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서문│김유정 / 이식된 자연이 전하는 ‘식물성 메시지’와 공생의 미학

김성호


이식된 자연이 전하는 ‘식물성 메시지’와 공생의 미학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작가 김유정은 스크래치 기법으로 상처의 의미를 드러낸 프레스코(fresco) 형식의 회화 그리고 살아있는 식물인 틸란드시아(tillandsia)를 오브제와 공간 위에 배치하는 대규모 설치의 조형 언어를 선보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의 작업은 ‘식물이라는 자연과 예술이라는 인공’ 사이에 놓인 경계의 문제를 탐구하면서 양자 사이의 적극적인 매개 주체가 되기를 자처한다. 또한 돌보기, 보살피기라는 피상적 목적과 변명으로 자연을 속박해 온 인간의 관조적 욕망이 야기한 ‘공원, 정원’과 같은 인공 자연이 종국에 다다른 종말과 파국(破局)의 상황을 함께 선보임으로써 인간의 자연 지배의 욕망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김유정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어떻게 작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는가? 프레스코화와 식물 설치의 혼성을 통해서 구체화하고 있는 그녀의 작업이 품은 미학적 함의는 무엇인가?   


중간 서식지, 2021


II. 받은 상처로부터 - 중간 서식지로서의 인공 자연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다. 그것은 내 맘과 몸에 새겨진 흔적으로 과거의 시공간을 각인한다. 그것은 망각의 힘을 빌려 부재한 듯하다가, 의외의 상황을 만나 현실 밖으로 느닷없이 불쑥불쑥 뛰쳐나와 상처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것은 대개 그냥 잠시 나를 흔들고 지나칠 따름이지만, 내 깊은 무의식에 깊이 각인된 상처는 트라우마라는 이름으로 현실 위로 튀어나와 일상의 삶을 버겁게 만들기도 한다. 혹여 망각이나 용서라는 이름으로 그 상처로부터 잠시 탈주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리적 상처가 남긴 흔적을 지우는 일이란 특히 어렵다. 
인간의 상처가 이러할진대 자연의 수많은 개체가 인간에 의해 자신의 몸과 마음에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깊은 상처는 어떠한가?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아리고 쓰리지 않을까? 식물로 대별되는 자연에 감정이입을 행하는 이러한 질문은 김유정의 프레스코 작업이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그녀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변덕스러운 욕망’이 ‘정복, 관조, 힐링, 보호, 폐기’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끊임없이 대상화하면서 이르게 된 결과를 ‘자연의 상처’, 즉 ‘자연이 입은 상처’로 바라본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라! 열매도 내어주고 그늘도 드리워주면서 인간의 친구가 되었던 자연은 변덕스러운 인간 때문에 심란하지 않겠는가? 자연의 입장에서, ‘좋아서 다가올 때는 언제고, 개발과 정복을 내세우며 갑작스럽게 돌변한 인간의 변심’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정원과 공원이라는 방식으로 다시 자신의 거주지 옆에 두었다가 다시 버리는 등, ‘보호와 폐기를 거듭하는 인간의 변심’을 매번 당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자연의 입장에서, 사랑과 미움을 오가는 ‘인간의 변심 혹은 양가적 태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정도의 만행이다. 한 마디로 자연은 인간 앞에서 상처투성이다. 
