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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불의 기억전 / 불의 땅을 찾는 아트프로젝트

김성호

불의 땅을 찾는 아트프로젝트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여기, ‘불의 땅’이 있다. 화산섬 제주는 불이 만든 땅의 생태와 역사를 한데 품는다. 한라산을 둘러싼 순상화산체와 일출봉처럼 작은 규모의 단성화산체뿐만 아니라, 기생 화산인 오름과 주상절리, 용암이 흘러 만든 계곡과 동굴 그리고 거대한 현무함 지형은 제주 곳곳에 자리한다. 나무와 덩굴이 엉클어져 이룬 곶자왈 생태 지역은 또 어떠한가? 
여기, ‘불의 땅’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2020 세계유산축전_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의 가치 향유 프로그램으로 열리는 ≪불의 숨길 아트프로젝트 – 불의 기억》이 그것이다. “유네스코에서 2007년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된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거문오름 용암 동굴계, 성산 일출봉 응회구를 널리 알리고 그 가치를 향유하기 위해 마련되는 특별한 아트프로젝트”로 소개된 이 전시는 문화재청과 제주도가 주관하는 축전의 한 프로그램으로 준비되었다. 세계자연유산의 가치를 되새길 공간을 새롭게 개척한 비공개 지역을 대상으로 전개된 이 아트프로젝트는 ‘불의 기억’이라는 특별한 전시명으로 ‘거문오름에서 용암동굴계의 흐름을 따라 바다까지 이어지는 약 20km 거리의 3개의 구간’에서 펼쳐진다. 전시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II. 불의 기억을 찾아서 
불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 지구의 한복판에 모든 것들이 용융된 마그마(magma)로 외핵(外核)을 떠다니는 존재. 그것은 때론 지각(crust)을 뚫고 나와 생물을 멸하는 화마(火魔)가 되거나 새로운 땅을 만들기도 한다. 제주의 출발은 후자였다는 점에서, 제주의 불은 생성이었다. 신생대 제3기 말에 화산 활동을 시작하여 제4기에 완성되었으니 제주는 불을 통해 땅을 만들고 선사 시대의 생명을 시작한 셈이다.  
제주의 땅은 불을 기억한다. 불이 만든 땅 위에서 하나둘 식물의 생육과 동물의 번식을 목도했으니, 자신을 잉태한 불이 얼마나 감사할까? 이곳의 인간은 또 어떠한가? 척박한 땅이지만 천혜의 자원을 지니고 살 수 있도록 터전을 열었으니 조상들이 들려준 불의 신화를 얼마나 기꺼워할까? 
불의 신화는 언제나 반갑다. 신이 자신의 것을 인간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불로 현현한 헤브라이즘 신화 속 야훼,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광야 속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던 야훼, 천상에 간직한 제우스의 번개로부터 탈취한 불씨를 인간에게 전한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접목취화(接木取火)로 불을 인간에게 전한 중국 고대 신화의 삼황(三皇)이었던 수인씨(燧人氏)! 불은 인간을 지구의 주인으로 만든 은인이자, 인간을 첨단 물질문명을 일군 ‘지금, 여기’의 현존재에 이르게 한 원동력이다. 불이 금(金)을 취해 오늘날의 인간 세계를 정교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제주의 불을 직접적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조상들이 들려주는 신화를 통해 제주의 불을 상상하고, 용암길이 만든 협곡과 용암 동굴의 흔적을 살피면서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예술의 이름으로 태고(太古)의 제주 불을 더듬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태고의 불이 만든  제주의 땅의 역사와 그 속에서의 인간의 역사를 기억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의 제목인 ‘불의 기억’은 ‘불의 기억’과 ‘불에 대한 자연과 인간의 기억’을 모두 품어 안는다. 
기획자는 “이 전시의 주인은 자연”이자 “또한 인간이 만드는 전시”라고 밝힌다. 불이 태고에 제주에 나타나 용암이란 이름으로 새 땅을 만든 후 지켜본 역사! 기획자는 그 불을 의인화해서 불의 기억을 추적하고 ‘의인화된 불이 소환하는 자신에 대한 기억’뿐 아니라, ‘제주를 낳은 불과 그 불이 낳은 제주의 땅 그리고 제주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간의 기억’을 함께 소환한다. 
다음과 같은 기획자의 말은 이번 전시의 취지를 이해하기에 족하다: “이 전시는 거문오름의 신화와 전설 그리고 용암의 불이 바다로 흘러가면서 협곡과 동굴을 만들었던 흔적을 보여주면서, 예술을 통해 세계자연유산으로서의 가치를 함께 나누고 이 코로나 시대에 인간의 문명을 반성하고 새롭게 사유해보고자 하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이 전시는 ‘불’이 만든 제주의 자연환경을 통해서 ‘자연 - 인간 - 예술’의 관계를 성찰한다. 기획자는 ‘불의 기억’이라는 제목 아래 ‘자연, 인간, 생명의 길’이라는 부제를 내세우고 다음처럼 3개 구간의 전시를 구상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다음 장에서 살펴본다.  

