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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TRACE전- 유주희 / 반복 흔적이 만드는 멀티플 모노크롬 - 노동과 명상 사이

김성호

반복 흔적이 만드는 멀티플 모노크롬 - 노동과 명상 사이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프롤로그 
작가 유주희의 최근작은 ‘반복 - 명상의 흔적’이라는 의미의 ‘Repetition - Trace of Meditation’이라는 제목으로 선보인다. 제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녀의 작업은 ‘반복되는 일련의 회화 행위’를 통해서 명상적인 화면 만들기에 천착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Blue, Acrylic on canvas, 33.4X53, 2015


I. 스퀴즈가 만드는 패턴 추상 
유주희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회화 행위’는 스퀴즈(squeez)로 통칭되는 ‘회화 도구 아닌 회화 도구’에서 기인한다. 대개 청소용이나 산업용 도구로 사용되는 이것은 유주희의 작업에서 붓과 같은 회화적 도구로 기능한다. ‘스퀴즈 회화’로 불리기도 하는 그녀의 작업이 지니는 오묘한 매력은 바로 이 스퀴즈로부터 유발된다. 크고 작은 스퀴즈가 화면 위에서 물감을 밀치고 당겨 만드는 ‘반복적 회화 행위’는 그녀의 작업을 비정형의 추상으로부터 일련의 정형화된 '패턴 추상(Pattern abstract)'으로 옷을 갈아입힌다.  
패턴이란 일정한 형태나 양식이 연쇄되는 이미지로 우리에겐 '무늬' 혹은 '문양(文樣)'이란 말로 익숙한 존재이다. 유주희의 작업에서 이 패턴은 전체상으로 볼 때, 마치 ‘점(點)’의 집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제각기 다른 ‘형(形)’의 집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즉 멀리서 볼 때 ‘0차원 점의 변주(變奏)’가 만든 모노크롬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그것은 ‘2차원 형(形)’의 세계들로 가득한 패턴 추상인 것이다. 이러한 최근작은 흰색과 검은색의 즉흥적인 붓질이 서로 뒤섞이는 유주희의 ‘형(形)–태(態) 연작(2001-2004)’에서 기원하고 있는 영향처럼 보인다. 이 연작들에서 나타났던 커다란 형태가 최근작에서 작은 형태로 응축된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최근작에서 패턴을 이루는 이러한 ‘형의 모듈’은 마치 점묘법의 붓질처럼 스퀴즈를 다루면서 유발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스퀴즈의 밀침과 삐침이 화면 위를 가득히 점유하게 되면서 만들어진 유주희의 ‘모노크롬 아닌 모노크롬’은 형식적으로는 비정형의 비(非)파상형 패턴 추상으로 시작한 것이지만 내용상으로 마루와 골을 지닌 물결 모양의 패턴 즉 파상형(波狀形) 패턴 추상으로 읽힌다는 점이다. 리듬으로 연속된 동형 반복을 통해서 패턴의 모듈 사이에 낮은 요철의 공간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스퀴지는 캔버스 화면 위에 물감을 미끄러지듯이 밀치면서 압착하고 확산한다. 이때 스퀴지를 사용한 회화 행위 뒤에는 요철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캔버스 위에서 물감을 밀치고 지나는 스퀴즈 행로 옆에는 볼록(凸)의 이미지를 남기고, 스퀴지의 몸체에 묻혀 끌려 나온 물감은 오목(凹)의 이미지를 남긴다. 즉 캔버스의 납작한 평면 위에서 스퀴즈가 남긴 이미지는 채움(이랑, 마루)과 비움(고랑, 골)이 연접하면서 만든 ‘물질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달리 말해 그려진 것(채움의 공간)과 지워진 것(비움의 공간)이 하나의 화면을 구성하는 ‘물질 흔적으로서의 질료적 회화’를 창출한 셈이다. 
그러나 이 대립하는 요철의 차이는 두꺼운 마티에르를 남길 만큼 크지 않다. 스퀴즈를 잡은 작가의 손동작에 따라 힘의 강약이 배분되면서 캔버스 위에 그저 얕은 마루와 골을 형성하는 미세하게 다른 물감의 두께를 남길 따름이다. 묽은 물감을 밀치고 간 스퀴즈의 행로 밑에는 캔버스의 표면색이 드러날 정도로 옅은 물감이 압착되고, 그 행로의 옆과 끝에는 좀 더 두터운 물감이 쌓일 따름이다. 마치 눈이 쌓인 마당을 밀대로 밀고 가면서 만든 흔적처럼 말이다. 
스퀴즈로 만든 유주희의 패턴 추상에는 미세하고도 낮은 진폭이지만 이처럼 포지티브와 네거티브의 공간을 흔적으로 남긴다. 

