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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조은필전 / 별을 내려다보는 밤 - 물질적 상상력이 미술이 될 때

김성호



별을 내려다보는 밤 - 물질적 상상력이 미술이 될 때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프롤로그
《조은필 개인전 - 별을 내려다보는 밤》에는 푸른색 풍경이 자리한다. 벽면에 투사되고 있는 짙푸른 코발트블루의 영상, 천장에 매달린 채 회전 운동을 하는 푸른색의 천, 벽면에 도열되어 있는 오래된 액자를 둘러싼 푸른색 직물이 발하는 ‘블루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관객은 작가가 숨겨 놓은 푸른 밤과 푸른 별을 맞이한다. 전시 속에 숨겨둔 블루의 밤과 별?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순전히 관객이 ‘마음의 눈’으로 보고 읽도록 이끄는 작가 조은필의 개인전 속 메타포(metaphor)라 할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말대로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는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대체하여,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무엇으로,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복수의 조형적 은유’라고 할 수 있겠다.  



‘별을 내려다보는 밤-g’



I. 밤과 별 - 복수의 은유 
조은필은 이번 개인전을 “사물이나 어떤 것을 단지 일상의 그것으로 인지하기보다 모든 것을 묘하고 생소하게 보이게끔 하는 것에서 출발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번 전시는 “시간이라는 것도 공간이라는 것도 우리가 경험했던 방식과는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러한 의도는 ‘별을 내려다보는 밤’이라는 주제명에 함축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즉 ‘별’은 실제의 전시장에서 볼 수 없지만, 그것을 ‘눈(육안)’이 아닌 ‘다른 눈(심안)’으로 볼 수 있다는 ‘잔잔한 역설’이 맞물리는 것이다. 
‘별을 내려다보는 밤’이라고 하는 도치법(倒置法)에 기초한 시적 표현의 주제는 또 어떠한가? 이 주제에는 작가 조은필의 ‘지각 관점의 전복이나 관성을 탈주하는 해석’ 또는 ‘어떠한 메타포’가 한데 겹쳐진다. 이러한 주제는 별을 별(星)로, 밤을 밤(夜)으로 지칭하는 ‘텍스트 지시성’이라는 고정적인 의미의 경계를 허물고 시적 상상력으로 또 다른 해석을 가능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그런 면에서 조은필의 개인전에서 ‘별’과 ‘밤’은 우리를 다른 생각과 해석으로 이끄는 하나의 메타포이다. 즉 상상력으로 실천하는 ‘은유 전략’이라 하겠다. 그것은 복수적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작가가 내세우는 주제어 ‘밤’이란 그 자체로 수많은 은유를 껴안은 신비의 시간이다. “밤이라는 시간은 모든 것을 모호하게 하기도 감상에 빠지게도 하는 마법과 같은 시간이다. 그리고 낮이라는 시간의 빛을 차단하고 이내 기존의 세상이 가진 색을 잃게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처럼 밤은 낮 동안의 익숙한 모든 것들을 낯설게 만드는 존재이다. 시지각의 착각, 오해 등을 이끌면서 ‘어떠한 것들’을 ‘다수의 다른 것들’로 인식되도록 만들기 십상이다.
‘밤’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의 어둠의 공간이자, 어둠으로 인해 실재를 판별하기 어렵게 만드는 시간이다. 따라서 ‘밤’은 마치 주체/객체, 시간/공간이 뒤섞인 현상적 존재이다. 그것은 마치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플라톤으로부터 차용해서 언급하고 있는 코라(Chora)와 같은 외디푸스 이전의 혼성적 시공간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사물 인식에 대한 판별 불가나 오판을 끌어냄으로써 피상적으로 부재와 혼성의 공포를 함유한 네거티브의 시공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밤은 다른 차원에서 포지티브의 시공간으로 작동한다. 크리스테바가 언급하는 코라가 어원상 의미에서 ‘우주의 자궁’이란 별칭을 가진 것처럼, 밤은 이내 잉태와 생성을 야기하는 포지티브의 시공간으로 현현되기에 이른다. 밤이란 현실의 실재를 소멸시키고 부재의 어둠으로 내모는 시공간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상상을 현실에 덧씌우고 실제와 다른 환상의 존재를 불러오는 시공간이기도 한 까닭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밤은 보이지 않는 것이자 동시에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부재/존재, 소멸/생성을 한꺼번에 껴안은 시공간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밤은 대립되는 많은 것들을 어느 것 하나 배척하지 않는 수많은 은유를 불러온다. 부재/존재, 소멸/생성뿐 아니라 시간/공간과 같은 물리적 개념을 뒤섞고 공포/평안과 같은 심리적 개념마저 한 몸에 품어 안는 수많은 ‘복수의 은유’와 접속한다.  






