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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경계에 서다전 / 경계의 언저리에서 잉태하는 시각적 발화

김성호

경계의 언저리에서 잉태하는 시각적 발화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4인의 작가, 이건희, 이우현, 이태훈, 구성균이 냉동 창고를 리모델링한 ‘구룡포 예술공장’에서 《경계에 서다》전을 펼친다.  
경계? 오늘날 주체의 소멸과 타자의 부활을 논하고 노마디즘으로 점철된 매끄러운 공간과 탈경계를 매 순간 경험하는 현대인의 삶에서 ‘무엇과 또 다른 무엇 사이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있는 형국이다. 혹자는 오늘날 ‘경계’란 아예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덮은 상황에서 다시 피부로 체감하게 된 ‘경계’의 개념은 오래된 서랍 속에서 망령처럼 되살아나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그래! 경계는 여전히 있나 보다. 그것이 실재가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날 ‘나와 너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작동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경계’의 개념이 부활하고 있는 작금에 네 작가의 작품 세계를 ‘경계’라는 키워드로 살펴보는 일은 어찌 보면 매우 시의적절할 수도 있겠다. 꼭 그런 탓만은 아니지만, 필자는 하도 익숙해서 이제는 구태가 된 것처럼 간주되어 온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몇몇 철학적 개념어를 통해서, 이번 전시의 주제가 맞닥뜨리고 있는 ‘경계’의 의미를 풀이하면서 네 작가의 작품 세계를 면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이건희의 에크리튀르 - 그림(畵)/글(書), 2. 이우현의 흔적 - 혼(混)/돈(沌), 3. 이태훈의 차연 - 인(因)/연(緣), 4. 구성균의 해체 - 묘(妙).


1 이건희의 에크리튀르 - 그림(畵)/글(書)
이건희의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그림과 글의 경계에 서 있고, 심층적으로는 말하기와 글쓰기의 경계를 서성인다. 그것이 무엇인가?  
작품을 보자. 작가는 신문지의 색 면을 가느다랗게 잘라 콜라주의 방식으로 수제 한지 위에 올려놓는다. 수평 혹은 수직으로 붙여진 콜라주와 콜라주 사이의 빈 곳에 연필로 글을 쓰고 점을 찍거나 선을 긋기도 한다. 화면은 신문지가 만드는 색면 띠와 그 사이의 글쓰기가 대비를 이루는 그림과 글의 경계를 만든다. 또는 신문지에 인쇄된 글과 신문지 콜라주 사이 여백에 직접 쓴 글이 대비를 이루는 ‘활자로 된 텍스트’와 ‘수기(手記)의 텍스트’가 경계를 만들기도 한다. 
그뿐인가? 콜라주가 올라선 면과 아무런 행위도 되지 않은 면이 대조되면서 채움과 비움의 경계를 만들기도 한다. 나아가 하나의 패널을 여러 패널과 연계시키는 일련의 집합적 패널을 통해서 하나의 작품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작품 속 부분과 합(合)이 경계를 만들기도 한다. 한지 위에 종이 죽을 올려 만든 얇은 부조의 회화는 또 어떠한가? 이것은 요철(凹凸)의 네거티브와 포지티브가 또 다른 경계를 만든다. 이렇듯, 이건희의 작업에서 그림과 글, 채움과 비움, 부분과 합, 네거티브와 포지티브가 맞부딪히는 경계의 영역은 다차원적이다.           
또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작가가 스스로 규정하는 자신의 작업 세계에 관한 것이다. 이건희는 자신의 작업을 ‘글을 그리다 - 쓰다, 젓다, 붓다, 말리다. 기다리다’로 정의한다. 구체적으로 그녀의 작업은 ‘글을 그리는 것과 쓰는 것’ 사이, 종이 죽을 만들기 위해 신문지를 매제에 ‘수평으로 뒤섞는 젓다’와 그림/글의 질퍽한 몸체를 화면 위에 얹기 위해서 ‘수직으로 물감을 쏟아내는 붓다’ 사이, 그리고 그러한 작가의 행위가 요청되는 ‘능동적인 주체로서의 시간’과 ‘말리다, 기다리다’와 같은 우연의 개입을 열어두는 ‘수동적인 주체로서의 시간’ 사이에서 작동한다. 그 외에도 우리가 언급하지 않는 또 다른 경계의 면들은 그녀의 작업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그러한 차원에서 이건희의 작업이 품은 경계는 한마디로 다차원적이다.  
