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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석용진 / 필묵이 발현하는 유희 - 무정유의 미학

김성호

필묵이 발현하는 유희 - 무정유의 미학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일사(逸史) 석용진의 작업은 서예/서양화/한국화의 경계를 넘나들고 평면/입체, 추상/구상의 장르적 범주를 오가고 넘실대는 ‘무엇’이다. 그것은 ‘그리고, 쓰고, 치는 행위’가 작가의 몸으로부터 촉발되는 즉발성(卽發性)과 운동성의 ‘무엇’이기도 하거니와 수양과 명상의 자기 찾기를 실현하는 ‘무엇’이기도 하다. ‘무엇’으로 규정하기 쉽지 않은 그의 작업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무엇’일까? 이 글은 그것을 ‘필묵(筆墨)이 발현하는 유희 - 무정유(無情遊)의 미학’으로 풀이한다.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II. 획(劃)이 견인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
석용진의 작업 세계는 ‘획’으로부터 시작하고 ‘획’으로 종결한다. ‘획’은 전통 서법(書法)에서나 현대 서예의 장에서 ‘점’을 이어 확산하는 근원적인 몸체이자 운동성 자체이다. 서구의 조형언 어가 0차원인 점으로부터 출발해서 1차원인 선으로, 다시 2차원인 면과 3차원인 입체로 물리적인 경계의 영역을 넘어 확장되어 가는 것과 달리 동양의 조형 언어는 ‘획’에서 출발하여 차원의 전후로 종횡무진 움직이면서 종국에 ‘획의 세계’ 안에서 종결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획’은 서구가 탐구해 온 ‘선’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른 무엇이다. 담묵이나 농묵의 획은 몰골(沒骨)의 자태를 한 채 0차원과 2, 3차원을 한꺼번에 수렴하면서 화지의 배면으로 스며들거나 화지의 외피 밖으로 뛰쳐나가는 운동성의 존재이다. 
생각해 보자. ‘획’은 그 자체로 ‘점-선-면’ 사이의 이동을 수시로 감행하는 변형성과 운동성의 존재이다. 언제나 ‘~로부터 ~로 이동하는’ 획은 때로는 ‘점→선의 획’이자, 때로는 ‘선→점의 획’을 성취한다. 그뿐만 아니라 획(劃, 긋다)은 서(書, 쓰다)와 화(畵, 그리다) 사이를 오가는 것이자, 양자를 통섭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획’은 공간과 공간을 분리하는 절(切, 나누다)의 개념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획’은 운동성의 흔적을 만드는 하나의 퍼포먼스인 셈이다. 즉 편평한 화지의 공간 안에 시간을 끌고 들어오는 ‘필묵의 몸짓’이라고 할 것이다. 
석용진은 전통 서법을 재해석한 현대 서예와 서화(書畵) 정신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회화의 장에서 이처럼 ‘시공간을 품은 획’을 근간으로 하는 필묵의 세계를 맘껏 펼쳐낸다. 보라. 농묵과 갈필의 일필휘지로 휘몰아치는 획의 세계를 말이다. 그것은 대개 한자라는 극동의 표의문자로부터 출발하고 있지만, 한자의 고유한 육서(六書)를 해체한 현대적인 필획(筆劃)으로 공간 속으로 산포(散布)하거나 서구와 비서구를 아우르는 고대의 상형 문자처럼 그림씨와 글씨를 한 몸으로 뭉쳐놓은 ‘획’으로 꽈리를 틀거나 혹은 화살표나 하트와 같은 현대적인 도상이 어우러진 지표나 상징처럼 변형하는 ‘획’으로 꿈틀거리기도 한다. 이처럼 석용진에게서 ‘획’이란 하나의 붓질 안에 공시(共時)와 통시(通時)의 순서를 전복하고 새로운 운동성의 방향으로 내달리는 걷잡을 수 없는 무형의 생명체라고 할 것이다.  
한편, 생명의 운동성을 품은 석용진의 ‘획’은 화지 안에 온통 기운생동의 세계를 넘실거리게 만든다. 자유롭고도 즉흥적인 붓놀림과 거침없는 즉발성의 일필휘지(一筆揮之)는 용필(用筆)에 따라 건묵(乾墨)과 담묵으로 용묵과 용색을 달리하고 먹의 번짐과 스며듦을 변주하면서 마치 알 수 없는 모종의 생명체처럼 화면 위에 살아서 꿈틀거리듯 휘몰아친다. 
정운(情韻)과 신기(神氣)를 가득 안은 석용진의 생명력 가득한 ‘획’이 창출하는 기운생동은 그만의 자유분방하고도 막힘없는 무경계의 골기(骨氣)를 드러내기에 족하다. 즉 음과 양,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 글과 그림이라는 이원 대립적 요소를 끌어안고 현대 서화의 장 안에서 한바탕 벌이는 그의 기운생동의 ‘필획’은 ‘통합이자 해체’를 한 몸에 품은 동양의 일원론적 관심을 여실히 드러낸다. 