첫 번째 길(용암의 길) - 자연의 기억, 
두 번째 길(동굴의 길) - 인간의 기억, 
세 번째 길(돌과 새 생명의 길) - 생명의 길. 





III. 불의 기억 1_용암의 길, 자연 기억  
첫 번째 길은 '용암 협곡 또는 붕괴도랑(collapsed trench)'이라 불리는 지형을 끼고 숲길을 걷는 코스다. 이곳은 “돌과 흙이 유난히 검은색으로 음산한 기운을 띤다”는 의미에서 명명된 ‘거문오름’으로부터 분출된 다량의 현무암질 용암이 지표면의 경사를 이루면서 협곡을 깊게 만든 곳이다. 즉 화산체의 열린 부분으로 용암이 흘러나와 용암동굴의 천장이 무너지면서 만들어진 협곡이다. 
용암이 지나간 ‘용암로(路)’를 따라 구성된 이 전시 공간은 “화산섬으로서의 제주 자연의 역사를 기억하는 공간”이라고 하겠다. 불이 만든 ‘땅 아닌 땅’, 즉 현무암질의 암석이 기억하는 공간이자, 그 돌 틈새로 뿌리를 내린 채, 바위를 움켜쥐고 자라난 나무와 식물들이 가족을 이룬  숲이 기억하는 공간이다. 또한 그곳에서 팔색조, 살모사, 고사리, 지렁이, 제주 비바리뱀이 서식하면서 그 자연 기억을 연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참여 작가들은 이 공간을 “화산도로서의 제주 자연의 역사를 기억하는 공간”으로 삼고 저마다 ‘자연 기억’을 상상한다.
작가 김도형은 작품 <Door-Earth-Door>를 통해서 이러한 ‘자연 기억’의 첫 장으로 들어가는 문을 선보인다. 숲으로 들어가는 생태 탐방로의 입구를 상징적으로 선보이는 이 문은 반영체의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로 인해 자연의 모습을 넉넉히 품어 안는다.  
작가 고승현은 숲속에 돌들을 쌓아 올리거나 나뭇가지에 매단 작품 <오름의 기억>을 통해서 자연의 기억을 머금은 돌탑과 바람에 움직이는 돌들의 대화를 주선한다. 비와 바람을 가득 안은 돌들을 하나둘 쌓아 올린 이 작품은 태고의 용암로가 만든 오름 속 여러 생명체가 마주하는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작가 이승수는 숲의 줄기 식물들의 넝쿨을 잇고 주변의 현무암과 나뭇잎을 작품 안에 끌어들여 <태초>라는 제목의 거대한 알의 형상을 만든다. 그것은 자연의 생명을 잉태하는 순간을 형상화함으로써 관객에게 제주의 자연 원형을 상상하게 만든다. 
용암 협곡에 설치된 작가 김기대의 작품 <환상어>는 스텐 피아노선과 컬러 시트지를 재료로 삼아 빛을 가득 끌어안은 물고기 형상을 만들어 ‘용암로가 만든 숲’의 정령이 되고자 한다. 물속이 아닌 숲속에 자신의 몸을 내어 주는 환상어는 곶자왈을 힘겹게 오르는 관객들의 시선을 잡고 그들에게 환상적인 시각 체험을 선사한다. 
김순임은 작품 <흐르는 돌>에서 붉은 화산송이(scoria)를 와이어로 연결한 ‘거대한 화산송이 그물’을 숲속에 설치한다. “돌이 불이 되고, 불이 물이 되어 흐르고, 물이 돌이 되고, 그 돌이 물을 만들고 그 물이 생명을 만드는” 곶자왈의 공간을 자연의 기억으로부터 끄집어내어 새롭게 해석한 용암의 길을 만든 것이다.  
정혜령은 작품 <자라다_땅의 기억>에서 용암의 길을 낳은 불의 씨앗(들)을 뜨개질로 일일이 만들어 바위 위에 설치한다. 그것은 마치 돌을 뿌리로 움켜쥐고 자라는 곶자왈의 나무를 연상하게 만든다. 작가는, 용암길이 만든 환경 속에서 자라는 특유의 생태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땅이 아닌 땅’의 기억을 추적한다.    작가 서성봉은 작품 <녹색 펜스와 입마개>를 통해, 인간 주체가 행해 온 자연 보호의 의미를 재성찰한다. 자연을 둘러싼 녹색 펜스나 돌 위에 씌운 입마개는 자연을 보호하는 장치인가, 그것을 구속하는 장치인가? 그의 작업은, 인간이 ‘이미 스스로 있는 자연’에 무리하게 개입해 ‘인간을 위한 자연 보호’에만 골몰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자기반성과 자기 성찰을 곱씹는 작업이라 하겠다. 
작가 고윤식의 작품 <피어오르다>는 숲 가운데 우뚝 솟은 송전탑을 마주 보는 언덕 위에 작은 현무암 기둥들을 무수히 세운다. 제주 비석의 형태를 띤 그것들은 불이 만든 용암의 길 위에서 인간 문명을 대면하는 하나의 표식으로 자리 잡은 채, 불의 기억을 더듬어 자연에 대한 명상으로 관객을 이끈다.  
작가 부지현은 작품 <비추고 반사하다>를 통해서 자연에 개입하는 인간의 생태적 노력을 다짐한다. 스테인리스 미러 재료로 반원의 고리를 만들어 물 위에 올린 작품은 수면 위의 반영 효과로 인해 원형의 고리를 만든다. 생태 회복을 도모하는 인간의 노력에 대한 자연의 화답인 셈이다.  

