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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최유희 / 멀티플 패턴 속 현대인의 심리적 메타포

김성호

멀티플 패턴 속 현대인의 심리적 메타포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프롤로그
작가 최유희의 작업에는 수많은 패턴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대칭과 비대칭의 패턴이 화면을 가득 채운 그녀의 초기 작업은 숨 쉴 여백마저 허락하지 않는 강박적 전면회화였다. 최근에는 부분적이나마 사유의 여백을 지닌 채 중앙집중식의 군집을 이룬 패턴 이미지를 통해서 변화를 선보이는 중이다. 
작가는 왜 일견 유사해 보이는 패턴을 캔버스 화면을 빽빽이 채우고 있는 것일까? 무슨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일까? 채우는 것은 숨기는 것을 전제하는 것인가, 드러냄을 의식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 패턴들은 정말 똑같은 것일까? 미(美)의 양극단의 경계를 서성이는 패턴 이미지 속에 담긴 작가 최유희의 시각적 메시지를 천천히 읽어 보자. 


최유희, I love rira(mobile) _116.8x91cm_acrylic on canvas_2016



I. 반복이 만드는 차이와 멀티플 패턴    
작가 최유희의 장방형의 캔버스 혹은 원형의 캔버스 안에는 원형, 꽃, 나사못과 같은 좌우 대칭적 패턴이나 일그러진 동심원, 마루와 골을 지닌 물결 모양, 즉 비정형의 파상형(波狀形) 문양, 그리고 똬리를 틀고 올라가는 식물 넝쿨 등 비대칭의 패턴이 가득하다. 이처럼 추상의 문양이나 구상의 형상이 반복적으로 증식하고 교차하는 ‘멀티플 패턴(multiple pattern)’의 양상은 그녀의 작품에 나타난 대표적 특징이다. 그녀의 작업에서 개별자 모듈(module)의 증식과 반복이 이룬 복수의 군집체는 특유의 패턴을 이루면서 화면을 뒤덮는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최유희 작품 속 개별자로서의 ‘패터닝 모듈(patterning module)’이라는 것은 전체적으로 유사해 보이지만, 세밀하게는 저마다 다른 크기와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형상 이미지들은 같은 것들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세밀하게 살펴보면, 추상 문양은 크기와 색을 달리하고, 구상의 형상은 그 모양과 방향을 달리한다. 따라서 그녀 작업의 패턴 이미지는 외견상으로는 유사한 것들의 군집이 만든 동질성(homogénéité)의 무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들뢰즈(G. Deleuze) 식으로 말해, ‘이질성(hétérogénéité)의 차이(difference)가 집적하고 있는 패턴이라고 할 것이다. 즉 그녀의 작품 속 패터닝 모듈은 ‘동형 동질’이기보다 차이가 무한 반복되는 ‘이형 이질’의 무엇이라 할 것이다
생각해 보자. 세상에 같은 것이 어디 있을까? 일란성 쌍둥이도 외형과 성격이 다르고, 어제 먹은 같은 음식도 오늘은 새로운 음식이 된다. 어제 본 같은 영화도 오늘 볼 때 다른 감흥을 주는데 하물며 하나의 틀에서 나온 캐스팅 에디션들이 모두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에디션으로 복사와 복제가 가능해진 오늘날 예술품에도 물리적 차이와 심리적 차이는 공존한다. 이처럼 어떠한 개체이든 다른 모든 것과 절대적으로 다른 차이를 지닌다. 그런데 그 차이란 다른 누구(무엇)와 종차(種差)적으로 비교되어 다른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한다. 즉 모든 개별자는 ‘차이 자체(différence elle-même)’의 존재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한 모듈이 반복되면 될수록 강도(intensité)’가 만드는 차이는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그렇다. 반복은 차이의 강도를 만든다. 그것은 철학자 들뢰즈가 자신의 저서,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1968)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하나의 역설이다. 최유희의 작업에 나타난 패턴에서도, 개별자로서의 모듈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차이가 더 두드러지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최유희, Whisper(Human by Hideholic), 387.8x130.3cm_Acrylic on canvas, 2010


