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일상으로부터 추출되는 컨스트럭션 아트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프롤로그
미술은 ‘무엇’을 만든다는 점에서 노동이며 ‘만든 무엇’을 통해 수용자에게 감화를 주는 목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예술이다. 그것은 소비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관람을 위해 존재하는 시각 커뮤니케이션이다. 미술가 개인의 자유로운 창작 행위가 미술 작품으로 용인되기 위해서는 미술계라는 제도권 안에서 수용의 커뮤니케이션을 거쳐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러한 점에서 미술은 창작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산 활동에서부터 시작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관람자의 다중적 수용 행위로 귀결된다. 관람자가 미술을 학습하지 않은 대중이든, 미술 취미를 가진 엘리트이든, 전문 지식을 갖춘 미술 전문가이든 각자의 수용의 커뮤니케이션과 가치 평가를 통해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I. 미술 외부로부터 – 사회학적 시각 커뮤니케이션
이러한 점에서 각가 세이빈의 이번 개인전은 개인적인 창작 행위로부터 다중의 수용 행위로 자리 이동한 제도권 안에서의 시각 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 출발한다. 그의 작업은 미술 내부의 미학에 잠입하는 모더니즘 미술의 엘리트적 태도를 버리고 미술 외부의 사회학에 한층 더 잠입한다는 차원에서 미학 외부의 커뮤니케이션에 골몰한다. 더 정확히는 미술 밖의 것을 미술 안으로 가져오는 창작 행위에 집중한다. 그러한 까닭에 그의 작품들은 한편으로는 날 것의 노동이자, 한편으로는 거친 조형 언어의 미술을 정초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작업은 미술 프레임 내부의 완결성의 조형적 하모니를 추구하기보다 미술 프레임 내외부로 넘나드는 뜨거운 창작의 에너지 자체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종종 추상화로 호칭되지만, 외피를 세련되게 다듬은 색면의 ‘모노크롬 추상’이기보다 대개 표현의 열망과 단순한 조형적 제스처가 화면 위에서 꿈틀거리는 ‘표현주의 추상’을 지향한다. 그것은 때론 설치로 호칭되지만, 조각적 볼륨과 매스를 고수하는 장엄한 ‘조각적 설치’이기보다 ‘발견된 오브제(objet trouvé)’에 잠입하여 분출하는 놀이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실험하는 가볍거나 유연한 ‘해체적 설치’를 표방한다.
유념할 것은 그의 작업이 추상 회화든 설치이든 대개의 작품이 자신의 주변에서 맞닥뜨렸던 여러 공사 현장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구상되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작가 세이빈은 “건축 공사 시 높은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건축물 외벽에 설치하는 임시 가설물”인 ‘파이프 비계(飛階)’를 가지런히 집적해 놓은 장면이나 건물 외벽에 연쇄적인 흐름으로 설치해 놓은 노출 파이프들의 장면으로부터 기하학적 추상의 조형성을 발견하면서 창작에 대한 영감을 받기도 한다. 때로는 건설 노동자들이 공사의 작업 지침이나 표식을 위해서 바닥이나 벽에 거칠게 표시한 스프레이의 흔적 속에서 미술의 자유로운 표현 충동을 얻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공사 현장에서 발견한 유리창을 보호하기 위해 얼기설기 덧댄 테이프의 흔적들로부터 또는 나무판들을 이어붙인 벽면의 콜라주 흔적들로부터 자유로운 구성의 조형미술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처럼 건축 공사와 같은 노동의 일상으로부터 예술 창작의 영감을 얻어 창작에 매진하는 작가 세이빈의 작업은 가히 ‘미술 외부로부터 미술 내부로 가져온 모든 것들’을 매체로 삼아 시도하는 ‘사회학적 시각 커뮤니케이션’이라 할 것이다.