고승현 <오름의 기억>

고윤식 <피어오르다>



IV. 불의 기억 2_동굴의 길, 인간 기억  
첫 번째 길의 전시가 ‘용암의 길을 통해 자연이 떠올리는 기억’을 은유한 것이라면 여기 두 번째의 길의 전시는 ‘용암이 만든 동굴의 길을 추적해서 그곳에 담긴 인간 기억’을 소환한다. 전자가 은유의 전략을 취했다면 후자는 이 공간 위에 각인된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탐구한다. 즉 동굴이 품은 사실 흔적을 추적한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두 번째 길의 전시는 거문오름의 용암동굴계 상류 동굴군 중 웃산전굴이 끝나는 곳에서 만장굴 3동굴과 2동굴로 이어지는 공간에서 펼쳐진다. 이곳은 환경적으로도 웅장한 규모와 다양한 동굴 생성물, 동굴 생태계가 유지되고 있는 장소로, 제주의 신화와 전설이 그리고 아픈 역사와 제주 특유의 문화가 함께 드리워져 있다. 다종의 문헌 신화와 무속 신화가 서려 있고, 제주 4. 3 사건 당시 주민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던 동굴들은 오늘날 4. 3 유적으로 남아서, 동굴의 길에 인간의 기억을 아로새겨 놓고 있다. 전시는 이러한 동굴 위에서 혹은 동굴 주변의 숲길 곳곳에서 펼쳐진다.
참여 작가들은 불의 용암 ‘동굴의 길’에서 옛 제주인의 기억을 소환하고 현재의 역사로 되새기면서 자신만의 언어로 공간을 재해석한다. 
먼저 작가 박형필은 용암교 인근 한 동굴 주변에, 철사와 한지로 하얀 꽃들을 형상화한 <혼(soul)>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선보인다. 용암굴에 이르는 협곡 아래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 밑에 한지로 만들어 설치한 무수한 하얀 꽃은 4.3 사건 희생자의 넋을 기리면서 제주인의 슬픈 기억을 지금, 여기에 소환하고 위무한다. 
작가 이연숙은 <빛과 소리 그리고>라는 제명의 작품을 통해서 동굴이 오랫동안 품은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한다. 얇은 두께의 사각형 미러 아크릴판을 동굴 입구의 철제 프레임에 매달고 시시각각 다르게 반사하는 빛의 효과를 시각화한다. 동굴로부터 나오는 들숨 날숨의 소리가 들리는가? 동굴 입구에 만든 무언의 메시지가 복잡다기한 어떠한 이야기보다 더 가슴 먹먹하게 들려온다. 
작가 전원길은 설치 작품 〈흐르는 생명〉을 선보인다. 함몰된 용암 협곡에 색 나무를 멀티플의 형식으로 설치해서 용암동굴에 담긴 인간의 기억을 좇는 그의 작업은 용암로의 흔적 속에 남아있는 신화와 전설을 소환한다. 한 줄의 와이어로 각각의 기다란 색 나무의 수평을 잡는 고된 창작 노동에 화답하듯, 색 나무들은 바람에 따라 자신의 몸을 서서히 움직이면서 율동으로 화답한다. 
작가 정만영은 만장굴 3입구 함몰 지역과 인근의 숯 가마터에 전시한 두 점의 사운드 인스톨레이션 작품 〈생명의 움직임〉과 〈불의 기운〉을 통해서 자신이 녹음하여 채집한 여러 생물체의 소리와 더불어 제주 자연의 소리를 우리에게 흥미롭게 들려준다. 동굴과 숯 가마터의 공간을 사운드 아트라는 이름으로 재생, 부활시킨 이 작품은 태양광 장치를 통해 작동시킴으로써 자연의 힘을 통해 자연의 이야기를 전한다.  
작가 여상희는 곶자왈 나무를 하얀 천과 은색의 인조 모발로 마치 서낭당의 신수(神樹)처럼 꾸민 설치 작품 〈영(靈)〉을 선보인다. 그 밑으로는 하얗게 이끼가 낀 현무암 형상을 신문지 죽으로 마치 두개골처럼 표현하여 설치함으로써 곶자왈에 드리워진 인간의 기억을 더듬는다.  

