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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김푸르다 / 하나 된 픽셀 - 큐아르 코드와 픽셀의 변주로 실험한 디지털 자연

김성호


하나 된 픽셀 - 큐아르 코드와 픽셀의 변주로 실험한 디지털 자연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존재를 잉태한 큐아르 코드와 픽셀
김푸르다의 전시는 'NFT, 하나 된 픽셀(pixel)'이라는 주제 아래 디지털 프린트와 페인팅이 결합된 형식의 평면 작업으로 펼쳐진다. 우리가 이번 전시에서 갖는 의아한 지점은 다음과 같다. 에디션이 가능한 ‘디지털 프린트’로 선보이는 작품들로 ‘대체 불가능한 토큰(Non-Fungible Token)’으로 불리는 NFT를 어떻게 실현한다는 것인가? 컴퓨터 모니터의 화상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로 간주되는 '픽셀'이 이미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하나’로서의 개별 주체의 위상을 지니고 있는데 어떻게 또 하나가 된다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전시에서 ‘NFT’는 자신의 작업을 ‘예술 소유권을 보장하는 가상 자산의 가치’로 전환하려는 미래적 작업을 선언하는 상징적인 키워드이며, ‘하나 된 픽셀’은 확대하지 않는 한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 픽셀이라는 최소의 존재를 ‘대우주 속 인간, 자연과 같은 소우주’인 ‘미시적 주체들의 공생’으로 은유하는 키워드가 된다. 즉 전자는 향후 자신의 작업이 지향하는 목표를 관객에게 예고하고, 후자는 자신의 현재 작업이 천착하고 있는 조화, 상생, 공생과 같은 주제 의식을 해설한다. 
그것이 전시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글에서 〈불멸의 아이콘〉 연작, 〈신비한 삶〉과 〈구름 위에 산책〉 연작, 그리고 〈심포니〉와 〈폭포는 자연을 노래한다〉 연작 등 3범주의 연작으로 구성된 김푸르다의 현재 작업이 드러내는 대표적 특징과 그것이 함유한 미학적 문제의식을 자세히 살펴본다. 
김푸르다의 세 범주의 연작은 형식적으로 ‘큐아르 코드(QR code)’와 ‘픽셀’의 조형이 맞물린 채 시각화된다. 먼저 큐아르 코드는 그의 작업을 출발하게 하는 지점이다. 2차원 바코드(2 dimensional bar code) 또는 ‘정보 무늬’로 불리는 큐아르 코드의 명칭은 주지하듯이, 일본 도요타의 자회사인 덴소웨이브(Denso Wave)의 등록상표, 퀵 리스폰스(Quick Response)에서 유래했다. 큐아르 코드는 “조그마한 사각형 안에 흑백의 점자나 모자이크 또는 격자무늬 패턴으로 정보를 나타내는 매트릭스(matrix) 형식의 2차원 바코드”다. 이 코드는 x축과 y축 양방향으로 표현이 가능하기에 기존의 ‘굵기가 다른 막대 모양의 1차원 바코드’보다 훨씬 많은 고밀도 정보를 담아낼 수 있다. 1차원 바코드는 대개 13~14자리의 숫자 데이터를 담을 수 있지만, 2차원 바코드는 1,000자 이상의 데이터를 표시할 뿐만 아니라, 작은 사각형 안에 문자, 숫자, 그래픽, 사진, 음성 등 대량의 정보를 고밀도로 담아낼 수 있다. 방향과 상관없이 스캐너를 통한 인식이 가능하고, 훼손된 정보도 복구가 가능하며, 암호화마저 가능해 오늘날 전 세계에 표준화된 인증 시스템으로 주목받고 있다. 
마치 기하학적 미로나 빌딩 혹은 거대한 파도처럼 보이기도 하는 김푸르다의 다양한 작품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큐아르 코드’와 ‘픽셀’이 자신의 형상과 이야기를 내어준 것들이다. 구체적으로 그는 ‘큐아르 코드’를 정보와 내용으로 간주하고 ‘픽셀’을 조형과 형식으로 대별한 채 접근한 모양새를 선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그러면서도 양자를 동일하게 존재의 양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격자형 혹은 검은색과 몇몇 색이 핀트가 안 맞는 것처럼 맞물린 그의 ‘큐아르 코드’는 인간이 밝혀낸 무수한 정보뿐 아니라 여태껏 밝혀지지 않은 판단 불가의 정보를 포함하고, 정보로 파악하기 어려운 상상의 이야기마저 두루 아우른다. 이러한 내용을 담는 그릇인 ‘작은 사각형 안 매트릭스’는 ‘픽셀’의 형태로 분절되거나, 시각화된다. 사물의 외관을 계단형으로 분절하는 이 ‘픽셀’은 김푸르다에게 있어, 여러 연작의 그래픽 언어의 유희 속에서 분명하게 해체되었다가 모호하게 재결합하는 무엇이다. 가히 존재를 잉태했다고 할 만하다. 이처럼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그의 큐아르 코드와 픽셀은 현실계의 은유처럼 보인다. 