II. 탈구조로부터 - 컨스트럭션 아트
작가 세이빈은 자신의 작업을 ‘컨스트럭션 아트(Construction art)로 작명한다. 공사 현장으로부터 왔다는 의미에서 ’공사 미술‘, ’건축 미술‘로 번역될 만한 이 용어는 실제로 20세기 미술사에서 사용되었던 범례에 따라 ’구축 미술‘로 번역해 볼 만하다. 그러나 1920년대 러시아에서 실제로 유행했던 전위예술 운동인 ’구축주의‘, 혹은 ’구성주의‘로 번역되는 ‘컨스트럭티비즘(Constructivism)’이란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형식을 특징으로 하나, 산업적 재료와 실용성을 추구하며 예술이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명”하였다는 점에서 닮은꼴이자 다른 작업이다. 즉 세이빈의 작업은 외형적으로 ‘러시아 구축주의’의 기하학적 추상과 닮은꼴이자, 산업적 재료를 예술의 질료로 사용하는 방식은 유사하나, 구축주의가 지향하는 공익적인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그도 그럴 것이 ‘러시아 구축주의’는 미술 내부의 담론을 ‘예술의 사회 공헌’이라는 문제의식을 통해 미술 외부로 확장한 것이라고 한다면, 작가 세이빈의 작업은 미술 외부의 현장을 ‘예술 조형의 실험’이라는 미술 내부로 끌고 온 것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이빈의 작업을 그가 사용한 원어 그대로 ‘컨스트럭션 아트’로 호명한다. 러시아 구축주의 미술이 사회적 유용성을 화두로 한 사명감 가득한 ‘구조주의적인 미술’이라고 한다면 세이빈의 컨스트럭션 아트는 흥미와 유희가 전면에 나선 ‘탈구조적 미술’ 혹은 ‘해체주의 미술’이라고 하겠다. 테이프와 같은 가벼운 재료들의 자유분방한 구성이나 건축물에 남겨진 얼룩진 세월의 흔적을 끌어안은 그의 작업은 정합한 구조조의를 애초부터 탈주한 이른바 탈구조주의와 해체주의적 유형을 강하게 배태한다. 이러한 경향은 그가 미술의 언어 안에 가져온 비루한 일상 공간에 대해 매혹하고 있는 상황을 여실히 반영한다.
즉, 그의 미술은 미술 외부의 담론을 공사 현장으로부터 가져와 미술의 장 안에 구축함으로써 ‘날 것의 비예술적인 재료’와 ‘산업 생산을 위한 노동’이 예술품과 예술이 되는 가능성을 탐구한다. 더욱이 작가는 그 외부의 것들을 “굉장한 예술 작품”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공사 노동자들의 작업 자체를 “고귀한 노동의 흔적”으로 간주한다: “어느 날 우연히 건축물 공사 현장을 지나면서 공사 중인 1층 현관문 테두리, 모서리마다 주황색 테이프로 둘러쳐진 문짝과 바닥을 보고 그 자체가 굉장한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공사장 인부들이 작업하기 위해 그려놓은 패션, 부호, 형상 테이프 작업 등이 보여주는 순수한 아름다움, 또 그 인부들의 반복되는 동작에서 느껴지는 고귀한 노동의 흔적을 보았다.”
III. 발견된 오브제로부터 – 질료와 기호 사이
작가 세이빈은 이번 전시에서 ‘SGR 시리즈’, ‘마킹 코드(Marking Code) 시리즈’ 등 매 연작마다 개별 작품의 제목을 늘 달리하면서도, ‘컨트럭션 아트’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의 초기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의 말대로 초벌 글(rough draft)처럼 혹은 거친 에스키스처럼 느껴지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나무판 위에 테이프를 더덕더덕 붙이거나 마치 물건이 놓였던 흔적처럼 물감을 군데군데 칠한 작품들은 물론이고, 마치 공사 진행을 살펴보는 네임텍(name tag)처럼 격자무늬의 틀 위에 테이프를 붙인 작품은 기하학적 추상으로 보인다. 또한 나무판이나 유리판 위에 청소한 것처럼 비누칠한 것처럼 붓질을 하고 뒤에서 조명을 비춘 작업은 표현주의 추상으로 보인다. 이러한 ‘컨트럭션 아트’ 초기의 작업은 추상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조형 언어의 배경에는 일상의 공간으로부터 생산된 노동의 결과물을 번안한 내용을 품는다. 형식은 미술의 언어지만 내용은 일상의 언어인 셈이다.
