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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수레아 / 촉각적 표현 의지가 견인하는 몽상의 에너지

김성호

촉각적 표현 의지가 견인하는 몽상의 에너지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작가 수레아는 이번 개인전에서 ‘수레알리즘 그리고 수레아(Surrealism und Surrea)’라고  하는 주제 아래 구작을 포함한 신작들을 대거 선보인다. 작가명인 수레아가 불어 원어인 쉬르레알리슴(Surréalisme)을 독일어 발음대로 표기한 ‘수레알리즘’에서 가져온 것인 만큼, 이번 개인전은 그녀의 작업 세계의 모든 것을 가장 솔직하게 그리고 종합적으로 선보이는 전시로 평가할 만하다. 수레아 작품들의 대표적인 특성은 어떠한 것이며 이번 전시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II.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현실적 회화 공간
수레아 작품의 초현실주의적 경향은 한국-독일-한국에 이르는 공간 이동 속에서 점차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서구 미술사에서 초현실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틈바구니에서 잉태한 ‘현실로부터 안주할 수 없는 인간의 탈주 욕망’이 야기했던 것인 만큼, 수레아의 작품 속 초현실주의 역시 독일에서의 13년에 이르는 낯선 이방인으로서의 삶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의 ‘안주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촉발되었다.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나온 독일은 내 생각과는 달랐다. 되돌아갈 수도 없는 또 다른 곳에서의 생존이 시작된 것이다. 타국에서의 일어나는 인간관계와 문화적 괴리감, 언어 소통은 변질되었고 의견은 어렴풋했다. 다른 시선에 대한 인식을 견뎌내고 이겨내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그런 나에게 유일한 자유의 공간이자 탈출구는 작품 속 공간에 집착하는 거였다.”

위의 작가 노트에서 드러나듯이, 수레아에게 현실의 경계 속에서 발생한 혼돈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은 “작품 속 공간에 집착하는 것”이었다. “현실은 금지된 것투성이지만 나의 공간은 금지된 것이 없다”는 그녀의 단언적 진술은 이러한 상황 인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녀에게 작품 안 공간은 유일한 자유 공간이자 혼돈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였던 셈이다. 표현주의적 경향의 붓질과 의미를 간파하기 어려운 여러 도상이나 캐릭터에 가까운 형상들은 현실의 경계를 서성이는 작가의 삶의 상황을 투영하면서 점차 그녀만의 초현실주의적 화풍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작업 세계를 정리한 일명 ‘비밀 노트 혹은 그림 노트’라 할 만한 드로잉에는 마치 자신의 작업을 도해하듯이 설명하는 텍스트가 다음처럼 적혀 있다: “그리기 다음 설정 결정(○), *찾아내기*/ 설정 결정 후 그리기(×), 결정 내기 / + 상상은 현실이 된다.” 이 간략한 텍스트는, 계획에 따른 작품 구상을 거쳐서 작품을 완성하기보다 무작정 그리기를 먼저 실행한 후에야 작품의 조형 방식을 설정하고 결정하는 것이 자신의 작업이 지향하는 태도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미리 계획한 대로 그리는 그림은 ‘결정 내기’인 반면, 무계획으로 접근한 그림은 무엇인가 ‘찾아내기’에 이른 것임을 강조하려는 듯 작가는 이 텍스트 주변에 별표로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뒷부분에 추가된  “+ 상상은 현실이 된다”고 표현한 텍스트는 “계획되지 않은 상상, 또는 현실을 벗어난(벗어나는) 상상, 즉 초현실주의적 상상이 현실이 된다”는 의미를 함유한다. 
수레아는 ‘무계획 속 그리기’로 출발하는 자신만의 초현실주의적 상상을 작품 속에 다양하게 펼쳐나간다.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를 이리저리 잘라내서 자신이 만든 이미지를 다른 캔버스 위에 콜라주의 방식으로 재차 옮겨 내는 방식은 우연으로부터 필연으로 이끄는 초현실주의의 조형 언어인 데페이즈망(dépaysement)과 자동기술법(automatisme)을 실천하기에 족하다. 장소 전이(轉移)를 화두로 익숙한 현실 속 이미지를 전복하는 데페이즈망이나 무계획과 우연의 첫 발자국을 무의식으로 이어 나가는 오토마티즘의 조형 언어는 그녀의 작품 도처에서 발현된다. 
빠른 속도감을 품은 즉발성의 붓질이 남긴 시간 흔적과 물질 흔적, 콜라주의 방식으로 자기 작품 속 이미지를 새 캔버스로 전이한 재(再)원전화, 이미지를 수집하고 만든 인위적 공간의 재구성, 버려진 채 굳은 물감을 건져와 캔버스 위에 오브제처럼 되살린 사물화된 마티에르, 커다란 구멍을 남긴 투과체의 회화, 캔버스 표면 앞뒤로 볼록 혹은 오목의 공간을 만든 네거티브와 포지티브의 부조적, 역(逆)부조적 회화 등 수레아는 초현실주의 언어를 현대적으로 변용한다. 
그녀의 회화는 재현적 기술보다 입체와 공간 문제에 천착하고 실제로 그것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그린 것’이라고 하기보다 차라리 ‘만든 것’이라 할 만하다. 가히 ‘입체 회화’라고 할 것이다. “입체를 더 심도 있게 표현하기 위해 가장 입체적이지 않다고 생각한 페인팅”을 자신의 작업으로 정초한 수레아는 이처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조각적 회화 공간’을 통해서 초현실의 미학을 산뜻하게 실천한다. 