이연숙 <빛과 소리 그리고>




V. 불의 기억 3_돌과 바다, 새 생명의 길  
세 번째의 길에는 무엇이 있는가? “만장굴로부터 김녕동굴까지 그리고 월정리 바다로 이어지는 길”이 자리한다. 돌과 바다로 이르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 거기에 있다. 기획자가 언급하듯이, 그 길에서 펼쳐지는 세 번째 전시는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길, 공생과 공존의 길”을 모색한다.  
참여 작가는 화산으로부터 용암의 길을 따라 협곡과 굴을 거쳐 바닷가로 이르는 긴 여정의 끝을 장식하는 이 장소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생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작가 하석홍은 만장굴 입구에 설치한 작품 〈White day, Gift -wrapping〉을 통해서 자연과 인간의 공생을 이야기한다. 각종 색의 돌들을 랩으로 감싸서 바닥에 산포(散布)하듯이 설치하거나 메탈 포장지로 사탕의 형상으로 싼 후 나뭇가지에 설치함으로써 작가는 자연이 품은 신화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선물처럼 전한다. 
작가 한석경은 작품 <겁劫>을 통해서 화산 폭발 당시 시원(始原)의 제주를 소환하는 용암 나무(Lava Tree)를 선보인다. ‘흐르는 용암에 타다 만 나무가 용암과 함께 굳은 채 만들어진 용암 나무’를 형상화한 한석경의 작품은 불의 기억을 간직한 태고의 역사를 선보이면서도 용암 나무 위에 자라는 또 다른 새로운 생명과 같은 제주의 미래 모습을 상상한다. 
작가 이응우는 현무암으로 만든 ‘정낭’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대나무 구조물로 된 작품 〈돌과 바람의 화음〉을 통해서 제주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정착한 아름다운 제주의 풍습을 이야기한다. 관객은 대나무 작품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의 노래를 들으면서 제주의 과거-현재-미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작가 여상희는 첫 번째 길에서 선보였던 돌의 형상을 만든 신문지 조형물을 세 번째 길에서는 전면에 내세운다. 〈회귀의 구〉라는 제명의 이 설치 작품은 모래 무더기 위에 무수히 도열해 올라선 ‘신문지 돌’을 통해서 순환적 자연과 자연으로부터 잉태한 문명 그리고 자연과 공존해야 할 인간 존재의 문제의식을 우리에게 성찰하도록 이끈다.      
작가 박봉기의 대나무 설치 작품인 〈호흡〉은 유기적인 생명체와 같은 형상 그러나 특정하기 어려운 모호한 형상에 내재한 들숨 날숨을 끌어낸다. 대나무 사이 투과 공간으로 햇빛이 드리우는 모습을 보았는가? 그 사이로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들었는가? 그가 만든 순환의 자연 앞에서 우리는 자연의 숨결을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느끼게 된다.   
첫 번째 길의 초입에 ‘전시장 입구’로 등장했던 작가 김도형의 또 다른 작품 〈Door-earth-Door〉는 세 번째 길의 끝에서 전시 관람을 마감하는 출구로 자리한다. 스테인리스 스틸의 차가운 소재가 품은 자연의 풍광은 반영체의 이미지로 인해 따뜻하게 다가선다. 관객은 이 문 앞에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과 공생의 의미를 되묻고 또 되묻는다. 
작가 강술생은 이번 출품작 중에서 가장 작은 알갱이로 가장 커다란 작품을 만들었다. 작가는  작품 〈우후석순(雨後石筍)〉을 통해서 당처물 동굴 내부 석순의 생성 과정을 동굴 주변의 모래를 이용해서 동굴 밖에서 형상화한다. 대지미술과 같은 물리적 크기의 변주뿐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협업 퍼포먼스를 통해 자연과 생명에 대한 거시적 서사를 써 나간 작품이다.  
작가 이용덕의 〈기억의 풍경 속에 그대가 서 있다〉라는 제명의 작품은 세 번째 길뿐만 아니라 전체의 전시를 마무리하는 작품이다. 제주의 초원에서 흔히 보는 말의 형상이 특유의 나무 구조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돌고 있는 ‘지금, 여기’의 현대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채 말 한 쌍이 평화롭게 풀을 먹는 모습으로 서 있다. 당신이 본 제주의 문화유산과 그 속에서 펼쳐진 현재의 전시가 어떠했는지 관객에게 태연스럽게 물어보는 것일까?  