II. 보이지 않았던 것들 - 푸른 기호  
조은필의 개인전에는 밤과 별로 대별되는 ‘복수의 조형적 은유’가 전시장 전체를 유영한다.  그것은 ‘보이는 것’ 이면에 실존하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의미화 과정을 구체화시키는 무엇이다. 달리 말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지각과 인식의 의미론적 실천’이다. 그래서 그녀의 은유의 전략은 ‘기호 작용(sémiosis)’, 더 정확히는 시각 기호(signe visuel)의 과정’을 주저 없이 껴안는다. 그것이 무엇인가? 
조은필의 개인전에서 복수의 은유를 품은 ‘별’과 ‘밤’은 ‘푸른 밤과 푸른 별’로 대별되어 나타난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그녀의 전시에서 푸른빛은 밤과 별을 특정한 의미를 지시하거나 형상화해서 드러내지 않고 기호처럼 시각화될 따름이라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푸른빛은 별과 밤을 잇는 필연성을 내포하지 않는다. 그저 오랜 시간 인구들에 회자되면서 동시대 사람들이 여전히 사용해 온 이미지와 맞물리면서 연동되는 기호로서 기능할 따름이다. 즉 푸른빛은 자의성, 사회성, 역사성을 거쳐 ‘별/밤’과 맺어진 기호인 것이다. 그래서 짙은 어둠의 우주 속 떠도는 푸른 별이나 축축한 우주의 습기를 먹은 별을 연동하거나 혹은 미명의 푸르른 새벽하늘을 품은 청연(淸姸)한 밤을 연동시킬 때도, 푸른빛은 단지 ‘별/밤’과 자의성, 사회성, 역사성에 기초한 기호로 맺어진 것일 따름이다. 
조은필이 작가 노트에서 “전시에 등장하는 푸른색은 단지 기호의 색이 아니라 어둠, 밤”임을 진술하고 있듯이, 그녀의 블루는 기호와 은유가 연동한다. 따라서 조은필의 이번 개인전에서 창출되는 ‘밤의 시공간’은 ‘별과 밤’이 잇는 ‘복수의 조형적 은유’와 ‘푸른빛의 시각 기호’ 혹은 ‘블루 기호’와 연동하면서 밤의 시공간을 창출한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개인전이 표방하는 ‘별을 내려다보는 밤’이라는 주제는 하나의 거시적 은유이자 기호로서 b, c, g, s, t라는 또 다른 미시적 은유와 기호들을 아우른다는 것이다. 즉 이번 개인전에 등장하는 돌, 나무, 액자와 같은 무수한 ‘발견된 오브제들(objets trouvés)’은 고유의 사물성이 명확하지만, 전시에 등장하는 각 작품을 ‘별을 내려다보는 밤-s’, 별을 내려다보는 밤-t, 그리고 별을 내려다보는 밤-g‘와 같은 방식으로 b, c, g, s, t와 같은 불명료한 문자 기호를 연동시킴으로써 ’사물이 품은 의미‘를 확장한다는 것이다. 즉, 각 작품에 특정 사물을 연상케 하는 영어 단어(bubble, conch, gown, stone, tree)의 맨 앞쪽 알파벳만 표기하여 ‘불명료한 지시 기호화’를 실행함으로써 눈에 빤히 보이는 사물의 특성 아래 숨겨져 있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수면 밖으로 드러내고 그 고정된 의미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브제의 피부를 덮은 푸른 직물이나 안료는 그 의미의 확장을 이끄는 ‘시각적 기호 작용의 주체’이자 언어와 비언어 사이를 연결하는 ‘유의미한 매개 주체’가 된다. 즉 ‘복수의 은유’를 연동하는 ‘푸른 시각 기호’인 셈이다.  