김유정의 프레스코 작업은 이러한 ‘상처 입은 자연’을 효과적으로 담아내기에 제격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프레스코는 모래와 석회와 같은 골재를 물과 혼합하여 만든 ‘석회 모르타르(lime mortar)’를 덮어 만든 바탕 위에 검은색을 도포한 후, 헤라와 조각도로 표면을 스크래치 기법을 통해 상처를 내면서 식물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프레스코를 현대화한 셈인데, 작품을 자세히 보자. 스크래치를 통해 검은색 피부 위로 흰색의 속살을 토악질해 내듯 끌어올린 식물 이미지는 모르타르 위에 바른 화지가 굳어가면서 ‘상처의 아문 흔적’처럼 검은 피부 곳곳에 희끗희끗하게 자리한다. 그녀의 작업에서 잎과 줄기를 피어올린 식물의 잉태라는 것이 이러한 상처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은 ‘자연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늘 정복과 관리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온 슬프디슬픈 존재’라는 위상을 우리에게 실감 나게 전한다. 
김유정이 프레스코로 표현한 자연은 대개 도시 공간 속에 들어온 식물로 대별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집 앞이나 마당에 놓인 화분 안 식물이거나 정원, 공원 또는 식물원이라는 ‘구획된 인공 자연’ 안에 들어온 식물로 드러난다. 그것은 야생의 자유로운 자연이 아니라 파종(播種)과 재배와 같은 인간의 수고로 만들어진 자연인 셈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옥 카페인 TYPE 앞마당에 가는 잎새 풀들로 무성하게 조성한 ‘식물 정원 이미지’와 아파트 주차장에 주검처럼 버려진 ‘가지치기를 완료한 가로수 나뭇가지들’을 대비적으로 선보인다. 전자의 이미지는 돌보기와 가꾸기라는 명목으로 인간 힐링을 위해서 기하학적 구조로 ‘구속된 자연’을 드러내는 반면에, 후자의 이미지는 같은 이유로 태생부터 자유로운 유기(有機)적 구조의 식물을 전지(剪枝)라는 명목으로 버림을 실천한 ‘폐기된 자연’을 드러낸다. 
더 나아가 정교한 가지치기를 실천한 프랑스식 정원의 ‘기하학적 식물이 만든 미로’와 같은 변형의 극치는 ‘자연에 대한 인간 욕망’의 밑바닥까지 드러낸 것처럼 참담하기까지 하다. 그것들은 자연의 전체상을 왜곡하고 환유적(metonymique) 질서 위에 치환한 ‘인공 자연이자 가짜 자연’인 까닭이다. 
김유정은 프레스코화에 담은 이러한 ‘인공 자연 풍경’을 ‘중간서식지’로 명명한다. 그것은 ‘자연과 인공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이것도 저것도 아닌 변종의 존재이자, 인간 욕망에 의해 고유의 정체성을 훼손당한 ‘가짜와 진짜 사이의 경계에 모호하게 걸터앉은 자연’이다. 그것은 마치 검은색 표면 위로 흰색의 속살을 생채기처럼 끌어 올리는 그녀의 프레스코화의 정체성을 닮았다. 전체 화면의 주조색을 검정과 하양 사이의 무수한 위성 존재인 회색으로 점철(點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녀의 프레스코화는 ‘검정과 하양’ 사이에서, 더 본질적으로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양자의 경계 범주에 대해 해석하는 무수한 회색층을 통해서 ‘자연이 인간으로부터 받은 여러 상처를 시각화한다’고 평할 수 있겠다. 


