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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조순호 / 미혹을 여윈 그림 - 가볍게, 단순하게 그리고 무심하게

김성호

미혹을 여윈 그림 - 가볍게, 단순하게 그리고 무심하게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한국화가 조순호는 2019년 이후 3년 만에 여는 16회 개인전의 주제로 ‘가볍게, 단순하게’를 내세웠다. 오랜 화업(畵業)에 대한 정수라고 여겨질 만한 이러한 주제를 작가는 어떻게 작품 속에 녹여 선보이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주제를 시각화한 작품을 통해서 종국에 그가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찬찬히 살펴보자. 




조순호 개인전 전경 



II. 최소한의 작의(作意), 그저 자연처럼 
조순호의 화제(畵題)는 늘 작가 주변의 흔하디흔한 것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작가의 작업실 주변에서 만나는 흔한 꽃, 식물, 새와 같은 자연을 다룬 〈잡초〉, 〈쥐똥나무〉, 〈파랑새〉 연작이나 늦봄이나 여름의 비 내리는 싱그러운 풍경을 담은 〈녹우〉 그리고 매일의 일기처럼 그저 마음이 닿는 대로, 붓이 가는 대로 그려낸 〈취석재일기〉 연작이 그러하다. 그것들은 작업실 일상 속에서 그에게 매일처럼 다가와 ‘최소한의 작의’를 불러일으킨 흔하디흔한 뮤즈(muse)인 셈이다. 
‘최소한의 작의’라니? 그것은 그림 속에 추상적인 거대 담론이나 이념을 담으려는 의도로부터 훌쩍 벗어나 그저 자연이 일깨우는 소소한 메시지를 담고자 하는 화의(畫意)와 같은 것이라 하겠다. ‘언제나 그렇게 거기에 있는 자연, 언제나 그렇게 순환하는 자연’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무엇’으로 말이다. ‘자연’이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를 의미하듯이, 자연이란 단어로부터 파생한 ‘자연스럽게'는 인간의 자연 구속의 결과물인 인공을 최소화한 ‘자연 상태’와 같은 일련의 편안한 상태를 상정한다.  
욕망이 야기한 ‘인간 문명학’이 자연을 정복하고 구속하면서부터 자연과의 결별과 이혼에 이르고 나서야, 이제 인간은 자신의 옛 고향인 자연과의 재혼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인공을 최소화한 자연 상태’에 이르는 일이란 쉽지 않다. 지극히 인공적일 수밖에 없는 예술의 세계에서도 인간 이성의 승리를 모토로 이끌던 모더니즘의 그림자를 지우는 일 또한 쉽지 않다. 새로운 조형 매체와 미학을 찾아 내달리던 서구의 미술처럼 한국화의 장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통의 현대적 변용이라는 이름 아래, 구상과 비구상, 형상과 추상, 물질과 정신을 통섭하는 1950년대 말 ‘수묵의 추상 실험’을 위시한 다양한 노력들이 이어져 왔으니까 말이다. 
조순호 또한 이러한 류의 조형 실험과 거시적 미학에 탐닉했던 신진 작가의 시기가 없지 않았다. “나는 한 때 그림을 거창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림의 본질이니, 의미니, 혹은 시대정신이니.... / 그러나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작업에 방해가 되는가”라고 그가 진술하고 있듯이, 예술에 대한 담담한 자성(自省)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사한다.  중진의 끝자락에 이른 현재 그는 인공의 조형 실험이 극에 달한 모더니즘의 미학을 어느새 털어내고 반(反)인공, 즉 자연의 미학을 마음과 몸에 품어 안으면서 ‘그저 자연처럼 혹은 자연스럽게’라는 화두로 화업에 임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가 언급하는 ‘최소한의 작의’란 실상 일상 속 자연이 화업의 주체가 되어 화가 조순호를 매개자로 삼아 견인해 낸 ‘화의’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최소한의 작의’만을 지닌 채 최대한 자연, 자연성에 몸을 의탁한 채 작업에 임한다.  
조순호가 관심을 갖는 자연은 지천에서 볼 수 있는 잡초나 들꽃처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자연이다. “진짜 아름다움은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내재해 있다”고 하는 이러한 관점은 다음과 같은 그의 작가노트에 여실히 드러난다: “산수유가 한 점 한 점 열리더니, 순식간에 무더기로 터진다. / 꽃들은 그저 저마다 최선을 다해 피어나고 / 그 모든 순간은 아름답다. / 꽃이 피는 데는 이유가 없다. / 나의 그림도 산수유 같기를 바란다.” 