이처럼 다차원의 경계 사이에 위치한 이건희의 작업은, 우리가 그녀의 텍스트를 ‘글을 그리다 - 쓰다’로 끊어 읽을 때, 그 경계가 명징해진다. 즉 ‘글을 쓰는 것이지만 그리는 것으로 읽을 때’, 그리고 ‘글을 그리고 쓰는 것으로 한꺼번에 읽을 때’, 다차원의 경계는 ‘글(텍스트)과 그림(이미지)’이 만드는 경계로 뚜렷해진다. 달리 말해 이건희의 작업에 나타난 다차원의 경계가 ‘글과 그림’의 뚜렷한 변별의 경계(글 vs 그림)로 혹은 ‘글과 그림’의 불가분의 애매모호한 경계(글/그림)’로 집중되는 것이다. 정리하면, 그녀의 작업에서 ‘그리다 vs 쓰다, 쓰다 vs 젓다, 젓다(뒤섞다) vs 붓다, 젓다/붓다 vs 말리다/기다리다, 말리다 vs 젓다’의 다차원의 경계는 ‘그리다와 쓰다(그림과 글)’ 혹은 ‘그리다/쓰다(그림/글)’의 경계 사이에 수렴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다차원의 경계 사이에 올라선 이건희의 회화는 시각 예술 내부의 조형 미학에만 매몰되어 있지 않고, 시각 예술 외부의 사회학적 관심으로부터 발화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이건희의  〈종이 위의 종이(Paper on Paper)〉연작이 시각예술의 조형 실험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말하는 종이(Talking Paper)〉 연작은 이러한 작가의 사회학적 관점을 여실히 함유한다. 신문 기사가 함유하는 국제 정치의 대립, 재난, 범죄와 같은 사회적 갈등과 같은 거시적 담론뿐 아니라 기사 속 건강, 취미 등 다양한 미시적 담론을 작가의 시각 예술이 은유의 방식으로 조용히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희의 작업은 가히, 데리다가 언급하는 에크리튀르(écriture)의 현현(顯現)이라 할 만하다. 문자 언어인 ‘글’을 지칭하는 에크리튀르는 음성 언어인 ‘말’이 유지했던 서구 전통의 ‘로고스 중심주의(logocentrisme)’가 만든 경계를 타파하는 조용한 무기다. 발화자의 생생한 로고스(말)를 흔적으로 고착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여 부재만 덜렁 남기는 것으로 폄훼되었던 에크리튀르(글)는 로고스가 만든 경계 너머의 주변으로부터 중심으로 서서히 자리 이동을 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에 의해 해체되고 뒤집힌 신문지 속 텍스트와 콜라주로 드러낸 텍스트들의 분열적 재조합과 병기된 수기의 텍스트는 그림/글 사이의 경계와 로고스/에크리튀르의 경계를 넘실거리며 넘나든다.  


이건희, Talking Paper 260x163cm, 수제 한지 위 혼합재료, 2018




2. 이우현의 흔적 - 혼(混)/돈(沌)  
이우현의 작품은 표면적으로 ‘능동(能動)의 회화하기’와 ‘피동(被動)의 회화되기’의 경계에 서 있고, 심층적으로는 ‘부재/존재’와 ‘실재/실재’ 사이의 경계를 서성인다. 즉 그의 작품의 대표적 속성인 흔적(trace)에 뒤섞인 ‘가상/실재, 부재/존재, 실재/실재’ 사이의 경계를 배회함으로써, ‘혼돈(混沌)으로서의 흔적’ 달리 말해 우리의 작명인 ‘혼/돈 흔적’을 조형적으로 성찰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이우현의 작품을 보자. 그의 작품은 일상의 주변에서 발견한 자잘한 쇠붙이를 주워와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작은 크기로 잘라낸 코튼 린터(cotton linter)라는 ‘섬유질의 펄프’로 뒤덮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각종 기계 부속이나 납작하고 작은 크기의 쇠붙이는 자신과 코튼 린터의 표면 사이에서 ‘산화되어 가는 녹’이 형성하는 ‘습기 침투와 건조 작용’에 의해 서로의 몸을 접착하여 결과적으로 저부조의 콜라주를 만든다. 
