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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박시현전 / 버려진 것들에 대한 기억과 미완의 예술

김성호

버려진 것들에 대한 기억과 미완의 예술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 추상으로부터 
박시현의 작업은 추상으로 대별된다. 화면 위에 수평과 수직이 교차하는 ‘기하학적 추상’은 물론 즉발적인 회화적 행위에 집중하는 ‘표현주의 추상’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작업은 추상의 모든 것을 실험해 왔다. 주지하듯이, 전자는 이성이 작동하는 구조적인 ‘차가운 추상’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감성에 의탁하는 탈구조적인 ‘뜨거운 추상’으로 회자된다. 동시대의 추상화가 부여받은 사명은 이러한 양분된 해석을 넘나드는 다양한 실험 속에서 형식과 내용 면에서 변화를 도모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안다. 동시대 추상미술이 ‘전위미술=추상미술=모더니즘=실험미술이라는 등식’을 거부하면서 형식과 내용도 제각각인 이른바 ‘다원주의 추상’의 시대를 열어젖히고 있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날 다원주의 추상은 ‘새로운 장르의 미술’을 찾는 집단적 실험을 그만두고 비평가 그린버그(C. Greenberg)의 고루하고도 형식적인 매체 미학에 함몰되지도 않는 오늘날 ‘추상의 존재 이유에 대한 다양한 실험과 사유’를 실천하는 중이다. 
작가 박시현 또한 이러한 추상 실험과 사유 속에서 자신만의 추상 예술을 찾기 위한 미시적 세계에 천착하는 중이다. 이러한 작가 고유의 미시적인 작품 세계는 캔버스를 중심으로 한 이전 회화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재료 실험을 하고 있는 최근작에서 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또한 그녀의 최근 실험은 동시대 추상 미술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II. 버려진 것들에 대한 기억 소환    
작가 박시현은 최근에 부쩍 이전의 캔버스 중심의 추상 실험에서 벗어나 다양한 재료 실험에 골몰하는 중이다. 그것은 대개 본 작품을 구상하기 위한 그려두었던 수많은 에스키스가 담긴 드로잉북, 운송 중 잘못된 보관으로 인해 구겨지고 찢긴 한지, 콜라주로 쓰고 남은 조각 종이, 구석진 곳에 폐기되었거나 휴지통에 버려진 비닐, 종이와 같은 가벼운 재질의 것들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재료들은 대부분 그녀로부터 무관심하게 버려졌거나 망각 속에 방치되었던 비천하거나 하찮거나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현실 속 버려진 것들이 작가에 의해서 예술 작품으로 거듭나게 된 계기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중국 상해에 23년 동안 거주하면서 말레이시아를 빈번히 오가며 작품 생활을 하던 중, 20년 전에 구입했던 한지를 계속 방치하다가 2년 전에서야 비로소 종이 작업을 위한 재료로 끌어들인 것이 첫 계기가 되었다. 옛 종이에 색을 입히고 바느질을 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버려진 것, 잊힌 것들에 대한 사유를 확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계기로 천착하게 된 종이 작업은 최근 해외 체류의 시간을 종결시키는 한 사건을 만남으로써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세계적 확산이었다. 해외에 작업실을 두고 임시 귀국했던 시간 동안 재출국이 불가능한 작금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창작에 매진하기 위한 제반 여건은 그녀에게 녹록하지 않았다. 작업실뿐만 아니라 화구와 재료도 새로 장만해야만 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박시현은 자신의 주변에서 손쉽게 창작을 위한 재료들을 마련했는데 이때 본격적으로 다시 창작의 재료로 등장한 것이 위에서 언급했던 허접한 종이류의 재료들이었다. 버려진 것들은 이처럼 우연한 기회를 통해 박시현에게 다가오고 본격화되었다. 
