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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김인중 / 영원을 향한 빛의 예술

김성호

영원을 향한 빛의 예술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I. 프롤로그
이번 전시는, ‘교회에서는 이색 화가, 미술계에서는 이색 사제’로 불려온 재불 화가 김인중 신부의 화업 60년을 소개했던 2020년의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의 대규모 회고전 이후 소개되는 올해 첫 전시다. 팔순을 거쳐 올해 반수(半壽)라는 81세에 이른 원로 신부 화가의 개인미술관을 준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펼쳐지는 이번 전시는 그간의 회화로부터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 세라믹 작업을 두루 선별하고 신작 여러 점을 함께 선보인다. 
이 글은 그의 작품 세계를 ‘영원을 향한 빛(光)의 예술’로 해설한다. 이 글은 아울러 그가 회화뿐 아니라 스테인드글라스, 세라믹 작업 안에 두루 담아낸 ‘비움과 채움’, ‘명상과 기도’의 메시지 그리고 그것이 함유한 ‘숭고’의 미학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II. 회화 - 빛의 색, 빛의 꿈   
작가 김인중의 화업 60주년 기념 회고전이 내세웠던 주제는 ‘빛의 꿈’이었다. 회고전에 부치는 글에서 그는 “구약 성서의 신비로운 세계를 꿈과 시로 가득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표현법으로 구현한 샤갈(Marc Chagall, 1887~1985)로부터 영감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16세기 화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가톨릭 신앙에 근간한 예언자적인 자유로움을 닮아 예술에서의 새로운 장을 펼치고자 한다”는 각오를 펼친 바 있다. 또한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95~1455)의 작품에 영감을 받은 자신의 예술적 포부를 다음처럼 피력하기도 한다: “하늘나라는 단순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상은 복잡합니다. 더 큰 꿈을 꾸어야 합니다. 프라 안젤리코의 환희에 넘치는 색조들을 공간에 담기 위해 시간을 더 받쳐야겠습니다.” 이러한 각오와 예술적 포부는 모두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빛의 세계’를 자신의 예술 속에 담고자 하는 노화가의 예술의 꿈, 즉 ‘빛의 꿈’이었던 셈이다. 웬디 베케트(Wendy Beckett, 1930~2018) 수녀가 김인중의 작품을 “기도의 깊이에서 솟아 나온” 무엇으로 평했듯이, 그의 회화는 ‘빛을 향한 꿈’이자 ‘빛을 향한 기도’의 결과물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그의 회화에서 ‘빛의 색(色)’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둠을 물리치는 빛에 의해서 구현되는 그의 실제적인 회화 세계를 지칭한다. 그가 직접 “예술이란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향해가는 끊임없는 과정”이라고 언급하고 있듯이, ‘빛의 색’이란 그에게서 예술을 총칭하는 하나의 은유인 것이다. 
은유를 떠나 과학적으로 언급할 때, ‘빛’이란 인간이 물리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가시광선(Visible light), 즉 ‘볼 수 있는 광선’을 지칭한다. 태양광이 프리즘을 거쳐 가시화되는 무지개색이 바로 그것이다. 파장이 큰 붉은색 밖의 적외선이나 파장이 짧은 보라색 밖의 자외선은 볼 수 없다는 점을 유념할 때, ‘빛의 색’이란 가시광선이 품은 다양한 색에 집중된다. 우리가 색을 본다는 것은 빛의 가시광선을 보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색’이란 한마디로 “빛의 파장에 대한 눈의 반응”이다. 즉 ‘색’이란, 눈의 망막, 더 정확히는 시세포인 원추세포에 도달한 빛이 전기적 신호를 대뇌에 이르게 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에게 인식되는 것을 지칭한다. 달리 말해, ‘색상뿐 아니라 명도, 채도의 속성을 함께 가지는 물리적 현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래서 색은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결과에 따라 나타나는 빨강, 파랑, 노랑 등의 색상뿐 아니라, 밝음과 어둠의 상태’를 함께 지칭한다.
