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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가론│유도희 / 수상한 오브제 초상

김성호

수상한 오브제 초상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작가 유도희의 작업은 ‘검고 수상(殊常)한 오브제’를 담은 흑백 사진이 주를 이룬다. 그 오브제란 석탄 폐공장에서 그녀가 우연히 발견한 ‘버려진 고무판’이다. 두껍고 검은 피부 안에 세월의 흔적을 생채기처럼 간직한 고무판이란 무용지물이다. 더럽고 누추한 무엇이다. ‘누군가’로부터 용도 폐기된 그것을 ‘작가 유도희’는 자신의 사진 작업을 위한 쓰임새 가득한 사진 모델로 영입했다. 우연한 발견과 한순간의 즉흥적인 선택이 누추한 고무판을 자신의 작업 세계 속 오랜 동반자로 만든 셈이다. 





수상한 오브제 - 누추한 무엇의 변신 
거무튀튀하고 상처 가득한 고무판! 그 누추한 물건의 무엇이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일까? 어떠한 감정 이입이 그 오브제로부터 발원했던 것일까? 자신의 작업에 대해서 그녀는 다음처럼 말한다: “동양화적 작업에서 인화지라는 화폭에 붓을 대신하여 카메라를 사용하고 흑백으로서 먹을 대신하여 실제적 자연 풍경과 배경에 한 번의 큰 필체와 같은 느낌의 추상적 형태를 한 오브제를 표현하고 그 속에서 조화와 의미를 찾는 작업이다.” 
유도희의 작업 노트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풍경 속에 구겨진 채 버려진 커다란 고무판으로부터 그녀는 필시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그려진 한 획의 서체 추상화를 떠올렸으리라. 무심한 듯 망설임 없이 큰 폭의 걸음을 휙 내딛고는 이내 멈춰선 한 획의 서체 추상! 그 ‘풍경 속 서체 추상’의 원저자는 고무판을 버린 ‘누군가’이겠지만, 그것을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예술의 세계로 견인해 온 이는 분명히 작가 유도희라고 하겠다. 한순간의 강렬한 시지각의 경험이 그녀의 작업을 이끄는 기억을 만들고 시간의 흐름을 이끌어 온 셈이다. 
그런데 유도희의 검은 고무판은 수상하다. ‘유연함’과 ‘딱딱함’처럼 대립하는 이것과 저것 사이를 오가는 변신의 진폭이 다양하고 크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보듯이, 그것은 더러는 황량한 벌판 위에 거적때기로 둘둘 말아 버린 무연고자의 주검처럼 처연하거나 더러는 수면 위로 퍼덕거리며 도약하는 싱싱한 물고기처럼 활력이 넘치기도 한다. 그것은 때로는 길 위를 걷는 수도사처럼 침잠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나무숲 사이 자신의 몸을 은폐하는 매복 병사처럼 음험해 보이기도 한다. 그뿐인가? 어떤 경우에는 피학, 수동과 멈춤이 어떤 경우에는 가학, 능동과 움직임이 고무판 위에 일렁거리기도 한다. 
가늠할 수 없는 무한 변신! 유도희의 작업에서 이러한 변신과 변화의 가능태는 도처에 있다. 생각해 보자. 미니멀 작가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의 펠트 작업이 그러하듯이, 네모의 ‘2차원 평면’이 만든 작가 유도희의 널따란 고무판은 겹쳐지거나 둥그렇게 말리기도 하면서 ‘3차원 조각’으로 변환한다. 그것이 나무들 사이에 세워지거나 밀물이 내치는 바닷물을 맞이하는 해변에 눕혀질 때 그것은 ‘설치 작품’으로 변환한다. 
아니! 차라리 그것은 자연의 공간을 아우르는 ‘자연미술’ 혹은 ‘대지미술’이라고 칭할 만하다. 또는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환경의 흐름을 창작 주체인 ‘작가’와 창작의 도구이자 대상인 ‘고무판’ 양자가 온몸으로 맞이하는 ‘과정미술’이자 ‘시간예술’이기도 하다. 무거운 고무판을 이리저리 이끌고 다니며 풍경과 대지 속에 위치시키는 행위 자체는 고된 노동을 동반한 하나의 ‘퍼포먼스’라 하겠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미술’은 궁극적으로 그녀가 계획하는 사진 촬영을 위한 연출 작업인 까닭에 어떤 면에서는 ‘사진 행위 프로젝트’라고 명명(命名)할 만하다. 
사진 인화지 위에 흑백으로 재현되는 ‘풍경 속 사물’은 시공간 속 실재의 찰나(刹那)를 포착하고 고착화한 시뮬라크르(simulacre)이지만, 이내 한지 위에 농묵의 갈필이 휘몰아치고 간 한 폭의 동양화 혹은 한 점의 서체로 연상되면서 이미지로부터 이미저리(imagery)로 변화되기도 한다. 가히 ‘발견된 오브제’를 통해 ‘만들어진 랜드스케이프(landscape)’를 앵글 속에 담는 ‘심심(深深)한 마인드스케이프(mind-scape)’, 즉 ‘심층의 심상(心像) 풍경’이라 할 것이다. 


