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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이명호 / 호명과 매개, 이명호의 사진-행위 프로젝트

김성호

호명과 매개, 이명호의 사진-행위 프로젝트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프롤로그
“이명호!” 누군가 사진작가 이명호를 부른다. 그가 돌아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찬찬히 둘러보니 비로소 무엇이 보인다. 빠져든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윽고 그가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보이는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조용히 그것을 부른다. ‘나무/신기루/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사진작가 이명호의 《사진-행위 프로젝트(Photography-Act Project)》는, 비유적으로 말해, 누군가의 호명(呼名)으로부터 시작하고 작가 이명호의 명명(命名)으로 전개되고 그의 호명으로 완성된다고 하겠다. 아! ‘명호(明豪)의 호명’? 이 말이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누군가의 호명으로 그의 작업이 시작된다니 여기서 누군가는 도대체 누구인가? 게다가 이 글의 제목인 호명과 매개는 “슬래시(/)를 통한 호명, 하이픈(━)을 통한 매개”라는 말로 해설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지닌 채, 이명호의 사진-행위 프로젝트를 천천히 살펴보자. 


이명호, Tree #18_2_1, 2020



I. 재현 – 나무 
먼저, 사진작가 이명호의 최근까지의 《사진-행위 프로젝트》는, 작가가 직접 언급하고 있듯이,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범주화된다. 

➀ 재현(再現, Re-presentation)–현실(現實) 
➁ 재연(再演, Re-production)-비현실(非現實) 
➂ 사이(間, Between) 혹은 너머(超, Beyond)-간현실(間現實) 혹은 초현실(超現實)

그리고 이 ‘세 범주를 실험하거나 활용하는 ‘또(&)’라고 하는 범주가 하나 더 있다. 다만 이 범주는 훗날 변용의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현재까지의 연작을 정확히 분류한 카테고리 이름으로 자리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는 “무제(無題, Un-Title) 혹은 미제(未題, No-Title), 부제(不題, Non-Title) 혹은 비제(非題, None-Title)”로 작명되거나 “적용(適用, Use As This) 혹은 적용(適用, Use As That), 사용(使用, Use This) 혹은 사용(使用, Use That)”으로 작명된 정도이지만, 향후 변동될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한글, 한자, 영문으로 병기된 ‘세 범주’는 관객에게 여러 차례 소개된 연작을 작가 자신이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하기 위한 차원의 카테고리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예를 들어 ‘재현(Re-presentation)’의 범주로는 〈Heritage〉, 〈Heritage_[drənæda]〉, 〈Petty Thing〉, 〈Tree〉, 〈Tree...〉, 〈Tree......〉와 같은 연작으로 소개된 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재현의 영문을, 하이픈을 넣어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로 표기한 작가의 의도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야생의 나무나 어린 잡풀 또는 문화유산 뒤에 캔버스를 설치하는 일련의 연작에 함유된 공통의 미학과 더불어 ‘재현’의 일반적 의미 외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작가가 현실이라는 말을 재현 옆에 병기했듯이 현실과 비현실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  
생각해 보자. 미술에서 일반적으로 ‘재현’이란 “현실 속 풍경, 인물, 사물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화나 사진에서는 3차원의 실재를 2차원 평면 위에 눈속임(trompe-l’œil) 기법과 투시 원근법을 적용해서 진짜처럼 보이는 허구(simulacre)를 창출하는 것이고, 조각에서는 3차원의 실재를 3차원의 대체적 구조 위에 ‘다시(re)’ ‘현전케 하는 것(presence)’을 의미한다. 사진이나 회화의 재현이 ‘2차원 허구로 실재를 모방하는 것’이라면, 조각의 재현은 ’3차원의 대체물이라는 허구에 실재를 다시 현전케 하는 일’이 된다. 즉 재현이란 근본적으로 비현실을 창출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명호의 작업에서 재현이란 범주 옆에는 현실이란 용어를 병기되어 있다. 그의 재현이란 비현실을 창출하는 것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닌 현실을 창출하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 까닭이다. 이 범주의 연작들인 〈Heritage〉, 〈Petty Thing〉, 〈Tree〉 등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비현실/현실이라는 양자를 함께 작동하고자 한다. 즉 ‘사진’으로서는 허구를, 3차원의 조각적 설치를 병행하는 ‘사진 행위’로서는 ‘실재를 다시 현전케 하는 일’을 실천하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작가 이명호는 상기의 연작과 같은 이 범주의 작업을 ‘Re-presentation’처럼 하이픈으로 명명하거나 ‘Re/presentation’처럼 슬래시로 호명하고, ‘Re-presentation’처럼 하이픈으로 매개한다. 그 매개란 사진이나 회화의 2차 비현실을 지우고 조각적 설치, 사진 행위와 같은 3차원의 현실을 일깨우면서 ‘캔버스-행위-사진, 작가-작품-관람자, 그리고 다시-현전’을 하이픈으로 잇는 일이 된다. 이것은 그의 사진 작업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들의 관계를 잇고, 매개하는 것뿐만 아니라 과정보다 결과물을 중시하는 관성화된 ‘재현’ 개념을 비틀고 과정을 창작 안으로 견인하고 연장하는 의미의 차원인 ‘재현 혹은 재-현’을 실천한다.  


