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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박지영/ 또 다른 나를 찾아서: 알터 에고에서 타아 그리고 피아적 주체로

김성호

또 다른 나를 찾아서: 알터 에고에서 타아 그리고 피아적 주체로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프롤로그
작가 박지영은 시간과 기억에 천착하는 자신의 작품 구현을 위해서, ‘눈이 야기하는 시지각(perception visuelle)과 인식(cognition)’ 작용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 속 주제 의식을 ‘내 시간 속 자신을 바라보는 내력(Histoire de se regarder dans mon temps)’으로 규정한다. 그렇듯이, 그녀는 ‘눈’을 외부 세계의 사물을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단순한 ‘감각 장치’로만 간주하기보다 그것을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사유 장치’로 받아들인다. 그녀가 주제에서 사용한 불어 ‘바라보다(regarder)’가 단순한 시각을 의미하는 ‘보다(voir)’와 달리 ‘유심히 보다(observer)’의 의미를 견지하는 까닭에, 박지영이 추구하는 시지각은 반성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다(se regarder)’처럼 이성적 사유를 동시에 촉구한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박지영, 자화상:나는 나와 살고있다, 116.7x91cm, mixed media on canvas, 2021



I. ‘심안’과 ‘내 안의 또 다른 나, 알터 에고’
우리는 안다. 눈이 담당하는 시지각이란 후각, 청각과 같은 다른 감각에 비해서 강렬하고 폭이 넓다는 것을 말이다. 커뮤니케이션학에서 수화나 몸짓과 같은 비언어적인 소통(communication non-verbale)과 신체적 소통(communication corporelle)을 시도하는 몸의 발화 역시 이미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d'images)으로 바라보는 작금의 학계 상황은 눈의 지각뿐 아니라 눈의 인식 작용을 매우 주요하게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눈으로부터 출발하는 박지영의 작품 속 시지각이란 지각론(esthésiologie), 인식론(épistémologie)의 단계로부터 의미론(sémantique)의 단계에 이르는 농밀한 미학의 체계가 한 덩어리로 응축되어 있다. 
박지영의 작품인 〈자화상: 나는 나와 살고 있다〉 연작에는, 이처럼 눈의 시지각이 견인하는 작가 자신에 대한 반성적 성찰, 즉 지각의 담론뿐 아니라 주체가 지닌 인식론 그리고 의미론의 차원이 깊게 스며있다. 그렇다면, 제목에 드러나듯이, 내가 함께 살고 있는 ‘나’란 과연 누구인가? 그것은 ‘나’와 ‘또 다른 나’다. 풀어 말하면,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다른 정체성으로서의 나’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또 다른 나’, ‘다른 정체성으로서의 나’라는 화두는 본질적으로 프로이트가 ‘자아(ego)’라는 주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만든 ‘또 다른 나’의 개념인 본능(id)과 초자아(superego)와 연동된다. 박지영이라는 에고가 품은 본능과 초자아! 
우리는 이러한 ‘또 다른 나’를 흔히 ‘알터 에고(alter ego)’로 부른다. “본래의 나의 모습과 다른 또 다른 자아”인 알터 에고는 해리성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를 설명할 때 종종 사용되곤 하지만, 그것을 병적 주체라고 규정하기보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또 다른 나’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즉 미처 발견하지 못한 ‘숨겨진 나’, 혹은 ‘나의 분신’ 또는 ‘잠재성의 또 다른 나’로 이해된다. 박지영의 작품을 보자. 그녀의 작품에서 ‘또 다른 나’는 자화상이라는 이름 아래 등장한다. 나무의 나이테와 같은 반복되는 원형의 주름을 지닌 두 개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이들은 위아래나 옆으로 배치된 채 서로 연결되어 있다. 때로는 하나의 나이테 얼굴 안에 겹쳐져 있기도 하다. 이 형상을 인간의 얼굴이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장치는 비교적 정치한 재현의 방식으로 그려진 ‘눈’ 때문이다. 때론 서로를 외면하고 때론 서로를 질시하듯 흘겨보고 있는 눈들은 나와 또 다른 나와의 애증과 같은 교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박지영, 자화상:두 얼굴,25x25cm(ea 24pieces),oil on canvas,2021



