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서문│이명섭 / 렌더링의 공간과 조형적 실천

김성호

렌더링의 공간과 조형적 실천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이명섭의 개인전이 열리는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의 전시 공간은 어둠으로부터 시작한다. 전시장 안의 어둠과 전시장 밖의 밝음이 부딪히는 ‘벽’에 틈을 내고 그것을 입구처럼 벌려놓음으로써 어두운 공간에서의 전시는 비로소 실효성 있게 작동한다. 틈이 확장한 전시장 윗벽의 모서리 공간이나 출입구의 공간을 통해서 전시장 외부의 빛의 유입을 허락하고 한 줄기 생명의 입김을 전시장 내부로 견인하여 비로소 전시를 살아있는 무엇으로 만들어 놓은 까닭이다. 어떻게?



I. 렌더링의 공간 - 어둠을 가르는 틈
이명섭이 내세운 전시명 ‘렌더링(Rendering)’은 죽어있는 것들로부터 생명을 부여하는 장치가 된다. “벽돌 벽, 석벽 등에 하는 회반죽 칠”이나 “특정한 해석을 가미한 연주나 연출” 혹은 “번역”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지닌 ‘렌더링’은 대개 디자인의 영역에서 “아직 제품화되지 않고 계획 단계에 있는 공업 제품을, 누구나 그 외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실물 그대로 그린 완성 예상도”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또한 렌더링은 “2차원의 화상에 광원, 위치, 색상 등 외부의 정보를 고려하여 사실감을 불어넣어, 3차원 화상을 만드는 과정”을 뜻하거나 “수치와 방정식으로 서술된 2차원 혹은 3차원 데이터를 사람이 인지 가능한 영상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뜻하는 컴퓨터그래픽스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처럼, 렌더링에 관한 다양한 뜻풀이는 ‘개념적인 무엇으로부터 가상적인 무엇으로의 전환’이라는 의미를 공유한다. 일련의 실재감을 부여하는 꾸밈을 통해서 2차원에서 3차원으로(또는 3차원에서 2차원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그리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되는 변환의 과정을 함유하는 것이다. 
작가 이명섭은 '틈'이라는 ‘사이 공간(interspace)’ 만들기라는 렌더링의 방법론을 통해서,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의 세계를 넘나든다. 전시 공간으로 잠입하는 출입구를 만든 작품 〈렌더 상황(render state)〉(2020)은 벽을 가르듯이 가느다란 틈(┃)을 내고 끝부분을 종잇장처럼 들어 올려 '확장된 통로의 공간'(△)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전시의 공간을 작품화한 것이다. 또 다른 작품 〈벽과 벽 사이의 빛〉(2020)은 같은 방식으로 전시장 윗벽의 모서리에 틈의 공간을 만든 것이다. 작가는 이 비워진 ‘사이 공간’으로 ‘전시장 밖’의 빛을 끌고 들어와 ‘전시장 안’에 희미하게 뿌려 놓음으로써 벽 위에 만들어진 ‘사이 공간’ 자체를 ‘죽음/삶’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 공간(interface)’으로 변주한다. 
이명섭의 이 작품은, 폰타나(L. Fontana)의 1950년대 작품 〈공간 개념(Spatial Concept)〉 연작이 캔버스의 표면을 칼로 베어내 심층으로 깊이 잠입하는 네거티브의 공간(凹)을 만들거나, 미니멀 아티스트 로버트 모리스(R. Morris)의 작품 〈무제-코너 조각(Untitled-Corner Piece)〉(1964)이 두 벽이 맞닿는 모서리에 삼각형의 조각을 끼워 넣어 무표정한 공간 자체를 작품으로 변주하는 ‘두 작가의 같으면서도 다른 공간 전략을’, 새로운 방식으로 계승한다. 
이명섭의 이 작품 또한 무표정한 ‘벽이라는 납작한 공간’(━)을 요철(凹凸)이 맞물린 ‘네거티브/포지티브’의 공간으로 살아나게 만든다. 벽체 일부가 안쪽으로 말려 올라간 까닭에 전시장 밖에서 볼 때는 비움(-)과 네거티브의 공간이지만 안쪽에서 볼 때는 더함(+)과 포지티브의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어둠의 전시 공간은 틈을 통해서 드러나고 구체화된다. ‘어둠을 가르는 틈’은 벽을 허무는 공간이다. 틈은 벽의 공간을 조형적으로 변주할 뿐만 아니라, 전시장 밖에서 안으로 빛, 소리 그리고 관객의 감정마저 깊이 밀어 넣어 건조하고 무표정한 사물의 공간을 심리적 공간으로 유효화한다. 어둠을 가르는 틈의 공간은 벽을 허물고 관객과 감정이입으로 교감하는 매개체적 공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은유하는 무엇이 된다. 틈은 어둠 속에 잠자는 본질적 주체를 깨워 합체하려고 만드는 ‘피아’로서의 주체이자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련의 사건이다. 그것은 또한 작가 이명섭의 ‘주검 속 피아 주체’가 부활하는 공간이자 차안과 피안을 넘나드는 공간이 된다. 가히 렌더링의 공간이라 할 만하다. 


