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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가론│최선희 / 자기 집에 있지 않다

김성호

자기 집에 있지 않다.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작가 최선희는 실제적 혹은 추상적인 ‘집’의 개념을 표현주의적 붓질의 회화로 추적하고 그것이 함유하는 안과 밖의 세계를 사회학적 담론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한다. 이 글은 먼저 집이라고 하는 공간과 그곳에 부유하듯이 사는 거주자를 조명하고 이후 평온과 행복을 의미하는 요나 콤플렉스와 이 개념의 반대편에 거취하고 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 최선희가 언급하고 있는 ‘자기 집’의 개념이 ‘행복한 자기 집’으로 확장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세계를 담고자 한다. 


안과 밖_캔버스에 유화 130*130cm 2022



II. ‘집의 공간’ - 부유하는 거주자   
최선희는 최근 개인전에서 ‘자기 집에 있지 않다’라고 하는 주제를 내세웠다. ‘자기 집’? ‘집’이란 무엇인가? ‘집’은 “바쁘고 지친 일상을 보내며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쉴 수 있는 곳”, “마음의 편안함을 주며 재충전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러한 이해는 무엇보다 집이 견지하고 있는 내밀한 고유의 기능을 떠올리게 만든다. 
즉 ‘집’은 벽과 벽 사이의 경계를 통해 불특정 다수로 대별되는 이웃과 사회라는 이름의 ‘타자’와 분리와 단절을 실행하고 가족과 함께하는 ‘혈연 공동체’의 공간이자, ‘자신만의 세계에 거주할 자격’을 자가 취득하는 내밀한 사적 공간이다. 그곳은 “비바람의 위험이나 악천후의 공격으로부터 피신한 인간을 위한 은신처”를 지칭하는 ‘셸터(Shelter)’로서의 피난처이자 안위의 공간이다, 아울러 그것은 비밀스러운 자신만의 사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개인의 자유 공간이기도 하다. 그녀의 ‘자기 집’은 이러한 집의 이상을 자연스럽게 설정한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집이 이러한 이상적 개념을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가? 최선희는 오늘날 ‘집’이 야기하는 혼돈의 메타포를 떠올린다. 가난한 이들에게 평온한 안식을 끝내 제공하지 못하는 반지하의 집, 한 독거노인에게 세상과의 단절을 선언할 수밖에 없게 만든 무덤과 같은 집, 청소년에게 정신을 욱죄는 감옥이 되어버린 가정이라는 이름의 집, 한 가장에겐 되돌아가는 길을 힘들게 만드는 집처럼, 오늘날 행복과 안식 대신 고통과 소외를 길어 올리는 ‘집’은 도처에 존재한다. 
어쩌면 오늘날 집이 견인하는 이와 같은 불안한 현재는 유목을 마치면서 시작된 정주의 문명 시대부터 예견된 것인지 모른다. 순수 자연인 ‘매끈한 공간(espace lisse)’ 위에 공동체를 위한 벽을 쌓고 수로를 파서 ‘홈이 팬 공간(espace strié)'을 만든 ’집’은 연이어 ‘마을’과 ‘국가’의 생산을 이끌면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보다 지배와 피지배의 질서를 공고히 하는 주범이 되었다. 들뢰즈(Gilles Deleuze)에 따르면, ‘매끈한 공간’은 비식민화된 공간, 열린 공간, 유목의 공간인 반면, ‘홈이 팬 공간’은 매끈한 공간에 반대하는 질서와 계층의 공간이다. 홈이 팬 공간으로부터 출발했던 ‘집’은 오늘날 자기의 고유한 기능과 역할을 상실한 채 부유한다. 개념상 오늘날 ‘자기 집’이란 현실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나아가 최선희는 오늘날 이러한 ‘부유하는 집’에 거주하는 ‘인간’을 주목한다. 소유한 자기 집이 물리적으로 없거나, 심리적 안정을 취할 ‘자기 집’을 정신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는 부유하는 현대인의 삶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집에 있지 않다”는 자조 섞인 작가의 단언은 현대인의 ‘부유하는 삶’에 대한 아포리즘(aphorism)으로 작동한다. 많은 현대인에게 평온과 안식을 제공하는 ‘자기 집’은 개념만 남은 채 부유한다. 최선희는 자기 집에 있어도 자기 집이 아닌 것처럼 느끼는 사람, 안식의 자기 집을 떠나 방랑자처럼 부유하는 많은 사람을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보면서 화폭 위에 기록한다. 작가는 이들로부터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 있는 모습들이 몸짓을 하고 소리는 내는” 장면을 채취하고 기록한다. 때론 서성이면서, 때론 담담하게, 때론 눈물 나도록 처연하게, 때론 소외와 고립에 처절하게 함몰하면서 말이다. 