III. 촉각의 이코노텍스트 
미술가가 작품에 담아내는 시각 메시지는 여러 의미로 해석이 가능한 ‘모호한 의미의 덩어리’ 그 자체이다. 바르트(R. Barthes)는 이미지의 기의는 ‘떠도는 사슬고리(une chaine flottante)’인데, 이것을 언어가 ‘고정(ancrage)’하거나 ‘중계(relais)’함으로써 의미가 명징해진다고 보았다. 언어의 ‘지시 기능(fonction dénominative)’을 통해서 비로소 명징해지는 미술 작품의 메시지! 우리는 이미지라는 다의적 시각 기호로 시도되는 미술의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non-verbal communication)을 해석이나 비평과 같은 ’이중 분절‘되는 언어를 통해 이해하려는 '언어적 커뮤니케이션(verbal communication)'을 자주 시도해 왔다.
그런데 미술 작품의 감상을 매번 이러한 언어에 의탁해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얼마나 삭막하고 허망한가? 수레아는 이러한 시도를 역으로 돌리는 미술 본연의 소통이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오감(五感)을 통한 비언어적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실험이 바로 그것이다. 수레아의 창작이  유독 촉각적인 면모가 강한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화면 위에 물감을 도드라지게 찍어 올리거나 질퍽하게 흘려 만든 마티에르, 콜라주로 덧붙여진 캔버스 천, 캔버스를 오려낸 후 만들어진 오목의 공간 등 촉각을 견인하는 표현 의지는 작품 도처에서 발견된다. 수레아가 귀국 후 개최했던 개인전의 주제가 ‘시각, 촉각, 감각의 버무림’이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그녀에게 이러한 촉각으로 대별되는 오감은 창작에 있어 매우 주요한 키워드가 되는 셈이다. 
그린 듯 쓰인 듯 보이는 이미지와 독일어 텍스트가 혼종된 ‘이코노텍스트(iconotexte)’ 상태의 화면은 또한 어떠한가? 사진작가 겸 이론가인 미셀 네를리쉬(Michael Nerlich)가 이콘(icone)과 텍스트(texte)의 결합어로 만든 ‘이코노텍스트’는 “글과 그림이 분할될 수 없는 총체성을 이루어진 하나의 작품”으로 풀이된다. 이것은 관람자에게 ‘그림 읽기’와 ‘그림 보기’의 감각을 한꺼번에 요청한다. 특히 여기서 텍스트는 그녀의 창작에 대한 ‘사유의 파편들’을 강조하면서 이미지에 대한 의미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그뿐만 아니라 텍스트는 작품 속에 이미지처럼 한 몸으로 편입되어 들어옴으로써 역으로 ‘언어의 고정화된 의미’를 전복하기도 한다. 작품 속 좌우가 뒤집힌 채 쓰여 있는 글씨나 ‘비밀 노트’로 불리는 이코노텍스트 형식의 드로잉에 담겨있는 그녀의 ‘메타인지’적 관점 역시 이미지와 텍스트의 합체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인가 확정할 수 없는 ‘몸의 다른 감각’을 일깨운다. 이렇게 보면 수레아의 작품 속 ‘이코노텍스트’는 이미지에 대한 ‘고정화된 언어의 지시 기능’으로부터 텍스트를 탈주시켜 이미지와의 관계 속에서 엉뚱하고도 낯선 초현실적 만남을 성취한 셈이다.  
촉각은 ‘보기’로 대표되는 ‘미술에 대한 우리의 관성적인 지각’을 전복하고 ‘읽기’, ‘만지기’, ‘느끼기’, ‘사유하기’와 같은 우리 몸속에 잠자고 있던 또 다른 감각을 깨운다. 그녀가 자주 화면에 등장시키는 솔방울은 실상 유사한 모양을 한 뇌(腦)의 중심부에 자리한 ‘송과선(松科腺)’을 비유한 것이다. 빛을 감수하고 멜라토닌을 생성하는 까닭에 ‘제3의 눈’이라 불리는 이것은 수레아에겐 자신의 ‘능력을 보는 또 다른 눈’으로 간주된다. 어찌 보면 그것은 작가에게 다른 감각을 일깨우는 ‘마음의 눈 또는 생각의 눈’에 대한 메타포라 할 것이다. 
수레아의 작품에서 이코노텍스트가 야기한 통합적이고도 촉각적인 감각은 ‘제3의 눈, 마음의 눈’으로 표방되는 솔방울과 같은 메타포를 형상화해 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또 다른 주요한 논점을 견인한다. 바르트가 언급하는 ‘제3의 의미(Le troisième sens)’ 또는 ‘무딘 의미(le sens obtus)와 같은 주관적 해석과 미적 경험이 그것이다. 이것은 이미지를 수용하는 관람자에 따라 다르게 지각하고 인식하는 미적 경험을 일컫는 풍크툼(punctum)’이란 개념과 연동한다. 바르트는 풍크툼을 가슴을 찌를 만큼의 강렬한 촉각적이고 주관적인 미적 경험으로 해설한다. 누군가에게는 버려진 것이었을 물감 찌꺼기, 또 누군가에게는 무계획의 유희처럼 간주되었을 즉흥적 붓질과 말장난 같았을 텍스트들이 수레아에겐 풍크툼처럼 강렬한 미적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되었으리라. 