III. 서화 통합의 아이코노텍스트가 품은 일원적 세계관  
작가 석용진이 서양화를 전공했으나 초기 화업을 서예의 장에서 펼쳤던 것만큼, 서(書)의 세계는 그의 화풍을 이루는 근간이다. 특히 전통 서법을 현대화하는 방식으로 실행했던 전각(篆刻) 예술은 그의 이러한 서의 세계를 명료하게 드러낸다. 
그의 ‘전각을 통한 서의 세계’에는 한자의 육서 중 하나인 상형(象形)이 그러하듯이, 화(畵)의 세계를 넉넉히 품어 안는다. 명상과 성찰하는 마음으로 오석(烏石)뿐 아니라 기와, 목판, 테라코타, 크리스털에 글자를 한 자씩 정성들여 새기고 상감을 넣거나 낙관 새김을 추가하는 석용진의 전각 예술은 아포리즘(aphorism)과 같은 훈육과 성찰의 메시지를 함유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대개는 ‘서’의 의지와 ‘화’의 의지가 상생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찍어내기의 방식과 같은 판본을 전제하는 전각 예술의 유형 안에서 ‘서’와 ‘화’의 세계가 마치 한 몸처럼 조응하는 ‘서화 통합’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석용진의 작업에 있어, 이러한 서화 통합의 지향점은 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회화의 장에서 더욱 자유롭게 펼쳐진다. 즉 ‘그림 같은 글, 글이 변형된 그림, 글과 그림이 뒤섞인 양태’는 전각 예술에서보다 회화의 장에서 더 구체적이고 다채롭게 자리한다. 화선지 위에 먹과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조형 질료뿐만 아니라 테라코타나 투명 아크릴판에 먹과 안료 그리고 아크릴 물감을 혼용하거나 아교, 파라핀과 같은 매제와 더불어 금박 상감과 같은 기법을 두루 전용하면서 그의 ‘서’는 ‘화’와 연동한다. 
‘현대적 서화’라고 할 만한 그의 작품에서 용(龍)이라는 글자는 용의 형상을 입고 승천을 시도하고, 동심(同心)이란 글자는 하트 모양의 얼굴로 기호화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다행(多幸)이라는 글자는 영어로 해석되는 다양한 키워드들과 연동하거나, 풍문(風聞)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담긴 글자는 마치 ‘비밀이 바람에 흩날리는 형상’처럼 씌어(혹은 그려져) 있기도 하다. 때로는 의미를 명료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일필휘지의 글자 파편들’은, 현대적 인물이 입고 있는 의상처럼 변주하기도 한다.   
한편, 서구는 이러한 그림과 글이 통합된 현상을 아이콘과 텍스트의 결합을 의미하는 아이코노텍스트(iconotext)라는 용어로 부른다. 이 용어는 사진작가 겸 이론가인 미셀 네를리쉬(Michael Nerlich)가 이콘(icone)과 텍스트(texte)의 결합어로 만든 불어 이코노텍스트(iconotexte)의 영어식 표기다. 네를리쉬의 개념화에 따르면, 아이코노텍스트는 “글과 그림이 분할될 수 없는 총체성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작품”이다. 물론 픽토그램(pictogram)과 같은 현대적 흐름이 존재했지만, 서구에서 아이코노텍스트는 분명 전통과는 다른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와 달리 동양에서는 ‘서화’를 통해서 이 개념이 이미 존재했던 까닭에 전통적 특성이라고 정의해도 무방하겠다. 
적어도 서구에서, 아이코노텍스트는 글과 이미지 사이에서,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에서, 그리고 사진술과 글쓰기 사이에서 논의되면서 주로 시와 그림, 텍스트와 이미지가 혼종된 시각예술 작품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지만, 오늘날은 이미지와 텍스트, 아이콘과 텍스트가 결합된 모든 양상을 아우르며 다양한 용어들로 재편되는 중이다.   
이 글은 석용진의 작업을 ‘서화의 현대적 해석’이라고 보는 익숙한 관점을 견지하되, 글과 그림의 통합이라는 아이코노텍스트라는 서구적 용어를 빌려 그 통합, 융합, 해체의 언어를 분석하면서, 역으로 그의 작업 안에서 동양 전통의 일원론적 미학이 구현되고 있는 상황에 주목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작업 속 ‘서화동원’(書畵同源)의 현대적 면모는 가히 아이코노텍스트라 부를 만큼, 탈전통의 ‘무엇’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자와 도상이 맞물리는 정도가 아니라 영어로 쓴 텍스트, 혹은 이미지 속에 스티커처럼 프린트해서 개입시킨 서구의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브랜드명은 석용진의 회화를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을 변주하는 아이코노텍스트로 살펴보게 만든다. 그의 아이코노텍스트는,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을 실현하듯 관련성 없어 보이는 이미지가 비구상과 구상의 옷을 입은 채 나란히 배치되거나, 현대 서예에서 엿보이는 활달한 필획들이 텍스트로, 포스트모던 광고에 등장할 법한 현대인이 이미지로 등장하면서 때로는 ‘텍스트가 이미지로 역전’되거나 ‘이미지가 텍스트로 전환’되는 대비와 상응의 효과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러한 융복합의 조형 언어는 서구 전통인 이원론적 인식에 ‘병 주고 약 준’ 오늘날의 ‘해체로 귀결된 일원론’으로 살피기보다는 주체와 대상, 자연과 인간, 서와 화 사이를 언제나 하나의 기(氣) 속에 함유된 ‘동양의 일원론’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그의 작업은 ‘서구의 것’으로 동양 전통을 혼성하고 해체하는 형식을 통해서 인내천(人乃天)과 삼자일합(三者一合)과 같은  ‘동양의 일원론적 내용과 세계관’을 함유하기 때문이다. 
 