’별을 내려다보는 밤-c’ 는 소라껍질


III. 살아나는 오브제들 – 물질적 상상력 
조은필이 일상의 공간으로부터 전시장이라는 예술의 공간으로 가져온 사물들, 즉 ‘발견된 오브제들’은 블루의 피부를 덧입고 미술 작품으로 변모한다. 그것은 일상품에서 예술품으로의 자격 전환을 시도한다. 또한, 오브제들은 블루의 마술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보이는 것들‘로, ’죽은 것들로부터 살아나는 것들‘로 전환된다.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비가시성으로부터 가시성으로 변환되는 지점의 매개 주체는 블루의 빛이나 물감 혹은 블루의 직물이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조은필의 작업에서 블루라는 시각 기호가 낳은 밤과 별이라는 복수의 은유는 ‘잠재적 움직임(Mouvement virtuel)’이든 실제적 움직임(Mouvement réal)이든 ‘운동성’을 동반하게 되면서 죽어있는 사물들에 비로소 생명력을 부여하고 살아나는 사물들로 변모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바슐라르(G. Bashlar)식으로 ‘시적 상상력(Imagination poétique)’에 덧붙여 ‘물질적 상상력(Imagination matérielle)’으로 칭하기로 한다. 오늘날의 창조적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몽상이 야기한 시적 상상’이란 바슐라르의 관점으로 말하면 ‘의식의 흐름’이다. 그것은 운동성을 동반한다.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또한 움직임을 동반한다. 그에 따르면, 대상의 표면에 머무르는 ‘형태적 상상력’(imagination formelle)이란 얼음의 외형처럼 고정화된 것일 뿐이고 대상의 표면과 내면이 함께 침투하는 ‘물질적 상상력’(imagination matérielle)이란 얼음, 물, 수증기처럼 변화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은필의 작업이란 ‘형태적 이미지’(image formelle)를 벗고 되찾은 ‘물질적 이미지’(image matérielle)라 할 만하다. 왜?
조은필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보자. 작품 〈별을 내려다보는 밤-b〉는 전시장의 벽면을 ‘버블 건을 쏘아 만든 천’으로 둘러싼 것이다. 버블은 완성된 작품 속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단지 얼룩진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이지만, 창작의 과정에서는 보이는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생성과 소멸을 거듭했던 운동체였음을 우리는 간파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완성의 결과물은 정적이지만 결과에 이르게 한 과정은 동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별을 내려다보는 밤-b