II. 숨바꼭질의 메타포 – 숨김과 드러냄의 경계 
최유희의 작품은, 이미지 모듈이라는 개별자들의 반복적 증식을 통해 때로는 대칭, 때로는 비대칭의 방식으로 ‘차이의 강도’를 미세하게 전개하는 멀티플 패턴을 만든다. 그녀가 이러한 멀티플 패턴을 통해서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작가 노트에 나타난 작가의 발언을 들어보자: “복잡하고 화려한 이미지들은 스스로 드러내려 하나 또 동시에 숨기고 싶은 나의 어정쩡한 마음을 나타내는 장치이다. 형태들의 유사성의 다채로움을 반복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변화와 새로움을 찾는 나의 태도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것은 작품 속에서 온전히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면서도 또 감추고도 싶어 하는 나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현대인의 단면이다.”
최유희에게 멀티플 패턴은 반복되는 일상을 사는 작가 자신과 현대인을 은유한다. ‘특정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과하게 반복, 증식하는 양적 과도함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숨기려는 현대인의 심리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것은 대개 편향성을 견지한다. 나쁜 이미지를 숨기고 타자에게 각인되고 싶어 하는 좋은 이미지만을 과도하게 부풀려서 ‘실체에 대한 왜곡’을 낳는 까닭이다. 보라! SNS에 풀어 놓는 이미지와 이야기의 과도함은 발화자의 모습을 왜곡하거나 위장하여 한쪽에 치우친 가공된 이미지로 포화시킨다. 우리는 안다. 온갖 좋은 이미지로 포장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온갖 나쁜 상황에 있는 자신을 은폐하고 기만하는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작가 최유희에게 이러한 과도한 반복과 생산을 견인하는 ‘멀티플 패턴’은 현대인의 심리를 반영하고, 그 숨김과 드러냄의 양가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회화적 장치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드러내기와 숨기기의 방식은 나와 맞닿아 있다. (...) 드러내기와 숨기기의 형태들은 화려하게 패턴들로 덮여 있으며 그것들은 무언가를 보호하려 숨고 드러내고 숨긴다”라고 말하는 그녀의 진술을 여기서 곱씹어 볼 만하다. 
작품을 보자. 최유희의 〈swimming〉 연작에는 물결 문양이나 꽃의 형상이 만드는 정형, 비정형의 패턴들과 특정할 수 없는 원생생물 형상의 대칭적 패턴, 나뭇잎이나 해조류의 형상과 같은 비대칭적 패턴이 함께 자리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게나 인물로 추정되는 형상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파상형 배경 속을 헤엄치는 인물이나 크고 작은 점(dot)들로 이루어진 무늬 속을 헤집고 나오는 게의 형상은 대표적이다. 아울러 중심을 늪지대처럼 에워싸고 있는 패턴 가운데 똬리를 틀고 있는 짚신벌레와 같은 원생생물의 형상은 숨김과 드러냄의 경계를 서성이거나 스멀스멀 횡단한다. 
숨김과 드러냄을 공유하는 심리란 다분히 ‘숨바꼭질’로 은유된다. 그것은 ‘양가성(ambivalence)의 공존’을 의미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인 브로일러(E. Bleuler)에 따르면, ‘양가성’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 동시적으로 상반되는 반응, 감정을 갖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긍정/부정, 드러냄/숨김과 같은 혼종의 양태를 드러낸다. 따라서 ‘숨바꼭질의 메타포’는 ‘숨고 싶지만 발견되고 싶은’ 양가적 측면, 즉 ‘도주/체포’, ‘은폐/고발’의 경계 사이를 서성이거나 쉼 없이 횡단하는 ‘정서적(emotional) 양가성’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그것은 프로이트(S. Freud)식으로 말해, 자기 보존과 성적 충동을 포함하는 ‘삶의 본능인 에로스(Eros)’와 공격적인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Thanatos)’와 맞물린 상태와 유사하게 경계 사이를 유영한다. 
‘숨바꼭질’이라는 영어 제목을 가진 최유희의 또 다른 연작 〈Hide and Seek〉에는 기하학적 문양이 패턴을 이루는 가운데, 그 추상 패턴 안에 아메바와 같은 형상의 단세포 원생동물 혹은 말미잘과 같은 촉수를 가진 바닷속 자포동물로 보이는 구상 이미지가 추상 패턴 속에 숨겨져 있다. 드러내듯 숨듯이 말이다. 가히 숨김과 드러냄이 양자의 경계 사이를 유영하거나 서성이는 작업이라고 할 만하다. 