행복에의 의지_캔버스에 유화_94cm×73cm_2018 



III. ‘자기 집’ - 요나 콤플렉스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최선희가 인지하는 ‘자기 집’은 행복의 공간으로부터 출발한다. 작품 〈행복에의 의지〉를 보자. 분홍빛이 감도는 박스 안에 목마를 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담겨 있다. 여기서 박스는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이 있는 3차원 입방체로 가장 기초적인 집에 관한 유형론(Typology)적 모델이다. 집으로 표상된 이 박스는 화사하고 부드러운 분홍빛만큼이나 행복한 분위기를 관람자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집’을 의미하는 ‘박스’가 바슐라르(Gaston Bachelard)가 해석하는 '요나 콤플렉스'(Jonah Complex)의 공간이었음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겠다. 요나 콤플렉스는 부정의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바슐라르가 ‘서랍, 박스, 장롱, 구석, 집’과 같은 ‘감쌈의 공간’이 전하는 안온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즉 박스로 대별되는 ‘감쌈의 공간’이란 구약성서의 등장인물인 ‘요나가 거주했던 고래 뱃속’처럼 안온함과 평화로움으로 둘러싸인 어떠한 공간이다. 마치 우리가 태아로 있었던 ‘어머니의 자궁 속 모습’처럼 말이다.  
고래 뱃속과 같은 ‘감쌈의 공간’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에 우리의 무의식 속에 형성된 이미지로서, 우리가 어떤 공간에 감싸이듯이 들어 있을 때에 안온함과 평화로움을 느끼는 본능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어머니 속 ‘태반이 양수를 둘러싸고 있는 자궁’과 같은 ‘감쌈의 공간’은 우리가 안온함과 행복함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최초의 공간이라고 한다면, ‘박스’로 대별되는 ‘집’은 그것을 이성과 감성을 통해 인지하는 최초의 공간이라고 할 것이다. ‘요나 콤플렉스’에서 드러나는 ‘안온한 감쌈’은 바로 집이 우리에게 전하는 일차적인 심리학이다. 
최선희의 또 다른 작품인 〈집〉 연작은 ‘박스’가 곧 ‘집’에 대한 은유임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한 작품에는 회색빛이 감도는 하얀 배경의 하얀 박스가 자리하는데 박스의 한 면을 다 차지하는 ‘창’으로 보이는 곳에 한 사람이 고즈넉이 서있고 또 다른 작품에는 청회색의 분위기 속 같은 색의 박스가 자리하는데 박스의 한 면이 마치 창처럼 돌출되어 있고 그곳에 한 사람이 동그마니 앉아 있다. 회색빛 흰색과 청회색이 전하는 안온함과 쓸쓸함이 교차하는 분위기는 작가가 관심을 기울이는 ‘집’이 품은 양가적 상황을 여실히 드러낸다. 집이 품은 사색/우울, 고요/발랄처럼 병치되거나 대비되는 분위기의 극단은 마침내 행복/불행 사이를 오가기까지 한다. 


불안을 삼킨 숨_캔버스에 유화_91cm×91cm_2018 


불행과 슬픔은 언제나 행복과 기쁨의 언저리에서 생겨나는가? 최선희는 최근의 우울한 상황이 자신의 작업의 방향성을 달리 설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음을 작가 노트에서 밝히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아갔다. ‘바깥’에서 ‘안’으로 시선이 옮겨갔고, 타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소중히 지켜내려 했던 무언가를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 
그녀가 ‘바깥’에서 ‘안’으로 시선을 옮긴 계기로 오롯이 드러나게 된 공간은 바로 ‘집’이라는 공간이다. 때론 박스로 때론 건물로, 때론 자연 환경으로 드러나는 ‘집’은 그러한 차원에서 그녀의 회화 속 ‘순연한 메타포’이다. 이제 그녀는 이 메타포에 창과 문을 만들어 창과 문의 ‘밖’을 보고 그 창과 문을 통해 자기의 집을 나와 타자의 집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간다. 
따라서 창과 문은 ‘닫힘’을 통해서 자아 보존과 타자와의 관계 단절의 공간이 되지만, ‘열림’을 통해서 타자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지속하는 외교의 매개체가 된다. 마치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유아의 성장 과정을 세계와 자기 사이를 연결하는 어머니라는 매개자를 설정했듯이, 창과 문은 한 인간 주체가 세계를 향한 생의 의지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상징된다. 프로이트가 어머니와의 사랑을 방해하는 또 다른 매개체인 아버지를 설정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로 설명하고 있듯이, 창과 문은 열림과 닫힘에 따라 사랑을 전하는 큐피트가 되거나 훼방꾼이 되는 경계 사이에 놓여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드러나는 ‘열림과 닫힘’은 집이 창과 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는 이차적인 심리학이다. 


