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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한원석 / 어둠의 공간에서 화해의 시간으로

김성호

어둠의 공간에서 화해의 시간으로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어둡다. 관객들이 작가 한원석의 초대를 받아 전시장에 도착해서 맞닥뜨린 것은 당혹감을 안기는 짙은 어둠이다. 내장재가 뜯겨 나가 진피층을 드러낸 잔해들이 널브러진 건축물 안에 공포에 가까운 어둠이 갇혀 있다. 아니, 사실은 그가 어둠을 가둔 것이다. 멈춰진 인테리어 공사의 현장을 미술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한 이 기묘한 장소를 더욱 기괴하게 만든 것은 그가 만든 어둠 때문이다. 왜 그는 전시장 안에 이러한 어둠을 만들었을까? 




I. 어둠의 공간 – 진동  
어둠은 자생적인 생산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빛’이라는 숙주에 기생하는 존재다. 늘 빛을 피해 다니면서 빛이 힘을 잃을 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간악(奸惡)한 존재로서의 어둠! 성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은 ‘절대자의 악(惡)의 창조’를 용납할 수 없었던 자신의 ‘선(善)의 신학’을 위해서, 빛이 도달하지 못한 곳에서 자라나는 ‘어둠’을 ‘악’으로 비유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어둠은 ‘선보다 악’, ‘삶보다 죽음’의 분위기를 품어 안는다. 
아서라! 누가 어둠을 절망과 죽음의 음습한 냄새를 전하는 존재로 만들었는가? 어둠은 ‘빛의 잉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 빛이 자신과 다르다고 내팽개치고 던져버린 것일 뿐이다. 버림을 당한 이들은 안다. 버린 이들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말이다. 빛이 버린 잉여물, 빛을 결여한 부족분, 빛이 불충분한 잔여물로 간주되어 온 어둠은 그래서 흐느낀다. 
작가 한원석은 이러한 어둠을 보듬어 안으면서 자신의 전시를 연다. 우리의 눈이 쉬이 감지할 수 없는 형체들을 어둠 속에 묻고 대신 우리의 귀에 무엇인가를 들려준다. 무슨 소리를 말인가? 어둠을 뚫고 느릿한 동작으로 습격하는 그것은 야생의 짐승이 무엇인가 긁어대는 소리 혹은 불규칙한 표피 위에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청자에 따라 달리 들리는 그 ‘소리의 정체’를 관객이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때는 어둠이 자신을 버린 빛에게 용서와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는 시점에서다. 우리가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갈 때,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사물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보이기 시작하는 현상을 ‘암순응(暗順應)’ 또는 ‘암흑 적응’이라고 할 때, ‘어둠의 빛에 대한 용서’는 이 과정에서 작동한다. 어둠이 짙은 암흑의 상태를 풀고 관객을 천천히 편안한 심정 상태로 안정화하는 까닭이다. 
그 과정에서 노이즈처럼 들렸던 소리는 천천히 우리의 귀에 친숙한 소리로 전환되어 들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장작개비가 타들어 가는 소리다. 암순응의 상황 속에서 ‘점차 가시권에 들어오는 어둠’은 ‘장작불 소리’를 통해서 우리를 ‘짙은 어둠의 공포와 당혹감’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이 소리는 바닥의 중앙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내 지하로부터 2층까지 엘리베이터 통로처럼 연결한 비움의 공간 속에 매달아 놓은 높이 7미터에 육박하는 크기의 ‘사운드 스컵쳐’로부터 발원한다. 3인치 풀레인지 스피커(full-range speaker)를 1,886개 수량으로 무수하게 격자형으로 집적해서 만든 이 거대한 사운드 장치는 위치가 다른 개별 스피커들이 온오프를 거듭하면서 마치 거대한 실제 장작이 타는 듯한 소리를 실감 나게 들려준다.  
그렇지만 이 거대한 사운드 장치는 어둠 속에 쉬이 들어오지 않는다. 마치 거무스레한 괴물처럼 보이는 이 사운드 스컵쳐는 어둠 속에서 형체를 희미하게 드러내면서 빛에 대한 어둠의 용서와 화해의 전령을 자처한다. 그도 그럴 것이, 관객의 시각을 잠시 어둠 속에 머물게 하면서 청각을 부유하게 만든 사운드 스컵쳐가 관객에게 심안(心眼)이라는 ‘마음의 눈’으로 소리를 보게 하는 효과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소리를 보게 하는 사운드 스컵쳐’를 ‘설치적 회화’로 번안한다. 어둠 속에 설치된 회화로서 보게 하는 이러한 해설은 그의 작품을 그저 ‘소리 조각’이 아닌 ‘어둠의 공간 전체’를 캔버스로 삼아서 종횡 무진한 ‘설치적 회화’로 인식하도록 만든다. 
이 육중한 ‘설치적 회화’를 통해서 어둠 속 전시장에 스며드는 ‘장작불 소리’는 마치 각성된 중추 신경성을 억제하는 ‘심상 유도 음악’처럼 일정한 진폭과 잔잔한 속도로 관객들에게 다가선다. 희뿌연 어둠 속에서 고즈넉이 홀로 앉아 있거나, 혹은 얼굴을 어둠 속에 묻은 친밀한 상대와 마주 앉아서 함께 듣는 장작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는 현실의 긴장된 삶에 지친 관객들의 몸과 마음을 풀어헤치기에 족하다. 누군가에게는 어린 시절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고, 누군가에게는 떠나간 그리운 사람을 아련하게 떠올리게 만든다. 이러한 이처럼 희미한 어둠과 친밀한 장작불 소리로 품어 안는 어둠의 용서는 따스하기조차 하다. 특히 이 작품은 관객이 많아질 경우, 점점 증폭되는 장작불 소리를 통해 나와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성찰하도록 하는 장치를 고려함으로써 예술 언어의 잔잔한 변주를 도모한다. 