이처럼 이우현의 〈기다림〉 연작은 작품명에서 보듯이, 작은 쇠붙이의 산화와 자연 건조 작용을 작가가 시간을 투여하여 묵묵히 기다린 결과물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작가의 ‘능동의 회화하기’는 실상 기다림 속에서 가능해진 것으로, 어찌 보면 ‘발견된 오브제’라는 사물 자체가 시간 속에서 변모하면서 ‘저절로 만들어진 회화’라는 점에서, ‘피동의 회화되기’이기도 하다. 특히 코튼 린터의 표면에 달라붙었던 작은 쇠붙이들은 전시의 과정에서 접착력을 잃고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가기도 하는데, 이때 오브제는 사라지고 오브제의 자취만이 화면 속에 남게 된다. 한때 사물이 “거기에 있었다(Çà a été)”라는 완료형의 사건을 가시화하는 이 ‘흔적’은 이우현의 작업 속에서 주요한 조형 개념인 셈이다.     
‘흔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호학의 언어로 진술하면 지표(index)와 같은 것이다. 지표는 ‘표상하는 사물과 의미 사이의 인과 관계와 상관성을 드러내는 기호’이다. 한 발레리나의 발가락에서 발견되는 굳은살은 혹독한 연습의 시간을 거쳤음을 알리는 지표이며. 한 어린아이의 무릎에 난 멍 자국은 얼마 전에 타박상을 입게 된 사고가 있었음을 알리는 지표다. ‘흔적’이라는 것이 “어떤 현상이나 실체가 없어졌거나 지나간 뒤에 남은 자국이나 자취”를 의미하듯이 ‘지표’ 또한 사물과 사건의 인과 관계를 추적하게 만든다. 이처럼 지표는 대개 흔적으로부터 오고, 흔적은 많은 부분 지표와 같은 의미로 묶인다. 
이우현은 또 다른 유형의 작품에서 이러한 ‘흔적’의 미학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실험한다. 일상에서 발견된 쇠붙이를 코튼 린터로 덮는 것이 아니라 쇠붙이를 넓은 장지 위에 올려놓고 물을 뿌려 가며 변화를 기다리는 작업이 그것이다. 이 작업은 습기를 먹은 쇠붙이가 만드는 녹에 의해서 화면 위에 이미지를 만든다는 점에서 이전 작업과 동일하지만 쇠붙이가 최종적으로 제거된다는 점에서 변별된다. 물론 이 작업에서도, 물을 뿌리면서 의도적인 형상을 만들기보다 물을 뿌린 후 쇠붙이가 공기와 결합하며 만들어내는 화면 위의 녹의 생성을 자연스럽게 열어 둔다는 점에서, ‘기다림의 미학’과 ‘우연성의 흔적’은 지속된다.     
한편, 오브제로서의 쇠붙이가 아닌 철분 자체를 작업에 도입한 또 다른 작품에서 녹물이 만드는 이미지는 이우현이 제시하는 ‘혼돈 흔/적’ 즉 ‘혼돈으로서의 흔적’이라는 의미를 보다 더 강력하게 드러낸다. 섞임(混)과 엉김(沌)이라는 ‘혼돈’의 한자어에서 간파할 수 있듯이, 철분을 안료처럼 사용하는 이러한 작업에서는 이미지는 ‘사물의 흔적으로서의 이미지’로부터 ‘질료 자체의 이미지’로 이동한다. 특히 장지 위에 흑연을 칠하고 그 위에 철분을 안료처럼 사용한 또 다른 작품에서는 녹이 슨 표면을 강력한 코르텐 스틸(corten steel)과 같은 것으로 변환시킨다. 즉 ‘녹’ 자체를 ‘벌겋게 한 번 녹슨 상태에서 더는 녹슬지 않는 가장 강력한 염료’로 만드는 것이다. 달리 말해 ‘실재(철)의 흔적(녹)’을 ‘실재(철)의 혼/돈 흔적(코르텐 철)’으로 전환한다고 하겠다. 