기생하는 대기, 2021




III. 상처받은 자연의 반격 - 공생을 제안하는 식물  
식물이 반격한다고? 상생과 조경이라는 빌미로 꾸려졌던 화분, 정원, 식물원, 공원과 같은 ‘인공 자연’을 통해서 자연에 대한 구속과 억압을 한 것도 모자라,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자연 폐기’와 같은 폭력을 서슴지 않았던 인간에게 여리고 여린 식물이 어떻게 반격할 수 있을까? 산불이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의 공포를 인간에게 안기는 일? 아서라! 이상 기후와 자연의 대재난은 인간의 욕망과 자연에 대한 폭력이 자초한 결과일 뿐, 식물로 대별되는 자연은 보복을 일삼지 않는다.  
인간으로부터 구속과 억압 심지어 폭력마저 입었지만, 식물이 인간에게 취하는 반격은 언제나 온건하다. 자연이 ‘스스로 그러한 모습’으로 애초부터 존재했듯이, 식물은 인간에게 언제나 그랬듯이 공생(共生, symbiosis)을 제안할 뿐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에 행했던, 대상화, 구속과 억압 그리고 폭력에 대한 응답이자 피드백이다. 자연은 보복 대신 치유를 도모하고 상대에게 공생을 제안한다. 공생이 “서로 다른 종의 개체들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킬 때, 늘 인간의 종속 대상이자 피해자였던 식물이 인간에 제안하는 공생이란 그런데도 식물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절대적으로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공생에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상리공생(相利共生)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이해는 할 만하다, 한쪽에만 이익이 되는 편리공생(片利共生)이 식물의 인간에게 제안하는 최소한의 공생이 아닐까 싶다. 물론 식물의 입장에서 슬프기 짝이 없지만, 인간에게만 이익이 되는 편리공생으로서 말이다. 아니 더 나아가, 어찌 보면 식물이란 순진하기 짝이 없어 한쪽이 늘 손해를 보는 편해공생(片害共生)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없이 가해자 인간을 용서하고 치유, 화해, 공생을 제안하는 자연이니까 말이다. 그런 면에서 자연은 언제나 한결같다. 
대형 농장과 공장을 짓기 위해서 아마존 밀림을 파괴하거나 모험과 탐험을 위해서 떠난 남극과 같은 오지나 여러 바닷가에 무수한 쓰레기를 남겨 해양을 오염시켜도 인간이 별 탈 없이 누린 평화는 이제 위협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인간은 자연이 제안하는 ‘공생 제안’을 필히 받아야만 할 것이다. 오늘날의 기후 위기와 대재난 속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에 상리공생을 도모해야만 하겠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까닭은 인간이 머리로는 인간-자연 사이에 요청되는 상리공생을 이해하면서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못 말리는 욕망덩어리기 때문이다.        
김유정은 ‘자기반성’의 마음으로, 이러한 인간 사회에 ‘틸란드시아’라는 식물을 통해서 ‘상처받은 자연의 반격’을 선보인다. 그 반격이란 식물의 입장에서 인간에게 간절하게 요청하는 ‘공생 제안’일 따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대상화, 구속과 억압 그리고 폭력에 대한 응답이자 피드백으로서 선보이는 ‘공생 제안’ 말이다. 이 식물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러한 공생의 메시지를 품은 채 작가의 조형 언어에 깊이 들어온 것일까? 
틸란드시아는 페루, 에콰도르와 같은 남미가 원산지로 ‘외떡잎식물 파인애플목 파인애플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이 식물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나무나 돌에 달라붙어 착생하는 역할을 할 뿐이며, 실질적인 뿌리 역할은 잎에 붙어 있는 트리콤(trichome)이라는 솜털이 담당하는 까닭에, 마치 ‘뿌리 없는 식물’로 간주되거나, 공기 중 떠다니는 먼지 속 유기물과 수분을 흡수하면서 성장하는 까닭에 ‘에어 플랜트(air plant)’로 불리기도 하며, ‘공중식물’, ‘먼지 먹는 식물’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틸란드시아는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잎을 통해 영양분을 섭취하기에 주위에 수분만 충분하다면, 그 성장 속도는 놀랄 만하다. 게다가 꽃까지 피운 채 몇 개월을 지속하니 얼마나 보기 좋으랴. 그런 까닭에 이 식물은 보기 좋은 ‘관상식물(觀賞植物)’로, 또는 식물성 인테리어의 하나인 토피어리(topiary)로 주목받고 있는데, 최근에 ‘반려 식물’이라는 이름으로 달리 불릴 뿐, 우리는 이것을 ‘인간에 의해 구속되고 종속된 자연물의 전형’이라고 평해도 무방하겠다.
그런데 김유정은 이러한 틸란드시아의 독특한 생존 방식과 왕성한 성장력을 지켜보면서 인간에 의해 구속당하고 상처받은 ‘자연의 반격’을 상상한다. 중력에 순응하면서 선형의 잎들이 아래로 스멀스멀 자라나 자신의 덩치를 키우는 틸란드시아는 식물의 시원(始原)의 고향인 땅을 떠나 인공의 공간 어디에서나 자신의 존재를 지켜나간다는 차원에서 ‘자연을 밀쳐내고 인공의 세계를 만들어 영위하는 인간’에게 공포의 존재로 보일 수도 있겠다. 인간의 제어와 통제가 없다면 틸란드시아의 인간계 잠식 수준은 엄청나서 거의 공포의 차원이기까지 하다. ‘자연의 상황 그 자체로 인공의 세계 속에서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틸란드시아’는 관상식물, 혹은 토피어리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적극적 요청 혹은 동의를 수용하면서 공생을 암묵적으로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그늘 잠식지_물의 시원Ⅰ, 2021


