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작가론│쑨지 / 일상에 판타지를 부여하는 뉴페인팅

김성호

일상에 판타지를 부여하는 뉴페인팅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작가 쑨지(Soon Ji)는 최근작에서 〈뉴페인팅(New- Painting)〉이라 명명한 작업을 선보인다. 캔버스 위에 아크릴이나 유화를 입힌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나 인물이 주를 이룬 그녀의 작업을 ‘새로운 회화’라는 의미의 뉴페인팅이라 부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I. 뉴페인팅 혹은 뉴-뉴페인팅 
주지하듯이, 미술사에서 ‘뉴페인팅’은 “198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했던 새로운 유형의 구상 회화”를 지칭하는 다양한 용어 중 영미권에서 사용되었던 용어다. 독일에서는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트랜스 아방가르드(trans avant-garde)’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의 뉴페인팅은 대개 “인간 형상을 주제로 삼아 다소 거칠고 투박한 필치, 원색을 사용하는, 표현주의적 구상 회화”라는 특성을 선보였는데, 이러한 흐름은 1970년대 관념적이거나 금욕적인 ‘모더니즘 회화’의 가치로부터 이탈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의 ‘새로운 회화’의 흐름을 형성했다. 신화, 꿈, 죽음, 폭력, 죽음, 성(性)과 같은 주제를 거리낌 없이 표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관련하여 우리는 슈나벨, 바스키아, 클레멘테와 같은 작가들을 떠올려 볼 수 있겠다.  
2010년대를 호흡하는 쑨지의 뉴페인팅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지극히 감각적이고 도발적인 주제를 표현주의적 경향으로 담아 온 1980년대 영미의 뉴페인팅과 달리. 쑨지의 뉴페인팅은 자유로운 표현주의적 회화의 특성을 견지하되, 잔잔한 일상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쑨지가 붓질을 중시하는 1980년대 뉴페인팅의 형식은 공유하되, 내용은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보다 ‘인간 현실에 대한 잔잔한 조망’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현실과 일상을 주제화했던 1960년대의 팝아트의 내용뿐 아니라 가볍고도 발랄한 팝아트적 표현 형식에 보다 근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물과 실내 풍경과 같은 친근한 소재를 표현주의와 같은 거친 붓질로 담아내면서도, 발랄한 원색으로 엷고도 투명한 층으로 겹쳐 올리고 있는 그녀의 회화 형식은, 팝아트적 회화와 연동하는 우리의 해석을 어렵지 않게 이끌어낸다. 
쑨지의 뉴페인팅은 1980년대 ‘새로운 회화’를 천명했던 서구의 뉴페인팅의 조형 언어를 일정 부분 공유하면서도 그것과는 또 다른 형식과 내용으로 접근하면서 오늘날 당면한 ‘회화’를 재성찰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새로운 형식은 형광 물질을 ‘또 다른 물감’으로 도입하는 창작에서의 방식과 ‘일반 조명이 아닌 특수 조명’을 사용하는 전시에서의 디스플레이의 방식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쑨지는 날것의 형광 물감이나 일반 물감과 섞은 형광을 캔버스 위에 올려 그린 회화를 어두운 공간 속에서 자외선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선보임으로써 기존의 ‘회화 창작’과 ‘회화 감상’에 대한 조건과 상황을 변주한다. 즉 “특정 파장의 빛을 흡수해 다른 파장의 빛 에너지로 방출”하는 형광 물질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회화의 장(場)에 끌어 들여와 낯설고도 환상적인 화면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쑨지의 작업은 ‘물감 위에 빛이라는 물감을 더해 그림을 그리는 창작 방식’과 더불어 ‘어두운 공간 속에 자외선을 끌어들이는 전시 방식’을 통해서 회화의 장을 새롭게 연장할 뿐만 아니라 종합적으로 변주한다고 평할 수 있겠다. 쑨지의 ‘뉴페인팅’은 1980년대의 ‘뉴페인팅’의 형식을 공유하고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오늘의 상황에서 새로운 형식과 주제로 변주하고 변용한다는 점에서 가히 ‘뉴-뉴페인팅’이라 할 만하다.





