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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TRACE전- 황성준 / 사물 흔적으로 탐구하는 존재의 문제의식

김성호

사물 흔적으로 탐구하는 존재의 문제의식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프롤로그 
작가 황성준은 사물에 담긴 흔적을 탐구함으로써 존재에 관한 문제의식을 성찰한다. 그의 작업은 구체적으로 캔버스 천으로 뒤덮인 은폐의 장치로부터 삐죽이 고개를 내미는 사물과 그것을 프로타주로 소환하는 사물 흔적, 다양한 세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 실험 그리고 채집한 과거의 흔적을 현재의 맥락으로 개입시키는 조형 실험을 통해서 사물에 잠재된 존재를 사유하게 만드는 작업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의 작업에 담긴 존재의 문제의식이란 과연 무엇인가? 




I. 프로타주 - 흔적에서 흔적으로  
황성준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의 작업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양상은 다르지만, 흔적과 존재를 화두로 한 일련의 작업을 펼쳐 왔는데 이러한 주제를 표상화하는 대표적인 조형 기법은 프로타주(frottage)였다. 주지하듯이 프로타주는 연필, 목탄과 같은 도구로 사물을 덮은 천이나 종이 위를 문질러서 사물 표면의 마티에르가 담은 이미지를 추출하는 판화 기법의 일종이다. 
황성준은 초기 작업에서 자전거 바퀴, 나무판, 끈 등 일상에서 취한 다양한 오브제 위에 캔버스 천을 덮은 후 프로타주를 통해서 사물의 이미지를 추출하여 작품화했다. 이 기법은 실재를 재현하는 직접적인 방식 중 하나이지만, 실제 사물의 표면 이미지만을 추출함으로써 드러나지 않은 사물 존재를 유추하도록 관자를 이끈다. 즉 표면의 이미지만으로 표면 반대편이나 표면 너머의 사물 속성을 추적하게 함으로써 사물 존재에 접근하게 만드는 것이다. 황성준은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공간을 추적하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프로타주를 응용한 자신의 초기 작업에 ‘공간 추적’으로 번역되는 ‘Chase of Space’라는 작품명을 내세웠다. 
한편, 이 기법은 실재 사물의 표면 이미지를 거의 실재만큼 흡사하게 재현한다는 점에서 실재에 대한 시뮬라크르로 작동하기도 한다. 황성준은 초기 작업에서 프로타주를 통해서 얻은 나무 표면의 이미지를 기둥에 감싸서 시뮬라크르를 실재의 나무 기둥처럼 오인하도록 관객을 기만함으로써 실재와 가상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한다. 반대로 나무의 그림자를 실제 철판으로 대치함으로써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에 대해서 또 다른 방식으로 성찰하기도 한다. 
황성준에게 있어 프로타주 기법은 이처럼 존재에 대한 성찰을 이끄는 조형 언어였다. 그것은 마치 실재를 피사체 안에 가두어 과거의 존재했었음을 확인하는 사진 작업처럼, ‘과거의 시공간 속 사물’을 표피적 이미지로 추출하고 ‘현재의 시공간 속 사물의 의미’를 질문하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프로타주를 통한 공간 추적, 실재와 시뮬라크르의 식별성, 실재와 가상 이미지의 존재론적 성찰을 도모하는 그의 작업은 초기작으로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흔적(trace)의 미학적 담론과 늘 연동되는 것이다. 건축물의 벽이나 바닥의 표면을 종이와 연필로 떠낸 2010년의 작품 연작 제목이 ‘Trace to Trace’인 것으로만 봐도 그가 사물의 흔적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여실히 반증한다. 달리 말해 그의 프로타주는 ‘흔적에서 시작해서 흔적으로 마무리’되는 셈이다. 