잠식 항(航), 2020
 



IV. 치유와 화해 - ‘이식된 자연’이 일깨우는 공생의 미학 
김유정은 인간에게 공포가 될 수 있는 틸란드시아의 이러한 잠재적 가능성을 자신의 작업 안에 끌어들여 인간에게 비판적 성찰의 메시지를 전한다. 인간의 관조적 욕망 때문에 자연의 공간으로부터 인공의 공간 안으로 초대받아 이주한 후 인간에게 여전히 구속당한 채 ‘이식된 자연’, ‘사회화된 자연’으로 살고 있는 한낱 이주민일 따름이지만, 틸란드시아는 꿈을 꾼다. 그것은 인간에게 피해 보았던 것에 대한 복수와 보복에 대한 꿈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인간으로부터 입은 상처에 대한 자가 치유와 더불어 인간에게 손을 내미는 화해와 공생에 대한 간절한 꿈이다. 작가가 언급하는 “식물 또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은 이러한 관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김유정은 한편으로 연약하지만, 또 한편으로 강인한 이러한 틸란드시아에 감정이입을 한 채 자신의 작업을 어떻게 우리에게 선보이는가? 그녀는 틸란드시아 자체를 화이트 큐브 전시장 벽면이나 시멘트 벽면에 드로잉처럼 설치해서 마치 동양화의 산수화 같은 자연 풍경을 만들기도 하고, 버려진 듯 퇴락한 유휴 공간 전체를 덮어 틸란드시아가 만든 작품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작가가 직접 사용했었거나 수집한 세면대, 화장실, 욕조 등을 틸란드시아로 뒤덮거나 침대와 소파를 잠식하는 경우는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김유정은 버려진 호수, 파이프 등을 감싼 틸란드시아 풍경을 통해서 식물이 잠식한 기이하고도 괴기스러운 풍경을 만든다. 그것은 식물이 만든 낯설고 생경한 풍경이지만 한편으로 동물성의 무엇으로 증식한 공포의 풍경이 되기도 한다. 또한 그녀는 인조 식물 화분이나 빈 액자들을 뒤덮는 틸란드시아를 통해 스스로 한계 짓는 식물의 정체성과 위상을 변주하기도 한다. 식물에서 동물로, 연약함에서 강인함으로 그리고 잔잔한 관조적 심미감에서 두려운 공포와 경외의 숭고에 이르기까지의 그 변주의 진폭은 깊고 넓다. 마치 액자의 프레임 내외부로 자라는 틸란드시아를 통해 회화와 조각 그리고 설치의 경계를 뛰어넘고 식물과 동물의 위상을 자유롭게 오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김유정의 작업에서 틸란드시아는 모든 것의 경계를 오가는 존재로 상정된다. 이번 전시에서 그녀는 버려진 채널 간판을 전시장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원래의 용도를 폐기당한 채 버려진 오브제인 채널 간판은 그녀의 전시장 안으로 들어와 사물로부터 예술로 변환한다. 이러한 ‘사물-예술’, ‘일상품-예술품’ 사이의 경계 변환의 매개체가 틸란드시아임은 물론이다. 그뿐만 아니라 김유정의 전시에서 틸란드시아는 죽음-생명, 소멸-생성 사이의 경계마저 넘어선다. 한글 혹은 영문의 자음과 모음은 분절된 채널 간판의 해체된 철자들은 김유정의 작품 안으로 들어와 틸란드시아를 뒤집어쓴 채 원래의 텍스트가 지닌 의미론을 해체하고 새로운 의미를 구성한다. 그것은 원래의 텍스트 조합을 변조하는 ‘텍스트 의미론(text semantics)’이기보다 유용의 텍스트 조합이 와해되었음에도 틸란드시아라는 식물의 옷을 입고 전혀 다른 존재로 변환했다는 ‘화용론적 의미론(pragmatic semantics)’이라고 하겠다. 낱개의 텍스트 분절체들이 틸란드시아의 옷을 입고 벽면에 산포(散布)의 형식으로 흩뿌려진 채 붙어있거나, 천정에서부터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은 가히 ‘주검을 소생시킨 부활의 육신’이라고 할 만큼 장대하고 심오하다. 
전시장 한 편에 배치된 오래된 자개 옷장을 서랍으로 삼아 그 위에 야구 유니폼, 공, 방망이, 글러브를 감싸고 있는 틸란드시아를 배치하거나, 악보, 바이올린과 케이스를 잠식한 틸란드시아를 병치한 작업은 또 어떠한가? 이 작품들은 어른이 돼서도 끝내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오랫동안 간직했던 유년기 꿈의 의미를 되살린다. 한때는 소중한 애장품이었지만, 집 어디엔가 방치된 채 있었을 버려진 오브제들에 꿈의 의미를 되살린 것이 틸란드시아임은 물론이다. 꿈의 성취를 위한 일련의 과거 사건의 파편과 흔적들을 현재에 소환해서 인간의 망각을 되살리는 그녀의 작품 속 틸란드시아는 ‘인간이 망각하고 있던 원초적 고향인 자연’의 의미를 되묻는 지점으로 우리를 이끈다.   
 

