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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일반│제5회 서울은 미술관 / 일상의 대중문화와 공공미술

김성호

일상의 대중문화와 공공미술
Popular Culture in Everyday Life and Public art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저는 일상의 대중문화와 공공미술이라는 주제로 일상의 대중문화와 공공미술의 기본적인 사례 분석보다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 Figure 1

사진에는 페리스 힐튼, 톰 크루즈 등과 같은 연예인, 대중스타와 애니메이션 이미지가 있습니다. 이 섹션의 소제목을 ‘현대의 대중문화와 생활계’로 잡았습니다. 오늘날 미디어로 인해 대중문화의 영향은 매우 커졌는데, ‘오늘날 우리는 미디어가 생산하고 있는 대중문화의 물결 속에서 일상을 지속하는 생활계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디어가 생산하고 있는 긍정적인 대중문화의 콘텐츠 외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대면 커뮤니케이션을 형성하는 공론장을 와해시키고 오염시킨 경우가 있습니다. 공론장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통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버마스(Habermas)가 이 용어를 학술의 장에서 처음으로 이론화했습니다. 18세기 프랑스에는 살롱이라고 하는 응접실 문화가 있었는데, 귀족 마담이 운영하는 살롱에서 귀족뿐만이 아니라 군인, 성직자, 문인, 예술가들이 신분과 계급을 뛰어넘어 서로 정치와 문화, 예술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들이 당시에 형성되었습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살롱이나 영국의 커피하우스 같은 유무형의 공간이 하버마스가 찾고 있는 공론장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중에게 메시지의 수용을 강요하는 신문이나 TV와 같은 미디어 시스템이 이러한 공론장을 와해시켰다고 하버마스는 주장합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인터넷을 통해서 세계 각지와 연결하고, SNS를 매개로 자신의 이야기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교류할 수 있는 새로운 소통의 장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새로운 공론장’으로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 Figure 2

위의 그림을 보시면 공론장이라고 하는 것이 국가와 민족 또는 국가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교집합을 만드는 공간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새로운 공론장은 그와 같은 ‘공론장의 이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편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생활 속에 담겨져 있던 주류와 비주류, 제도와 비제도권, 상위 계급과 하위 계급의 문제의식과 보이지 않는 문화자본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죠. 인터넷을 통한 가상 세계에 구축하는 오늘날은 공론장의 모델을 재편하고 새롭게 만듭니다. 유념할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개별 주체가 선호하는 온라인 속 공론장이 각기 다르듯이, 공유 지점과 겹치는 부분도 그만큼 다양하게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대중문화가 새로운 공론장과 연동되어 끼치는 영향력은 지대합니다. ‘일상과 멀어져 있어서 예술로서 인정했던 이전 시대의 생태계’를 대중문화가 바꾸어 놓았음을 말이죠. 오늘날 대중문화는 예술이 곧 일상이자 일상이 곧 예술인 세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 Figure 3

