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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민성호 / ‘불완전한 자아’의 사랑

김성호

‘불완전한 자아’의 사랑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조각가 민성호의 이번 개인전이 선보이는 주제는 ‘Two and One’이다. 병치된 두 단어가 유추하게 만드는 ‘둘로부터 하나’라고 하는 소망을 엿볼 수 있는 이 주제는 궁극적으로 ‘사랑’이라는 주제 의식으로 수렴된다. 궁극적 사랑을 위해 작가는 ‘내면의 인간상’을 탐구한다. 즉 민성호의 작업은 ‘나에 대한 내면적 성찰과 사랑’이 잉태하는 ‘자기애(自己愛)’는 물론이고 그것으로부터 탈주하여 ‘타자(他者)를 향한 사랑’이라는 대상애(對象愛) 그리고 ‘타자를 위한 사랑’이라는 ‘이타애(利他愛)’로까지 확장한다. ‘사랑을 화두로 한 채 인간 본연의 존재적 위상’을 탐구하는 그의 작품 세계가 이번 전시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 것인가? 





II. 나의 내면으로부터  
‘나(我)’는 현실적 세계와 대면하는 삶의 주체다. 존재론의 입장에서 그 누구도 이러한 주체적 위상을 대체할 수 없다. 나는 개별자 또는 단독자로서 ‘대체 불가능한 실존’인 셈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언급한 ‘세계-내-존재(In der Welt-sein)'로서의 인간 주체는 ’나‘로 대별되는 자의식을 지닌 인간의 존재론적 위상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개별자, 단독자로서의 ‘나’는 타자들과 이루는 ‘사회적 인간’의 위상 속에서 자신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존재로, 그것을 지탱하게 만드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의식으로서의 개인’이 중심에 자리함으로써 가능하다. 
달리 말해 단독자로서의 개체성(individuality)을 지닌 ‘나’라는 본질적 개념은 헤겔(G. W. F. Hegel)의 언급처럼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주관적이고 고립적인 ’즉자존재(卽自存在)’로부터 벗어나 ‘자기를 대상화한 의식적 존재자로서의 ’대자존재(對自存在)‘의 위상에서부터 출발한다. 반성적인 관찰과 사유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는 이와 같은 대자존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르트르(J. P. Sartre)가 언급하는 '타자에 대하여' 혹은 '타자에 있어서' 존재하는 ‘대타존재(對他存在)’로 확장한다. 사랑과 미움과 같은 태도는 모두 이와 같은 대타의 차원에서 성립되는 것이지 않던가? 그러한 차원에서 인간의 본연의 정체성에 다가가기 위한 출발점인 ‘대자존재’와 그것의 확장으로서 사랑을 성취하는 ‘대타존재’에 있어서 ‘나의 의식’이란 언제나 주요하다. 
‘대타적 의미의 사랑’을 화두로 하는 민성호의 작업은 이러한 차원에서 ‘나로부터 시작되고 있지만, 나의 의식’으로부터 가져온 무엇이라고 하겠다. 다만 민성호의 작업이 ‘나의 의식과 냉정한 이성’을 작업의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나의 내면’과 ‘주관적 감성’에 골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차가운 머리’보다 ‘뜨거운 가슴’이 더 가깝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 그의 작업은 ‘냉철한 이성의 판단에 따른 개인 자율성’에 근거하기보다 ‘따스한 내면의 감성과 주관에 따른 개인 자율성’에 골몰하는 작업이다. 
이번 전시에서, ‘돌 위에서 돌을 이고 있는 인체상’을 선보이고 있는 일련의 연작을 살펴보자.  이 연작은 〈사색하다(근원적 사유)〉, 〈사색하다(자아 성찰)〉, 〈나른한 오후에 사색〉, 〈자연 속 사색〉, 〈고향 생각〉, 또는 〈휴식(얼큰이)〉과 같은 다양한 제명으로 각기 달리 지칭되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머리보다 가슴이 가까운 작품들이다. 아울러 조형 언어적으로도 ‘돌 위에서 돌을 이고 있는 인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돌 위에서 돌을 이고 있다니? 작가는 ‘머리 위에 자연석을 이고 있는 인체상’을 사암(沙巖, sandstone)을 깎아 만들어 ‘또 다른 대리석이나 자연석’을 좌대 삼아 그 위에 올려놓는다. 그 형상은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으로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있는 인간이 돌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형상으로 소개된다. 
현실 속 복잡다기하게 벌어진 사건들이 야기한 무거운 짐을 가득하게 이고 사색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인물은 ‘머리로부터 계획된 냉철하고 정교한 이성적 사유’를 취하기보다 ‘내면으로부터 잉태한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사유’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물이 앉아있는 자연석은 커다란 바위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자연’을 상징하고, 인물이 이고 있는 자연석은 머리를 짓누르고 있거나 머리를 대체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현실 속, 삶의 무게’를 상징한다. 
민성호는 머리에 무거운 돌을 이고 있는 인물상을 통해서 ‘현실 속 버거운 짐’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면서 ‘나 자신의 내면과 내가 맞닥뜨린 현실’을 되돌아보자는 ‘나로부터의 성찰’에 관한 메시지를 이처럼 간명하고 정감 있게 우리에게 전한다. 