어제의 오늘_캔버스에 유화_94cm×73cm_2017 




IV. ‘행복한 자기 집’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그러하듯이, 작가 최선희 역시 ‘자기 집’을 나와 타자의 ‘자기 집’은 어떠한지 살피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타인에게 불필요해 보일지라도 불안과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삶을 보존하려는 모습에서 사람의 자리란 무엇일까 생각했다”라고 작가가 고백하고 있듯이, 내밀한 타자의 삶을 살피는 일은 ‘보이는 것’ 이면에서 숨겨져 있던 ‘보이지 않는 것’을 들춰내는 까닭이다. 즉 ‘못 사는지’와 ‘잘 사는지’ 그리고 ‘행복한지’와 ‘불행한지’, 그들의 삶의 ‘자리’가 어떠한지를 판별하기에 이르는 까닭이다.  
그래서 ‘보는 자’와 ‘보이는 자’는 상반된 상황에 처한다. 작품 〈안과 밖〉에서는 이러한 긴장된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에는 즉발적인 붓질이 거침없이 지나간 곳에 자리한 커다란 창과 그것을 모두 뒤덮은 커튼이 표현되어 있다. 아니다. 모두 덮은 것은 아니다. 커튼의 상단 한쪽이 살포시 젖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커튼의 한쪽을 열어 ‘막힌 공간’으로부터  ‘빈 공간’을 만들고 자리한 누군가가 창 ‘안’에서 ‘창 밖’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이 자리한다. ‘밖을 보는 자’가 ‘안을 보는 자’에 의해 순식간에 ‘안을 보이는 자’가 되는 역전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당혹스러움과 긴장감이 양 주체 사이에서 발생한다. 
‘닫힌 창’이 ‘열린 창’으로 전환되는 일은 일상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지만, ‘닫힌 마음’의 사람이 그것을 실천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비어 있음’의 공간을 주목한다. 생각해 보자. ‘비어 있음’이라는 상황은 ‘열기’라는 행위를 통해서 확인 가능한 존재 인식이 된다. 보기가 은폐된 공간 안에 무엇인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빈 공간’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최선희는 커튼 사이 ‘빈 공간’ 혹은 ‘틈’을 통해서 타자의 ‘안’을 살펴보고 타자와의 소통을 갈망한다. 
여기 ‘열기’를 실천한 누군가가 여기 있다. 작품 〈불안을 삼킨 숨〉에는 아파트나 빌딩의 경비실로 보이는 공간 안에서 작은 창문을 열어젖힌 경비원으로 보이는 푸른 옷의 누군가가 밖을 보면서 앉아 있다. 사실 눈코입이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은 작품 속 얼굴로 봐서는 그가 밖을 보는 상황인지 판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누군가의 방문과 질문을 맞이하게 위해 ‘보이는 자’의 역할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명에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듯이, 작품 속 그는 ‘보는 자’, ‘감시자’의 역할을 맡았으면서도 스스로 ‘보이는 자’ 혹은 ‘타자의 감시를 자처하는 자’로 전환된 채 ‘보기’와 ‘보이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안과 긴장의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창문과 같은 ‘열린 공간’을 통해서 한 주체는 타자를 살펴본다. 타자가 소통을 시도하지 않는 한 이러한 열린 공간은 관찰하기 혹은 엿보기의 대상이 된다. 최선희가 ‘실제의 창문’ 또는 ‘창문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관찰하는(혹은 엿보는) 타자는 대개 그녀의 눈과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존재로 들어온다. 양자 사이에서 '언어적 소통(verbal communication)'은 부재하지만, 비언어적 소통(non-verbal communication)은 충만하다. 작가 노트에서도 일단을 살펴볼 수 있듯이, 열린 공간에 주목하는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보기의 욕망이 큰 만큼, 보이기 주체인 타자와 대상에서 ‘많은 것을 담은 표정’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담고 있는 표정이 있다. / 몸은 언어보다 더 진솔한 무엇으로 다가올 때가 있기에 / 일상을 관찰하여 그림을 그리면서 존재하는 것 / 잃어버리거나 훼손된 것, 어찌할 수 없는 것,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지속하는 모습에서 / 슬픔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타자의 일상을 관찰하는 가운데서 맞닥뜨리게 되는 상실, 훼손, 불가능, 낙망의 상황은 작가에게 복잡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리라. 목도하는 앞서의 상황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지속”하는 타자의 모습에서 최선희는 슬픔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측은지심 혹은 연민과 같은 공유의 감정이 고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작품 〈슬픔 조각〉 과 그것을 잇는 연작에는 이러한 ‘타자와의 공유 감정’이 잔잔하게 배어 있다. 창살을 지닌 창을 통해서 바라보는 짙은 어둠 속 달을 표현한 〈슬픔 조각〉, 나무 기둥을 두 팔로 한껏 끌어안고 있는 사람을 표현한 〈새기는 마음〉, 〈다시 밖으로〉는 ‘반 지하 공간에 살고 있는 한 지인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지인과 동행한 작가, 햇볕, 바람 그리고 커다란 나무에 좌절과 낙망을 건네고 위로를 받고 다시 일어서고자 했던 지인의 절실한 모습 앞에서 그녀는 단지 웃음과 위로를 나누었을 따름이지만, 가슴 시린 슬픔의 감정을 맞이한다. 