얼굴의 부분 이미지들을 격자무늬로 분리하여 24개의 캔버스에 배치한 작품 〈자화상: 두 얼굴〉은, 작품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나’와 ‘또 다른 나’의 혼성적 존재 상황을 시각화한 작품이다. 검은 바탕 위에 커다란 하나의 얼굴을 담은 작품 〈자화상: 나는 나와 살고 있다〉는 또 어떠한가? 그곳에는 얼굴에 흐물거리는 것처럼 자리한 주름 아닌 주름들 사이로 똬리를 풀고 기어가는 한 마리 뱀과 눈을 향해서 유영하고 있는 네 마리의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또한 그 주름 아닌 주름 사이로 태아를 잉태한 여성과 작가의 ‘또 다른 나’처럼 보이는 여러 인물과 무수한 눈의 형상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상징적 이미지로 자리한 많은 눈과 함께 정치하게 재현한 눈의 대비는 육안(肉眼)이 아닌 심안(心眼)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소환한다. 즉 ‘보기(seeing)’라는 시각성에만 매몰되는 육안이 아닌 ‘사물을 살펴보기(observation)하고 분별하는 능력과 작용’을 요청하는 심안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 면에서 작가 박지영의 자화상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눈들은 인도 전통에서 두 눈썹 사이에 그리는 ‘제3의 눈’인 빈디(Bindi)의 메타포와 겹쳐진다. 즉 우리 몸의 생명력의 원천인 7개의 차크라(Chakra) 중 빈디를 찍는 미간을 ‘여섯 번째 차크라’ 혹은 ‘아즈나(Ajna)’로 부르는데 그 의미는 ‘직관의 눈’이다. 따라서 박지영의 작품에서 ‘심안’이란 가히 자신 안의 ‘또 다른 나’를 들여다보는 ‘직관적 인식의 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박지영, 자화상:나는 나와 살고 있다, 130.3x162.2cm, mixed media on canvas, 2021