이명호, Mirage #4_Silk Road, 2011



II. 재연 – 신기루
작가 이명호는 ‘재연(再演, Re-production)’의 범주에서 그동안 우리에게 〈Mirage〉, 〈Mirage_[drənæda]〉 연작을 선보여 왔다. ‘재현(Re-presentation)’의 범주가 풍경과 사물 뒤에 캔버스라는 배경을 설치해서 그것들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고 한다면, ‘재연(再演, Re-production)’의 범주는 캔버스가 풍경의 중심으로 들어가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명호의 〈Mirage〉 연작에서, 그 주인공이란 다분히 ‘유령(phantom)’과 같은 존재로 드러난다. 고비 사막을 횡단하는 거대한 크기의 실물 캔버스 천을 들고 수십 명의 스텝이 사막으로 들어가 실물의 캔버스 천을 마치 바다처럼 시뮬라크르로 보이도록 만드는 이러한 장치는 그의 《사진-행위 프로젝트》를 ‘사진 이전’의 메이킹 포토(Making Photo)를 감행하는 ‘거대한 연극적 상황의 창작’으로 이끈다. ‘다시 상연하는 것’이란 의미의 재연이란 다시(re)와 생산(production)을 하이픈으로 잇는다. 미술에서 리프로덕션을 재연이라 번역하기보다 주로 ‘복사, 복제’의 의미로 사용하는 상황에서 그가 ‘재연’을, 다시-생산 혹은 재-생의 의미로, 하이픈으로 분절하거나 연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분명히 물리적인 실재가 장소 특정적 상황에 개입하고 있으나 허구로 드러나는 마술적 결과물을 통해서 재-연이 품은 개념을 강조하려는 셈이다. 
한편, 이명호는 아라비아 사막에 들어가 허구의 오아시스를 만들어 낸 연작을 특별히 〈Mirage_[drənæda]〉로 칭한다. 발음기호를 병기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사막에 들어가 거대한 캔버스 천으로 실제의 오아시스가 아닌 가짜의 오아시스를 만들어 ‘드러내다’의 동사적 의미를 탐구한다. 즉 작가는 ‘드러내다’라고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 비단 실재에 가려진 위장막을 벗겨 실재를 가시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의 사막 공간에 캔버스라는 인터페이스(interface)를 개입시켜 새롭게 허구를 창출할 수 있음을 피력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말해 현실계에 ‘보이지 않았던 풍경’을 작가의 상상력과 창작 노동을 통해서 ‘비로소 보이게 된 풍경’을 만든 것이라고 평할 수도 있겠다. 〈Mirage_[drənæda]〉 연작을 통해서 그는 무에서 창출한 허구가 아니라 어쩌면 실재하고 있었을지 모를 ‘잠재적 실재’를 비로소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창조적 가능성을 제기한다. 아울러 이 작업은 ‘드러내다’와 발음이 같은 ‘들어내다’의 의미의 후속 작업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작가 이명호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보이는 것’처럼 슬래시로 호명한다. 또한 그는 상기의 연작과 같은 이 범주의 작업을 ‘Re-production’처럼 하이픈으로 명명하거나 ‘Re/production’처럼 슬래시로 호명하고, ‘Re-production’처럼 하이픈으로 매개한다. 그런 차원에서 재현과 음성 유사성을 지닌 재연의 매개 작용이란 ‘다시’와 ‘생산’의 사이에서 ‘다시-생산’을 하이픈으로 연결하고 ‘실재-허구, 사진-행위’를 잇는 작업이 된다. 
 

