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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남기성 / ‘이빨자국’ - 인덱스로서의 사물 흔적과 뉴-바니타스 미학

김성호

‘이빨자국’ - 인덱스로서의 사물 흔적과 뉴-바니타스 미학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사진가 남기성의 근작 개인전은 ‘이빨자국’이라는 띄어쓰기를 고의로 어겨 복합어로 만든 주제 아래 인간이 먹다 남은 음식의 잉여(剩餘)물이나 먹고 버려진 음식 폐기물을 카메라로 촬영하여 선보인다. 이러한 관심은 그동안 그가 카메라에 담아온 일상에서 흔히 발견되는 작은 티끌, 먼지, 버려진 머리카락과 같은 흔하디흔한 미시(微視)적 세계에 대한 관심이 다른 관점에서 확장한 것이다. 즉 무의미의 존재에 순연(純然)한 관심을 기울이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무의미의 존재가 어떻게 촉발되었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유의미를 담보하는지 성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진 작업을 전개해 온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본다. 


먼지Series #17-03, 2017


먼지Series #17-3176, 2017



II. 하찮은 미물에서 찾은 특별한 세계  
사진가 남기성은 작가 노트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나는 거창한 소재보다 흔하고 사소해서 시각적 대상이 되지 않는 하찮은 것에 관심이 간다. 너무 친숙하고 일상적이어서 시각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것에서 무엇을 찾고 싶었다.” 작가 노트에서 보듯이, 그가 먼지나 버려져 뒤엉킨 머리카락 등에 카메라 앵글을 가까이한 것은 “현실에 너무 많다”는 이유로 우리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 왔던 ‘관성적 사유’를 전환하고 ‘하찮은 것’에서 특수한 의미를 찾고자 한 까닭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과포화 상태의 미물(微物) 존재’를 무의미한 것에서 유의미한 무엇으로 추출하려고 한 시도였다. 즉 먼지나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동전, 멸치, 시든 꽃, 죽은 곤충’과 같은 흔하디흔한 사물이나 미물을 피사체로 담아온 남기성의 작업은 하찮은 것을 특별한 무엇으로 바라보고자 한 존재론적 관심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존재론(ontology)을 현실에서의 실존(existence)의 의미를 다루거나 현실 너머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는 거시적인 현상학(phenomenology) 담론으로 받아들이곤 했던 까닭은 존재론의 주체를 늘 인간으로 상정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현실 속에 인간만 존재한다고 하겠는가? ‘인간이 아닌 타자(他者)’의 존재론, 즉 동식물, 사물의 존재는 인간이나 예술 작품의 존재론처럼 거창한 담론으로 내달리지 않지만, 그것들이 이미 실존의 주체임을 인간은 종종 방기하곤 한다. 사유하는 인간만이 모든 실존의 주체라고 여겨왔던 까닭이다. 
퐁티(M. Merleau-Ponty)의 존재론적 탐구가 그러하듯이 동식물이나 사물은 인간과 대면하는 상호작용의 존재이자 인간과 시선을 교환하고 소통을 지속하는 동등한 주체이다. 서구가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상대주의적 관점을 용인하기에 이르렀지만, 동양에서는 이미 인간 아닌 모든 존재를 우주의 한 부분이자 우주의 다른 모습으로 간주해 왔다. 게다가 동양 전통의 사유는 미물을 ‘텅 빈 무(無)’의 존재로 바라보기보다 ‘충만한 유(有)’의 존재로 바라본다. 즉 미물이란 비(非)존재가 아니라 인간처럼 충만한 존재이자, 우주의 한 부분이자 곧 전체인 존재로 간주된다. 
남기성은 흔하디흔하고 하찮은 미물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익숙한 그것’을 ‘낯선 무엇’으로 전환하는 사진 작업을 통해 미물을 희소성의 특별한 존재론적 위상으로 전환한다. 가히 ‘하찮은 미물에서 찾은 특별한 미시적 세계’라고 할 만하다. 남기성의 작업이 ‘낯설게 하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형식적으로 ‘화소(畫素)도’가 높은 특수 카메라로 대상을 근접 촬영하여 세부 이미지를 깨짐 없이 담아내고 ‘대상의 실제 크기’보다 훨씬 크게 사진을 인화하는 방식으로부터 기인한다. 먼지의 몸체와 죽은 곤충의 거대한 더듬이를 목도할 뿐만 아니라 멸치의 미묘한 비늘 표피를 사진으로 확인하게 만든 이러한 ‘근접 촬영’과 ‘거대 인화’의 작품 형식은 대상에 대한 익숙하고도 관성적인 바라보기에서 탈주하게 만들고 ‘낯설게 보기’를 효과적으로 견인한다. 