이처럼 이우현의 작업은 ‘부재의 흔적’과 ‘실재의 흔/돈 흔적’의 경계를 서성이고 넘나든다. 마치 데리다가 ‘흔적’을 ‘있음과 없음 사이에 불확정의(indécidable)의 상태로 애매하게 걸쳐 있는 경계선’으로 살피고 있듯이 이우현의 작업에서 ‘흔적’은 허구/실재, 부재/실재, 실재/실재 사이의 경계를 배회한다. 




3. 이태훈의 차연 - 인(因)/연(緣) 
이태훈의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이미지와 시간의 경계에 서 있고, 심층적으로는 지각/인식, 계획/우연, 익숙함/낯섦의 경계를 뭉뚱그리는 ‘인연(因(緣)’ 혹은 ‘인/연’의 경계를 서성인다. 
이태훈은 자신의 사진 작품을 위해서 두 가지의 방법을 사용한다. 하나는 홀가(Holga)라는 장난감 카메라를 통해서 대상을 겹쳐 찍는 방식으로 이미지와 시간의 경계를 서성이는 사진이고, 또 하나는 휴대폰(아이폰)으로 대상을 즉석에서 촬영하는 방식으로 이미지 속 일반과 특수의 경계를 서성이는 사진이다. 두 연작 모두에게는 지각/인식, 계획/우연, 익숙함/낯섦의 ‘대비적 한 몸’이 동시다발적으로 함께 일렁인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작품을 보자. 이태훈이 ‘홀가’라는 장난감 카메라를 가지고 필름을 다 감지 않은 상태로 필름을 조금씩 움직여 가며, 풍경이나 사물을 찍어 이미지를 중첩한 〈Parallel Spaces〉 연작은 최종적으로 좌우로 겹쳐지거나 연접하는 이미지를 선보이게 됨으로써 마치 이미지를 포토 콜라주나 포토몽타주로 뭉쳐 놓은 결과물을 낳는다. 동일한 사물들이 반복적으로 재생되어 사진 내부의 인접 거리에 재배치되어 있는 이미지는 일견 단순한 메이킹 포토(making photo)의 하나처럼 보이기도 한다. 단순한 이미지 안에 그가 담아내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공간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나의 프레임 안에 귀환시켜 병치’시킴으로써 “빛을 찍는다”라고 하는 가장 근본적인 사진 미학에 대한 성찰을 담고자 한다.  
우리가 사물을 보고 풍경을 본다는 시각적 행위는 결국 빛에 대한 지각(perception) 행위이며, 그 사물이나 풍경이 가슴에 들어와 불쾌와 쾌를 유발하는 까닭은 지각에 대한 ‘인식(cognition)’이 작동하는 이유에서이다. 그런 면에서 ‘지각’이란 인식에 도달하기 이전에, ‘이미지와 한데 얽혀 있는 거친 메시지 덩어리’를 몸이 깨닫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 인식이란, 시각, 청각 등의 감각이 야기한 지각을 통해 ‘명료하고도 확실한 메시지의 묵직한 덩어리’를 어떻게 ‘언어화된 메시지’로 머리로(어떤 면에서는 가슴으로) 깨닫는지와 결부된다.
이태훈이 장난감 카메라를 통해 시도하는 중첩 촬영의 전략은 사진 촬영 당시의 시공간과 프레임의 제약을 벗어나고자 한 시도이다. 이러한 실험은 계획과 우연의 효과를 중첩한다. 지각과 인식 행위가 순차적이긴 해도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거나 마치 한 몸처럼 이해되는 것처럼, 그가 시도하는 ‘계획(적 실천)’과 ‘우연(적 효과)’은 시간 속에서 수많은 상황을 만나면서 익숙함과 낯섦 사이에 무수하고도 모호한 경계를 만든다. 