쥐똥나무2 60112(73x105cm)


(좌)날지않는새3-2019 / (우)날지않는새-2019



III. 번짐의 발묵(潑墨)과 스며듦의 파묵(破墨) - 순환과 포월의 자연
조순호의 작품에서 흔하디흔한 자연은 잡초와 같은 것으로 대별된다. 내가 씨를 뿌린 적도 없는 데 얼어 있던 검은 땅을 뚫고 파란 싹을 틔어 올린 이름 모를 잡초의 모습을 보라.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 수 없는 그들의 포월(匍越)의 생명력은 가히 신비롭기까지 하다. 포월이란, 탈주의 결과에 박수를 보내는 초월(超越)과 달리, 현실을 안고 엉금엉금 느리게 기어 넘는 지난한 넘어섬의 과정 자체에 방점을 찍는 행위이다. 
그것은 인간의 돌봄 이전에 그리고 너머에 존재하는 생명이다. 황무지와 돌밭과 같은 척박한 땅에서 싹을 틔운 식물들을 보라. 하나의 씨앗이 썩어 소멸하면서 미생물에게 양분을 주고 새로운 생명인 자신의 분신을 잉태하고 자연의 생명을 이어가는 포월의 존재! 그것은 봄으로부터 겨울로 가는 길목을 무한히 재생하는 ‘순환의 자연’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서 ‘번짐의 발묵(潑墨)과 스며듦의 파묵(破墨)’은 이러한 ‘포월과 순환’의 자연관을 담아내기에 효과적이다. 작품 〈잡초〉 연작을 보자. 이 작품들에는 기본적으로 먹을 붓는 것과 같은 번짐의 효과를 드러내는 ‘발묵법’이 중심에 자리한 채, 농묵으로 형상을 그린 후 먹이 마르기 전 바림을 통해서 대상의 풍요로운 입체감을 드러내는 ‘파묵법’은 물론이고, 화지에 흥건히 자리한 담묵이 마르기 전에 농묵을 얹어 농묵이 번지면서 깊이 있는 색이 살아나게 하는 ‘운염법(暈染法)’의 효과 또한 여실히 드러난다. 
작품 〈잡초2016〉에서는 단연 이러한 ‘번짐의 발묵과 스며듦의 파묵’이 전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화지에 수분을 가득 먹은 담묵의 화면 위에 수분이 증발하기 전에 농묵으로 획을 긋거나 그 반대의 방식으로 잡초를 그린 이 작품은 농묵이 담묵의 배경 사이로 기묘하게 번진 채 마무리되고 있다. 먹의 번짐이 이르지 못한 곳에 자연스러운 여백을 군데군데 남기면서 말이다. 형상의 외곽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풀어져 버린 ‘형상과 형상’, ‘형상과 여백’의 경계는 발묵과 파묵의 효과로 인해 무수한 1차, 2차 경계를 낳으며 퍼져나가면서 용묵(用墨)과 용색(用色)을 변주한다. 
이와 달리 농묵 안에서 미세하게 스며듦을 선보이는 파묵 또한 눈에 띈다. 작품 〈잡초2012〉에서는 잡초 하나의 이미지를 농묵으로 커다랗게 화지 중앙에 가득 남기고 있는데, 농묵의 비좁은 경계 사이로 담중묵(淡中墨)이 번지고 스며들어 신비로운 화면을 만들면서도 전반적으로 농묵이 가득한 화면은 잡초의 강인한 이미지를 순연히 드러낸다.  
농묵, 중묵, 담묵을 신비롭게 변주하는 발묵이나 파묵의 효과 외에도, 먹을 여러 번 덧칠해서 중후한 양감을 만드는 적묵(積墨)의 운용이나 초록의 담채(淡彩) 효과가 어우러진 작품 또한 있다. 〈잡초2-2019〉에서는 농묵이 획으로 스쳐간 빈자리를 또 다른 농묵이나 담중묵으로 여러 번 겹쳐 올려 짙은 어둠 속에서 수묵의 풍요로운 변화를 도모한다. 싹을 틔어 올린 녹색의 잡초가 화면 가운데 자리한 또 다른 작품 〈잡초3-2019〉은 짙은 듯 흐린 담중묵이 화지에 난을 치듯이 획을 그어 수풀과 같은 형상을 배경에 한 가득 잉태한다. 획이 만든 ‘형상과 여백의 공존’이 열린 셈이다. 
이처럼 조순호가 포월의 자연을 표현하는 ‘번짐의 발묵과 스며듦의 파묵’은 형상과 여백 사이의 경계를 미묘하게 허물면서 풍요로운 수묵의 세계를 창출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이러한 조형 언어는 자연이나 먹의 심오한 깊이를 창출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그저 자연의 자연스러운 성상(性狀)을 드러내는데 목적을 둘 뿐이라는 점이다. 봄으로부터 겨울에 이르는 계절의 순환을 천천히 지속하면서 자신을 구속했던 인간을 다시 자연으로 받아들이고 품어 안는 포용과 포월의 마음을 자연에게서 배우듯이 말이다. 
그래서일까? 조순호에게서 ‘번짐 그리고 스며듦의 파묵’이란 아래 작가 노트에서 보듯이, 흔하디흔한 일상 속 자연에서 배우는 따스함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스며듦은 따뜻함이다. / 먹과 물과 종이처럼 / 나와 대상의 이어짐이다. / 계절이 오고 또 가고 / 꽃이 피고 지듯/ 스며듦은 자연의 속도이다. / 이것이 내 삶의 방식이다.”