이빨자국Series 옥수수#03. 2019


이빨자국Series 알타리#01~04. 2020





III. 이빨자국: 폐기와 잉여가 남긴 상처 흔적의 인덱스 
현실에 너무 많아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잘 보이지 않던 ‘소소한 것들’이라는 미시적 세계를 사진으로 길어 올려 관심을 촉발하던 남기성의 작업은 최근에 동일한 주제 의식 속에서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확장, 전개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먹는 음식으로부터 남겨진 잉여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 그것이다. 작가가 ‘이빨자국’이라 명명한 이 연작에 등장하는 음식물은 여전히 음식의 본체로부터 떨어져 남겨진 음식물의 존재이면서도, 인간의 선택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잔여(殘餘)물, 잉여물이자 버려진 폐기물이다. 
본래의 몸체를 상실하고 이빨자국을 흔적(trace)으로 남긴 채 잔해의 형상으로 기록된 그것은 사진이 지향해 온 오래된 ‘인덱스(Index)의 미학’을 강하게 드러낸다.  
잉여의 음식물에 남겨진 ‘사물 흔적’은 존재의 문제의식을 인덱스(index)의 개념으로 드러낸다. 인덱스는 표상하는 사물과 의미 사이의 인과 관계와 상관성을 드러내는 기호이다. 흔히 ‘색인(索引)’으로 번역되는 인덱스는 원래 “책 등에서 중요한 단어나 항목, 인명 따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일정한 순서에 따라 별도로 배열하여 놓은 목록”을 지칭하지만, 기호학에서는 ‘지표(指標)’로 번역되는데, 그것은 “방향이나 목적 혹은 기준을 가리키는 기호”라는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공장의 굴뚝에서 나는 연기는 공장의 가동이 시작되었음을 고지하는 지표이지만, 깊은 숲속 산장에서 나는 굴뚝 연기는 등산객을 위해 산장의 주인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지표가 된다. 식당의 한 테이블 위에 음식의 잔여물이 남겨진 것은 얼마 전에 손님이 식사를 마치고 나갔다는 지표이며, 조금의 물기가 남아 있는 것은 이전에 테이블을 행주로 닦았다는 지표가 된다. 또한 노인의 손등에 핀 검버섯은 나이가 들었다는 지표이며, 어린아이의 손등에 난 멍 자국은 얼마 전에 사고가 있었음을 알리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흔적’이라는 것은 “어떤 현상이나 실체가 없어졌거나 지나간 뒤에 남은 자국이나 자취”를 의미하듯이 ‘지표’ 또한 이러한 흔적의 사건을 함유함으로써 사물과 사건의 인과 관계를 추적하게 만든다. 이러한 차원에서 작가 남기성이 잉여의 음식물에서 추적하는 이빨의 흔적은 ‘지시로서의 인덱스’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지표로서의 인덱스’에 연동된다. 
그런데, 여기서 남기성이 추적하는 인덱스의 미학이 흥미로운 지점은 인간의 욕망이 유발하는 ‘폭력성’과 그것이 야기한 ‘사물 흔적 혹은 상처 흔적’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동식물의 주검을 먹이로 삼아 생을 영위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욕망은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먹는 일이 오락과 유희가 되어 벌어지는 오늘날의 ‘향락의 식문화’를 ‘폭력적인 인간의 욕망’으로 바라본다. 
예를 들어 타액을 남긴 채 먹다 남겨진 크림빵, 과자와 같은 혼합 식물뿐 아니라 옥수수 알맹이가 껍질만 남긴 채 빠져나간 텅 빈 옥수수와 같은 식물성의 것들 외에도 이빨자국을 남긴 채 살점을 잃은 닭 바비큐, 살덩어리와 뼈가 뒤섞인 돼지 족발의 잔해와 같은 동물성의 음식들 그리고 질펀한 식음의 향연을 흔적으로 남긴 돼지주물럭 불판과 같은 사물과 같은 ‘동식물 혹은 사물에 남겨진 상처 흔적’으로부터 ‘인간의 폭력적 욕망’을 발견한다. 남기성이 작가 노트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그의 최근작은 ‘잉여의 음식물에 남겨진 흔적’을 추적하면서 풍요로운 문명의 시대가 낳은 ‘본능을 넘어선 인간 식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되묻는 작업이다: “먹는 것이 본능을 넘어 오락처럼 되어버린 시대가 되었다. 그 풍요의 이면에 가려져 있는 빈곤을 생각하며 우리가 살기 위해 먹는 것인가 하는 오래된 질문을 떠올려 본다. (...) 그 옛날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 그 피와 살과 비린내를 풍기던 이빨을 떠올려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본능적 욕망에 의해 매일 습관적으로 먹어야 하는 그 행위를 환기시켜 본다.”
이처럼 남기성은 ‘이빨자국이라는 상징적인 제명’을 ‘인간의 욕망이 촉발한 폐기와 잉여가 품은 폭력과 상처 흔적의 인덱스’로 풀이한다. 즉 음식물에 실제로 남긴 ‘먹은 흔적’과 연동하면서 인간의 폭력적 욕망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빨자국Series LA갈비#01. 2020