III. 불안하고 불완전한 자아의 사랑 
민성호는 자아(自我, ego)를 탐구한다. 자아란 “사고, 감정, 의지 등의 여러 작용의 주관자로서 여러 작용에 수반하고, 또한 이를 통일하는 주체”라는 개념적 정의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는 늘 불안하다. 데카르트(R. Descartes)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로 생각하는 자아로서의 위상을 높이면서 우리를 다독였음에도 불구하고 흄(D. Hume)과 같은 경험론자들은 자아를 감각과 경험의 총체로 늘 변동하는 불안한 존재로 파악하였으니까 말이다. 
민성호 역시 이러한 ‘불안한 자아’를 탐구한다. 앞서 살펴본 사색하는 인물상들은 대표적이다. 이 작품들에서는 현실 속 고민의 무게와 그것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인간 주체의 사유와 번민이 엿보인다. 한편 이들 작품과 유사한 형식이지만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 작품 〈초인(공중 부양)〉을 보자. 이 작품은 인물이 머리에 이고 있던 돌 속으로 아예 빨려 들어가듯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형상이다. 어떻게 보면 목을 매어 자살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목이 왜 ‘초인(超人)’인가? 초인이란 일반적으로 “인간의 불완전성이나 제한을 극복한 이상적 인간”을 지칭한다. 니체(F.W. Nietzsche)가 초인을 “권력에의 의지의 체현자” 또는 초극적(超克的) 존재로 칭송하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초인을 찾기 어려운 이 시대에 인간이란 니체식으로 말해 그저 중간자(中間者)일 뿐이며, 근본적으로 ‘불안하고도 불완전한 존재’임을 반증한다. 
그런데 무엇과 무엇 사이의 중간자인가? 프로이트(S. Freud)식으로 말해 그것은 비인격적이고 본능적인 자아인 이드(id)와 이성적이고 정신적인 초자아인 슈퍼에고(superego)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담당하는 중간 역할자로서의 자아(ego)일 따름이다. 민성호의 작업 속 인물은 이러한 ‘이드-에고-슈퍼에고’ 사이를 지속해서 오가는 ‘불안한 자아’가 잘 표현되어 있다.  
작품 〈서랍 속 얼굴(내면의 자아)〉을 보라! 브론즈 부조 위에 우레탄 도색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하나의 얼굴에 ‘정면, 좌측면, 우측면’의 얼굴 형상을 모두 가지고 있다. 눈으로 보이는 가로로 이어진 긴 홈은 ‘하나의 얼굴 속 세 자아’를 하나로 잇는다. 이 얼굴은 ‘이드-에고-슈퍼에고’를 끊임없이 오가는 ‘불완전한 자아’ 혹은 ‘불안한 자아’처럼 보이지 않는가? 한 자아로부터 나온 세 정체성은 이처럼 ‘불완전한 나’를 상징한다. 게다가 하단부에 집의 굴뚝 모양으로부터 떠오른 얼굴은 마치 연기가 피어났다가 곧 소멸할 것처럼 불완전해 보인다. 
그렇다고 이러한 불안한 자아를 미워할 것인가? 언제나 그렇듯이 껴안고 함께 살아가야 할 인간 주체의 모습일 텐데 말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서랍이라는 오브제 안에 이 형상을 고이 담았다. 마치 시간이 날 때마다 과거의 자아를 들여다보려는 듯이 말이다. 
또 다른 작품 〈자라나는 생각〉을 보라. 화면 중심에 가로로 자리한 나무 오브제로부터 실제 자란 듯한 나무줄기, 나뭇가지 이미지를 사이에 두고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두 얼굴이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 나뭇가지는 마치 하나의 눈처럼 두 얼굴을 잇는다. ‘쩍’ 갈라진 사과처럼 양쪽 면이 전개도처럼 표현된 두 얼굴은 이 얼굴이 원래 하나의 인물로부터 온 것임을 암시한다. ‘자라나는 생각’이란 이처럼 양 갈래 혹은 여러 갈래의 다른 모습으로 ‘복합적인 자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민성호는 자신의 작업 도처에서 발견되는 ‘불안하고 불완전한 자아’를 자기애(自己愛)로 품어 안는다.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는 자기애가 “리비도(libido)의 힘이 자신의 내부로 향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가 작품을 통해 선보이는 자기애는 비유적으로 말해 프로이트가 성인에게서 발견하는 2차 자기애(secondary narcissism)라 할 만하다. 프로이트의 분석에 따르면 이드로부터 벗어나 외부로 향했던 리비도가 자아로 되돌아온 성인기의 자기애란 병적인 상태이기 쉽지만, 민성호는 개의치 않고 이러한 사랑의 의미를 작품 속에 깊이 투사한다. 
작품 〈하나에서 둘이 되어〉나 〈하나에서 둘(비상하는 얼굴)〉은 각기 비상하는 두 마리의 새가 서로 만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성호는 이드나 슈퍼에고를 중재하는 에고의 지휘자처럼 원래의 한 마리 새로부터 각기 다른 자아를 쪼개어 놓은 형상으로 두 마리의 새를 만든 것이다. 즉 피상적으로 ‘두 마리 새의 만남’처럼 보이는 이 작품들은 원래 하나의 새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새의 형상은 그의 분신이라고 할 만하다. ‘자기에 대한 지독한 사랑’으로 이질적 자아를 만나게 하는 일,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대타적 사랑’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본질적 힘인 셈이다.  