I

I. 흔적  - 감추기와 드러내기   
황성준의 사물 흔적(trace)은 존재의 문제의식을 인덱스(index)의 개념으로 추적(trace)한다. 주지하듯이, 인덱스는 표상하는 사물과 의미 사이의 인과 관계와 상관성을 드러내는 기호이다. 기호학에서 인덱스는 ‘지표(指標)’로 번역되는데, “방향이나 목적, 기준 따위를 나타내는 표식”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분주한 식당의 한 테이블 위가 물기가 있는 것은 조금 전에 손님이 식사를 마치고 나갔다는 지표이며, 주방에 물기가 남아 있는 것은 방금 전에 설거지를 마쳤다는 지표가 된다. 또한 얼굴에 핀 검버섯은 나이가 들었다는 지표이며, 어린아이의 무릎에 난 멍 자국은 얼마 전에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음을 알리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흔적’이라는 것이 “어떤 현상이나 실체가 없어졌거나 지나간 뒤에 남은 자국이나 자취”를 의미하듯이 ‘지표’ 또한 사물과 사건의 인과 관계를 추적하게 만든다. 
황성준의 작품 속 인덱스는 특별하게도 시간의 흐름과 연동되는 흔적을 암시하면서도 사물 존재의 전체상과 부분상 사이에 나타나는 흔적을 탐구함으로써 존재의 문제의식에 천착한다. 황성준의 작품에서, 인덱스는 ‘사물이 과거에 남긴 흔적의 소환’에 집중하기보다 ‘사물 존재의 현재적 흔적 자체’에 방점을 두면서 사물 존재의 전체와 부분의 의미에 질문을 던지는 까닭이다. 맹인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면서 코끼리와는 다른 존재를 상상했던 우화를 생각해 보자. 부분은 대개 전체를 드러내기보다 전체상을 왜곡하기에 십상이다. 그의 초기작이 프로타주 기법으로 사물 존재의 전체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최근작에서는 프로타주가 작품에 일부분만 나타나면서 전체상에 대한 유추를 모호하게 만든다. 물론 이것은 작가가 의도하는 결과다. 
전체를 가리고 부분 흔적을 드러내는 작가의 의도적인 전략은 어떤 면에서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은폐와 위장이라는 ‘감추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드러내기’를 극소화함으로써 ‘드러내기’의 본질적 의미를 오히려 극대화하는 까닭이다. 2010년에 발표된 황성준의 ‘pause’ 연작은 감추기와 드러내기 사이에 함유된 작가의 이러한 역설적인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한다. 멈춤, 정지를 의미하는 포즈를 제명으로 앞세운 것은 시간의 흐름과 연동되는 흔적의 인덱스적 특징을 강조하면서도 전체와 부분의 존재론적 관계를 가시화한다. 패널 위에 올린 오브제들을 캔버스 천으로 팽팽하게 당겨 감싼 이 연작에서 작가는 캔버스 천과 오브제가 맞닿은 접촉면을 프로타주 기법으로 덧칠해 ‘양자의 만남이 야기한 흔적’을 강조한다. 
그렇다. 연필로 덧칠되어 더욱더 도드라진 이 접촉면은 흔적이다. 이것은 극히 작은 크기라서 이 흔적을 통해 캔버스 밑에 숨겨진 오브제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못 머리’에 망치를 맞아 모양이 변형된 것 같은 좁고 둥그런 면이나 ‘칼날’처럼 날카로운 표면을 지닌 금속체의 얇은 면을 상상할 수 있지만, 작가가 직접 진술하지 않는 한 숨겨진 오브제의 정체에 대한 관객의 유추는 빗나갈 수 있다. 오브제와 캔버스 천 사이의 ‘접촉 지대’에서 벌어지는 묘한 긴장감은 팽팽하게 당겨진 캔버스 천이나 시각적으로 날카로운 면이나 작은 범위의 접촉면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천 밑에 은폐된 오브제가 지닌 ‘확증 불가능성’으로 인한 것이다. 즉 그의 작품이 지닌 묘한 긴장감은 캔버스 천 밑에 보이지 않는 오브제가 실제로 무엇인지 ‘예측할 수는 있지만 확증할 수는 없는 일련의 상황’으로부터 연유한다. 
유념할 것은 그의 작품에서 감추기가 시각의 전면에 나서고 있고 드러내기는 아주 미세한 접촉면을 통해서 일부분만 가시화하고 있을 따름이지만, 오히려 이 작은 접촉 지대 혹은 흔적이 지닌 본질적 의미를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은 흔적을 통해서 존재의 실체와 실상을 확증하기는 어렵지만, 존재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논할 수 있는 상상과 해설을 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작품 속 감추기라는 전략이 이미 드러내기를 함유하고 있다는 것과 작은 접촉면을 가시화함으로써 전체상을 확증할 수 없지만 무한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한다. 이처럼 그의 감추기 전략은 수용자의 유연한 관람과 상상력 가득한 해설을 열어젖힌다. 
이번 전시에서 흔적을 화두로 한 작가 황성준의 존재에 관한 일련의 연속적 탐구는 각목이 올라가 있었던 자국을 스펀지처럼 유연한 재료 위에 남기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 설치 작품 Reflection of being(1997)의 문법을 다른 방식으로 계승하고 번안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에서 자국 난 스펀지처럼 보이는 재료는 실제로 무거운 석고로 만들어졌으며, 둔중한 각목처럼 보이는 재료는 가벼운 소재로 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설적 메시지는 관객에게 ‘보이는 것(이미지)’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실재)’에 대한 문제의식마저 곱씹게 만든다. 