세력도원, 2018


숨_휴게와 대기, 2018




V. 에필로그  
김유정의 전시는 스크래치 기법으로 제작한 프레스코 회화와 틸란드시아 설치를 함께 선보임으로써 ‘식물성의 메시지’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오래된 관계를 되묻고 관계 재설정에 대해 성찰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녀가 전하는 ‘식물성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깊다. 인간의 변덕스러운 욕망을 묵묵히 들어주었던 자연은 언제나 피해자였지만, 인간을 탓하지 않는다는 것! 인간이 오늘날의 식물로 대별되는 자연을 ‘이식된 자연’, ‘사회화된 자연’으로 비틀어 놓기도 했지만, 자연은 ‘중간 서식지에서의 인공 자연’의 모습임에도 자신이 인간에게 받은 상처에 대해 보복과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자연의 반격이란 사랑스럽다. 언제나 스스로 치유하면서 오늘도 인간에게 ‘공생 제안’이라는 화해의 손길을 내밀 따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쓰다가 버린 의자 위에 건물의 틈바귀에서 자라는 이름 없는 식물들을 보라! 인간이 버린 모든 것들에 생명을 새로 입히는 이와 같은 김유정의 ‘식물성의 메시지’는, 홀로센(Holocene)이라는 현세의 끄트머리인 오늘날에도, 하양과 검정의 경계를 끊임없이 포월(匍越)하는 회색의 프레스코화에서, 그리고 죽은 것처럼 보이는 살아있는 틸란드시아에서 스멀스멀 자라나 우리에게 끊임없이 소통의 대화를 걸기를 시도한다.●   



출전/
김성호, 「이식된 자연이 전하는 ‘식물성 메시지’와 공생의 미학」, 『김유정』 , 카탈로그 레조네. 2022.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