생각해 보자. 허름함, 구겨짐, 찢어짐 등은 ‘버려진 것들’의 지표들(indexes)이다. 기호학에서 A라는 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B라는 사건이 따를 때, B는 A의 ‘지표’라고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버림이라는 하나의 사건(A)은 구겨짐, 찢김, 허름해짐과 같은 여러 사건(B1, B2, B3)을 동시다발적으로 잉태한다. 이러한 여러 지표는 다시 ‘버리다’라는 동사가 낳은 ‘버려진 것들’로 수렴된다. 그것들은 기념하여 고이 간직해야 할 ‘보존의 자격’을 상실한 ‘배제된 것’이자, ‘잔여물’이며, 쓰임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불필요한 ‘잉여물’이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배신을 당해 연인의 자격을 박탈당한 누구이거나, 구멍 뚫린 비닐봉지처럼 보존할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배제된 것이거나, 곧 쓰레기로 버려질 먹다 남은 음식물과 같은 잔여물이거나 자신의 몸에서 나온 땀과 같은 비루하고 지저분한 불필요한 잉여물이기도 하다 
버려진 것들은 사소하고 소소한 것들이자, 대개 보잘것없고 비천하고 비루한 것들이기 십상이다. 필요와 쓰임새로부터 배제된 이것들은 쉽게 망각된다. 혹시 몰라 보관은 하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쉬이 망각된 채 부패하고 녹인 슨 상태로 방치되거나, 버림의 사건을 통해 소유자로부터 영원히 이격되기도 한다.    
작가 박시현은 ‘버려진 것들’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다. 버려진 것들을 우연한 기회에 한꺼번에 만나게 되면서, 그것들에 과거의 감정을 이입하고 현재의 연민을 투사하면서 보듬어 안은 채, 자신의 필연을 향한 새로운 작업을 전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현재는 남루하지만, 애정으로 품게 되면서 한때는 소중했었던 버려진 것들의 과거를 소환하고 그것들의 더 유의미한 미래를 예견’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어떻게?  





III. ‘다시’의 콜라주 미학
작가 박시현은 버려진 것들을 보듬어 안은 채, ‘다시(re)'라는 화두를 꺼낸다. ‘다시’라는 용어가 품은 의미는 오묘하다. “이전 상태로 또”,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라는 의미 외에도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라는 개선의 지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다시’는 시간의 흐름을 타고 상황을 과거로 되돌리는 가역적(reversible)인 것이 아니라 ‘여기, 지금(Here and Now)’에서 과거를 잇는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만드는 비가역적(irreversible)인 일이다. 철학자 베르그송(H. Bergson)이 이야기하듯이 원래 ‘삶의 시간’이란 경험적 지속(Durée vécue)이자 비가역적 지속(durée irréversible)이 아니던가? 이러한 차원에서 재활용으로 번역되는 리사이클링(recycling)이 품은 ‘다시’라는 화두에는 “과거에 쓰던 것을 다시 활용해서 새로운 가치를 입힌다”는 의미 외에도 과거로 회귀하지 않는 비가역성의 의미를 내포한다.
주목할 것은 박시현이 비가역적 의미의 ‘다시’라는 화두를 콜라주(collage)와의 조형 언어로 실천한다는 것이다. 콜라주가 원래의 공간으로부터 다른 공간으로 옮겨져 원본의 맥락을 탈각시키고 새로운 이미지의 위상을 성취하는 ‘추방(追放) 혹은 장소 전이’로 번역되곤 하는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라는 미학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작가의 작업은 이러한 전통적 콜라주의 의미와는 다른 지점을 노정한다. 즉 ‘버려진 것들’이라는 원본이 지닌 과거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보듬어 안은 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과거로도 회귀하지 않지만 과거를 버리지도 않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일련의 치유의 과정으로 가능하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바느질의 조형 언어는 대표적이다. 작품 재료로 구입했지만 쓰지 못하고 방치된 채로 보관되었던 구겨지고 찢겨진 한지를 서로 덧대어 풀칠하고 바느질로 한 땀 한 땀 꿰맨 특유의 콜라주 방식은 상처 입고 버려진 한지를 위무하고 보듬으면서 그것에 생기를 불어넣는 과정이 된다. 물론 여기에는 이러한 치유의 콜라주를 위해서 상처 입은 것들의 기억을 소환하는 몇 단계의 훼손을 거듭하는 데콜라주(décollage)의 조형 언어가 선행되기도 한다. 찢어진 한지 위에 다른 한지를 덧대는 치유가 진행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부위를 도려내는 훼손이 먼저 진행되기도 한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이식처럼 더 나은 치유를 위해 불가피하게 진행되는 절단과 같은 수술 행위인 셈이다.