한편, 이태훈이 일련의 스냅 촬영의 방식으로 풍경이나 사물을 휴대폰으로 촬영한 〈Path〉 연작은 그의 말대로 “늘 보던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느껴질 때를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이 사진 연작은 익숙함과 낯섦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지속적으로 서성였던 과정이자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벽에 유령처럼 드리워진 식물과 사람의 그림자, 어린이 놀이터의 어두워진 풍경 사이로 붉은빛을 밝히는 한 교회의 십자가, 텅 빈 그네 뒤편 바닥에 드리워진 맞은편 한 아이의 그네 타는 그림자가 이러한 결과물을 만든다. 이전 작품에서도 이러한 이미지를 살펴볼 수 있다. 우산이 한쪽에 놓인 물기 어린 바닥에 창문을 통해 비추는 한 줄기 빛이 만드는 풍경, 상점의 유리창을 관통하는 빛이 골목길에 드리운 텍스트 그림자, 차창에 비친 일렁이는 밤 풍경, 가로등에 반짝이는 도로 위의 주차 경계선 등. 이러한 모든 이미지는 그에게 ‘익숙하고도 낯선 풍경’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에게는 낯선 것이지만, 다른 이에겐 너무나 익숙한 것일 수도 있고 또 반대의 경우도 무수히 많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바르트(R. Barthes)의 푼크툼(punctum) 비유에서 보듯이 이미지는 관자에 따라서 다른 의미로 수용된다. 그런 면에서 누구에게나 보편적 대상은 아예 존재하지 않고 특수한 대상만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앞의 이미지가 이태훈에게 익숙함/낯섦 사이의 경계를 서성이게 만든 까닭은 무엇인가? 작가는 그것을 푼크툼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인 ‘인연’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태훈이 자신의 사진 안에 포섭한 이미지는 결국 그가 세계와 맺은 인연인 셈이다. 
이태훈의 이러한 인연과 연동되는 사진 미학은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의 개념과 연동한다. 데리다가 차이(différence)라는 불어에서 모음을 바꾸어 창안한 이 비평 개념은 ‘다르다(differ)’와 ‘지연시키다(defer)’를 포함함으로써, 모든 것의 ‘지속적인 의미의 불확정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태훈의 작품은 지각/인식, 계획/우연, 익숙함/낯섦 등 이미지를 둘러싼 대립항들을 ‘차연이 만드는 경계’ 속에서 서성이게 만든다. 때로는 인연처럼 겹쳐지고 미끄러지면서 말이다. 




4. 구성균의 해체 - 묘(妙)
구성균의 작품은 표면적으로 구상/추상, 중심/주변, 질서/혼돈, 미(美)/추(醜) 사이의 경계 근처에 거주하고 심층적으로는 ‘자유’와 ‘오묘(奧妙)’를 지향하는 가운데 앞의 이항대립의 경계를 해체한 둔덕 위에서 서성인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기 이전에 유념할 것이 있다. 작가는 말한다. “이분법적인 중간을 의미하는 경계가 아닌 타자에 의해 규정된 논리와 개념들을 ‘경계’하여 주체적 삶 속에서 나 자신이 체험하고 느낀 세상의 현상들을 기억하고 기록해 가면서 체득된 경험을 나의 감성 즉 오감이 발현된 결과물들을 잉태해 가는 것이 나의 삶이자 작업”이라고 말이다. 작가의 언술에서 우리는 구성균이 ‘경계(境界)’ 자체를 사회와 제도에서 중심이 된 모든 것들에 대한 ‘경계(警戒)하기’로 치환하는 태도를 살펴볼 수 있다. 즉 그는 사회와 제도 속에서 B급으로 평가절하하거나 비정상 혹은 소수자로 만들어 주변으로 밀어낸 ‘모든 타자의 것들’을 추슬러 담아내고 작업하는 것에 골몰한다. 그것은 있음/없음, 중심/주변의 경계 속에서 타자화된 모든 것들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의 작품을 보자. 한지 위에 실제 붓으로 쓴 고서(古書)의 낱장을 뜯어 콜라주로 배치한 화면 위에는 낙서처럼 마구 휘갈겨 그린 드로잉과 더불어 만화 주인공 도널드 덕(Donald Duck)이 마치 할리우드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영화 제작사 로고(logo)처럼 혹은 공적 문서를 보증하기 위해 찍힌 인장(印章)처럼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또는 도널드 덕 대신에 가짜 젖꼭지가 마치 우주선의 형상처럼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만화와 같은 싸구려, 낙서와 같은 해체와 전복, 그리고 가짜 젖꼭지처럼 허위가 주도하는 구성균의 회화 연작은 ‘고서로 상징되는 제도와 규율’ 그리고 ‘그것이 품은 거시적 담론’을 무력화하고 조롱한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나는 거대한 담론이나 주제를 제시하지 않는다. 