물위에 그리다 01, 고무판, 사진


무제 (을왕리에서) 고무판 67x100cm 피그먼트 프린트 2017



무제, 고무판, 2003 



수상한 오브제 초상 – 사진의 안팎에서  
그렇다면 사진은 작가 유도희 작업의 완결판인가? 그녀의 사진은 액자 속 이미지로 자리한 완성작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것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사진 컷이 모여 영상으로 변환되기도 하고, 인화지 위에 프린팅된 사진이 아랫단이 둘둘 말린 채 핀으로 벽에 매달려 ‘액자 없이 벌거벗은 사진’으로 또 다른 방향성을 예고하기도 한다. 이것은 역설이다. 왜냐하면, 1970년대 프랑스 그룹 ‘쉬포르 쉬르파스(Support-Surface)’의 작품 설치 방법이 관객에게 선보이는 ‘순수한 미술’의 본질과 회화 구조가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과정에서 프레임 없이 전시하는 방식으로 표출되었다면, 유도희의 이러한 설치 방식은 사진에 이르는 수많은 변신 과정의 지속적 순환 속에서 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3차원-2차원, 조각-평면-설치, 자연미술-대지미술-과정미술, 버려짐-발견됨, 멈춤-움직임, 실재-시뮬라크르’와 같은 변신의 과정과 대립항과의 만남은 ‘종이에 인화된 메이킹 포토(Making Photo)’에 이르러서도 종결되지 않고 지속된다.
인화된 사진이 ‘전시라는 이름’으로 실제의 그물이나 고무판을 다시 만나기도 하고 도록과 포트폴리오를 위한 ‘아카이브라는 이름의 사진’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달리 말하면 검은 고무판이 ‘사진’과 ‘사진 아닌 다른 것들’과의 변주된 만남을 통해서 변신을 무한 거듭하는 것이다. 이처럼 환경과 만나 벌이는 ‘수상한 오브제’의 변신은 무한한 듯 보인다. ‘수상한 오브제 초상’이라는 이 글의 제목은 그래서 나왔다. 
작가 유도희는 자신의 작업 노트에서 “앞으로는 삶 속의 많은 변모들을 좀 더 다양한 매체와 방법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다양한 매체와 방법’이라는 작가의 말은 사진이라는 매체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창작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즉 ‘사진의 안팎’을 넘나드는 미디어와 그것의 예술적 사용과 연동된다. 게다가 최근에는 코로나 상황으로 인한 포스트 팬데믹 시대와 인류세(人類世)를 맞이하면서 느끼는 소회들이 새로운 작업을 구상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여하한 이러한 다양한 매체와 방법에 대한 새로운 변화와 구상은 작가의 몫이다. 그의 작업이 어찌 다르게 변하게 될지 필자로서는 속단하기 어렵다. 그것은 온전히 창작의 주체인 작가 유도희의 몫이기 때문이다.
남겨진 관건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녀가 운명처럼 맞닥뜨린 ‘버려진 커다란 검은 고무판’에 대한 시각적 경험이 워낙 컸던 탓인지, 창작의 도구이자 대상인 이 고무판을 지나칠 정도로 ‘이미지’로만 인식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과 같은 것이다. 마치 동양화 화폭 위에 일필휘지의 획을 남긴 서체처럼 기운이 생동하는 무엇으로 보거나 묵시적이고 종말적인 주검의 존재로 보는 극단의 관심은 대개 시각적 경험에서 비롯된 강렬한 기억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고무판을 말아 두거나 둘둘 묶어 풍경 속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고무의 탄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지만, 고무라는 성질에 대한 다양한 조형적 실험은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작가 역시 인식하고 있는 고무의 탄성은 과학적이고 물리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점에서 창작의 도구이자 대상인 고무판에 대한 조형적 실험을 이미지라는 외피로부터 탈주해서 탄성과 같은 ‘고무 고유의 속성’에 대한 실험으로 깊이 들어올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고무판의 탄성과 장력을 과학적으로 점검하고 성찰하는 방식의 접근이 필요해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작가 유도희가 시각적 충격으로 맞이했던 ‘작가의 시지각적 체험 속 고무판’이라는 조형 언어의 한계로부터 일정 부분 자리를 이동해서 ‘고무판이라는 대상’을 과학과 물리의 연구 방식을 통해서 잘게 쪼개어 보거나 사회학적 은유를 도모하는 새로운 문법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달리 말해, 온도, 압력, 공기와 습도에 따른 고무 재질의 다양한 속성 변화에 대한 연구를 병행한다면, 또 다른 차원에서의 새로운 작업 방향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진의 안팎에서 시도하는 고무판이라는 작가 유도희의 ‘오브제의 초상’이 ‘심오한 수상함’으로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   


무제 (At Rouen) 고무판 157X107cm 젤라틴 실버프린트 2003


무제,가변설치 고무, 그물, 2003

출전/
김성호, 「수상한 오브제 초상」, 유도희 작가론,  『OFF-SITE-SeMA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2022, pp. 9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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