IV. 몸의 감각이 이끄는 몽상 - 오목의 공간 혹은 요나 콤플렉스 
수레아의 창작 세계에서 일련의 깨달음을 준 것은 ‘내 몸 안의 우주’라는 생각이었다. 유학을 떠났던 독일이나 안정을 위해 되돌아온 한국은 자유의 공간을 모색했던 과정에 거주했거나 거주하고 있는 장소이지만, 정작 그녀로서는 자유의 공간이 장소이기보다 자기 몸이라는 것을 체득한 셈이다. 몸의 감각이 이끄는 ‘엄청난 가능성의 공간’으로서 말이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끊임없는 상상력을 예술로 보여드리는 것이 제 꿈이에요. 그러기 위해 나를 부수는 과정을 잊지 않고, 발전해 나가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손의 감촉으로 주무르고, 파괴하며, 힘을 가하는 방법에서 감각이 살아나고, 몽상의 힘을 키울 수 있었어요. 아티스트란 정말 자유로운 세상에 가까이 가도록 해주는 뱃사공 같아요.” 
수레아의 언급에서처럼, 작가의 몸은 자유로운 예술과 상상력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몽상(夢想, rêverie)’의 힘에 이르게 하는 원동력이다. ‘몽상’이란 바슐라르(G. Bachelard) 식으로 언급하면 정신분석학자들이 대상으로 하는 ‘무의식적 활동으로서의 꿈(rêve)’이 아니라 ‘깨어 있는 꿈’이다. 바슐라르의 관점에서, 예술의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인간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몽상이란 ‘밤의 꿈’이기보다 ‘낮의 꿈꾸기’라고 할 것이다.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La Poétique de l'Espace)』이란 저작에서 하나님의 명을 거역했던 요나(Jonah)가 삼일 동안 고래 뱃속에 갇히는 형벌을 받고 회개했다는 에피소드에서 유래한 요나 콤플렉스(Jonah complex)에 대해 언급한다. ‘모태귀소본능(母胎歸所本能)’으로 풀이되는 이것은 주로 어머니의 태아 시절을 그리워해 벌이는 ‘아동기의 퇴행적 증상’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바슐라르는 이것을 ‘모든 상상력을 낳는 근원’으로 파악한다. 즉 이것은 인간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 무의식에 형성된 이미지와 같은 것으로, ‘어떠한 공간에 감싸이듯이 포근하고 안온함을 느끼는 상태’를 지칭한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요나 콤플렉스의 상황을 ‘서랍, 상자, 장롱, 조개껍데기, 새 둥지, 집’과 같은 공간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수레아의 작품에서 몸의 감각이 이끄는 몽상은 요나 컴플렉스로 풀이되는 오목의 공간으로부터 잉태한다. 이 공간은 상상력을 낳는 거점이다. 수레아의 작품에서 ‘상상력을 낳는 요나 컴플렉스’는 대개 새 둥지와 같은 오목한 공간이 만들어진 캔버스나 서랍처럼 꾸며진 프레임을 통해서 드러난다. 인물의 전신상이나 얼굴, 꽃, 별들의 형상이 오목하게 파인 역부조의 콜라주나 캔버스 뒤로 달항아리 모양으로 움푹 꺼진 네거티브의 공간 역시 이러한 예가 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자기 얼굴 형상을 역부조로 남긴 석고 캐스팅 작업이나 그림이 그려진 부분들을 잘라내 다른 캔버스에 콜라주로 사용하고 난 후 덩그러니 커다란 구멍으로만 남은 상태의 캔버스 작업 또한 수레아에겐 요나 컴플렉스의 상징처럼 자리한다.  
“집착적으로 수집해서 만든 공간, 언제 떠나야 하는지 모르는 곳이지만 만들어 놔야 하는 보금자리는 절묘한 균형과 위태로움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수레아의 작가 노트 속 진술이나 “내가 만들어낸 공간은 얽히고 뒤섞여 있지만 무너지지 않고 불완전한 나를 숨겨준다”는 진술은 상상의 근원지인 요나 컴플렉스의 공간이라는 것이 안온함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불안, 포함/배제의 양면성이 부딪히면서 몽상을 잉태할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렇다, 수레아의 작품 속에 산포(散布)해 있는 요나 콤플렉스의 오목 공간은 크리스테바(J. Kristeva)가 상상계의 담론으로 고찰했던 코라(chora) 같은 혼돈의 공간이자 생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기호학자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코라는 ‘어머니와 아이가 공유하는 분화되지 않은 자궁과 같은 몸의 공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감각을 수집하고 에너지를 전달하는 작가”로 소개하고, “혼돈 속에 자신을 던져 넣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이해하는 수레아에게 있어 이 오목의 공간은 요나 콤플렉스의 공간이자 코라의 공간이 되기에 족하다. 수레아에게 그것은 혼돈, 상상력, 역동성, 운동성이 요동치는 에너지의 활동 공간인 셈이다. 