출현_캔버스에 유화_70cm×70cm_2015




V. 에필로그 
작가가 관찰하고 있듯이, 많은 사람에게, 실제적 현실이든, 은유의 상황이든 ‘행복한 자기 집’은 가까이 있지 않다. “자기 집에 있지 않다”는 전시명처럼 많은 사람이 ‘자기 집이 아닌 타자의 집 혹은 유령의 집’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할 것은, 작가 최선희가 언급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슬픈 감정을 잉태하는 전제로 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작가에게서 다시 쓰이고 관객에게서 다시 읽히고 있다는 점이다. 열심히 일상을 사는 소시민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이제 슬픔에만 국한되지 않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두루 품어 안는다. 
최선희의 작품을 대면하는 관람자로서 우리는, 죽었다고 생각했으나 다시 돌아오는 식물의 생명력을 다룬 〈화분1〉, 〈화분2〉, 〈화분3〉과 같은 작품을 슬픔이 아닌 희망과 기쁨의 감정을 가지고 주목할 일이다. 작품 〈싹〉에서처럼 활량한 넓은 들판처럼 보이는 곳에서 파랗게 싹을 틔우고 있는 작은 새싹 하나를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주목할 일이다. 
그래서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고개를 숙인 한 가장을 그린 듯한 작품 〈어제의 오늘〉은 관객인 우리에게 그 고단한 표정이 내일까지는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만든다.  심지어 한 사람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작품 〈길을 잃다〉에서도, 그리고 한 사람이 온통 붉은 화면 속에서 쓰러지는 순간을 담은 작품 〈앗〉에서도, 좌절과 낙망 뒤에 희망이 곧 오리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자기 집에 있지 않다”는 그런 의미에서 최선희에 의해서 다시 써지고, 관람객에 의해서 다시 읽혀진다. 불완전한 초상 그 자체로 서로에게 전해지고 서로가 새로 읽기를 시도하는 중에 최선희의 작업이 지닌 회화의 힘이 발현되길 기대한다. 아울러 바슐라르가 전하듯이, ‘집이란 우리에게 선보인 최초의 세계이자 정녕 하나의 우주’이듯이, 우주 속에서 티끌과 같이 작은 인간 존재가 저마다 ‘자기 집’을 소중히 그려 나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진실하게 발견하는 날이 머지않아 도래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말 일이다. ●


출전/ 
김성호, 「자기 집에 있지 않다」, 최선희 작가론, 『2022년 공립미술관 추천작가-전문가 매칭 지원 사업』, 국립현대미술관,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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