작가 김인중이 하얀 캔버스 위에 가져오는 ‘빛의 색’이란 어둠을 물리치는 밝음의 존재다. 여기서 ‘색’은 ‘빛’의 전령이자 같은 위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제소(gesso)와 미디엄 그리고 물감으로 꼼꼼하게 초벌칠이 마감된 순백의 공간 위에 유화 물감을 올릴 때, 여백을 많이 남겨 그 부분이 마치 백색광(白色光)처럼 여겨지도록 한 것도 이러한 ‘빛의 색’이라는 주제를 돋보이게 하는 장치가 된다. 백색광이란 흰색으로 보이지만, “가시광선의 모든 파장의 빛이 혼합된 빛”으로 무지개에 나타나는 색깔을 모두 포함한 존재다. 
우리는 안다. 물감의 경우, 여러 색을 혼합할 때 검은색으로 변하면서 명도가 낮아지는 ‘감산혼합(減算混合, subtractive mixture)’의 효과를 일으키는 반면, 빛의 경우, 파장이 다른 여러 빛의 색을 혼합한 경우에는 마치 흰색처럼 명도가 높아지는 ‘빛의 가산혼합(加算混合, additive color mixture)’ 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의 작품에서, 하얀 캔버스의 여백은 실제로 흰색 미디엄과 물감의 혼합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마치 파장이 다른 여러 빛이 모여 가산혼합의 효과를 낳은 백색광처럼 가시화된다. 
게다가 화가 김인중은 흰색의 캔버스 위에 푸른색이나 붉은색의 유화 물감을 마치 맑은 수채화처럼 투명하게 덮어 올린다. 유화 물감에 휘발성의 테러빈유(turpentine)나 건성용 용해제인 린시드(linseed oil)를 많이 섞어 물감의 ‘농도(濃度)’를 묽게 함으로써 캔버스 표면을 흠뻑 적시면서 화면 안에 삼투(滲透)의 방식으로 잠입하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물은 마치 동양의 수묵화(水墨畵) 혹은 선화(禪畵)를 캔버스 위에 구현한 것처럼 보인다. 수분이 증발하고 종이 위에 남겨진 농묵(濃墨)과 담묵(淡墨)의 향연처럼, 그의 작품은 기름이 증발하면서 캔버스 위에 유화물감으로 된 농담의 깊은 변화가 한색과 난색처럼 ‘파장이 다른 빛’이 서로 만나는 순간으로 자리한다. “내 그림은 동양화나 서양화가 아니라 세계화(世界畵)”라고 피력한 그의 입장을 능히 이해할 만하다. 
그는 자신의 회화 창작에 있어 넓은 붓과 동그란 서예 붓, 나이프, 스퀴지(squeegee)를 혼용하면서 페인팅과 드리핑은 물론이고 그리기, 겹치기, 지우기, 닦아내기와 같은 다양한 표현 방식을 구사함으로써 캔버스 위 백색 화면을 ‘부드러우면서도 역동적인 무엇’으로 변모시킨다. 다양한 과정을 거쳤음에도 지극히 단순하고도 단순한 정수만 남긴 그의 회화는 그려진 것과 남겨진 것이 대화하고 채움과 비움이 상응하는 하모니를 창출함으로써 ‘어둠으로부터 탈주하는 빛의 꿈과 빛의 색을 향한 여정’으로 우리를 이끈다. 






III. 스테인드글라스 - 빛을 향한 숭고의 미학 
작가 김인중에게 스테인드글라스는 ‘빛의 꿈과 빛의 색을 향한 여정’ 중에서 만난 또 다른 창작이다. 그것은 ‘현실의 어둠으로부터 천상의 빛’을 찾는 작업이자, 아래의 진술과도 같이 ‘이 땅 위에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려는 가톨릭 신학을 고스란히 실천하는 사제 화가로서의 ‘신앙’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20년 넘게 해온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통해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더욱 깊이 깨달았습니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도 태양이 없으면 홀로 빛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신의 은총이 없다면 죽은 존재와 다름없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란 그저 예쁜 장식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으로 향하는 해방의 통로이기를 기원합니다.” 

그에게 스테인드글라스는 ‘빛과 어둠을 잇는 통로이자, 신의 은총을 받는 창’이다. 오랫동안 회화라는 것이 세계를 보는 창으로서 기능해 왔듯이, 그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창이자,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창’으로 자리한다. 그것은 성전의 벽과 바닥에 그리고 기도하는 신도들을 따사롭게 비추는 천상의 빛을 우리로 하여금 늘 성찰하도록 이끈다. 