위의 왼쪽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화상이고, 오른쪽에는 예술 아이콘이 된 그의 작품 ‘모나리자’가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은 일상과 별리되어 있는 ‘미’의 영역을 창조하는 것이었죠. 르네상스 이후로부터 ‘미’와 같은 예술 속 자율성을 찾는 움직임들이 있었는데요. 20세기 중반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지속되던 이러한 흐름은 오늘날 변곡점을 맞이했습니다. 일상과 예술을 하나로 묶는 흐름들이 생겨난 것이죠. 
다음 사진은 앤디 워홀(Andy Warhol)인데, 그는 대중문화가 유행처럼 번지던 1960년대에 자신의 팝아트를 선보였습니다. 그의 창작 대상은, 일상에서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캠벨 수프 깡통이라든가, 애니메이션 혹은 카툰, 신문에 보도된 사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대중적 문화를 예술적 소재로 사용했기에 그를 많은 사람들의 눈높이를 맞추고 문화적 기호를 같이 소통했던 예술가라고 칭했습니다. 이와 같은 팝아트의 시대에 프랑스에서는 ‘누보 레알리즘(Nouveau Réalisme)’이라는 미술 운동이 있었는데, 동일하게 대중 지향의 예술 언어를 구사했던 운동입니다. 이전까지는 예술은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던 이유로 존립 가치를 인정받았던 것인데, 팝아트 시대 이후에는 거꾸로 예술과 일상이 뒤섞인 새로운 예술의 흐름이 만들어졌습니다.
오른쪽 하단에 제프 쿤스(Jeff Koons)의 작품 ‘풍선 개’입니다. 제프 쿤스는 막대기 풍선이라는 사물을 예술 작품으로 둔갑시켰습니다. 대중적 기호, 또는 대중이 좋아하는 부분들을 예술 작품으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옛날에는 엘리트 미술이 필요했는데 오늘날에는 대중적 미술이 필요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도 천재에서 아트 스타의 영역으로 바뀌게 된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위와 같은 예술’에 대한 진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 Figure 4

왼쪽에는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Brillo Box)있는데, 저것은 세제 상품이 아닌 1964년 개인전 때 발표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오른쪽에 앤디 워홀이 슈퍼마켓에서 산 브릴로 세제 상자가 보입니다. 세제 상자를 모방한 브릴로 박스가 예술 공간에서 예술 작품이 되고 슈퍼마켓에서는 세제 상자 그 자체로 상품이 되는 상황을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Figure 5