IV. 기호 구조로부터 탈주하는 무정유(無情遊)의 한판 놀이
석용진의 그림과 글이 통합된 현대적 서화 혹은 아이코노텍스트는 다분히 기호학(sémiotique)이라는 구조주의(structuralism)적 틀을 빌렸음에도 종국에는 그것을 깨고 나가는 탈구조주의(post-structuralism)의 한판 놀이를 선보인다. 특히 관람자에게 보기(see)와 읽기(read)라는 지각 행위를 동시에 요청하는 석용진의 그림과 글의 융복합적 맞물림은 우리에게 기호학이라는 언어적 구조주의의 틀 안에서의 사유를 요청하고 시각기호학(sémiotique visuelle)이라고 하는 20세기의 탈언어적 구조주의의 노력을 동시에 엿보게 한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그의 그림은 '언어적 메시지'로의 번역을 필요로 하는 기표(signifié)와 기의(signifiant)의 결합으로 시작되는 ‘언어기호학(Sémiologie linguistique)의 면모를 띠고 있지만, 그것에 개입하는 글은 전통적 서화 개념의 이미지에 대한 해설이나 번역에만 고착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탈언어기호학적 면모를 동시에 선보인다. “모든 것은 언어이며 그 어떤 것도 언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언어학 중심의 구조주의란 그림 혹은 이미지를 모두 언어로 해설하거나 매개하려는 노력을 고수하는데, 석용진의 서화는 출발부터 글과 그림을 하나로 뭉쳐 ’글이자 그림‘이며 ’글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아이코노텍스트의 유형을 견지하는 까닭에 언어학이 중심이 된 구조주의의 틀을 깨는 무엇이 된다. 즉 그의 현대적 서화는 ‘이중 분절되는 언어’를 최상의 가치로 간주하는 언어학적 구조주의인 소쉬르의 기호학과 결별한다. 달리 말해 기표와 기의로 분할되는 ‘그림과 글’이라는 대비의 인코딩(encoding)에서 탈주하고 탈구조주의의 ‘그림/글’이라는 ‘빗금(/)의 인코딩’을 성취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글/그림’ 혹은 아이코노텍스트는 언어 대신 시각기호를 앞세우는 시각기호학이라고 하는 탈구조주의적 영역에 발을 내딛는 무엇이 된다고 하겠다. 모든 것을 언어로 정의할 수 없고 그저 다양한 해석만이 열려 있다는 상대주의적 해석, 혹은 주관주의적 해석의 관점에서, 그림을 그저 ‘판독 불가능한 기호로 수용’하는 석용진의 현대적 서화는 의미심장하다. ‘의미가 너무 많아서 무의미한 것과 다를 바 없는 회화’를 그가 그저 다양하고도 무한한 해석으로 열리는 원천으로 간주할 뿐 어떠한 특정 의미로 고착화되기를 원하지 않는 까닭이다. 게다가 아래의 작가 노트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그는 창작을 하나의 놀이나 유희처럼 간주하는 것이 유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른 듯 보인다. 

“노자에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이 있다. 내용의 이면을 성찰하기에 앞서 이렇게도 무정한 말이 있구나 싶다. 요즘 들어 문득 인생은 무정한 놀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의 작업도 그것이 문자가 되었든 그림이 되었든 모두 무정유(無情遊)가 아닐까?”