II ‘심안의 기억’과 ‘타자로부터 비롯된 또 다른 나, 타아’ 
‘마음의 눈’과 ‘직관으로 찾는 또 다른 나’라는 알터 에고는 멀리 있지 않다. 내 안에 있다. ‘심안의 기억’, 즉 내 마음의 눈이 간직한 기억 속에 존재한다. 베르그송(H. Bergson)이 이미지를 기억과 연관하여 살피고 있듯이, 이미지는 과거의 기억과 연동한다. 마음의 눈으로 각인시킨 기억과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박지영의 작품에서 ‘심안의 기억’이 야기한 이미지는 타자를 배제한 채, 내 안에서 철저하게 홀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와의 지난한 관계 속에서 나를 타자로부터 가리고 내 안에 나를 나이테처럼 켜켜이 축적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작품 속에 드러난 ‘또 다른 나’를 ‘알터 에고’로 지칭하면서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롯된 ‘또 다른 나’를 ‘타아(他我, other self)’라는 말로 부르고자 한다. 이것은 ‘타자가 지닌 자아’를 의미한다. 즉 타아는 나의 분신을 한 타자의 자아로 이해된다. 결국 너, 그, 그녀, 그들이라는 타자들은 나의 투영에 다를 바 없으며, 거꾸로 나는 타자들의 투영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타자들의 시선으로 매개되는 나 말이다. 이처럼 박지영의 작품들에 나타난 자아라는 주체의 초상에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라고 하는 ‘알테 에고’와 ‘타자들로부터’라고 기인하는 ‘타아’의 아포리즘(aphorism)으로 가득하다. 
박지영의 작품 속 ‘또 다른 나’는 타자와의 관계 지평을 넓히지 않은 상태로 침묵하거나, 은폐하는 가운데서 발생한다. 그것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길 꺼리는 자신의 생각과 실제의 모습을 위장하는 가운데서 발현된다. 박지영의 작품에서, ‘또 다른 나’, 즉 알터 에고나 타아란 타자에게 선보이길 꺼리는 자아의 모습을 내 안에서 켜켜이 쌓아 올리는 모습으로 축적된다. 작품 〈위장된 외면〉은 얼굴을 가득 차지한 입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공정하거나 예의 바른 언어를 구사하면서 자신을 속마음을 위장하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시선이란 방해꾼의 등장은, 타인의 시선에 갇혀버린 채 살아가는, 또 그렇게 인식된 채로 살기 시작한 나로부터이다.” 사회 속 타자의 시선은 진정한 나의 모든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려하게 만들고 외면적으로는 위장된 것이지만 정제된 나의 모습을 만들면서. 내면적으로는 날 것의 알터 에고와 타아를 쌓아 나간다. 얼굴을 붕대로 칭칭 동여매고 가면을 들고 서 있는 인물을 표현한 또 다른 작품 〈위장된 외면〉 또한 이러한 상황을 여실히 드러낸다. 꽃잎처럼 겹겹이 포개진 멀티플 얼굴을 한 인물을 표현한 연작인 〈감추고 드러내기I. II〉는 타자에게 나를 드러내면서도 온전한 나를 가감 없이 드러내기보다 선별적으로 타자에게 노출하는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을 잘 전달한다. 오늘날 타자 앞에 선 현대인이란 작품 〈소리 내지 못하는 내면〉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멀티플 가면을 얼굴에 쓴 채, 실제의 모습을 은폐하고 가면을 내세워야만 ‘속앓이’를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육안으로 나를 스스로 마주할 수 있지만, 여기 위아래 머리카락만 연결되어 서로를 볼 수 없는 상태의 자아를 표현한 작품 〈마주하지 못하는 시선〉을 보라! 현재의 나/과거의 나, 선의 나/악의 나, 누가 ‘본질적 나’이고 누가 ‘또 다른 나’인가? 육안으로도 서로를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심안으로 그저 자신을 보면서 타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또 다른 나’를 내면에서 가꾸어 나갈 뿐이다. 그것은 어쩌면 ‘과거의 기억 속 나’ 안으로 잠입하는 ‘병적 자아’일 수도 있다. 스스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나’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나 안의 또 다른 나를 바라보는 심안! 그렇다면 그러한 심안으로 현재의 나를 제대로 직시할 수 있을까? 나아가 그러한 심안으로 타자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까? 작가 박지영은 이러한 또 다른 나와 심안의 기억을 탐구하면서 또 다른 차원의 나를 탐구한다. 