한편 스테인드글라스는 빛이 실제로는 파장이 제각기 다른 영롱한 ‘빛의 색’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인식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지혜의 창이기도 하다. 빛이 없는 어둠에 들어와 은혜로운 세계로 충만하게 만드는 이 스테인드글라스를 위해서 그는 “서양인들이 모방하기 힘든 유일한 스타일”을 고안했다.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에 있어 매우 독창적인 그의 조형 언어는 몇 가지로  
대별된다. 간단하게 언급하면 그것은 첫째, 성인들의 도상을 그린 구상화가 아닌 형상이 구체화되지 않은 비구상 혹은 추상 이미지의 스테인드글라스라는 것이고, 둘째, 납선의 구속을 벗은 스테인드글라스라는 것, 셋째, 마케트를 만들어 유리에 옮겨 구운 것이 아닌 유리 위에 물감으로 직접 그려 구운 스테인드글라스라는 것이다. 
그의 독창적인 스테인드글라스는, 오래전 문맹자가 다수였던 성도들에게 이미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전통으로 인해 주요한 성서의 장면과 도상을 구상화로 전했던 것과 달리, 표현주의적 추상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선택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의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유효한 도구로 견인한다. 게다가 형상을 구획하는 납선 사이에 일일이 색유리를 끼우는 방식이나 마케트를 통해서 원화를 옮기는 방식으로부터 탈주하여 직접 유리 위에 그림을 그려 구워내는 방식은 오늘날 스테인드글라스의 현대적인 면모를 가능케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그의 스테인드글라스는 ‘구상화, 납선, 마케트의 형식’으로부터 기인했던 모자이크 색상과 같은 빛의 효과로부터 탈주하면서 ‘채도, 명도, 농담’이 자유롭게 섞이는 수채화나 데칼코마니의 마블링 효과를 드러내는 ‘빛의 색’을 창출한다. 
이러한 효과를 위해 유리 위에 직접 동양화 붓으로 물감을 올려 그림을 그리고 700도에 이르는 뜨거운 열로 여러 번 구워내서 완성된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기까지 그의 무수한 조형 실험과 그것에 따른 시행착오는 필수적이었다.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태어난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그의 무수한 조형적 실험은 진실과 아름다움을 위한 인고의 시간을 감내해야만 했다. 
설치 현장에서도 이러한 실험은 지속되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빛이 투과될 때 성전 속 벽과 바닥에 어떻게 투과될지, 어떠한 형상이 만들어질지를 예측하고 면밀하게 작업을 점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빛을 받는 건물의 방위에 대한 고려뿐 아니라 여름과 겨울의 변화에 따른 태양의 고도를 예측하는 일까지 포함된다. 따라서 일출 방향에는 파랑, 보라처럼 한색을 배치하고 일몰 방향에는 빨강, 노랑처럼 난색을 배치하여 성전 안에 드는 ‘빛의 색’의 균형을 맞추는 작업도 요청된다. 일출 시 풍광은 파장이 짧은 한색이 주도하고 일몰 시 파장이 긴 난색이 주도하는 까닭이다. 그는 이러한 다양한 조형 실험을 위해서 유리판을 직접 빛이 드는 곳에 세워놓고 작업을 하면서 빛의 효과를 탐구하는 지난한 과정마저 감수한다. 
이러한 실험은 2006년 프랑스의 사르트르 노트르담 주교좌 성당(Crypte de la Cathédrale Notre-Dame de Chartres)을 위시로, 2008년 아일랜드 슬레인 소재 세인트 패트릭 성당(Eglise Saint-Patrick, oratoire Saint-Erc, Slande, Irlande), 2016년 벨기에 브뤼셀 소재 사크레쾨르 국립 성당(Basilique Nationale du Sacré-Coeur, Espace Cardinal DANNEELS, Bruxelles, Belgique) 등 1973년부터 현재까지 유럽 45곳의 성당과 교회에 괄목한 규모로 실현되었다. 