담론, 논리, 이론이 정립되는 순간 타자의 주체성을 파괴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고로 나는 ‘이것이다’라는 결론을 정의하지 않는다. 그냥 체험적 느낌들을 나열할 뿐이다. 규정화하고 규격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즉 그의 작업은 ‘규정화되고 규격화된 모든 것들을 거부하면서 제도 안으로 내던지는 시각적 메시지’인 셈이다.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전에 참여했던 구성균의 전시 리플릿에는 ‘진공모유(眞空妙有)’라는 희미한 글씨가 인쇄되어 있다.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절대의 진리는 공에도 유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의 이 말은 진리라는 것이 ‘별도로 분리된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인연의 조합’임을 강조한다. 즉 선/악, 참/거짓의 경계가 변별된 것이 아니라 음양오행의 조합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자, ‘모든 것이 하나로부터 근원’한다는 동양의 일원론적 사유로부터 형성된 것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구성균의 작업을 굳이 언급한다면 ‘데리다’식의 ‘해체적 일원론’이 연동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데리다의 해체(déconstruction)란 서구에서 플라톤 이래 지속되어 왔던 ‘이원론적인 형이상학’의 해체 작업이자 일종의 자기 비판적 성찰이다. 지배적인 것들, 구조적인 것들, 관습적인 것들에 대한 부정을 통해 본질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의미 부여를 가능하게 만든 사유의 그릇이자,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것들에 대한 복원과 재해석을 가능케 한 사유의 그릇이기도 하다.
구성균이 골몰하고 있는 ‘자유’와 ‘묘(妙)’의 차원은 이러한 ‘해체적 일원론’의 전략인 ‘탈(post, anti)’과 합(complex, fusion)의 전략을 취한다. 선현들의 철학과 교훈적 지식에 어깃장을 놓고 예술가 거장들이 성취한 미의 질서를 조롱하고 미/추, 절대/상대의 경계를 해체하여 재구조화하는 것이다. 
흘려진 물감과 붓질이 난무하는 ‘해체적 드로잉’을 배경으로 액자 테두리로 둘러싸인 투명 혹은 불투명 거울 이미지가 자리하는 작품이나 일필휘지의 드로잉과 스크래치가 뒤섞인 ‘꽃잎의 이미지’로 가득한 작품으로 구성된 〈Organic Particles 〉 연작은 그가 말하는 ‘자유’와 ‘묘’의 상태뿐 아니라 이러한 ‘해체적 일원론’으로 도달한 ‘유기적 상황’과 관련한 회화적 사유를 수렴하기에 족해 보인다. 


구성균, Organic Particles, 100×100cm×4, mixed media on metal, 2015


4. 나오는 글 
‘경계에 서다’라는 전시명으로 모인 네 작가, 이건희, 이우현, 이태훈, 구성균의 작업을 우리는 지금까지 순서대로 에크리튀르, 흔적, 차연, 해체라는 데리다의 철학적 비유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네 작가의 모든 작품을 데리다라는 한 철학자의 사유로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하나의 키워드로 한 작가의 풍부한 예술 세계를 모두 풀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오래된 ‘경계’로부터 ‘탈경계’의 담론을 견인한 후기구조주의 철학자 데리다의 사유는 ‘경계에 서다’라는 전시명으로 뭉친 이들 네 작가의 작품을 들여다보는 여러 ‘창(窓)’ 중 ‘주요한 하나의 창’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데리다의 철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고집하는 필자’의 무모하거나 어설픈 해설이 빚은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필자의 몫이다. 그런데도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부족한 이 글이 ‘경계의 키워드를 공유하는 네 작가의 작품’을 들여다보고 ‘경계의 언저리에서 잉태하는 네 작가의 시각적 발화’를 살펴보는 관객들에게 하나의 ‘작은 안내서’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

출전/
김성호, 「경계의 언저리에서 잉태하는 시각적 발화」, 『경계에 서다』, 전시 카탈로그,
(경계에 서다 展-이건희, 이우현, 이태훈, 구성균, 2020. 5. 12~ 8. 1, 구룡표예술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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