Rendering 02-4, 랜더링02-4_MDF 구조물 위에 단채널 비디오 프로젝션_10분10초_2020

벽과 벽사이의 빛-6_혼합매체,LED조명_가변크기_2020



II. 렌더링의 실천 - ‘보이는/보이지 않는 벽’   
이명섭의 작품에서 틈의 공간은 렌더링에 대한 성찰뿐 아니라 그것의 실천으로 이끈다. 그 실천의 영역에는 인간관계의 지형에 위치한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벽’을 전제한다. 작가의 발언을 보자: “본인의 작품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생겨난 모호한 심리들의 불확실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하였다. 유년 시절부터 현재까지 잦은 이사로 인해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을 당시에 느꼈던 관계의 부재와 처음 겪는 환경에서 감정의 표현을 감추고, 본인의 행동을 타인에게 맞추어야만 했던 경험은 현재에도 연속되고 있으며 그러한 상황들이 작지만 자주 반복된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과 상황들의 반복은 본인의 자아를 인식하게 함과 동시에 내면적 심리의 변화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중략) 이번 <Rendering> 전시는 청주 미술창작스튜디오에 오게 되면서 본인이 느낀 감정들을 가상의 틈과 일상의 소리, 빛을 통해 경험한 일상-감정의 변화-긴장의 상태를 공유하고자 한다.”
작가 이명섭이 틈과 함께 언급하는 소리, 빛은 렌더링의 공간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들이다. ‘공간과 어둠을 가르는 틈’이 렌더링이라는 주제 의식을 성찰하고 지각적으로 실천하는 공간이라고 한다면 인간관계 지형에 놓인 ‘보이는/보이지 않는 벽’은 렌더링을 심리적으로 성찰하고 실천하는 공간이 된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보이지 않는 벽’은 MDF 구조물 위에 단채널 비디오를 투사하는 작품 〈Rendering 02-4〉에서 잘 드러난다. 사람 키를 넘는 커다란 크기의 스크린 구조물 위에 투사된 화면은 파란색으로 가득하다. 영상은 그 위에 각기 모양이 다른 사각형 이미지들을 천천히 올려놓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이미지들은 파란색 바탕 위에 집적되면서 작가의 ‘자화상 사진’의 윤곽을 서서히 드러낸다. 그런데 영상의 후반부에 이르면 파란색 바탕 위에 하나둘 올라섰던 사각형 이미지들이 픽셀처럼 집적되면서 거꾸로 작가의 인물 사진 위에 파란색이 덧씌워졌던 것처럼 보인다. 즉 영상 도입부에 사진 콜라주가 지속되는 것처럼 보였던 영상이 후반부에는 파란색의 데콜라주처럼 보이는 것이다. 
바탕과 이미지의 시각적 치환! 그 사이에서 관객은 ‘보이는/보이지 않는 벽’을 인식한다. 관객은 이 사이에서 보이기(showing)와 보기(seeing), 보이는 주체와 보는 주체, 주체와 타자 사이의 ‘보이는/보이지 않는 벽’을 인식하는 인간관계의 지평을 탐구한다. 그것은 잦은 이사로 인해 초면의 타자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던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을 반영한다. 
이처럼, 자신과 타자 사이에 놓인 ‘보이는/보이지 않는 벽’으로 인해 인간관계와 타자와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던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은 ‘어둠을 가르는 틈’과 ‘덧씌우기와 드러내기 사이를 오가는 콜라주와 데콜라주’를 시각화한 또 다른 작품들에서도 발견된다. 그것은 빛과 어둠, 포지티브와 네거티브, 콜라주와 데콜라주의 개념들을 하나로 이어받으면서도 실재와 허구와 같은 개념들을 한데 묶어 내는 것이다. 
작품 〈untitled〉(2020)는 어두운 전시장 속에 또 다른 커다란 어둠상자를 만들고 그사이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틈(통로)을 낸 뒤 그 가운데 상단에 LED 조명이 환하게 비추는 라이트 박스를 설치하고 그 아래로 유연한 버티칼을 커튼처럼 설치해 내린 것이다. 어둠 속에서 인공조명을 받고 있는 버티칼은 빨강, 파랑, 노색이 뒤섞여 만드는 알지비(RGB) 색상으로 인해 마치 무지개처럼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어둠을 가르는 틈, 통로를 막는 빛의 버티컬, 어둠을 지우는 빛, 백색광을 산포하는 알지비 색상뿐 아니라 어둠 속 자유, 통로 사이의 차단, 우울과 희망 등 ‘보이는/보이지 않는 벽’은 이 작품에서 두루 발견된다. 
또한 삼각뿔 상단에 드릴봉을 박아 벽에 걸어 둔 작품 〈드릴에 벽질〉(2020)에도 빛과 어둠, 포지티브와 네거티브뿐 아니라 실재와 허상, 우리의 심리적 기저에 담긴 폭압과 피압 등 ‘보이는/보이지 않는 벽’이 드러난다. 
또 다른 작품 〈소소한, 외부의 힘〉(2020)에서는 이러한 ‘보이는/보이지 않는 벽’이라는 주제 의식이 극대화된다. 실물 크기의 두 인물 조각이 기다란 삼각뿔을 상반신에 덮어쓴 채로 가운데 유리를 접점으로 서로 겨루듯이 마주하고 있는 작품은 주체와 타자, 피아의 주체와 본질적 주체, 조화와 대립의 쌍(雙)이 마주함을 형상화한다. 특히 두 인물 사이에 위치한 유리판은  ‘보이는/보이지 않는 벽’에 내재한 ‘투영을 통한 소통의 주제 의식’을 잘 드러낸다.  