그런데,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와 슈퍼마켓의 브릴로 박스 사이의 ‘식별 불가능성’ 때문에 아서 단토(Arthur Danto) 학자는 예술 종말을 선언하게 됩니다. 예술 종말론을 고안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일상과 예술 사이에서의 식별 불가능성, 즉 눈으로 차이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단토는 일상과 예술 사이의 식별불가능성을 논증하기 위해서 옛 시대를 추적합니다. 그에 따르면, 옛 시대에는 두 가지의 거대 서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13세기로부터 19세기까지의 예술을 바자리(Giorgio Vasari)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이후의 예술을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이야기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거대 서사(master negative)로 미술사를 쓸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제가 그 다음에 물음표를 쓴 이유는 그와 같은 커다란 이야기로 더는 써 내려갈 수가 없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상징적으로 의미합니다. 단토는 다만 미시적인 내러티브만 있을 따름이라면서 역사와 예술의 종말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일상과 예술의 관계가 있습니다.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예술의 무가치(Nullite de I’art)’를 얘기했어요. 우리는 예술이 가치 있다고 얘기하지만 보드리야르는 “예술이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문가들의 음모다”라고 단정했습니다. 전문가들이 생활을 영위해야 하므로 예술이 가치 없음을 알면서도 대중들을 현혹시키기 위해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고 겁니다. 그게 다 예술 전문가들의 음모라는 것이죠. 예술의 무가치를 주장한 그의 책 제목은 ‘예술의 음모(le Complot de lart)’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예술은 무가치하다”라고 주장했던 보드리야르의 회의론적인 시각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나름 우리에게 타당한 논리의 근거를 제공해 줍니다. 그는 일상 속에 미가 너무 많기 때문에 현대 예술이 가치가 없다고 본 거죠. 우리는 조금 전에 일상과 예술이 달라서 예술이 가치가 있던 시대로부터 일상과 예술이 한데 뒤섞인 채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 팝아트 시대까지를 함께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드리야르가 일상 속의 예술이 바로 과포화 상태로 있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얘기했던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5~16세기에는 독창성(originality)이 유일한 가치를 지녔습니다. 특히 미술 작품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는 유일성, 단품성이라는 의미가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 이 오리지널리티 개념은 점차 ‘집단적 독창성’이라는 개념으로 바뀌게 됩니다. 인상주의, 야수파, 다다, 초현실주의처럼 새로운 미술적 이즘이 계속 주창됩니다. 이전 것들과 다른 새로운 것들을 찾아가는 ‘집단적 미술 운동’이 20세기에 일어나게 되는데, 21세기에는 역전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와 같은 새로운 것을 찾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주장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게다가 이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더는 없다는 주장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창의성(creativity)만이 논의될 수있는 사회에 이르렀다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제인 공공미술은 창의성 면에서 어떠할까요? 옛날에는 대개 초상 조각이었다가 조각공원 안에 장식품처럼 들어가 있는 공공미술로 전개되었습니다. 국내의 공공미술은 이러한 유형을 거치게 되었고, 지금은 대중문화와 결합하고 있는 공공미술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창의성의 문제는 이제 대중문화의 일상 미학이 변별적 창의성을 지니고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논의로 확장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서 곰곰이 생각해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대중문화가 우리에게 주는 긍정적인 영향 외에 우리에게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없는 것일까’라는 것 말입니다. 대중주의 미학을 견지하는 공공미술이 당면하고 있는 딜레마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로 미디어를 통해서 생산되고 있는 대중적 아이콘 이미지를 크게 확대하는 방식으로 공공미술을 접근하거나, 미디어가 재생산하는 이해하기 쉬운 대중적 조형 언어로 공공미술을 포장한 채 대중에게 다가갑니다. 지나친 대중주의에 매몰된 채 조악한 조형의 공공미술을 생산합니다. 아파트 단지에 남겨져 있는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의 조악한 조형물은 대중의 눈높이는 쉽게 맞추지만 변별성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오늘날에는 제도나 행정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가벼운 대중주의로 포장된 조악한 조형의 공공미술이 양산되지 못하도록 심의를 강화하는 경향이 국내 공공미술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간의 공공미술에서 여러 가지 폐해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공공미술과 오늘의 공공미술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전에는 초상 조각의 형식으로, 이후에는 예술가의 작품을 기념비의 형식으로 보여줬던 작업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이 공공미술의 초기적 양상이었다면 다음에는 조각공원을 무대로 장식성을 지향하고 있는 예술이 등장했습니다. 다만 이 당시에는 순수 예술가의 작품으로 재해석한 공공미술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죠. 
오늘날에는 대중문화 코드가 매우 친근한 형태로 대중에게 다가가게 되면서 미술의 위상이 새롭게 변화했습니다. 대중문화 코드가 접목한 공공미술은 대중의 기호 수렴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모 외에도, 예술의 미적 가치를 폄하시켰다라고 하는 부정적 면모 역시 함께 지닙니다. 그러니까 예술적 메시지의 수용의 문제보다는 대중적 이미지를 소비로 전환하는
데 급급하지 않았는가라고 하는 비판적 문제의식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또 한편의 문제는 생산 과정에 있었습니다. 공공미술은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을 발주해서 협력 시스템을 진행 하는데, 공공미술의 생산 공정 시스템이 기계화·시스템화되면서 많은 중간 매개자가 등장하게 됩니다. ‘아트 공장(팩토리)’ 또는 공공미술 생산 대행 기획사와 같은 시스템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카르텔을 형성하기에 이릅니다. 한두 기획사가 그와 같은 공공미술의 모든 것을 점유하고 독식하면서 한두 명의 예술가를 단골 공공미술 조형가로 등극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기업형 생산 매개자들은 대중문화 생산자들을 새로운 협력자로 끌어들여서 천편일률적인 형식과 유사한 조형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 오늘날 공공미술의 과제가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에 제가 언급했듯이 공공미술은 특히 맞춤형 가구가 아닙니다. 공공을 위한다는 이유로, 대중을 불편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고 필요한 메시지를 전해야 될 것을 방기하면서 대중의 기호와 결탁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공공미술이란 오늘날 사회에 쉽게 도달하지 못했던 사회적, 비판적 성찰마저 드러내는 불편한 무엇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공공미술이 지향해야 될 바는 대중적 콘텐츠를 완성된 조형적 결과물로 생산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중과 소통하는 사회 성찰의 메시지도 함께 모색해야만 할 것입니다. 


