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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일반│'작가 최선의 코로나 위장무늬 모바일 커넥터’에 대한 논평

김성호


손지민의 발제 ‘팬데믹 시대의 분위기는 예술 작품의 시발점이 될 수 있는가? 
-작가 최선의 코로나 위장무늬 모바일 커넥터’에 대한 논평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발제자 논문의 문제의식은 글 말미에 밝히고 있듯이, “팬데믹 시대를 어떻게 시각화하여 팬데믹의 분위기를 소통할 수 있는가”에 집중되고 있다. 간단히 말해 “팬데믹 시대의 분위기의 시각화”에 관한 문제의식으로 읽힌다. 발제자는 작가 최선의 일련의 작품 〈코로나 위장무늬 – 모바일 커넥터〉을 대상으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덧입혀 ‘분위기’라는 독특한 개념을 ‘경험’이라는 화두와 맞닥뜨려 논지를 펴고 있다. 그 논지는 “특별한 감각의 구현이 아닌 경험 자체의 예술화 가능성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것이다. 즉 “미적 경험을 관념화하여 표현하는 것이 아닌 의식 내에서 생성되는 과정을 시각화하려는 시도”를 옹호하는 것이자, 그것을 위해서 “다른 일상적 경험과 구분되나 세계와의 관계 내에서 개인의 특유한 주의력을 바탕으로 체험되는 미적 경험에 대한 연구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편, 발제자가 주목하는 작가 최선의 작품에 등장한 코로나 바이러스 무늬는 교련복의 위장무늬에서 기인한 것이다. 당시의 군부 독재 시대와 반민주적 상황 혹은 분위기로부터 소환한 교련복 무늬를 변주한 코로나 바이러스 무늬는, 시각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구현되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로 차치하더라도, 개념적으로는 불안, 공포, 혐오와 더불어 호기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족하다. ‘미적 성찰을 주의력에서 감성으로의 이행’으로 바라보는 제라르 주네트의 견해를 주석으로 달면서 ‘포스트 팬데믹 시대의 분위기에 대한 자각과 그것을 작품화하는 것으로 소개하는 최선의 최근 작업’을 ‘일련의 추상적 관념의 단계에서 구체적 이해 단계로의 이행’으로 해설하는 발제자의 주장에 주목한다. 발제자의 연구는 미학에서 ‘지각-인식-의미론’으로 이어지지만 그 경계가 불명료한 것을 분절해서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의미 있는 연구로 생각된다. 발제문에서 이것은 ‘자각’이라는 말로 탐구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논평자는 발제자의 흥미로운 주제와 더불어 논의의 전개에 많은 부분 공감하나 이 논문에 몇 가지 의문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발제자가 언급하는 ‘분위기’라는 용어는 직접 경험에 의해서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간접 경험에 의해서 도달하는 것인가? 
발제자의 글에서는 논리의 장치인 두 키워드, ‘분위기’와 ‘경험’이 야기하는 ‘공유의 의미’와 ‘대비의 의미’가 보다 명징하게 설명될 필요성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드리는 질문이다. 발제자는 ‘분위기’를 “분위기를 느끼는 사람이 세계와 맺는 관계에서, 다시 말해, 명백히 실체인 것들과 내가 맺는 사실 관계에서 자각된다.”고 정의한다. 
‘분위기’라는 용어는 사전적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환경”과 같은 실존적 상황을 의미하면서도,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지니는 독특한 느낌”과 같은 주관적 감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분위기’란 용어는 일견 달라 보이는 ‘실존적 상황’과 ‘주관적 감성’을 모두 지니면서 객관과 주관, 실체와 비실체처럼 ‘대비의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지각이라는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에서 ‘공유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분위기와 경험’이라는 양자는 ‘지각’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서 ‘주체의 실존’을 전제하지만, 전자는 ‘간접적 경험’, 후자는 ‘직접적 경험’이라는 차원으로 대비된다. 논평자의 이러한 분석은 발제자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나타난다.

“베르그손이 자신의 방에서 신문 기사로 전쟁을 접했을 대 그는 어떠한 폭발, 굉음, 비명도 듣지 않았으며, 자신의 지적 능력으로 전쟁이라는 실체를 사유하거나 그 현상을 해부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 간단히는 공포에 대한 신체와 정신의 자연적 반응이 있기까지의 과정 또는 어떠한 기묘한 인상이 생겨나는 순간을 가리키며 공포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삶 속으로 들어와 있는(이 예시에서는 인격화된 ) 모습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로만 설명된다. 이 모든 것을 지배하지만 모순적으로 간단해 보이는 낯선 인상은 베르스손의 미적 경험, 일상의 경험과 구분되는 분위기다. 한 시대의 공기를 뒤덮는 분위기는 이렇듯 추상적 관념을 구체화시키는 의식의 인지 활동에 의해 자각된다.(그리고 또한 의식의 문제이므로 지극히 생물학적, 인지심리학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의식의 감성적 작용이다). 뿐만 아니라 분위기는 우리가 우발적으로 만나는 사물들에 대한 의식과 신체의 반응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 