(우측) untitled(무제),MDF 구조물 안에 LED조명,혼합매체_가변크기_2020


소소한, 외부의 힘_혼합매체_가변크기_2020



III. 에필로그 
작가 이명섭은 전시 공간을 어둠과 틈의 조형 언어를 통해서 ‘조각’으로 전환하면서 렌더링이라는 주제 의식을 시각화한다. 어둠과 틈이라는 렌더링의 공간 속에서 ‘보이는/보이지 않는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사회적 인간의 관계 지형을 은유하면서 렌더링의 미학을 조형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밝음과 어둠, 포지티브와 네거티브, 주체와 타자, 실재와 가상 등 대립적 요소를 대치시키거나 조화로운 쌍으로 배치하는 방식을 통해서 이명섭은 자신의 체험했던 인간관계의 심리적 긴장을 렌더링의 미학으로 절묘하게 풀어낸다. 이러한 주제 의식에 대한 작가의 ‘끊임없는 질문’이 인간관계를 은유하는 심리적 차원뿐 아니라 언뜻언뜻 차안과 피안을 넘나들고 죽음으로부터 생명의 공간으로 변주하는 무거운 존재 의식에 걸쳐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의 향후의 작업에 대해 거는 기대가 자못 크다. ●

출전/
김성호, 「렌더링의 공간과 조형적 실천」, 매칭 비평, 자료집,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20. 
(이명섭 개인전-렌더링, 2020. 2. 27-3. 8,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김성호(1966- ). 파리1대학 미학 전공 미학예술학 박사. 모란미술관 큐레이터, 『미술세계』 편집장, 쿤스트독미술연구소장, 중앙대 겸임교수, ‘2014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전시총감독, ‘2015 바다미술제’ 전시감독, ‘2016 순천만국제자연환경미술제’ 총감독, ‘2018 다카르비엔날레 한국특별전’ 예술감독 역임. UNIST 박사후연구원. 현재 2020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 여주미술관 관장.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