(좌)잡초2-2019 / (우)잡초2016


(좌)녹우 60111(210x74cm)x2  / (우)산수유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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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미혹(迷惑)을 여윈 그림 - 가볍게, 단순하게
화가 조순호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연을 그저 “가볍게, 단순하게” 대면하고자 한다. 
작품 〈쥐똥나무1〉, 〈쥐똥나무2〉는 그가 작업실 주변에서 그저 ‘가볍게, 단순하게’ 대면했던 흔한 자연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갑자기 그리고 싶은 마음이 몸으로 이끈 결과물인 셈이다. 번짐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먹을 뿌리듯이 그린 발묵법과 먹을 덧칠하는 적묵법이 두루 병행된 이 연작에는 푸른 녹색과 검은 먹색이 한데 어우러진 채 그의 ‘최소한의 작의와 흥(興)’이 흐드러지게 펼쳐진다. 마치 한껏 부푼 동심의 유희처럼 말이다.    
흥이라니? 흥은 반복되는 리듬을 통해 기(氣)의 흐름이 몸 안에서 꿈틀대고 상승하는 무의식적 반응이다. 그것은 몰입의 경지로 들어가는 문지방과 같은 것이어서 예술 창작을 이어가는 시작점이 되기에 족하다. 그래서일까? 동아시아의 문인들은 이러한 흥을 ‘의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상(象)을 통해 깨우치게 하는 심리적 영역의 표현 방식’으로 삼아왔다. 즉 흥이란 예술 창작의 몰입을 견인하는 ‘무의식적 심리의 과정이자 그것이 고양되는 영역’으로 ‘무목적’을 지향한다고 하겠다. 
조순호의 창작 또한 마찬가지다. 그에게 흥은 자연 혹은 사물과 만나 자신과 무의식적 동화(同化)를 이루는 일련의 과정이 된다. 그것은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자신을 의탁해서 창작에 뛰어드는 무목적적 회화 행위로 이성적 사유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창작이기도 하다. 이러한 창작에 대한 작가의 사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작가노트를 살펴보자. 
 
“세상은 복잡하고 어지럽지만 요즘의 나는 점차 단순해진다. (...) / 생각을 멈추고 몸이 이끄는대로 그리려 한다. / 오로지 나만의 호흡으로 작업한다. (...) / 이제 나는 되도록 무심히, 최소한의 작의(作意)로 흥(興)을 그린다. / 마음의 물줄기가 무의식(無意識)의 수면에 닿을 때까지...” 

우리는 그의 진술에서 “최소한의 작의로 흥을 그린다”라고 하는 대목과 ”되도록 무심히”라는 말에 주목한다. 여기서 ‘무심히’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를 의미하는 ‘무심(無心)’이란 용어는 흔히 노장사상 내지 불교사상과 연동된다. 
노장사상에 있어서 ‘무심’이란 '행동하지 않고 행동하다‘는 의미의 무위(無爲)와 더불어 ’삶은 하나의 놀이와 같다‘는 소요(逍遙)의 개념과 맞물린다. 인간 우환의 궁극적 해결을 도(道)에서 찾고자 하는 노장사상은 인간이 따라가야 할 행동에 관한 궁극적 원칙을 무위와 소요로 바라본다. ‘무위’는 인위(人爲) 또는 작위(作爲)를 버리고 대자연의 본성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따르는 일이며, ‘소요’는 대자연의 변화 속에서 억지 없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참된 인간 행위를 의미한다. 불교사상에서 ’무위‘는 ’망념(妄念)을 멀리 떠난 진심(眞心)과 맞물린다. 특히 불교에서 ‘무심’은 “허망하게 분별하는 삿된 마음, 미혹한 마음을 여윈 것”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욕망의 집착을 버리는 수행의 길을 강조하는 무념무상의 상태를 상정한다.  
따라서 조순호가 자신의 창작에서 화두로 삼은 ‘무심히’는 노장사상의 ‘무위, 소요’ 그리고 불교사상의 ‘진심, 미혹(迷惑)한 마음을 여윈 상태’를 만나 ‘과도한 작의’를 버리고 ‘최소한의 작의’를 통해서 오늘도 흥의 세계를 펼쳐 나가는 태도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을 의미하는 ‘미혹’과 거리를 둔 무엇, 즉, ‘미혹을 여윈 그림’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그의 미적 태도 때문일까? 복잡다기한 다양한 삶의 맥락을 화폭에 담은 그의 몇몇 작품들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미혹을 여윈 그림’이라고 하는 의미를 읽어낸다. 코로나19가 창궐하는 포스트 팬데믹의 상황에서 마스크를 낀 채 핍진(乏盡)하고 우울한 표정의 인물을 담아낸 작품 〈외눈박이 60115〉이나, 난감하고 곤고(困苦)한 상황에 처한 것으로 보이는 인물들을 표현한 〈외눈박이〉, 〈외눈박이 2019〉, 〈편두통 2012〉과 같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이 그림들에서 우리는 작금의 상황은 고단하고 어려운 것일 수 있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하는 무위와 무심의 상황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최근작은 현재의 번민과 비루함조차 실의와 낙망 속에서 대면하기보다는 ‘최소한의 작의와 흥’을 통해서 ‘최대한 가볍게, 단순하게’ 바라보려고 하는 그의 관조의 태도가 낳은 ‘미혹을 여윈 그림’이라고 하겠다.  