II. 일상에서 새로움을 찾는 뉴페인팅 
쑨지의 회화가 정말 새롭다고? 
생각해 보자. 그룹 운동의 차원에서 ‘새로운 것(nouveauté)’을 찾아 내달렸던 서구의 모던 미술은, 20세기 중반 모더니즘의 종말을 고하고 다원주의 미술을 선포한 이래, 더 이상 ‘미술의 장에서 새로운 것’이 없음을 토로한다. 테크놀로지가 발전하고 디지털 아트와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미술이 등장하면서 21세기 미술에도 ‘새로운 것’은 여전히 가능함을 증명해 보였지만, 적어도 회화의 장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아포리즘(aphorism)을 숭상한다고 할지라도 ‘나올 것이 다 나온’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로움은 존재한다. 회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새로움’을 ‘새로운 매체’에 국한시키지 않고 ‘새로운 태도와 경향’으로 간주하면서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쑨지 또한 ‘형광 물질이라는 새로운 회화 매체’나 ‘형광을 극대화하는 특수 조명이라는 디스플레이 방식’과 같은 매체나 방법론뿐만 아니라 ‘일상을 판타지로 변모시키는 회화적 태도’를 통해서 ‘새로운 회화’로서의 가능성을 찾는다. 즉 형식뿐만 아니라 주제와 내용면에서 새로운 회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우리는 뉴페인팅이라는 용어어서 쑨지가 내세우는 ‘뉴’라는 접두어의 의미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겠다. 문자 그대로 여기서 ‘뉴’는 ‘지금까지의 페인팅’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페인팅’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1980년대의 영미의 뉴페인팅과 독일의 네오 엑스프레셔니즘(Neo Expressionism)이 그랬다. 이러한 차원에서 비속한 오브제를 예술로 변환시켰던 '다다(Dada)’의 역설적 태도를 고스란히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으려 했던 1950년대의 네오 다다(Neo-Dada)나 레알리슴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1960년대 프랑스의 누보 레알리슴(Nouveau Réalisme)은 또 다른 예가 된다. 특히 누보 레알리슴은 쿠르베의 레알리슴(Réalisme)이라는 ‘현실에 기초한 회화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현실적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을 뛰어넘어 ‘현실(또는 실재)을 제시’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대량 생산된 동형의 오브제를 집적하는 아르망(Arman)이나 거리의 벽에 붙은 포스터를 떼어내는 방식으로 작업했던 앵스(Raymond Hains)의 작업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이미 현실(réalité) 자체였다.   
흥미롭게도 쑨지의 뉴페인팅은 1980년대의 뉴페인팅을 계승하고 재해석하는 ‘뉴-뉴페인팅’으로 정초된다. 구체적으로 말해 형식은 표현주의를 계승하되, 주제와 내용은 팝아트를 계승하고 재해석하는 까닭이다. 그런 면에서 쑨지의 뉴페인팅은 20세기 미술사에 등장했던 많은 ‘뉴(네오, 누보)의 세계관’을 조금씩 공유한다. 즉 네오 다다와 누보 레알리슴이 지향했던 ‘일상의 실재를 제시’하던 태도와 팝아트가 지향했던 ‘일상의 이미지를 재현’하던 경향을 혼성적으로 드러낸다. 쑨지의 뉴페인팅에서 ‘이미지’는 일상의 풍경이나 인물을 다루는 팝아트의 경향을 지니되, ‘물질’은 물감뿐 아니라 형광 도료와 같은 산업품을 사용하는 네오 다다와 누보 레알리즘의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업을 가히 일상에서 새로운 미학을 찾는 뉴페인팅이라 할 만하다. 