아이엠 큐알2, f50, 2017



II. 불멸의 아이콘 - 세계에 질문하고 답 찾기  
김푸르다의 〈불멸의 아이콘〉 연작에는 무수한 정보와 데이터를 품은 큐아르 코드를 해체하고 계단형 픽셀을 오버랩시킨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그 가운데 희미하지만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커다란 두 문장 부호(punctuation marks)인 '?(물음표, question mark)'와 ‘!(느낌표, exclamation mark)’는 그가 세상의 모든 정보, 지식, 지혜를 대면하는 가장 기초적인 모듈이 된다. 화면 안에 때로는 물음표(?)만 자리하거나, 때로는 물음표와 느낌표(!)가 병치되기도 하는 조형 배치를 통해서 그는 세계의 모든 궁금증에 대해 질문하고 그것에 대한 답을 찾아 나가는 인류의 문화 활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또한 질문과 대답으로 무한 반복되는 주체와 타자의 언어적 소통 행위에 대한 정수(精髓)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 속 물음표와 느낌표는 그의 표현처럼 인류에게 절대 불가결한 ‘불멸(不滅)의 아이콘’이라고 할 만하다. “시작도 끝도 없다”는 의미의 영원성(eternity)과 달리 “죽거나 사라지지 않는 상황”을 의미하는 ‘불멸(immortality)’은 어떤 시작의 가능성을 자연스럽게 내포한다는 점에서, 김푸르다의 두 문장 부호가 품은 의미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만든다. 즉 물음표와 느낌표를 낳은 문자 지식의 기원과 그것이 ‘인간의 감정’을 품고 세계에 보편적으로 두루 사용되기에 이른 오늘날의 인간 소통의 상황을 이해하게 만든 셈이다.
‘인간의 감정’이라니? 이러한 질문은 글의 효율적인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물음표와 느낌표라는 것이 소통의 복잡다기한 감정을 한 덩어리로 품은 ‘시각적 소통의 몸체’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해 보자. 물음표가 퀘스쳔(Question)에서 두 글자를 딴 'Qo'를 문장의 마지막에 써서 물음의 의미를 나타냈다가, 점차 '?'으로 단순화되었다는 견해나, 느낌표가 엑스클래메이션(exclamation)'에서 두 글자를 추출한 'io'를 같은 방식으로 표기했다가, 점차 ‘!’로 단순화되었다는 주장은 이러한 감정의 인간 소통을 반증한다. 달리 말해 물음표를 통해서 질문을 던지고 지식을 찾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느낌표를 통해서 답을 찾은 깨달음과 놀라움, 그리고 단호한 결단과 같은 다양한 감정을 잉태하는 것이라 하겠다.   
김푸르다의 〈불멸의 아이콘〉 연작에서 이러한 ‘감정을 잉태한 물음표와 느낌표’는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진다. 큐아르 코드를 해체해서 만든 원, 사각형, 입방체와 같은 기본 요소가 격자무늬의 바탕 위에 멀티플 아트(multiple art) 형식으로 병렬, 배치된 채 그 사이에서 색상이나 명도를 달리하면서 희미하게 떠오르거나 빌딩이 가득한 도시의 풍경 속 어떤 건물처럼 각진 모습의 아이콘으로 때로는 거친 픽셀로 가득한 모니터의 게임 속 아이콘처럼 자리하기도 한다. 그뿐인가? 포토샵과 같은 그래픽 프로그램이 만드는 다양한 툴을 통해서 그의 물음표와 느낌표는 때로는 어떤 브랜드의 상표처럼 때로는 자연의 풍경처럼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면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렇다. 서구에서 유래한 이래 각기 다른 문화로 전이되어 세계에 표준화된 문장 부호로 자리하게 된 오늘날의 ‘물음표와 느낌표’는 향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는 불멸의 아이콘이자 인류의 ‘정신적 유전자’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인간이 여전히 묻고 깨닫는 지식의 체득 과정과 소통의 인간 행동 속에서 제기되는 ‘물음표와 느낌표’는 이처럼 인간의 ‘같으면서도 다른 감정’을 가득 안은 채, 그의 해체와 융합을 지속한 픽셀들이 가득한 작품 속에서 살아 꿈틀거린다.  