그러나 박시현은 너덜너덜한 한지나 종이들에 품은 누추한 곤궁(困窮)과 비루한 피폐(疲弊)를 개선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모조리 도려내거나 그것들 전체를 은폐하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어찌 송두리째 오려내 던져 버릴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다가 현실의 삶의 지평 위로 어떠한 사건을 만났을 때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불가피한 내상(內傷)이다. 우리는 때론 자연 치유가 되도록 상처를 내버려 두거나, 긴급한 치유가 필요한 국소 부위만 감싸서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조치하기도 한다. 
박시현의 작업은 이러한 현실의 삶 속 치유의 과정과 닮아있는 작업을 이어간다. 거칠어진 피부를 연고로 치유하듯 미디엄 섞은 흰색 물감으로 도포하기도 하고, 찢어진 피부를 의료용 스템플러로 연결하고 치유하듯 찢어진 한지 위로 종이를 덧대고 바느질을 이어가기도 한다. 또한 골절된 뼈를 붙이기 위해 튼실한 깁스(gips)를 하듯이, 버려진 신문지를 겹겹이 접어 올려 연약한 화면을 보호하는 지지대를 만들기도 한다. 나아가 치유가 되길 기원하는 부적(符籍)처럼 상처 난 종이 피부 위에 물감을 뿌리고 도상적인 기호를 그려 올리기도 한다. 혹은 너덜너덜하게 상처 난 종이나 비닐의 피부를 자연 치유되도록 화면 속에 방치하기도 한다. 
그녀의 작업은 ‘다시’의 콜라주 미학은 홀로 불가능하고 데콜라주가 만나면서 전개된다. 추방과 전환이, 상처와 치유가, 처연한 우울과 초탈한 여유가 그리고 완전한 치유와 불완전한 후유증이 서로 갈등하면서 양자를 하나의 회화의 장(場) 안에서 뒤섞는다. 과거를 지금, 여기에 가져와 재조합하지만, 결코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으면서도 과거를 끌어안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면서 말이다. 







IV. 보이는 흔적과 보이지 않는 흔적   
작가 박시현 최근작이 선보이는 ‘다시’의 콜라주 미학은 ‘보이는 흔적’ 속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흔적’을 담는다. 버려진 재료들을 중첩으로 콜라주하거나 바느질로 연결하고 수를 놓는 가시적인 조형 방식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과거의 기억을 소환해서 남겨진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어 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가시적 흔적은 이질적인 조형 언어의 대립, 중첩, 화해를 거치면서 두터운 마티에르를 만들고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이러한 가시적 흔적은 작품 도처에서 발견된다. 콜라주와 데콜라주, 오리기와 덧대기, 전개하기라는 데벨로페(développer)와 감싸기라는 엥벨로프(envelopper)가 그것들이다. 여러 재료를 중첩하고 물감까지 올려서 생성된 볼록(凸)의 이미지와 중첩된 재료 사이에 비어진 네거티브 공간이나 스크래치가 남긴 오목(凹)의 이미지는 또 어떠한가? 이것들은 채움(이랑, 마루)과 비움(고랑, 골)이 연접하면서 만들어낸 가시적인 ‘물질의 흔적’을 남긴다. 
