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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가론│류영신 /신성한 숲의 세계

김성호


신성한 숲의 세계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작가 류영신은 그간 자작나무와 미루나무가 이룬 숲의 풍경을 탐구했던 《숲속으로》 연작과 미루나무의 반추상화 경향을 탐구했던 《군상(Cluster)》 연작 그리고 2010년대 중반 시원의 숲을 표현주의 추상의 형식으로 탐구했던 《The Forest-Black Hole》 연작을 거쳐 마티에르가 두터운 다양한 추상의 조형 언어를 통해서 근원적인 자연의 심상을 탐구하는 최근의 《Forest-Divine》 연작에 이르고 있다. 작가의 이러한 연작 중에서 특히 최근작은 어떠한 조형적 변화를 거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것이 함유한 미학적 함의를 살펴보자.  


No107 Forest-Divine, 91 X 91cm, mixed media,2021,ⓒADAGP  Ryu, Young Shin


II. 나무와 숲으로부터 
작가 류영신이 작업에서 커다란 변곡점을 갖게 된 계기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레핀아카데미에서 수학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드넓은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 여행 중 창밖으로 펼쳐진 자작나무숲을 보았던 당시의 감흥은 그녀를 오랜 시간 동안 나무와 숲에 대한 조형적 실험에 천착하게 했다: “잔바람에 하늘거리는 푸른 잎들, 끝없는 광활함 속엔 따뜻하고 아련한 정담이 스미어 있었어요. 어둑한 노을빛 뒤로 녹녹한 밤안개가 이방인을 친절하게 마중하며 밀려오는 듯했죠. 은빛 나뭇가지의 향연에 나도 함께 훨훨 날아다니고 싶었습니다. 자작나무 숲이 준 깊은 감동의 힐링을 일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강렬하면서도 풍성한 희열을 화폭에 고스란히 담아내고 싶습니다.” 
1995년 인데코갤러리의 첫 개인전 이후 류영신이 줄곧 ‘나무와 숲’이라는 소재에 골몰해 왔다는 점에서, 러시아에서의 자작나무숲에 대한 강렬한 체험은 오늘까지 이르게 한 일관된 작업 세계를 이끄는 첫 발자국이었던 셈이다. 백옥과 같은 하얀 피부와 사이사이 검은 반점처럼 짙은 피부를 지닌 자작나무는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날렵하고도 고고한 자태뿐만 아니라 자줏빛의 나뭇가지와 연녹색 잎이 색의 조화를 이루는 환상적인 숲을 이루면서 보는 이에게 낙원 혹은 천상계와 같은 강렬한 환영을 드리운다. 순연한 피부를 지닌 자작나무와 그것이 군집을 이룬 숲의 풍광이 야기한 강렬한 체험이 작가에게 ‘나무-숲’에 대한 관심을 지속하게 했으리라. 
구상이든, 추상이든 류영신의 작업에서 우리는 나무에서 인간을, 숲에서 사회라는 현실을 메타포로 읽게 된다. 한자어 목(木)에서 보듯이 땅속에 뿌리를 박고 하늘 높이 가지를 뻗고 있는 나무는 인간의 메타포처럼 보이고, 나무와 나무가 모여 만든 림(林), 삼(森)과 같은 ‘숲’은 오늘날 인간과 인간이 더불어 살고 있는 오늘날 인간 사회의 메타포처럼 간주되는 까닭이다. 
류영신은 인간이 나무와 만나 쉼을 갖게 된다는 한자어 ‘휴(休)’처럼, 자신의 작업이 천착하는 ‘나무-숲’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자신과 관람자에게 쉼과 힐링의 시간을 선사한다. 그것은 슬픔에 대한 위안이자 아픔에 대한 치유이기도 하다. 류영신의 이전 작에서, 중간 색조를 바탕으로 한 채 반구상적 형태의 원색의 나무들이 이룬 숲에서, 그리고 최근의 어두운 바탕 위에 추상적 형태로 나무와 숲이 한 덩어리처럼 만나는 숲에서 이러한 위안과 치유는 가시화된다. 