나는 왜! 2241, f50, 2022


불멸의 아이콘 -꽃 망울 20f, 2022



III. 신비한 삶, 혹은 구름 위에 산책 -  여백을 남긴 채 꿈틀거리는 파편들 
김푸르다의 〈신비한 삶〉과 〈구름 위에 산책〉 연작은, 무수한 픽셀이 멀티플의 ‘전면 회화(all over painting)'처럼 병치되고 군집한 다른 연작들과 달리, 큐아르 코드의 일부를 떼어 와 만든 픽셀 이미지를 통해서 화면 군데군데 여백을 만들면서 분열, 파편, 해체에 관한 주제 의식에 골몰한다. 오늘날 현실계에서 온전하게 전달되는 전체의 정보로부터 해체되고 이격된 ’파편화된 정보‘란 ‘거짓 뉴스’처럼 팩트와 픽션 사이에 걸터앉아 있거나 그것의 경계를 교묘하게 무너뜨리지만, 김푸르다의 작품에서 이러한 ‘파편화된 정보’는 참과 거짓을 가르는 윤리적 잣대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생명력 있는 존재들로 거듭난다. 가히 “여백을 남긴 채 꿈틀거리는 파편들”이라고 할 만하다. 
사각형의 흑백 모자이크 혹은 격자무늬 패턴으로 구성된 큐아르 코드의 일부분을 해체해서 픽셀들의 군집체로 변형해 가져온 이 연작은 다종다양의 형상들을 품어 안으면서도 하얀 여백을 남김으로써 형상을 대면하는 우리를 무한한 상상이 가능하도록 이끈다. 마치 ‘구름 위에 산책’이라는 연작의 제목처럼 구름이 하늘이라는 여백을 남기면서 만드는 다양한 형상들처럼 말이다. 그것은 천상의 화가가 만든 구름 그림처럼 신비롭다. 때로는 양 떼로, 때로는 괴물의 형상으로 다가서는 구름이 하늘의 드넓은 여백 안에서 흩어지고 뭉치기를 반복하듯이, 김푸르다의 픽셀의 이미지 집합체는 큐아르 코드의 다양한 부분들을 해체하고 분절해 내어 상상력 가득한 이미지로 재조합한다.    
신비로운 삶이라는 연작의 제명처럼, 그의 작품은 “자연에 대한 이야기, 추상적 단어, 삶의 모습 등” 다양한 내용의 정보를 지닌 큐아르 코드를 해체하여 조형적으로 분별한 다양한 형상의 파편을 화면에 배치하고 재조합해서 ‘우리 삶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쩌면 그것은 운명과 순리처럼 흘러가는 형상일지도 모르지만, 작가는 마치 창조자가 된 듯한 입장에서 ‘정보의 군집체로부터 이야기의 덩어리로 전환해 내는’ 이러한 창작에 골몰한다. 
작품을 보자. 이 연작은 수묵화의 선들처럼 굵고 가는 검은 선들이 흰 여백을 가득 남긴 채, 기하학적 도상이나 기호를 변형한 이미지를 구축한다. 그것은 마치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전기 회로판 또는 하늘을 배경으로 줄지어 서 있는 아파트먼트나 빌딩 숲처럼 여럿이 한데 모인 군집체로 보이기도 하고 특정하기 어려운 어떤 브랜드의 상표처럼 이미지 자체가 홀로 도드라져 보이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검은 선 주변으로 마치 칼라 잉크가 다 떨어져서 나온 프린트 출력물처럼 군데군데 노란색, 붉은색, 파란색이 배치된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마치 미디어가 첨단화되지 않았던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이러한 이미지는 1980년대 도시 골목 앞에 자리하던 해상도 낮은 모니터를 장착한 게임기가 선보이던 픽셀이 도드라지게 보였던 장면과 유사한 것이기도 하다.   
검은 선과 그 주변 군데군데 자리한 붉거나 푸른색 혹은 노란 색상의 선들은 물론이며 하얀 여백은 관람자들에게 이러한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면서 큐아르 코드의 디지털 이미지로부터 인공 이미지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이미지를 옮겨온다. 마치 항공기를 타고 내려다본 시가지의 풍경이나, 도심 속 인간 군상 혹은 식물을 가꾼 식물원이나 정원의 풍경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신비한 삶-암호화된정보1931 f100, 2019