Repetition - Trace of Meditation, Acrylic on canvas, 100X100, 2018
 


Installation View, 2018, Sarajevo, Bosnia, Herzegovina



II. 멀티플 모노크롬 - 이질성의 반복   
작가 유주희의 최근작은 이전 연작들과 확연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면서도 그 작업의 미학적 심층에서는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마치 서체와도 같은 형태로 검은색과 흰색이 뒤섞이는 즉흥적이고도 표현주의적 회화를 드러냈던 ‘형-태 연작(2001-2004)’뿐 아니라 흑백의 커다란 붓질들이 뒤섞이는 화면과 중간색조의 단색면이 병치되는 ‘무제 연작’(2006-2011)과 'Landscape over being' 연작(2005-2008)에서도 물감이 뒤섞이는 스퀴즈 효과를 드러내거나 실제로 스퀴즈를 사용해서 색의 압착과 밀기 현상을 드러낸다. 즉 표현주의 회화 경향의 추상을 선보이던 이전 작업과 달리 최근작은 붓질의 집적이 이루는 모노크롬 추상을 드러내고 있지만, 이전 작품과 최근작이 동일하게 ‘스퀴즈 효과’를 함유한다. 그것이 실제 스퀴즈를 사용하든 안 하든, 색의 압착과 밀치기 현상이 작업 전반에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점은 유주희 작업이 회화 본질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하게 만든다.  
한편, 유주희의 최근작은 ‘반복이 만든 멀티플 모노크롬(Multiple Monochrome)’를 드러낸다. 복수화가 만든 균질 화면을 지칭하는 멀티플 모노크롬은 필자의 작명일 따름이지만, 20세기 추상미술의 흐름 속에서의 유주희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있어 주요한 개념이다. 매체 미학을 정초했던 그린버그(C. Greenberg)의 선언적 언명 이래 현대 추상 회화는 2차원 평면성 너머에서 오는 모든 것들을 차단하고 모노크롬과 같은 평면성 안에 잠입하는데 골몰해 왔지만, 이내 다원주의 미술이라는 흐름 속에서 혼성의 추상으로 자신을 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에게 20세기 추상미술을 견지해 온 형식 미학이라는 거시적 틀을 내던지고 개별 화가의 다양한 미시적 세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멀티플 모노크롬은 작가 유주희의 미시적 세계를 해설하는 하나의 키워드라 할 만하다. 그것은 추상의 출발이 형상으로부터 출발했음에도 복수적 형상이라는 멀티플의 과정을 거쳐 이룬 패턴 추상을 지칭하는 용어이면서도, 결국은 그 최종적 양상이 모노크롬과 같은 단색조의 균질 화면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반복이라는 화두가 담겨 있다. 유념할 것은 이 반복은 '동질성(homogénéité)의 반복'이 아니라 '이질성(hétérogénéité)의 반복'이라는 점이다. 피상적으로는 점이나 원형, 사각형과 같은 동질 도형들의 반복처럼 보이는 이미지는 일정한 크기를 지닌 ‘저마다 다른 형상들의 반복’이 만든 것이다. 사계절의 반복이 매년 다르고 우리의 일상 속 아침이 매번 다르듯이, 같은 것들의 반복이란 실상 유심하게 살피면 모두 다른 것들의 반복이다. 
유주희의 동일한 유형의 스퀴즈 행위에 드러난 반복 역시 매번 다르다. 때론 외곽을 비우거나 때론 간격을 달리하거나 때론 색을 달리하면서, 때론 미세한 형태의 변화를 도모하는 이질성의 모듈들은 그녀의 추상 회화 안에서 멀티플의 유형으로 집적되면서 멀티플 모노크름을 창출한다. 동종이형 혹은 이종이형의 것들의 반복이다. 줄여 말하면 ‘동질성의 비반복’이자 ‘이질성의 반복’인 셈이다. 

 
Installation View, Bowoo gallery, 2008, Ulsan, Korea


Installation View, Dusan gallery, 2008, Daegu, Korea


형(形) - 태(態), Mixed media on canvas, 33.3× 50, 200




에필로그 - 노동과 명상 
유주희의 작업에는 스퀴즈가 만드는 패턴 추상이 그리고 이질성이 반복하는 멀티플 모노크롬이 자리한다. 또한 거기에는 형태로부터 전환되는 얇은 물질성의 질료가, 요철의 공간이, 색의 뒤섞임이, 그리기와 지우기가 그리고 물감의 밀치기와 물감 쌓기가 함께 자리한다. 
이질성의 모듈을 단순 반복하는 유주희의 패턴 추상은 ‘수고스러운 노동의 과정’을 전제한다.  스퀴즈를 실행하는 터치 하나하나를 만들고 집적해 나가는 데 있어서 단순한 노동의 지속은 매우 고단한 육체적 노동을 수반한다. 마치 번뇌를 잊고 마음을 비우기 위해 중생의 고통을 되새기는 불교의 백팔배(百八拜) 수행을 하듯이, 유주희는 오늘도 고통스러운 창작의 노동을 이어간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노동은, 희로애락의 과거사를 소환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명상으로 이어지면서, 희열이 되고 쾌(快)의 대상이 된다. 회화의 자율성의 미학을 자기 성찰을 통해 찾아 나가는 무심(無心)의 경지와 그곳에 이르기 위한 노동 그리고 그것이 맺는 희열의 열매는 값지다. 이처럼 노동이 곧 명상이 되는 유주희의 수행적인 작업은 관객에게 자신을 스스로 되돌아보고 인간과 예술의 문제를 성찰하는 시간을 선사한다. ●


출전/
김성호, 「반복 흔적이 만드는 멀티플 모노크롬 - 노동과 명상 사이」, 『TRACE-유정희』, 카탈로그, 2020 
(TRACE展,  2020. 9. 1~11. 29, 시안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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