이명호, Heritage #3_Seojangdae



III. 사이 혹은 너머 –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이명호의 《사진-행위 프로젝트》는 그간 재현의 의미를 비튼 변주의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범주를 통해서 현실을 강조했다면,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에서 실재와 허구의 의미를 탐구하는 ‘재연(Re-production)’이라는 범주를 통해서 비현실을 강조하면서 사진 현장에서의 관성적 미학을 재고한다. 
그에게서 ‘사이(間, Between) 혹은 너머(超, Beyond)’의 범주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서성이면서 간현실(間現實) 혹은 초현실(超現實)의 의미를 탐구한다. 이것은 대개 〈Nothing But〉 연작으로 대별된다. 이 연작은 캔버스를 피사체가 되는 나무나 사물 뒤에 세워 그것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던 ‘재현(Re-presentation)’ 범주의 〈Heritage〉나 〈Tree〉 연작과 달리, 사막으로 들어가 캔버스 천이 직접 주인공이 되는 ‘재연(再演, Re-production)’ 범주의 〈Mirage〉 연작과 일정 부분 작업의 특성을 공유한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Mirage〉 연작이 커다란 캔버스 자체가 사막에 들어가 비현실의 바다나 오아시스를 만드는 거대한 주인공으로 자리한다면, ‘사이(間, Between) 혹은 너머(超, Beyond)’ 범주의 〈Nothing But〉 연작은 텅 빈 캔버스 자체가 특별한 주인공이길 포기하고 그 자체로 갯벌이나 바다와 같은 풍경 안으로 풍덩 들어가 자리할 뿐이다. 이 캔버스는 풍경과 사진을 만나게 하는 접점이며 그의 사진은 풍경과 관객을 만나게 하는 접점이 된다. 풍경-캔버스-작가-사진-관객 사이의 경계를 겹쳐 안은 이 연작은 제목처럼 ‘아무것도 아니지만 무엇인가 곱씹어 볼 존재 이유’를 지닌다. 
〈Nothing But〉 연작은 ‘재현(Re-presentation)’ 범주에서 선보였던 〈Petty Thing〉 연작과 같은 관심이 다리를 놓은 것처럼 보인다. 즉 자연 속 ‘하찮은 것’으로 간주되던 잡초나 이름 모를 풀꽃 뒤에 작은 캔버스를 설치해 주인공으로 소환하던 방식이 일정 부분 규모를 키운 채로, 주인공을 만들어 줄 피사체를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스스로 주인공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Nothing But_[drənæda]〉 연작은 〈Mirage_[drənæda]〉 연작이 예고했던 ‘드러내다(reveal)/들어내다(remove)’처럼 똑같이 발음되는 양가적 의미를 한데 껴안고 현시한다. 즉 작가는 슬래시로 호명하는 ‘현시(顯示)하는 전자’와 ‘소멸(消滅)하는 후자’를 발음기호 안에 한데 묶어 넣음으로써 사이와 너머의 의미를 탐구한다. 애써 촬영하여 인화한 사진 전체나 일부를 날카로운 도구로 오랜 시간을 투여하여 다 들어내어 무(無)로 돌리는 일은 ‘사진하기의 끝’이 ‘인화지에 잉크가 얹힌 상태’만이 아님을 설파한다. 그의 《사진-행위 프로젝트》가 ‘사진 이전’의 행위의 과정을 중시한 것처럼, 이제 ‘사진 이후’의 행위까지 ‘전체 작업’으로 연장한 셈이다. 특히 발음기호가 부가되는 이 연작은 ‘재현(Re-presentation)’ 범주의 〈Heritage_[drənæda]〉 연작과 ‘재연(再演, Re-production)’ 범주의 〈Mirage_[drənæda]〉 연작에서도 실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진의 ‘사이 혹은 너머’의 의미를 탐구하는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주요한 지점이 된다.  