구름 위의 산책 2255, f20, 2022



IV. 심포니, 폭포는 자연을 노래한다 - 디지털 자연으로 하나 된 픽셀   
김푸르다의 〈심포니〉와 〈폭포는 자연을 노래한다〉 연작은, 큐아르 코드와 픽셀이라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상징’을 ‘자연’ 혹은 ‘자연성의 무엇’으로 변환하려는 다각적인 실험을 선보인다. 이러한 실험의 기조에는 인공과 자연, 테크놀로지와 예술을 융합하려는 작가의 ‘통섭(統攝)’ 의지가 자리한다. 
통섭이란 무엇인가? 이 용어는 ‘모든 것의 조화와 공생을 도모하는 융합’을 의미하는 컨실리언스(consilience)라는 용어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컨실리언스라는 용어는 19세기 중반 자연철학자인 윌리엄 휴얼(Willian Whewell)이 1840년에 처음 사용한 이래, 1998년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이 자신의 저서에서 다시 사용하면서 두루 알려지게 되었고, 국내에서는 최재천이 이 용어를 통섭(統攝)으로 번역하면서 두루 회자되었다. 윌슨으로부터 촉발된 컨실리언스는 ‘사회학적 현상→심리학적 현상→생물학적 현상→물리학적 현상’으로 이어지는 환원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어 다분히 비판적이다. 그렇지만 이 용어는 원어의 의미가 ‘함께 뛰어넘는다(jumping together)’라고 하는 뜻을 지닌 만큼, ‘더불어 넘나듦’과 ‘서로 다른 현상들로부터 도출되는 귀납들이 서로 일치하거나 정연한 일관성을 보이는 상태’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오면서 흔히 언급되는 복합, 융합의 의미에 소통의 의미가 부가된 용어로 확장되어 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푸르다의 〈심포니〉와 〈폭포는 자연을 노래한다〉 연작은 이러한 ‘통섭’과 연동한다. 즉 통섭의 미학은 김푸르다의 작업에서 연주 공동체 구성원의 하모니를 강조하는 ‘심포니’뿐 아니라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자연의 공생을 의도하는 ‘폭포는 자연을 노래한다’는 제명의 ‘디지털 자연’을 한데 품어 안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큐아르 코드와 또 다른 데이터들을 연속적으로 융합시켜 픽셀의 형상을 만들고 이것을 디지털 공간 속에서 필연적 기획과 우연성의 개입을 열어두면서 다른 것들을 융합시켜 작품 이미지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의 ‘디지털 자연’의 근저에는 각기 다른 미시적 세계인 픽셀들을 융합으로 만나게 하고 서로가 소통의 상황으로 하나가 되게 만드는 통섭과 연동되는 ‘하나 된 픽셀’이라는 의미를 넉넉히 담고 있다고 하겠다.    
김푸르다는 이처럼 ‘하나 된 픽셀’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여러 픽셀을 잇는 운동의 궤적을 만드는 조형 언어에 집중한다. 즉 하나의 픽셀을 여러 공간 속에 위치시키는 방식으로 운동의 궤적을 만들어 마치 하나의 형상이 길게 늘어뜨려진 이미지를 만든다. 이러한 창작의 방식은 공간 속에서 계단 모양의 픽셀이 외곽선으로 이어지면서 시간의 흐름이 확연히 감지되는 연속적 운동 이미지를 창출한다. 그것은 실제로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임은 물론이다. 달리 말해 키네틱 아트처럼 ‘실제적 움직임(real movement)'을 선보이지는 않지만, 옵티컬 아트처럼 시각적으로 율동하는 '잠재적 움직임(virtual movement)'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자신의 몸체를 길게 늘어뜨린 픽셀의 변형체가 창출하는 놀라운 마블링 효과와 같은 우연적 결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폭포 혹은 노을과 같은 서정적인 자연 풍경을 연상하게 만드는 상상력 가득한 이미지를 대면하게 만든다. 가히 ’디지털 자연으로 하나 된 픽셀‘이라고 할 만하다. 