이번 전시에는 한발 더 나아가 유리판 위에 직접 물감을 올린 스테인드글라스를 유리 장인을 도움을 통해서 입체물로 실험하고 구현한다. 그것이 어떻게 창출될지 매우 기대된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와 같은 지난한 실험과 노동의 과정을 통해서 창출된 그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로마네스크 예술(Romanesque art)'과도 같은 단순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 스테인드글라스는 형상도 없이 매우 단순한 색채일 뿐, 원초적이라 할 만한 그런 단순함의 의미를 추구합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돌로 지어진 벽으로 하여금 노래하게 해야 합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교회의 눈입니다.” 그렇다. 그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전하는 숭고(崇高, the sublime)의 미학은 단순함에 있다. 그것은 경외(敬畏)를 가득 품은 단순함이다. 오늘날 숭고란 창조주를 두려워하고 공포에 떨게 하는 압도적인 크기의 경지를 넘어, 창조주의 은총에 감사하고 그를 찬양하고 그의 말씀을 전하는 ‘경외의 단순함’을 넉넉히 품어 안는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란 하느님의 말씀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것은 단순하고도 신실한 메시지다. 








IV. 에필로그 
이번 전시에서 작가 김인중은 회화와 스테인드글라스 외에도 2000년대 중반부터 매진해 온 도자기 그림을 함께 선보인다. 우리가 주목할 만한 그의 실험은 초벌로 구운 질그릇 위에 그림을 그리고 구워 완성하는 ‘도자 회화’에만 머물지 않고 소성된 질그릇을 해체하고 이지러뜨려 형상을 재구성하고 그 위에 회화로 부가하는 총체적인 ‘도조 예술’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작가 김인중의 다양한 작업, 즉 투과의 직물 텍스처(texture)의 바탕 위에 자리한 캔버스 회화, 얇은 재질의 종이 회화 작업, 투명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불투명의 세라믹 작업은 모두 ‘영원을 향한 빛의 예술’을 지향한다. 달리 말해 그것은 수많은 ‘빛의 색과 빛의 꿈’을 탐구하면서 ‘빛을 향한 숭고의 미학’을 전개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그의 창작이란 ‘빛을 향한 명상과 기도의 메시지’를 날마다 성찰하는 개인적인 신앙의 실천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의 진술처럼 무엇보다 ‘하느님의 도구’가 되고자 하는 
‘사제 화가로서의 사명 실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 작업이 빛을 터뜨릴 수 있는 무기가 되어 창조주의 눈에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가장 큽니다. 그래서 힘들 때마다, 아니 매 순간 그분의 도구이기를 청합니다.” 
‘비움과 채움’, ‘명상과 기도’의 메시지 그리고 그것이 함유한 ‘숭고’의 미학을 탐구하는 ‘빛의 화가’ 김인중은 오늘도 하느님의 단순한 메시지를 전하는 전령을 자처하면서, 그리고 창조주의 은총을 노래하는 사제 화가의 역할을 담당하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 창조주가 부여한 노동의 기쁨을 지금도 부지런히 실천하는 중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시편에 가까운 그의 1987년 작업 노트의 일부를 옮기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새 하늘 새 땅을 찾는 일 / 저세상에는 그림 그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 그곳은 시간이 정지된 영원의 현재일 테니까, / 희망이 달성된 곳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 하지만 시작은 반, 저세상을 향한 첫걸음은 그곳의 투영된 모습 / 성인이나 예술가의 생명은 그들이 남기는 과업, / 그다음은 넘치는 침묵이 격조를 가한다./ 새로움이란 이때껏 듣거나 본 일 없는 신선한 것. / 가장 밑으로 내려가는 이가 가장 빛나는 보화를 끌어 올린다. / 그림을 그리는 일은 제조하는 것이 아니고 /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는 일 / 선과 채색으로 협화음을 이루면서, / 지나가는 일들을 영원 위에 잡아매는 일, / 아무리 좋은 작가라도 하찮은 종일 뿐. / 하얀 캔버스 위에 기쁨을 작곡하듯, / 영근 열매로 가지가 휘어진 생명의 나무로 서 있고 싶다.” 



출전/
김성호, 영원을 향한 빛의 예술」, 『빛의 화가, 김인중 세계화』, 카탈로그 서문, 2021. 
(김인중 개인전, 2021.12.21.~ 2022.07.31. 유리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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