최유희, I love Rira(wish luck)_193.9x130.3cm_acrylic on canvas_2020


최유희, Sneer_162.2x97cm_acrylic on canvas_2021



III. 혀의 메타포 – 경외와 혐오의 경계 
작가 최유희의 또 다른 연작에는 식물성/동물성의 양가성을 입은 알 수 없는 생명체가 자리한다. 〈Tongue cloud〉, 〈Tongue flower〉 연작에는 어찌 보면 유약한 식물성이, 어떻게 보면 포학한 동물성이 공존한다. 그것은 인체의 말단 기관 중 하나인 혀(舌)! 외부와 지속적인 소통을 도모하면서도 인체 내부에 안거(安居)하는 그것은 작가의 언급대로 “가볍기도, 무겁기도, 부드럽기도, 날카롭기도, 빠르기도, 느리기도, 흉악스럽기도, 아름답기도 한” 무엇이다. 그것은 솜털을 지닌 복숭아나 수탉의 볏처럼 생긴 꽃줄기를 지닌 맨드라미처럼 기묘하게 아름답다. 혀를 군집적으로 한데 모아 놓은 위의 두 연작은 이상야릇한 구름이나 꽃의 형상으로 우리를 현혹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그것은 기묘하고 섬뜩하기도 하다. 최유희의 또 다른 연작, 〈Silent invasion〉, 〈Sneer〉를 보자. 이 연작에서 ‘혀의 군집 형상’은 마치 움직이는 포충엽으로 곤충을 포획하고 끈적거리는 점액을 담은 포충낭으로 곤충을 죽여 버리는 ‘잔혹한 식충식물’의 모습처럼 보인다. 가운데 입 혹은 입구를 지닌 채 위협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괴생물체! 미각과 흡착을 위해 존재하는 혀의 돌기, 부드럽지만 때론 뼈를 둘러싼 근육처럼 곤두서기도 하는 그것은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때론 위협적인 포식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연체동물의 빨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서운 포식자의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혀의 형상! 그것은 가히 식물성/동물성, 미/추의 경계를 오가는 존재라 할 것이다.  
우리는 안다. ‘이중적인 혀의 외형’처럼 ‘혀의 존재적 위상’이라는 것이, 작가의 언급처럼, “그 어떠한 것보다도 우리의 감정의 높낮이를 한순간 끝과 끝으로 배치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혀의 형상은 입속에 숨어 쉽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내뱉는 말들은 우리 귀에 순식간에 박힌다. 그것은 우리를 기쁘게도 노엽게도 만든다. 우리는 때로 “훌륭한 언설로 사회를 가르치고 이끌어 나가는 사람”을 ‘금구목설(金口木舌)’이라 칭하며 그것을 경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라는 뜻의 ‘설참신도(舌斬身刀)’를 되뇌며 그것을 혐오하기도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작가 최유희의 작업에 나타난 ‘혀’는 외형과 ‘혀’가 전하는 메시지를 한데 끌어안으며 ‘경외와 혐오’라는 ‘양가(兩價)적 경계’를 서성이는 메타포를 자처한다. ‘세 치 혀’가 만드는 언설이 견인하는 경외와 혐오는 끝 간 데를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우리는 일상에서 혀가 만드는 긍정/부정, 칭찬/비난, 경외/혐오처럼 대비되는 양극단으로 치닫는 일을 매번 경험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경외와 혐오의 양극이 치닫는 거리는 그녀의 작품에서 그리 길지 않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경외/혐오 사이의 간극보다 그사이의 경계를 오가는 빈번한 움직임이 더 주요하게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경외와 혐오는 근원을 달리하는 대립의 감성이라고 하기보다 한 몸에서 나온 이질의 감성이라고 하겠다. 고전주의 미학이 숭고(崇高)와 추(醜)를 경외와 혐오의 대상으로 분리해서 일반적인 미학의 범주 밖으로 밀어내곤 했지만, 이후의 미학은 양자 모두를 아름다움과 공포를 동반한 이란성 쌍둥이로 평가하기도 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숭고-그로테스크-카니발리즘-흡혈귀 문학-B급 문화-상대주의’로 이어지는 숭고 개념의 변천사를 통해서 보듯이 쾌(快)와 미(美)는 고상과 존엄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쾌와 미는 비속과 비천함 속에서도 어김없이 현시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최유희 작품에서 혀의 메타포는 숭고/추, 경외/혐오의 경계 주변을 오가며 양가성의 미를 탐닉하는 현대인의 초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최유희, Forest of wounds_162.2x97cm_acrylic on canvas_2021


최유희, Black Rain_162.2x97cm_acrylic on canvas_2019


에필로그 
작가 최유희의 작업에는 이른바 ‘맘 작가’라 불리는 한국에서의 ‘기혼 여성 미술가’로서 살아가는 어려운 상황과 그것을 대면한 섬세한 심리가 잘 드러나 있다. 연작 〈I love Rira〉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희미한 인물은 작가 자신의 투영이자 그녀의 딸에 대한 애정이 투영된 것이다. 나사못이 폭우처럼 떨어지는 배경을 담고 있는 〈Black Rain〉 연작이 작가 자신과 현대인에게 주어진 어려운 난국을 상징한다면 앞서의  〈I love Rira〉 연작은 딸의 초상으로 대표되는 등장인물을 통해서 이러한 상황을 잘 헤쳐 나가길 기대하는 소망의 표현이 된다. ‘다채로움 속에 갇혀 있는 현대인의 심리적 초상’을 꼼꼼하고 세밀한 필치로 그려나가는 최유희의 회화는 작가의 말대로 그녀에게 “종교적 안식, 위로, 평온, 희망”이 된다. 같은 것들로 보이는 상징들이 반복되는 멀티플 패턴 속에서 차이라는 다름을 이야기하고 ‘숨김/드러냄, 식물성/동물성, 경외/혐오’와 같은 양가성의 경계를 서성이는 현대인의 심리를 탐구하는 최유희의 회화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가길 기대한다. ‘배신, 조롱, 시기, 미움이 난무하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절실한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로서 말이다. ●


출전/
김성호, 「멀티플 패턴 속 현대인의 심리적 메타포」, 『최유희』, 카탈로그 서문, 2021.
(최유희 개인전, 2021. 5. 13~5. 19, 갤러리 아트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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