폭포는 자연을 노래한다 1752, f20. 2017



폭포는 자연을 노래한다1751, f50, 2022


V. 에필로그 
글을 마치자. 김푸르다의 야심 찬 신작전은 수많은 정보를 담은 디지털 세계를 상징하는 큐아르 코드를 해체하고 재조합하여 픽셀로 변환한 이미지를 통해서 조형 세계에 대해 질문하고 자신만의 창작을 위한 답 찾기에 골몰한다. 이러한 실험 자체가 그가 구축하는 ‘디지털 자연’에 관한 존재 의미를 성찰하는 과정이 된다. 큐알 코드 해체와 부분 이미지의 재조합을 통해서 여백을 가득 남긴 꿈틀거리는 픽셀의 파편들이란 결국 인공과 자연, 디지털과 아날로그,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서로 만나게 하는 통섭의 미학을 실천함으로써 그가 종국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디지털 자연으로 하나 된 픽셀’의 이상을 구현한다. 
다만 이러한 회화 실험이 컴퓨터 모니터 안에서 포토샵이라는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작동시키고 그 결과물을 캔버스에 출력한 후 회화적 가필을 일정 부분 시도한다는 데서, 전통적인 회화가 지닌 매체 실험을 도모하는 데는 일정 부분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김푸르다가 이러한 조형 언어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까닭은 그가 미래적 비전으로 남겨둔 NFT 생산 방식의 예술 창작을 타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회화 실험과 NFT로의 전환 혹은 병행이 얼마나 효능감을 지닌 창작으로 발전할지 가늠하는 것은 이 글에서 논외의 상황이다. 그가 이번 개인전을 계기로 계획하고 있는 새로운 실험이 한국 미술의 발전에 있어 의미 있는 발걸음이 되길 기대한다. ●
  

출전/
김성호, 「하나 된 픽셀 - 큐아르 코드와 픽셀의 변주로 실험한 디지털 자연」, 『김푸르다』, 전시 카탈로그 서문, 2022.
(김푸르다 개인전, 2022. 06. 08~2022. 06. 16, 금보성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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