이명호, Nothing But #3, 2018



에필로그 – 호명을 실천하는 매뉴얼 
이명호의 이번 개인전 주제는 ‘MANUAL(사용설명서)’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호명이라는 예술 행위를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관객의 입장에서 수용할 수 있을지를 되묻는 전시라 할 수 있겠다. 이명호가 ‘사진 이전’과 ‘사전 이후’를 함께 주목하면서 작업을 진전시켰던 것처럼 이번 전시는 ‘전시 이전’과 ‘전시 이후’ 그리고 ‘작품 소장 이전’과 ‘작품 소장 이후’를 예견하여 선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즉 “작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전시를 넘어서 “작품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는 완성된 이명호의 사진 작품이 놓이는 ‘전시 공간’ 혹은 ‘일상 공간’에서의 맥락을 탐구한다. 작품이 공간과 어떠한 관계를 지니며 그 공간에 따라 어떻게 연출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프롤로그로 다시 돌아가 보자. ‘누군가’ 사진작가 이명호를 부른다고? 그를 부른 ‘누군가’는 자연이다. 퐁티(M. Merleau-Ponty)의 견해처럼, 인간과 자연을 ‘주체와 대상 사이의 구분이 없는 상호 작용의 존재’로 간주하는 작가 이명호에게 들리는 자연의 호명인 셈이다. 그 호명이란 ‘자연/인간, 풍경/이명호’ 사이를 껴안은 슬래시(/)의 상호작용적 실천이다. 그는 자연의 호명에 화답하면서, 자연 속 ‘보잘것없거나 하찮은 것들’에 눈을 돌려 이름조차 부재한 그것들에게 이름을 짓는다. ‘Heritage, Tree, Petty Thing, Mirage, Nothing But’과 같은 연작의 이름으로, 그리고 ’하이픈(━)‘으로 잇기와 연계를 주선하는 이름으로 ‘재현(Re-presentation)’ 혹은 ‘재연(Re-production)’과 같은 카테고리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 인간의 ‘이름 짓기’(명명)는 언제나 ‘이름 부르기’(호명)를 위해 존재했고, 명명의 의미론은 언제나 ‘인간’의 존재 의식을 전제하는 담론이자, 주체와 타자를 연결하고 매개하는 행위로 확장된다는 것을 말이다. 
글을 정리하자. 이명호의 《사진-행위 프로젝트》는 ‘하이픈으로 명명하고 슬래시로 호명하며 하이픈으로 매개하는 작업’이다. 이명호의 이번 전시 《MANUAL》은 명명과 호명을 이어 그것의 매개 작용의 매뉴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되묻는다. 작가-행위-캔버스-사진-관람자 사이를 하이픈으로 끊임없이 매개하는 방식에 대해서 말이다. 마치 시인 김춘수가 호명과 매개의 의미를 다음처럼 노래했듯이 말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출전/
김성호, 「호명과 매개, 이명호의 사진-행위 프로젝트」, 『이명호』, 전시 카탈로그, 2021
(이명호 개인전- MANUAL, 2021. 9. 10~11. 17, 소울아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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