II. 화해의 시간 – 결핍의 존재를 위하여  
상처받은 사람은 안다. 상처를 준 자는 쉽게 망각에 휩싸이지만, 상처를 받은 자에게 망각이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때론 기억을 곱씹으며 홀로 슬퍼하거나, 저주의 말을 쏟아부으며 분노 속에 살기도 한다. 버림을 당한 이들은 안다. 버린 자는 쉽게 잊지만, 버림을 당한 이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간과한다. 누군가의 버림으로부터 비롯된 또 다른 결핍의 존재가 지닌 슬픔의 무게가 나의 것에 못지않다는 것을 말이다. 나의 결핍이 세상의 그 어떤 슬픔의 무게보다 더한 것이라고 여기었건만, 그(녀)의 결핍이 나의 것보다 더할 수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작가 한원석은 이번 전시에서 ‘결핍과 또 다른 결핍의 만남’에 주목한다. 우리의 현실계가 개별 주체들이 군집의 사회 속에서 무수한 만남의 관계를 만들어 가듯이, 그의 작품은 작은 스피커들이 집적되어 소리를 품은 거대한 ‘설치적 회화’를 만든다.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여 직물을 만들고 들숨과 날숨이 상응하면서 호흡을 이어가듯이, 그의 ‘설치적 회화’는 회화, 조각, 설치, 건축이 하나의 장 안에서 어우러진다. ‘결핍된 것들의 만남’이 내게 있는 것을, 갖지 못한 그(녀)에게 나누고, 내게 없는 것을 가진 그(녀)에게 의지하는 나눔을 지속하듯이, 그의 작업은 건축적 능력을 나누어 주고 자신에게 부족한 작곡의 능력을 빌리면서 협업을 마다하지 않는다. 
때때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결핍과 충만은 사실 반대항에 있는 상극이 아니라 경계를 서로 밀어내는 존재일 수 있다는 점이다. 빛이 어둠을 밀치고 어둠이 빛을 밀어내는 것처럼, 우리의 현실계의 이항 대립적 존재들은 많은 부분 경계의 영역을 이동하면서 변화를 지속한다. 여기에 버린 자와 버림받은 자 사이에, 그리고 상처 준 자와 상처받은 자 사이의 경계가 겹쳐진다. 너의 결핍을 내가 채워주고, 나의 결핍을 너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잉여와 결핍 주체들의 교류는 언제나 절실하지만, 때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대면하는 변화 역시 필요하다. 가해자의 사과는 언제나 절실하지만, 피해자의 용서 또한 필요하다. 시간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해결하는 적극적 매개체가 된다.   






작가 한원석은 이번 전시에서, ‘어둠 속, 소리가 유영하는 설치적 회화’를 통해서 결핍을 안고 사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한다. 그 또한 결핍의 경험을 몸서리치게 겪었고, 용서와 화해의 시간을 스스로 헤쳐 나갔으니, 많은 이에게 그가 경험한 용서와 화해를 통한 잔잔한 행복을 나누어 주고자 한다. 자신의 전시를 찾는 관객을 위해 구성한 일 층 로비의 ‘따스한 공간’뿐 아니라 삼 층 공간에 크고 작은 사운드 스컵쳐를 설치하고 각각의 연주곡이 만나 하모니를 이루게 전시를 구성한 것도 코로나로 심성이 피폐해진 많은 관객에게 따스한 위로를 전하기 위함이다. 특히 삼 층의 ‘텅 빈 창문 공간’을 날 것 그대로 놔두고 창문을 경계로 밖과 안의 소리가 뒤섞이는 상황을 열어 둔 점도 주체와 객체, 예술과 일상의 공간이 상응하게 만든 시도로 평가할 수 있겠다. 이 작업 또한 공간 전체를 캔버스로 삼아 하나의 거대한 회화를 만들고자 하는 그의 ‘설치적 회화’의 구상을 어김없이 실현한다. 
그가 이번 전시를 위해서 지난한 노동과 세밀한 계획으로 만든 ‘소리가 유영하는 어둠의 공간 회화 혹은 설치적 회화’는 이제 ‘화해의 시간’을 향해서 달려간다. 그렇다. 그의 전시는 하나의 결핍이 또 다른 결핍을 만나 서로를 위무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는 ‘더불어’의 세계관은 물론이고 상처 준 이마저 용서하는 ‘화해의 시간’으로 가자고 독려하면서 포스트 팬데믹의 피폐한 삶을 사는 많은 관객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의 말대로 이 시대, “우리에겐 사랑과 예술이 필요해.” ●


출전/
김성호, 「어둠의 공간에서 화해의 시간으로」, 『한원석』, 카탈로그 서문, 2021. 
(한원석 개인전-daybreak, 2021. 10. 9~11. 29. 금호 알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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