III. 사물 흔적 - 사물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사물 기억으로 
이번 전시에서 작가 황성준은 실재를 가리는 은폐, 위장의 전략을 통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 그리고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본질적 문제의식에 더욱더 천착한다. 특히 조형 대상의 범주를 오브제에서부터 현실의 공간으로 전이시킴으로써 사물에 담긴 존재 문제를 미학 내부로부터 미학 외부의 문제로 확장하는 작업은 흥미롭다. 그는 시안미술관의 공간을 작업의 맥락 안으로 끌어들여, 사물 흔적의 개념을 확장한다. 마치 전시장 기둥의 실제 그림자처럼 보이도록 ‘전시장 바닥을 프로타주 기법으로 작업한 작품인 ’Standing Shadow’는 시뮬라크르로서의 이미지로 실재를 위장하면서 이미지와 그것 너머 실재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관객에게 되뇌게 한다. 아울러 이 작업은 그간의 오브제를 통해서 탐구했던 사물 흔적을 공간 흔적으로 확장하는 본격적인 실험으로 자리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황성준은 이전에도 이러한 사물 흔적이라는 테마를 현실의 공간 속에서 실현해 왔다. 여러 사물뿐 아니라 현실 공간 속의 담벼락, 바닥 등을 종이 위로 프로타주로 채집한 작업 ‘Trace to Trace’(2010)는 일상 속 사물과 공간을 재현한 기록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시안미술관 인근의 공간은 물론 그가 만난 다양한 공간의 흔적들을 촬영하여 기록한 사진을 선보인다. 앞의 프로타주가 사물과 공간의 표면을 물질적으로 재현한 기록이라고 한다면, 사진들은 사물과 공간의 표면을 이미지로 채록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대개 어떠한 사물과 공간을 만났을 때, 그것에 대한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공간 속 맥락을 구체화한다. 이러한 태도는 사물과 공간을 다분히 인간 주체의 대상화된  존재로 각인하는 관성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작업에서 읽을 수 있는 사물 흔적은 반대의 방향에서 작동한다고 평할 수 있겠다. 즉 그의 작품에서 ‘사물 흔적’이라고 읽을 수 있는 지점은 사물이 능동적인 주체가 되어 남긴 흔적이자 사물이 스스로 소환하는 자신의 기억인 셈이다. 그것은 관객에게 마치 퐁티(M. Merleau-Ponty)가 주체와 대상의 역전 현상을 설명하는 철학을 엿보게 함과 동시에 바슐라르(G. Bachelard)가 언급하는 물질에 잠입해서 형상의 만드는 인간의 상상력과는 달리 ‘물질이 스스로 형상을 만드는 상상력’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의 각기 다른 장소에 존재하는 돌들을 은색으로 도포해서 전시장 바닥과 구멍 난 벽 사이사이에 설치하고 실제 돌을 촬영한 사진을 병치한 그의 작업 ‘Trace to Trace’(2015)는 이러한 바슐라르식의 물질적 상상력(l'imagination matérielle)에 관한 메타포를 조형적으로 실천하는 것처럼 보인다. 황성준의 작업이 함유하는 사물 흔적이란 그가 기억하는 사물에 대한 흔적이라고 하기보다 사물이 기억하는 공간, 풍경, 사건의 연속적 기록처럼 보이지 않는가? 