III. 낯선 공간에서 길어 올리는 판타지 
쑨지의 뉴페인팅은 납작한 캔버스의 표면 위에서 일상의 이미지를 재현하고 실재를 제시한다. 작품을 보자. 테이블 위에 흩어져 놓여 있는 노트북과 일상의 잡동사니, 바닥에 놓인 기타와 난로, 화분 등의 풍경은 우리 주변에서 늘 보아온 일상의 흔하디흔한 이미지다. 쑨지가 그리는 인물들은 어떠한가? 테이블을 두고 무엇인가 바라보고 있는 중년 여인, 해먹 위에서 낮잠을 즐기는 젊은 여인, 무료한 듯 자신의 몸을 의자 안에 깊숙이 묻고 있는 남자,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듯 병 속의 무엇인가 따르고 있는 남자, 춤을 추며 파티를 즐기는 남녀 한 쌍의 모습,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가족, 커피숍에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역시 우리가 일상 속에서 수없이 보아온 흔한 이미지일 따름이다. 
이러한 일상이 어떻게 새로움으로 창출되는가? 그녀의 회화에서 지각으로도 판별 가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상의 모습을 그렸으되 그것이 자연스럽지 일상의 색감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엷지만 강렬한 총천연색의 색 층이 어지럽게 오가고 군데군데 튀는 형광 물감이 덧칠해져 있다. 사물과 인물의 외곽선의 경계를 넘어서는 색 층이 넓은 붓질로 횡단하는 가운데 형광 물감이 드리핑처럼 군데군데 떨어져 있기도 하다. 지극히 익숙한 일상의 풍경과 정물 그리고 인물을 낯설게 창출해 낸 셈이다.   
쑨지의 회화에서 익숙한 이미지와 낯선 조형의 만남은 원래 경계를 탈주하려는 이전 작업에서의 설치적 시도가 회화의 장 안에서 응축된 채 도달한 지점이다: “범람하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평면만으로 생경한 이미지를 만드는데 한계를 느낀다. 그 대안으로 회화를 입체적으로 보일 수 있는 디스플레이를 모색해 왔다. 다각, 다면의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 파노라마 그림 등 입체적으로 그림을 그려내기도 하고 커튼, 블라인드, 원형 타워 등의 다양한 입체적인 형태 위에 그림을 그린다.” 
이러한 경계 탈주를 통한 낯선 조형의 만남은 그녀의 회화 곳곳에서 발견된다. 자연스러운 구상 형상과 낯선 원색 물감 그리고 이질스러운 형광 물감의 만남이 그녀의 회화 안에 자리한다. 회화의 물질인 물감과 산업 재료인 형광 물감이 함께 하고, 무료한 일상의 이미지와 역동적 감성이 함께 만난다. 이러한 ‘익숙함/낯섬’의 만남과 혼성은 작품을 싸고 있는 프레임 외부에도 존재한다. 특히 전시장에 들어온 그녀의 작품들은 생경하고도 낯선 형식의 장소 안에서 준비된다. 전시장 벽을 온통 형광 도료로 칠하고 특수 조명을 장치함으로써 일반적 조명에서 보는 이미지와는 확연하게 다른 이미지로 관객을 맞이하는 것이다. 즉 형광으로 방출되는 긴 파장의 빛에 의해서 자연광 혹은 일반 조명에서 보았던 이미지와는 다른 극도의 발광(發光) 이미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관건은 “빛을 흡수하여 들뜬 물질이 다시 빛을 방출하는 광발광(photoluminescene)” 효과에 의해서, 일상 속에서 잘 보이지 않던 형광 물질이 극도로 가시화되는 현상에 관한 것이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형광’을 자외선으로 가시화를 극대화함으로써 익숙한 이미지를 해체하고 낯설게 드러내는 방식은 그녀의 작업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된다. 너무나도 익숙한 이미지가 해체되고 재구성됨으로써 판타지(fantasy)라는 낯설기의 미학이 창출되기 때문이다. 
판타지? 흔히 ‘공상, 환상’이라 번역되는 판타지는 실체가 없는 헛된 상상이나 공상이 창출하는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상황을 의미한다. 이 판타지라는 용어는 실상 오늘날 이미지(image)라는 고대 그리스어 어원인 판타스마(φάντασμα, Phantasma)로부터 왔다는 점에서 다양한 이미지의 한 현상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판타지는 대개 판톰(Phantom)이라는 유령, 허깨비처럼 실재(reality)와는 다른 허상(虛像)의 것을 지칭하면서 ‘현실과는 유리된 이미지’를 가리키지만, 실상 판타지는 우리의 일상 이미지 속에 잠세태(virtualité)의 형국으로 깊이 잠자고 있는 존재일 따름이다. 쑨지의 형광 물질이 자외선을 만나 비로소 잠세태로부터 현실화(actualisation)의 과정을 거치며 비로소 판타지의 이미지로 나타나듯이, 판타지의 존재론적 차원은, 들뢰즈의 이미지론이 그러하듯이, 태생적으로 비현실이기보다 잠자고 있는 상태의 ‘현실이자 실재’(réalité)라고 하겠다. 어떠한 특이점(singularité)을 만나 비로소 우리의 눈에 드러날 뿐인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작가 쑨지가 구현하는 낯선 공간(프레임 내부의 형광 물질,  자외선을 투사하는 형광 도료가 칠해진 프레임 외부의 전시 공간)은 ‘익숙한 일상의 이미지’에서 판타지를 길어 올리는 특이점과 다를 바 없다고 할 것이다.  





IV. 에필로그   
쑨지의 회화가 가지는 유의미한 미학은 다음과 같다. 판타지는 현실을 이탈하는 비현실의 존재가 아니라 이미 이미지 안에 있고 당신 안에 있는 ‘내재성(inmanencia)의 존재’라는 것!  그것은 주체의 상상하기에 따라 언제든지 현현(顯現)한다. 마치 메를로 퐁티(M. Merleau-Ponty)의 철학적 사유를 작가 쑨지가 회화를 통해서 실천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퐁티에 따르면 ‘보이지 않는 것’의 세계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가시성이 하나의 특정한 부재로 현존하게 하는 비가시성의 층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사물의 전체를 볼 수 없듯이, 가시성이란 언제나 비가시성을 전제한다. 그런데 이 비가시성은 가시성이 배제시킨 잔여물이기보다 원초적인 것이다. 퐁티에 따르면, ‘깊이(profondeur)’는 ‘보이지 않는 것’의 본질이다. 
이러한 해설은 작가 쑨지가 왜 낯선 공간을 만들어 관객에게 판타지를 만나게 시도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안내도가 될 것이다. 평범한 일상의 이미지로부터 판타지를 길어 올리는 쑨지의 회화는 오늘도 낯선 공간을 만들고 그 창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 내재한 깊이를 찾아 나선다. 언제나 유쾌한 상상과 긍정의 태도로서 말이다. ●

출전 /
김성호, 「일상에 판타지를 부여하는 뉴페인팅」, 쑨지 작가론, 2020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