유념할 것은 이처럼 그려진 것과 중첩된 것(채움의 공간)과 그 옆에서 동시에 만들어지는 남겨진 것(비움의 공간)은 일련의 패턴과도 같은 가시적인 물질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규칙성을 갖는 평면적, 공간적인 배열”을 우리가 패턴이라고 부를 때, 박시현의 작업은 정형화되었든, 비정형화되었든, 콜라주와 데콜라주가 리듬으로 연속된 동형 반복을 통해서 다분히 ‘패턴화된 추상’을 선보인다. 접힌 신문지나 삼각형으로 접힌 한지가 수평의 형식으로 마루와 골을 반복하는 패턴을 만들기도 하지만, 땀땀이 손바느질로 이어간 비정형화된 파상형(波狀形) 패턴도 눈여겨볼 만하다, 얇은 천이나 한지의 배면으로 묽은 물감이 침투해서 만든 비정형의 얼룩과 같은 흔적이나 즉발적 붓질로 올린 표현주의 추상 회화와 맞물린 혼성적인 콜라주 연작들도 마루와 골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드는 비정형의 패턴을 만든다. 
박시현의 작품에서 이러한 물질성을 견지한 가시적 흔적이 남긴 패턴은 우연과 필연이 겹쳐지면서 우리에게 비가시적인 흔적에 대해서 곱씹게 만든다. 예를 들어 작품에서 발견되는 얼룩과 같은 우연과 붓질과 같은 필연의 만남이 그것이다. 실수로 커피를 쏟은 얼룩이나 이성적 통제의 여력이 없이 몸이 가는 데로 따라간 즉발적 붓질이 남긴 ‘우연’은 작품 속으로 개입해 들어온 ‘비자발적 회화’라고 한다면, 작가의 이성이 통제한 필연이 남긴 다양한 조형 언어는 ‘자발적 회화’를 만들었다고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수직과 수평이 각을 이룬 기하학적 추상의 구조를 마치 야외 풍경이 보이도록 문을 열어 둔 창문처럼 보이도록 의도한 것이나, 버려진 물감 덩어리나 신문지와 같은 발견된 오브제를 콜라주의 방식으로 붙여 나가는 것들은 필연이 구축한 ‘자발적 회화’이다. 그것은 어떠한 면에서 비자발적 회화를 ‘물질 주도의 시간’으로, ‘자발적 회화’를 ‘작가 주도의 시간’으로 해석하게 만든다. 가시적 흔적이란 이 양자의 시간이 질료 위에 쌓이면서 만들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쌓인 가시적 흔적 위에는 작가의 내적인 심리 상태가 고스란히 반영된다. 때로는 혼돈이, 때로는 침울함이, 때로는 희열이 교차하는 상태가 질료 위에 남긴 시간의 지층 속에서 얹히는 것이다. 버려진 것들을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소환해서 화면 위에 구축하는 창작을 통해서 작가 박시현의 내면에는 이러한 복잡다기한 감성뿐 아니라 상처와 치유를 거듭하면서 단련되었던 일련의 ‘마음의 평정 상태’가 화면 위에 올라와 앉는다. 그것은 분명 관객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흔적’이지만 관객의 마음으로 읽어내는 ‘보이지 않지만, 읽을 수 있는 흔적’이 된다.  





V, 에필로그 - 미완의 기억과 미완의 완성 
작가 박시현의 작품에서 이 글이 언급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평정 상태’는 어디에서 연원(淵源)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반적으로 몰입의 상황이 낳은 ‘도취’와 같은 감정 상태로부터 촉발되고 명상과 같은 고요함의 단계로 귀결된다. 창작의 과정에서의 몰입은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그것도 버려진 것들을 대면하면서 창작을 하는 박시현의 작업에서는, 단순한 몰입과 도취의 단계뿐 아니라 일련의 반성과 성찰 그리고 깨달음과 같은 심적 평정 상태를 야기한다. 작가 노트를 보자: “전시 막바지에 이르러 종이로 한 작업을 집중적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가장 낮고 비천한 곳에서 인류를 구원코자 탄생한 예수님을 생각해 본다. 버려진 모퉁이 돌로 주춧돌을 사용하며 보잘것없고 연약한 자를 사용하였다. 배반과 질시와 치욕을 감내해야 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고 사랑은 날카롭고 강한 것을 녹아내린다. 바느질과 물로 쉽게 찢어지는 종이와 함께 작업하는 시간은 내게는 기도와 명상, 신과의 끊임없는 대화의 시간이다.”