No72 Forest-Divine, 131 X 131cm, mixed media,2020,ⓒADAGP  Ryu, Young Shin


No108 Forest-Divine, 90.9 X 72.7cm, mixed media,2021,ⓒADAGP  Ryu, Young Shin




III. 깊고도 신성한 숲  
류영신의 비교적 최근작인 《The Forest-Black Hole》 연작과 최근작인 《Forest-Divine》 연작은 제목만큼이나 ‘나무-숲’의 지시적 대상을 벗고 더욱더 근원적인 자연과 생태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문제의식을 조형적으로 성찰한다. 이전의 작품들이 ‘나무-숲’이 이루는 풍광에 대한 경이로운 감흥을 시적 감수성으로 표현한 것이었다면, 이 두 연작은 숲이 지닌 심층의 존재적 미학과 더불어 인간의 원초적인 내면을 그곳에서 발견하려는 의지로부터 발원한 것이다. 즉 그녀의 작업은 자연으로부터 대자연으로 더 나아가 광대한 우주의 생명성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전환된다. 류영신이 한 인터뷰에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의 자연 속에서 숲과 우주의 근원적 교감과 공감을 끌어내고 싶었다”고 진술하고 있듯이 말이다. 
《The Forest-Black Hole》 연작을 살펴보자. 이 연작은 캔버스 위에 검정이나 어두운 바탕색으로 짙은 숲의 어둠을 드리우면서 뿌리기, 닦기, 밀치기 등 운필의 효과를 실험하면서 숲의 형상을 만든다. 즉 숲의 배경을 만들면서 동시에 나무-숲의 형상을 마치 서체의 획(劃)처럼 한꺼번에 운용하는 조형 언어를 구사한다. 달리 말해, 배경과 형상을 단색의 어두운 물감으로 한꺼번에 창출하는 것이다. 캔버스 위에 물감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숲의 농담을 만들거나 칠해진 물감을 닦거나 물감이 굳기 전에 스크래치로 흰 여백을 만들기도 하면서 숲 사이로 들어오는 자연광의 이미지를 만들기도 한다. 어떤 여백은 거친 마티에르가 올라서 있기도 하고 어떤 여백은 엷게 펴 바른 물감으로 인해 캔버스의 올이 희미하게 드러나기도 하면서 말이다. 가히 추상과 구상의 접점에서 펼쳐지는 장대한 자연이라고 할 만하다. 
같은 연작 중에서 검은색 바탕 위에 노란색을 덧바르고 마르기 전에 스크래치로 긁어서 밑바탕의 검은색이 드러나게 함으로써 만들어낸 풍광은 어찌 보면, 한국화의 부감법(俯瞰法)처럼 높은 곳에서 길이 나 있는 들판을 내려다본 풍경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보기에 따라서는 한 그루의 나무나 바윗덩어리가 자리한 자연을 선 채로 마주 본 장면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스크래치로 비로소 드러나는 바탕의 검은색은 작품명처럼 자연의 근원적 물질의 양태인 블랙홀(Black Hole)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한다. 빛을 포함하여 근처에 있는 모든 물질을 흡수해 버린다고 하는 블랙홀! 그것은 직접 관측할 수도 없지만, 그녀의 작품에서 자연-우주의 근원적 존재를 상정하는 하나의 메타포로 가시화된다. 
최근작인 《Forest-Divine》 연작에서는 이러한 메타포가 형상이기보다는 개념 혹은 물질과 같은 의미를 함유하면서 보다 추상적으로 시각화된다. 예를 들어, 한지 재료인 닥나무 펄프를 화면 위에 올려 거친 마티에르로 숲의 질료적 가치를 심화하는 조형 탐구는 작품을 더욱 추상적으로 보이게 한다. 특히 화면을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직물의 텍스쳐(texture)처럼 꾸민 화면은 형상을 거부하고 개념이나 물질의 의미를 더욱더 구체화한다. 질감은 거칠지만, 구조적으로 정교하게 얽힌 이러한 리좀(rhizome)과 같은 연결망은 화면 안에서 나무의 거친 피부나 호수의 물결과 같은 자연의 외피를 살포시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위에 거칠게 뒤덮인 물감 덩어리들, 즉 나이프를 사용해 화면 위에 물감을 넓게 펴 바르거나 스퀴즈(squeeze) 효과를 통해 만들어진 추상표현주의의 물감층은 마치 기도와 같은 묵언의 간절한 메시지나 묵상해야만 할 잔잔한 아포리즘(aphorism)의 내러티브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물감의 흑백 대비, 화면의 거친 표면 처리, 한지를 통한 오브제 효과, 물감이 뒤덮은 격자 혹은 리좀 무늬, 자연의 흔적으로서의 질감, 생멸과 순환의 자연 미학은 자연적 오브제와 표현주의적 추상으로 특징되는 류영신의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런 면에서 류영신의 최근작은 가히 ‘깊고도 신성한 숲’이라 하겠다. 
흥미로운 것은 전작들에서 선보인 ‘나무-숲’의 관계보다 최근작들이 ‘나무-숲-자연-대자연-우주’로 확장하면서, 하이픈으로 연결된 모든 주체적 대상끼리 가능한 ‘상호 소통’의 관계망을 만든다는 것이다. 마치 세상을 대면한 절대가 자신으로부터 창조한 피조물들과 관계 지평을 만들어 가듯이 말이다. 
  

No105 Forest-Divine, 40.9 X 31.8cm, mixed media,2021,ⓒADAGP  Ryu, Young Shin

No 70 Forest-Divine, 182 X 182cm, mixed media,2020,ⓒADAGP  Ryu, Young Shin




IV. 에필로그 
류영신의 작업은 ‘나무-숲’의 경이로운 풍광을 작업에 끌어들여 그것의 형상으로부터 그것이 질감이 지닌 풍요로움을 실험하면서 자연의 본질적 미학을 탐구해 왔다. 때론 자연에서 발견하는 무한 반복의 프랙탈(fractal) 이미지를, 때론 보색의 맞부딪힘을, 때론 검정의 숭고함을, 때론 마티에르의 중첩을 실험하면서 그녀는 이전/이후, 네거티브/포지티브의 세계를 그리고 주체/미적 대상의 관계를 조형적으로 탐구해 왔다. 그것은 ‘나무-숲’의 외연적 관계로부터 자연-대자연-우주와 같은 거시적 세계로 이동하면서도 생명 본연의 심층적 문제로 천착해 들어간다. 시원(始原)의 자연 생성의 상상으로부터 재난으로 인한 상처와 파편까지 아우르며 그 속의 신비로운 생명성 자체를 탐구하는 작업으로 변모해 온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작가의 언급대로 “인간과 대자연의 상호 유전정보 사슬에 내재된 원시 메커니즘(primitive mechanism)의 신경망”과 같은 거시적 세계를 대면한 한 화가의 ‘처절한 자기 존재 확인’ 혹은 ‘자기에 대한 숙연한 성찰’과 같은 것으로 이어진다. 어찌 크나큰 우주의 세계를 예술이라는 화폭 안에 모두 담을 수 있겠는가? 그 한계 상황을 처절하게 인지할 때 예술은 그 유의미함을 획득한다. 자신의 화폭 안에 자연-우주-생명을 추구하는 류영신의 예술 행위가 더욱더 값진 까닭이다.●  


출전/ 
김성호, 「신성한 숲의 세계」, 류영신 작가론, 『미술과비평』, vol.73, 겨울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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