즉 그의 작업은 사물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사물 기억으로 전이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시안미술관의 공간 속에 가벽을 설치해서 골목처럼 꾸미고 그가 Zing이라 명명한 알과 같은 거대한 타원형 구조물을 설치한 작업은 사물이 주인공이 된 ‘물질적 상상력’과 더불어 이러한 ‘사물 흔적’과 ‘사물 기억’의 미학을 일깨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만든 가상의 복도 좌우로 Zing이 작가와 함께 여행했던 곳에서 다양한 풍경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배치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떠한 면에서 황성준의 창작물 Zing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기념사진이라 할 만하다. ‘Zing’s Journey’ 연작(2005)이 새로운 공간 속에서 재해석되고 현재화된 이 작업은 2층에 전시된 사물들에서처럼 사물이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되어 포착한 사물 흔적의 미학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에필로그 
작가 황성준의 최근작에는 작업 전면에 시도하던 프로타주 기법이 매우 작은 범주에 부분 적용하는 방식으로 응축된 채 시도되는 오브제 작업을 선보인다. 이러한 방식은 A와 B의 만남의 접촉 지대의 면적을 줄이면서 만남의 관계학을 더욱더 증폭시키는 효과를 불러온다. 그것은 한 주체와 타자를 맞이하는 공간을 이야기하는 것이면서도 그 공간에서 야기된 만남의 사건을 강화하는 수단이 된다. 흔적을 남기는 사건, 그것은 분명히 기호학에서 언급하는 인덱스로서의 사건이다. 그의 인덱스로서의 흔적은 이러한 만남의 사건을 현현한다. 
아울러 우리는 이번 전시에서도 그가 일관되게 추구해 온 ‘사물 흔적’을 미학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그는 흔적이나 공간이라는 키워드를 앞세우고 있지만, 우리의 작명인 ‘사물 흔적’과 연동하는 사유는 그의 전시 도처에서 발견되다. 
그의 작업은 주체와 타자의 만남의 관계학이란 존재가 무엇인지를 다른 방향에서 되묻는 작업이다. 패널 위에 오브제를 올리고 다시 캔버스 천으로 뒤덮어 팽팽한 긴장을 만들어 내는 일련의 작업을 pause(2010), Trace to Trace(2014), Breath in Breath(2017)로 달리 부르고 있는 것도 ‘흔적’을 화두로 한 그의 작업이 결국 존재에 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근원하고 있다는 방증이 된다. 또한 사물의 흔적을 현실과 예술의 공간으로 확장하는 작업은 어떠한가? 들숨 날숨을 지닌 인간의 호흡을 은유하거나, 흔적으로부터 흔적을 탐구하는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사물 흔적을 통해서 탐구하는 그의 연작은 근원적으로 존재에 대한 성찰을 지향하는 것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

출전/
김성호, 「사물 흔적으로 탐구하는 존재의 문제의식」, 『TRACE-황성준』, 카탈로그, 2020
(TRACE展,  2020. 9. 1~11. 29, 시안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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