위의 글은 베르그손이 폭발, 굉음, 비명을 듣는 ‘전쟁에 대한 직접적 경험’ 없이 신문 기사를 통해서 접하게 된 ‘전쟁에 대한 간접적 경험’으로 야기된 ‘기묘한 인상과 그것으로 이르게 된 공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베르그손의 미적 경험, 일상의 경험과 구분되는 분위기”라고 정리한다. 베르그손의 경험에 대한 사유를 우리는 ‘삶의 철학’이라고 칭하면서 지속(Durée)이라는 시공간이 혼성된 삶의 시간 개념을 통해서 체험적 일상, 직접적 경험의 일상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발제자가 언급한 ‘분위기’는 이러한 ‘베르그송이 언급하는 직접적 경험’과는 구분되는 ‘간접적 경험에 의한 무엇’으로 읽힌다. 이러한 논평자의 독해는 다음에 이어지는  “한 시대의 공기를 뒤덮는 분위기는 이렇듯 추상적 관념을 구체화시키는 의식의 인지 활동에 의해 자각된다.(그리고 또한 의식의 문제이므로 지극히 생물학적, 인지심리학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의식의 감성적 작용이다)”라는 발제자의 글에서도 감지된다. 그러나 그 다음의 글 “뿐만 아니라 분위기는 우리가 우발적으로 만나는 사물들에 대한 의식과 신체의 반응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라고 하는 발제자의 글을 보게 되면 직접적 경험을 열어 두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발제자가 언급하는 ‘분위기’라는 개념은 전체적으로 간접 경험 속에서 자각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분위기는 (...) 의식과 신체의 반응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는 발언은 신체가 세계와 대면한 직접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독해에 혼란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또한 언급하신 베르그송의 에피소드를 ‘추상-구체 이행’에 대한 사유로 소개하고 계신데, 그의 철학적 개념에 따르면, 경험이라는 것은 모두 ‘체험적 시간(durée vécue)’속에서 맞닥뜨리는 직접 경험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마치 간접 경험에 의한 것처럼 설명되는 부분에 모순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 점을 앞에 드린 첫째 질문과 관련하여 답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둘째, 발제자는 작가 최선의 ‘코로나 위장무늬 모바일 커넥터’를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의식의 변화, 곧 시대의 분위기에 대한 추상적 관념에서 구체적 이해와 대화로의 이행”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코로나19 팬데믹의 실체, 즉 바이러스의 창궐은 그 자체로는 전혀 추상적이지 않으나 확진되지 않은 사람의 경험 속에 그 실체의 여파가 들어오는 과정은 분명하게 추상적 관념의 단계에서 구체적 이해 단계로의 이행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느끼는 팬데믹의 분위기는 이 이행에 다름 아니다”라고 정의한 발제자의 주장과 겹쳐진다. 
여기서, 팬데믹의 분위기를 ‘확진되지 않은 사람의 경험’으로 국한시켜 현재의 팬데믹적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확진자/비확진자를 나누고 확진 여부를 전제하는 팬데믹 상황은 ‘경험이라는 것을 세계를 대면한 한 주체의 직접적 경험’으로 바라보는 실존주의적 삶의 철학으로 본다면, 논리적으로 모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간단한 발제자의 답변을 바란다. 

마지막으로 연구 대상인 작가 최선의 전반적인 작업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어 해당 작가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전체 글의 연관성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독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빈 캔버스를 세월호가 빠진 팽목항에 빠트려 꺼내어 만든 소금 그림이나 빈 캔버스에 침을 뱉어 한국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조명을 가한 작업, 캔버스 천을 펼쳐, 개의 털을 태운 잿가루로 만든 벽화를 통해서 한국의 식문화에 배태한 야만성을 고발하는 작업, 캔버스 천 위에 많은 협업자와 함께 호흡으로 불어 만든 그림이 야기한 소통의 문제의식 등, 익숙한 기존의 조형 언어 안에 새로운 비판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작업에 대한 설명이 더 있었으면 한다. 관련하여 발제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또 다른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

출전/
김성호, 「손지민의 발제 ‘팬데믹 시대의 분위기는 예술 작품의 시발점이 될 수 있는가? 작가 최선의 코로나 위장무늬 모바일 커넥터’에 대한 논평」, 『팬데믹 시대, 철학이 사유하고 예술이 표상하다. - 단국대 철학연구소 2021년도 여름학술대회』, 자료집, 2021.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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