▲ Figure 6

위의 작품은 유대인 박물관의 공공미술이에요. 자세히 보시면 사람들 얼굴이 철판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모두 입을 벌리고 무엇인가에 놀라고 있거나 공포에 떨고 있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작가는 사람들이 이 얼굴을 밟고 지나가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산의 아픔을 가진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인이 나라를 잃고 나치로부터 홀로코스트를 당했을 때의 고통을 우리에게 떠올리게 만드는 공공 조형물인 거죠. 우리는 저것을 밟으면서 마음 편하게 밟고 가지 못합니다. 역사를 되돌아보고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거죠. 우리는 이 작품을 유태인이 감당했던 참혹했던 역사를 떠올리고 성찰하는 공공적 기제로서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공공미술로 평가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하드웨어 중심의 공공미술로부터 소프트웨어 중심의 커뮤니티 아트 유형의 공공미술로 방향을 전환해 가고 있는 현상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의 작품을 보시면, 중국의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Aiweiwei)가 손에 해바라기 씨를 담아서 보여주고 있는데요. 해바라기 씨 모양의 작은 조각 위에 붓으로 줄을 그어서 해바라기 씨를 만든 조각인데, 저것은 아이웨이웨이의 작품이지만 실제로는 한 마을의 많은 구성원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을 전체가 한 예술가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그 마을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시스템을 창출한 것이죠.
우리는 종종 이런 사례를 두고 “문화의 민주화로부터 문화민주주의로 이월했다”고 얘기를 합니다. 여기서 문화를 예술이라는 단어로 바꾸면 ‘예술의 민주화’로부터 ‘예술 민주주의’로 이동했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문화의 민주화는 엘리트의 문화를 대중들에게 소외감 없이 소통시키려는 노력인 반면에 문화민주주의는 문화 생산의 주체로 대중을 끌어 들인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예술의 민주화와 예술민주주의는 다른 개념입니다. 오늘날 커뮤니티 아트는 일방적인 수신자의 입장에 있던 자를 끌어 모아서 생산자의 입장에 참여하게 하는 겁니다. 예술의 민주화보다 예술민주주의를 성취하는 것이죠.


▼ Figure 7

그렇다면 오늘날 요청되는 공공미술은 무엇일까. 관객의 참여와 소통에 집중하는 미술, 움직이는 미술, 시간을 투여하면서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 미술, 최종적으로 작품은 사라지고 의미만 남는 개념적 미술 또는 공공미술이 위치한 맥락에 대한 자료를 지속적으로 작동시키는 리서치 아트와 같은 공공미술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일상의 대중문화와 연동되는 공공미술은 미디어로부터 생산되는 대중문화의 유형적 이미지에 골몰하기보다, 대중의 삶 속에서 공유하는 다양한 하위문화와 소수의 대중문화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대중문화는 미디어를 통해서 생산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우리 주변에서 생산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술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던 간에, 모든 사람이 문화를 창출하는 주체이기에, 대중문화는 예술의 삶과 괴리를 갖지 않습니다. 대중문화와 공공미술과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대중문화와 공공미술의 소비자는 동일한 대중이기 때문입니다. 관건이 있다면 공공미술의 생산 주체도 대중이 될 수 있는 커뮤니티 아트 유형의 과제들이 앞으로 많은 담론 속에서 생산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공공미술이 더욱더 발전적으로 전개되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출전/

김성호, 「일상의 대중문화와 공공미술」, 『제5회 서울은미술관, 공공미술 컨퍼런스- 공공예술과 대중문화, 변화된 문화지형도와 공공성』, 서울시, pp. 100-123.


(제5회 서울은미술관 공공미술 컨퍼런스, 2020. 10. 15, 서울시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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