버려진 재료들을 다루는 창작의 과정에서 작가는 종교의 근원과 기독교의 가르침을 끊임없이 되뇌고 성찰한다. 그녀는 보잘것없고 연약한 질료에 부드러움과 사랑을 마주보게 한다. 흔히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처럼, 그녀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라고 하지만, 비루한 현실의 삶에서 그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물론 작가는 이러한 선한 이상이 현실계에서 성취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잘 안다. 다만 예술 현장에서 작업에 매진하면서 현실의 장을 늘 성찰하는 실천을 통해 한 발씩 나아가길 원할 따름이다. “우연이 필연이 될 때 하나의 점이 되고 잊힌 것은 희미하게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것에 대한 이상향을 꿈꾸는 것만으로 속에선 날마다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박시현이 말하고 있듯이, 선한 이상의 실천을 위해 마음속 자신과의 투쟁은 지속된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불멸의 바벨탑을 쌓지 않을 것과 영혼을 지켜낼 것을 언약한다”는 작가 박시현의 선언적인 진술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구약 성서의 아포리즘(aphorism)이나 궁극적으로 세상을 지칭하는 “텍스트는 인용들의 짜임”이라는 바르트(R. Barthes)의 언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 언어나 예술의 세계에서 ‘완전한 독창성’이란 의미의 오리지널은 이제는 없다는 말이 가능해진다. 남들과 차별화된 우뚝 선 바벨탑을 세우는 일이란 동시대에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알면서도 예술가들은 욕망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재능과 아이디어 그리고 자본의 힘이면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작가 박시현은 ‘버려진 것들’을 작품화하면서 예술의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다짐한다: “호흡을 가다듬고 시공을 넘나들며 우주를 한 바퀴 돌아 시간 여행을 한다. 길게 바느질한 선들은 시간의 병렬 같은 것. 도대체 시간은 무엇이지. 과거는 기억들이 압축되어 다시는 떨어지지 않고 저 깊은 바닥에 침전한 채로 모습을 드러내고 선과 색상으로 경계 지어진 영역은 이승과 저승과의 경계이다. 죽음은 때론 더 이상 경계가 지워지지 않는다.”
인생보다 예술이 길다는데, 우리는 임시적인 인생의 길이를 간과한다. 예술이란 어찌 보면 임시성(éphémère)의 예술 창작 행위에 영원성(éternité)의 예술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과정 중의 하나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것’에 ‘보이지 않은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정작 ‘보이지 않는 것’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버려진 것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려는 박시현의 최근작은 겸허하면서도 어찌 보면 윤리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기조차 하다. 과거의 버려진 것들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하는 일은 언제나 미완이듯이, 영원성의 가치를 만드는 예술 창작의 과정은 언제나 미완이다. 단지 우리가 늘 가까이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망각하는 우리 외부의 공기나 우리 내부의 들숨 날숨과 같은 존재를 기억할 일이다. 버려진 것들로부터 ‘다시’의 화두를 가지고 콜라주의 조형 언어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흔적을 더듬는 박시현의 최근 작업은 현재 하나의 변곡점을 맞이하는 중이다. 적어도 예술을 대면하는 초심을 되찾고 예술의 근원적 성찰을 외면하지 않는 가운데서 작가가 모색하는 괄목할 만한 결과들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을 기대한다. 한국에서의 20여 년만의 개인전이라는 차원에서도 이러한 우리의 기대는 유의미하다고 할 것이다. ●

출전/
김성호, 「버려진 것들에 대한 기억과 미완의 예술」, 『박시현』, 카탈로그, 2020
(박시현展- Confession, 2020. 9. 1~2020. 9. 30, 갤러리 오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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