좌) 외눈박이 60115(68.5x49cm) / (우)편두통2012


취석재일기 60114(73x91.5cm)



V. 에필로그 - 남겨진 파지(破紙)
여기, 전시장에 마련된 테이블 위에 파지(破紙)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것들은 그가 평소의 작업 속에서,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렸던 수많은 그림들 속에서 끝내 작품으로 간택되지 못하고 버려진 것들이다. 작가의 작품으로 선택되지 못하고 작품 아닌 것으로 남은 어떤 잉여물(剩餘物) 혹은 작가로부터 버려진 폐기물인 이것들을 그는 왜 전시장에 가져왔을까? 게다가 작가는 왜 그것들을 박물관의 유물처럼 ‘테이블 위에 올린 아크릴박스’ 안에 고이 모셔 올려놓은 것일까?  
도공들이 가마에서 나온 도자기가 ‘쓰임새가 있는 공예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담보할 수 없는 흠결이 있을 때, 최종적으로 깨버려 파기시킴으로써 그 생명을 이 세상에서 궤멸시켜버린다고 할 때, 조순호의 파지들은 그것들과는 ‘다른 의미’를 우리에게 유추하게 만든다. 그는 전시에 선보이고 싶지 않은 그림을 더러 화로에 불태워 없애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그저 무심히 밀쳐두고 작업실에 쌓아둔 채 그 생명을 보존해 왔다는 점이다. 우리의 삶에서 잉태했던 수많은 부끄러운 모습이나 타인에게 숨기고 싶은 오욕의 상흔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 그는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던 그림들조차 언젠가 자신의 예술 의욕을 일깨우는 가르침이 있는 작품들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저 ‘파지’로 예술 작품의 위상으로부터 추락해 있는 상태이지만 말이다. 
‘가벼운 밀쳐둠’, 그것은 데리다(J. Derrida) 식으로 말해 예술과 예술 아님을 나누는 결단이 아니라 예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미루어둔 차연(差延, ‘differance)의 행위라 할 만하다. 그것을 어떻게 볼지는 관객의 몫이다. 작가는 그저, 가볍게, 단순하게 그것을 단지 작업실이라는 ’그곳‘에서 전시장이라는 ‘이곳’으로 가져왔을 따름이니까 말이다. 


조순호 작업실 전경

조순호의 이번 전시는 ‘가볍게, 단순하게’라는 주제 아래 ‘미혹을 여윈 그림’에 천착한다. ‘최소한의 작의와 흥’을 통해서 그저 ‘자연처럼, 자연스럽게’ 화제들을 대면하고 그것들을 화폭에 ‘무심히’ 담는다. 그의 화제들은 일상 속에서 대면했던 사물이거나 순환과 포월을 지속하는 자연의 모습이다. 
특히 번짐의 발묵과 스며듦의 파묵이라는 조형 언어를 통해서 조순호는 이러한 순환과 포월의 창작 태도를 효율적으로 가시화한다. 모필의 두께가 머금은 먹물의 크기와 농담에 따라, 또한 작가가 지면 위에 운영하는 모필의 운동에 따라 ‘형상과 여백의 경계’는 흐려지고 이어진다. 용필에 따라 용묵, 용색을 달리하는 그의 작품은 먹의 번짐과 스며듦을 변주하면서 모든 경계의 사이에서 ‘가볍게, 단순하게’를 조형적으로 실험하고 실천하기를 지속한다. 마치 일상 속에서 호흡하는 예술처럼 말이다. ●


출전/
김성호, 「미혹을 여윈 그림 - 가볍게, 단순하게 그리고 무심하게」, 『조순호』,카탈로그 서문, 리각미술관, 2022. 05. 13~06. 30(조순호 개인전-가볍게 단순하게, 리각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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