박지영, 감추고 드러내기 I ,72.7x91cm, acrylic on canvas,2012




박지영, 낮과 밤, 그림자 그리고 삶과 죽음..162.2x130.3cm, mixed medium on canvas, 2020





III. ‘타자 되기를 요청하는 나, 피아‘  
또 다른 차원의 나란 무엇인가? 그것은 ‘피아(彼我)’로, “그와 나 또는 저편과 이편”을 아울러 지칭하는 존재가 된다. 여기서 ‘피아적 주체’는 나라는 주체가 타자 혹은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타자 혹은 대상이 나를 바라보는 새로운 주체로 등극하는 차원을 노정한다. 예를 들어 내가 바라보는 풍경은 더는 나의 대상이 아니라, 피아적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내가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나라를 바라보는 것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의 견해 식으로 그것은 더는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함께 대화하는 주체로서의 풍경이 된다. 즉 ‘인간/예술/자연’ 사이에서 자신의 몸을 서로 나눠 받는 ‘탈대상화된 주체로서의 풍경’이 되는 것임과 동시에, 나와 풍경이 서로 피아적 주체로 등극하는 것이 된다. 
박지영의 작품을 보자. 그녀의 〈그 어딘가〉 연작은 마치 숲속에 무수한 반딧불이가 발광하고 있는 풍경과 같은 이미지를 선보인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발광체를 품은 작은 동심원들은 일견 밧딧불이처럼 보이지만 실상 ‘수정체를 감싸고 있는 홍채’처럼 눈의 형상을 상징처럼 표현한 것이다. 작품 〈Eyes in the night sky I〉은, 작품명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반딧불이처럼 보이는 그것이 실제로 ‘눈’을 표현한 것임을 명확히 한다. 박지영의 작품 속 ‘눈들’은 나무들이 떠받들고 있는 밤하늘에도 있고, 물결로 파장을 만들고 있는 호수의 수면 위에도 그리고 고양이가 거니는 지붕 위에도 무수히 있다. 그것은 작품 〈시선이 머문 풍경 – 지붕 위의 고양이III〉의 작품명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분명 나의 시선이 머문 대상으로서의 풍경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앞의 작품들에 표현된 ‘눈의 상징’은 풍경이 나를 보기 위해 뜬 ‘풍경의 눈’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숲, 물결, 하늘, 지붕이 ‘피아적 주체’로서 나를 보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 보이지 않는 것들에도 눈이 있었구나! 우리가 나라는 주체 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내’가 있었음을 ‘마음의 눈’으로 확인했듯이, 대상으로 치부되었던 풍경과 타자에게서 ‘또 다른 나’라는 피아적 주체가 있었음을 그들이 지닌 눈에서 확인한다. 그래! 풍경 속 ‘눈들’은 풍경을 바라보는 ‘나의 눈들’이기도 하고 풍경이 나를 보기 위해 부릅뜬 ‘풍경의 눈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 박지영은 고민한다. 타자와 풍경을 피아적 주체로 만들고 나 자신도 피아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방식을 말이다. 방법론적으로 그것은 들뢰즈 식의 ‘되기(devenir)’의 실천적 메타포로 가능해진다. 즉 내가 숲이 되고 풍경이 되고, 고양이가 되며, 타인이 되는 ‘타자 되기(devenir-autre)’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미혼의 한국 여성 작가’이지만, 아내, 며느리, 엄마, 외국인 되기를 조형적으로 실천할 수도 있게 된다. 


박지영, 시선이 내려앉은 풍경, 145.5x112cm,mixed medium on canvas,2018



IV. 에필로그 
작가 박지영의 창작이 한편으로는, 마음의 눈으로 내 속의 ‘또 다른 나’를 찾는 과정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또 한편으로는 ‘타자 되기’를 요청하는 ‘피아적 주체’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나 아닌 타자와 대상을 이해하는 과정’에 천착하고 있다고 하겠다. 
박지영은 그간 자신의 기억과 자신의 실제를 타자에게 은폐하는 방식으로 내 안에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아 침잠시키면서 ‘보이지 않는 것’의 시각화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런데 작가는 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내 안에만 있지 않음을 말이다.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나를 차단하고 위장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타자의 관계를 다시 잇고 그들을 들여다보는 ‘타자 되기’의 방식을 통해서 ‘타자와 대상 속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필자로서는 작가 박지영이 최근에 알타 에고, 타아와 더불어 동시다발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피아적 주체에 대한 탐구를 어떠한 조형적 실험을 통해서 이를 수 있을지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온전히 작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나’라고 하는 테마를 통해서 자아 탐구를 거듭하는 박지영의 작업이 ‘자기중심을 탈주하고 잠재된 상태의 새로운 작가적 자아’를 발견하길 기대한다. ●

출전/
김성호, 「또 다른 나를 찾아서: 알터 에고에서 타아 그리고 피아적 주체로」, 『박지영』, 전시 카탈로그, 2020. 
(박지영 개인전-반추의 시선, 2020. 10. 28-11. 10, 갤러리 아트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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