해서 인간 사회를 은유하는 것이다. 가히 ‘미술의 사회 속 변주’라 할 만하다. 이러한 차원에서 ‘자’의 표면에 리듬을 표현한 것을 “개인의 자유와 욕망을 추구하면서도 사회적인 구조와 제도 안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인생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작가의 진술을 곱씹어 볼 만하다. 
이러한 이창희 작품의 ‘미술의 사회 혹 변주’라 할 만한 ‘인간 사회 은유’는 또 다른 시리즈 작품 〈걸어가다〉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것은 그가 인용하듯이 미국의  사회학자 리스먼(D. Riesman)의 ‘고독한 군중’을 연상케 한다. 모두들 같은 방향을 향해 걷고 있는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발생하는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에 주목하면서 그는 동시에 힘겹지만 동행하는 묵직한 발걸음의 의미에 대해서 성찰한다. 그가 만드는 ‘미술의 사회 혹 변주’는 언제나 가장 기본적인 조형요소의 기초인 ‘모듈’의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출발했듯이, 그가 천착하는 사회학적 담론과 우주적 담론까지 모두 개별체 인간에 대한 관심이 중심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가히 '모듈을 확장하는 환경 속의 조각'이라 할 만하다. ●


이창희,〈걸어가다〉


출전/
김성호,  「모듈을 확장하는 환경 속의 조각」,  이창희 작가론, 『미술과비평』, 가을호, 2019

필자 김성호는 파리1대학 미학 전공 미학예술학박사. 모란미술관 큐레이터, 미술세계 편집장, 쿤스트독미술연구소장, 중앙대 겸임교수, ‘2014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전시총감독, ‘2015바다미술제’ 전시감독, ‘2016순천만국제자연환경미술제’총감독, ‘2018다카르비엔날레 한국특별전’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현재 UNIST 박사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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