이러한 일상의 언어를 미술화하는 그의 작업은 실제로 ‘발견된 오브제’로부터 작업을 지속한 면이 크다. 특히 그는 실제로 건축 공사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자재를 납품하거나 대여하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 설치를 하기도 했고, 경복궁 옆 국립현대미술관 맞은편에 실제로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 가서 구축된 비계 위에 색면 테이프로 설치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그가 일상의 공간으로부터 ‘발견된 오브제’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업 안에 끌어들인 작업이다.
이러한 초기의 작업은 최근의 연작들로 확장해 왔다. ‘SGR’ 연작은 ‘공사 현장의 인부들이 시멘트를 바르고 긁고 하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아서 캔버스에 담은 회화 작품들’이다. 여기에는 물감을 화면에 바르면서 물감의 엉킴과 겹침 그리고 스크래치와 같은 화면의 다양한 효과들이 결국은 예술가와 비예술가 사이에서 미술의 공간과 일상의 공간 사이에서, 인간 본연의 예술적 표현 의지와 맞물리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또 다른 작업인 ‘마킹 코드’ 연작은 그가 ‘공사 현장의 노동자들이 착공을 위해 그려놓은 패턴이나 기호 또는 그것의 색’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에는 실제로 공사 현장에서 가져온 패널 조각이나 테이프 등 ‘발견된 오브제’가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러한 오브제들은 사물이 품은 일상의 기호와 같은 양상으로 전개된다. 특히 곡선과 직선, 직선과 파선, 원형과 사각의 도형, 편재와 군집 등 제목처럼 그것은 ‘코드 맺기(encoding)’와 ‘코드 풀기(decoding)’를 감행하는 시각 기호들의 향연처럼 보인다. ‘마킹 코드’가 코드를 만들고 표시하는 일인 것처럼 창작과 연동하는 기호화 작업이다. 따라서 작가 세이빈이 만든 코드를 푸는 관객의 수용과 연동하는 기호화 작업은 이러한 마킹 코드가 펼쳐지면서 동시에 작동하게 된다.
IV. 에필로그
작가 세이빈의 작업은 노동의 일상으로부터 추출되는 ‘컨트럭션 아트’이다. 그의 작업은 미술 외부의 맥락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미술 내부의 조형 언어로 작가의 표현 의지를 발현할 뿐만 아니라, 비루하거나 고단한 비예술적 상황으로부터 고상한 예술적 결과물을 창출해 낸다.
순연한 예술 창작의 의지로부터 출발했던 초기 ‘컨트럭션 아트’는 ‘SGR 시리즈’, ‘마킹 코드(Marking Code) 시리즈’로 연결된다. ‘SGR’ 연작에는 내부로부터 분출하는 ‘표현 의지’가 일렁이고 ‘마킹 코드’ 연작에는 샘솟는 창작 아이디어와 같은 ‘개념주의’가 전면에 나선다. 그러니까 발견된 오브제라는 키워드는 동일하되, 전자는 추상 회화의 표현 의지와 ‘질료’가 맞물리고 후자는 패턴과 같은 기하학적 추상 회화의 형식미와 ‘기호’가 맞물린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는 일견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원천적인 질료’와 ‘정제된 기호’가 ‘발견된 오브제’와 함께 병존하는 셈이다.
그의 이러한 연작들은 최근의 다양한 연작들로 그 사유의 몸을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모든 가능성을 실험하는 그의 조형적 실험이 향후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공사 현장의 ‘일상’으로부터 미술 작품이라는 ‘예술’로 자리 이동한 세이빈의 작업이 확장한 사유의 몸을 지닌 채, 그만의 독특한 ‘컨스트럭션 아트’를 펼쳐 보이길 기대한다. ●
출전/
김성호, 「노동의 일상으로부터 추출되는 컨스트럭션 아트」, 『세이빈』, 카탈로그, 2020
(세이빈(Seivin) 展 _공사중, 2020. 6. 2~2020. 07. 26, 2ND 아브뉴 갤러리)
김성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