여상희〈회귀의 구〉

강술생 〈우후석순(雨後石筍)〉



VI. 에필로그   
우리는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통해서 제주가 품은 불의 기억을 더듬어 시원의 과거를 거쳐 왔다. 용암의 열기가 가라앉은 검은 돌 위에 자리한 ‘불의 기억’은 이제 자연에서 인간으로 이양된다. 
인간이 품은 ‘불의 기억’은 어떠한 것인가? 지금, 여기’의 현실계는 인류가 발견했던 불로 시작된 문명의 이기들이 창궐하는 시대를 지나는 한편, 그것으로 인한 패악들로 허덕인다. 인간이 인간을 구속하고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이 시대가 남긴 생태 위기는 ‘제주가 품은 불의 기억’을 따라 자연의 거대한 힘을 빌려야만 해결되는 것일까? 그런 면에서 생태학자 머천트(Carolyn Merchant)가 고찰하고 있는 ‘근본생태학(Radical ecology)' 중 반(反)인간주의, 반이성주의를 신조로 한 생태 중심주의 이념의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이나 정신생태학(Spiritual ecology)이 해결책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인간주의의 생태 운동은 답이 아니다. 머천트는 인간의 이성을 회복시키는 사회생태학(Social ecology)’을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제주가 품은 ‘불의 기억’을 소환하는 이번 전시가 우리에게 상기하게 만드는 관점이다. 오늘날의 생태의 위기 앞에서 인간과 이성은 거부되거나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공존과 공생을 위해 더욱 진보시켜야 할 무엇으로 간주해야만 한다. 
유념할 것은, 사회 변혁에 하등 도움이 될 것이 없어 보이는 현대 예술의 자유로운 정신은 오히려 인간의 지나친 이성주의를 경계하고 자연과 인간의 공생을 위해서 요청되어야 할 변혁의 자양분이라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자연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하기 위해 생태 운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인간과 공존하고 공생해야 할 친구처럼 대면하는 예술의 감성적 정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차이 있는 모든 것들의 관계 지형을 ‘동등한 항(項)들로 설정하는 상호 관계’와 ‘다양성에 대한 생태학적 가치’는 차가운 ‘이성이 주도하는 정신’보다 따뜻한 ‘감성이 자리한 정신’에서 촉발된다. 그런 점에서 예술 작품을 통해 ‘감성적 정신’이 전면에 나서는 ≪불의 기억》 전은 생태 위기의 문제의식을 성찰하고 자연과의 공존을 도모하는 ‘새로운 불’을 지피기 위한 ‘여러 불씨’ 중 ‘아직은 작지만 유의미한 불씨’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


출전/
김성호, 「불의 땅을 찾는 아트프로젝트」, 『불의 기억』, 카탈로그, 2020
(2020세계유산축전: 불의 숨길 아트 프로젝트 - 불의 기억展,  2020. 9. 4~9. 20, 제주화산섬, 용암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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