노자는 도덕경 5장에서 “하늘과 땅은 만물을 ‘생성화육’하는 함에 있어 어질지 않고 그저 무심하게 자기의 일을 할 뿐”이라는 의미의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를 설파했는데, 이 구절 앞에서 석용진은 무심한 세상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무정유(無情遊)의 삶이자 이승에서의 한판 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무정유’는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오연율시(五言律詩)인 '월하독작(月下獨酌)'에서 노래한 삶의 지향점이다.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시인은 정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의 복잡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거닐기(遊)’를 소망한다. 삶이란 이백의 노래처럼 이승에서의 한판 놀이라 할 것이다. 삶이 그럴진대 무심한 세상에서의 예술가의 화업이란 삶 속에서 체득한 ‘세계를 대면한 작가의 자유로운 표현 의지’를 그저 얽매임 없이 때로는 신명 나게 때로는 허허롭게 드러내는 것이리라.  
전통 서법과 서화의 현대적 변용을 실험해 온 석용진의 작업은 필묵으로 담은 서양의 형식과 동양의 마음이자, 이 둘이 상응하는 대화이다. 어떤 면에서는 글과 그림을, 어떤 차원에서는 전통과 현대를 대화의 장에 불러들이는 한판의 굿판이자, 신명 나는 놀이라 하겠다. 마치 낙서와 같은 필획이 갑골문자나 영어 텍스트와 함께 뒤섞이거나 문인화 형식의 도상이나 현대적 이미지와 혼성되는 작업에서는 신기와 같은 역동적인 에너지와 자유분방한 표현 의지가 넘쳐난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화폭에는 신명뿐 아니라 무심한 세상으로부터 별리된 채 자신의 세상에 깊이 잠입한 한 화가의 ‘즐겁고도 외로운 세상살이’ 또한 자리한다. 오늘날 명랑한 이모티콘 메시지처럼 변용된 문인화나 민화 형식에 거주하는 동물 조형, 그림에 또 다른 그림을 덧붙이거나 실제 우표를 개입하는 콜라주의 언어, 패널 속 패널을 개입하는 셰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와 같은 조형 언어, 먹과 장지, 화선지, 돌, 테라코타, 금박과 같은 다채로운 혼성의 재료를 사용한 조형은 석용진이 혼자 차지한 자기 시공간에 칩거하듯이 들어가 건져 올린 ‘즐겁고도 외로운 예술 세계’라 할 것이다. 가히 ‘무정유의 미학’이라는 한판 놀이를 펼치고 있다고 할 만하다. 





V. 에필로그 
작가 석용진의 작업 속 ‘무정유의 미학’이란 피상적으로는 칸트의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과 연동되어 보인다. 즉 ‘관심이 없음’이라는 부정적 규정과 더불어 ‘자율적 관조’와 같은 긍정적 규정이 맞물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만 다른 것은 칸트의 ‘무관심성’이 미적 판단으로부터 출발한 미 이론의 주관화와 같은 수용자 입장을 강조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면, 석용진의 ‘무정유’란 미적 창작으로부터 출발한 실천의 영역이자, 창작자의 입장을 강조하는데 방점이 찍혀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무정유는 적극적인 놀이와 유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무관심성과 차별화된다. 
석용진은 필묵이 견인하는 무정유의 미학에 천착한다. 석용진에게 그것은 ‘획이 함유한 운동성과 더불어 그것이 창출한 기운생동’의 세계이자, 서화 통합의 아이코노텍스트가 품은 일원론적 세계관이기도 하다. 석용진은 전통의 현대적 계승과 재해석을 통해 창작의 장에서 원전에 대한 자율적인 전유(appropriation)를 실천한다. 석용진에게서 필묵의 현대적 계승에 대한 실험, 융복합과 해체, 그것으로 귀결된 탈구조주의 신념과 포스트구조주의 현상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석용진이 필묵으로 추구하는 무정유의 미학은 이승에서의 한판 놀이, 유희와 같은 것이다. 창작 세계에서 심장이 뛰는 대로, 가슴이 시키는 대로 ‘자기 것 찾기’를 추구해 온 그간의 무수한 실험이 궤적을 만들면서 도달한(혹은 도달해 가는) 과정이자 결과물인 셈이다. 우리가 그의 향후의 행보에 주목하는 까닭이다. ●

출전/
김성호, 「필묵이 발현하는 유희 - 무정유의 미학」, 『석용진』, 전시 카탈로그, 2022
(일사 석용진展​, 2022. 5.14.~6. 1, 주노아트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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