V. 에필로그 
글을 정리하자. 초현실주의를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수레아의 이번 개인전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현실적 회화 공간을 몸의 감각이 이끄는 몽상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하길 거듭한다. 그녀의 작품은 조각적 회화의 공간과 더불어 촉각을 견인하는 이코노텍스트의 양상으로, 요나  콤플렉스와 코라가 품은 몽상과 에너지를 잉태하고 뿜어내는 오목 공간의 양상으로 드넓게 펼쳐진다. 
그 모든 것들은 한편으로는 혼돈의 양상으로 뒤섞이고, 한편으로는 등장인물, 무대, 스토리가 있는 이야기체의 회화 양상으로 전개된다. 그것은 예측 불가의 무엇으로 변화하는 가능성의 덩어리이자, 바슐라르가 ‘물질적 상상력(l'imagination matérielle)’의 근원으로 보고 있는 물, 불, 공기, 땅과 같은 4원소의 물질들이 넘쳐나는 이야기의 공간이기도 하다. 보라! 화려한 색상으로 가득한 산, 하늘, 강, 바다, 그리고 인간과 의인화된 동식물이 어우러진 수레아의 시원(始原)의 에덴동산을 말이다. 그녀가 앞으로 펼쳐나갈 이야기와 상상의 공간이 무엇일지 기대가 자못 크다.   ●


출전/
김성호, 「촉각적 표현 의지가 견인하는 몽상의 에너지」, 『수레알리즘 그리고 수레아 Surrealism und Surrea』, 전시 카탈로그, 2022.
(수레아 개인전, 클램프갤러리, 2022. 5.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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