또 다른 작품 〈별을 내려다보는 밤-s〉에서는 창작의 과정이 동적임은 물론 그 결과물 또한 움직이고 있는 운동체의 존재임을 가시화한다. 그것은 돌이다. 조은필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 과연 가만히 있는 것일까”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돌에 관한 작품을 시작했다. 생각해 보라. 광물성의 ‘돌’이란 무생물, 무기체이며 ‘그 자체로 있는’ 즉자적(An-sich) 존재일 따름이지만, 그녀의 ‘만들어진 돌’은 ‘자신을 스스로 객관화시켜 반성적 성찰을 거듭하는 인간과 같은 대자적(für sich) 존재’로 은유되거나 더 나아가 헤겔(Hegel)식의 ‘즉자적 대자(an und für sich)’와 같은 변증법적 존재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즉 불과 땅이 만난 화성암(火成巖)처럼 단단해지고(생), 물, 불, 공기, 땅을 만난 변성암(變成岩)처럼 시련을 겪다가(로병) 퇴적암(堆積巖)처럼 흙과 땅의 몸을 섞는(사) ‘돌의 순환(rock cycle)’적 삶 자체는 이미 운동성의 과정에 있는 존재이다. 작가 조은필은 푸른 안료를 묻힌 돌 위를 스쳐 가는 ‘직물의 회전 운동’을 실행하는 기계 장치를 통해서 여러 돌 위로 안료를 지속적으로 묻혀간다. 그것은 잠자는 것으로 보이는 사물 위에 덧입히는 작가의 ‘물질적 상상력’이라고 할 만하다. “조명과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뒷골목 작은 무대의 모노드라마의 주인공과 같은 느낌”을 보여주려고 의도했던 조은필의 이 작품은 ‘사물 위에 덧입히는 물질적 상상력’으로 인해 “작고 생명력이 없고 미약하지만, 그것을 더 강조하고 싶은 의도”를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별을 내려다보는 밤-s'




IV. 에필로그  
글을 마무리하자. 앞서 언급한 작업들 외에도 어린 시절 추억 속의 인형 놀이가 회전하는 푸른 천 작업으로 소환된 〈별을 내려다보는 밤-g〉이나, 스테인리스 미러 위에 뿌려진 미디엄 섞인 푸른 안료를 천천히 회전 운동을 하는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깃털이 펴 바르는 작업인 〈별을 내려다보는 밤-t〉는 ‘별과 밤’이 잇는 ‘복수의 조형적 은유’와 ‘블루의 시각 기호’와 연동하면서 추상적인 개념의 밤의 시공간을 창출하는 것들이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 죽은 듯 보이는 것들을 살아나게 하는 운동성의 미학과 더불어 시적 상상력과 물질적 상상력이 작동한다.
특히 작품 〈별을 내려다보는 밤-t〉는 스테인리스 미러 위로 투영된 낯선 천장의 이미지에 주목하게 만듦으로써, 쉬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존재 의식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그것은 작품 〈별을 내려다보는 밤-g〉에서 선보이는 푸른 천으로 된 구조물의 회전 운동으로부터 ‘나무의 수직적 성장’ 속에 가려졌던 ‘나이테를 만드는 나무의 수평적 자라남’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별을 내려다보는 밤-t

조은필의 이번 개인전은 우리가 관성적으로 인식하던 모든 것들에 대한 전복과 도치, 그리고 일반적인 사유의 틀을 넘는 ‘시적 상상력’과 ‘물질적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사물에 대한 경험’을 선사한다. 그것은 작가의 언급대로 “이상하고 웃기기도 하고 뭔지 모를 그런 느낌”이나 “어울리는 듯하지만, 비논리적인 조합으로 (중략) 이상하고 또 환상적인 느낌”을 선사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분명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경계의 주변을 넘나드는 오묘(奧妙)의 영역이다. 달리 말해, 경계 사이의 ‘탈(post, anti)’과 합(complex, fusion)을 동시에 실행하는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호함과 묘한 위상의 무엇이다. 아래 작가 노트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러한 ‘묘한 위상’은 이 글이 언급한 ‘시적 상상력’과 ‘물질적 상상력’과 매우 유효하게 어우러지는 개념이다. 아래 작가 노트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상상이란 ‘꿈(dream)’이란 명사형이기보다 ‘꿈꾸기(dreaming)’라고 하는 동명사 즉 명사의 기능을 하는 동사 형태로 늘 ‘묘한 경계의 지점’에서 변화하고 약동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전시 ‘별을 내려다보는 밤’은 위에 언급한 점들을 바탕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들이나 바로 그것을 다른 차원에서 생각하고 모호하고 묘한 지점으로 보여주고 싶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출전/
김성호, 「별을 내려다보는 밤 - 물질적 상상력이 미술이 될 때」, 『조은필』, 전시 카탈로그,
(조은필展- 별을 내려다보는 밤, 2020.07.17.-08.15, 예술공간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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