IV. 에필로그  
민성호의 ‘불안하고도 불완전한 자아의 사랑’은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하나의 아포리즘(aphorism)이다. 대자존재로부터 출발해서 타자를 인식하는 대타존재로서 확장하는 그의 ‘나’는 작품 안에서 ‘불안한 자아’로 형상화된다. 그의 작품 속에는 때론 초인과 같은 이미지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개 ‘이드-에고-슈퍼에고’를 오가는 ‘불완전한 자아’이다. 그것은 어쩌면 조현병(調絃病)에서 발견하는 ‘분열적 자아’일 수도 있다. 그렇다. 어떻게 보면 그가 표현하는 ‘불완전한 자아’는 자아의 세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조현병자의 ‘분열의 자아’와 동일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자아는 질병적 자아에 매몰될 뿐인가?
그렇지 않다. 들뢰즈(G. Deleuze)가 이러한 분열적 자아에서 완전한 인격체를 상상했듯이 민성호는 조현병자의 것처럼 ‘불안하고 불완전한 자아’라는 화두를 자신의 ‘예술 원동력’으로 삼는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자기애’는 작가의 고집스러운 작업을 이어 나가게 하는 힘이다. 나에 대한 사랑! 그것은 예술가가 감당하는 2차 자기애로, 이러한 사랑은 이제 그의 작업에서 대타적 존재로서의 에고를 확장한다. 타자를 나의 공감대에 끌어오는 일, 즉 ‘나’를 ‘너, 당신들’을 함께 아우르는 ‘우리’의 개념으로 확장하는 일이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그의 작업 안에서 진행 중이다. 앞서 살펴본 작품들, 즉 〈서랍 속 얼굴(내면의 자아)〉, 〈자라나는 생각〉, 〈하나에서 둘이 되어〉, 〈하나에서 둘(비상하는 얼굴)〉에서 그의 분신인 여러 형상은 ‘나의 모습’이자 이미 ‘우리의 모습’이다. 또 다른 작품들에서는 어떠한가? 그가 대리석을 깎아서 내부가 빈 고리 모양의 반(半)원기둥을 만들고 그 끝에 자아의 분신인 두 형상으로 서로를 만나게 할 때, 그 두 형상은 ‘나의 모습’이자 이미 ‘우리의 모습’이 된다. 정육면체 대리석을 쌓아 올린 작품 〈The face 09〉에서도 우리는 대리석 개별체마다 새겨진 사람의 얼굴을 만난다. 그 얼굴은 나의 얼굴이자 이미 우리의 얼굴이다. 
그렇다면 영어 LOVE를 가느다란 브론즈로 형상화한 작품, 〈사랑의 얼굴〉, 〈사랑의 얼굴2〉가 가리키는 사랑이란 ‘누구를 향한 사랑’인가? 그것은 나르시시즘이라는 자기애의 형상이자 에로스(Eros)나 아가페(Agape)와 같은 ‘우리라고 하는 나를 품은 타자’를 향한 사랑이기도 하다. 타자는 ‘나를 아우르는 우리’의 다른 이름이다. 그의 작업은 사랑이라는 화두를 통해서 자기애의 확장 지점에 서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애-대상애-이타애’로 확장하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 전개되는 어느 지점에 서 있다고 평할 수도 있겠다.    



부버(M. Buber)는 『나와 너(Ich und Du)』라는 저서를 통해서 인간을 ‘나와 너’의 '사이(between)' 속에서 살아가는 관계의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그에 따르면, ‘너’라는 타자와의 만남과 응답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진정한 자기가 된다. 마르크스(K. Marx) 관점에서 인간의 본질은 ‘개별적인 인간에게 내재하는 추상물(Abstraktum)’이 아니고 ‘현실 속 사회적 관계의 총체’인 ‘사회적 인간’인 까닭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타자를 인식하는 대타존재로서 ‘지속적인 나의 분열과 확장’을 도모하는 민성호가 조각의 언어로 시각화하는 ‘불안하고도 불완전한 사랑’은 가장 인간다운 사랑이라고 하겠다. 그런 면에서 민성호의 이번 전시는 ‘가장 인간다운 사랑’의 장에 초대하는 ‘내밀한 작가의 고백이자, 일관된 주제를 조각의 언어로 진솔하게 탐구하는 고집스러운 장’이라고 하겠다. ●
 

출전/
김성호, 「‘불완전한 자아’의 사랑 」, 『민성호』 , 전시 카탈로그, 2022. 
(민성호 - 'Two and One', 2022. 4. 27~5. 18, 갤러리 M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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