IV. 극적 사진으로 모색하는 뉴-바니타스  
남기성은 인간으로부터 버려진 잔여 혹은 잉여의 음식물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원론적으로 잔여 혹은 잉여의 세계는 제도, 규칙, 윤리가 요구되는 현실계에서 부산물, 찌꺼기와 같은 본체(本體)로부터 배제된 것들 혹은 버려진 것들이 만드는 세계이다. 잔여와 잉여의 세계는 ‘끝내 용도로 사용되지 못하고 남겨진 것이자 배제된 것’이라는 점에서 원래 목적으로부터 이탈한 무엇이다. 특히 그의 작업에서 이것은 식용의 목적으로부터 이탈하고 배제된 소외의 것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다. 
주모갈 것은 남기성의 작품은 잔여와 잉여의 음식물 자체를 이처럼 문화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면서도 사진 미학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실험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것을 ‘사진으로 모색하는 뉴-바니타스(New-Vanitas)’로 해설한다. 17세기의 네덜란드의 화가들이 천착했던 바니타스 정물화(Vanitas Still-life)가 해골, 뼛조각, 모래시계, 깃털 장식, 보석, 악기, 책, 거울, 꺼진 촛불, 과일과 꽃 등의 다양한 소재들을 등장시켜 유한한 인간 존재에 대한 교훈을 던지는 알레고리를 실천했던 것처럼, 남기성 역시 잔여와 잉여의 음식물을 통해서 인간 존재의 허망한 욕망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일정 부분 우리에게 알레고리적 교훈을 안기고 있기 때문이다.  
라틴어로부터 유래한 바니타스(Vanitas)가 ‘삶의 허무, 허영, 현세적 명예욕’이라는 의미를 다중적으로 함의하고 있듯이, 남기성의 사진 속 유한한 음식 잔해들 또한 한시적 인간 삶에 대해 교훈을 던지고 있다고 하겠다. ‘정물화’를 프랑스어로 ‘죽은 자연(nature morte)’이라 칭하듯이, 죽음이 예정된 유한 존재로서의 ‘정물’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은유라 할 것이다. 
남기성의 사진이 다른 점이 있다면, 바니타스 정물화가 죽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인생에 대한 비관적인 회의론을 화폭에 담았던 것과 달리, 그의 사진은 ‘남겨지고 버려진 잉여의 음식물과 같은 비루한 죽은 생명’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또 다른 생명적 존재’를 탐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식용의 목적으로 절단한 LA갈비의 절단면을 선명하게 포착한 사진 이미지는 마치 고고학으로 발굴한 구석기 시대의 주먹도끼나 유선형의 또 다른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하고, 갈비탕에서 건져 올린 날카롭게 절단된 갈비뼈는 모종의 생활 용기처럼 보이거나 동태탕에서 건져 올린 동태 등뼈 가시는 마치 고사리나 수풀의 형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뿐인가? 이로 베어 먹고 남겨진 알타리무 연작은 마치 보름달이 변화하는 양상처럼 보이거나 알맹이가 빠져나가고 껍질을 남긴 옥수수의 근접 사진은 마치 바닷속 부드러운 피부를 지닌 강장동물의 모습처럼 보이는 ‘낯선 효과’를 창출한다.    
남기성은 이러한 주검을 은유하는 잉여의 음식물로부터 ‘또 다른 생명 이미지’의 극적인 출현과 같은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위해서 다양한 연극적 장치를 고려한다. ‘칠흑처럼 어두운 배경, 역광을 통한 극적 조명, 접사(接寫) 방식의 촬영, 실제 크기를 확대한 인화’와 같은 방식이 그것이다. 특히 17세기 ‘바로크(baroque) 미술’에서 보이는 어두운 바탕 속 극적 조명 효과는 그의 사진 속 주검을 ‘특정할 수 없는 모호한 무엇’으로 만들면서도 마치 살아 있는 ‘역동적인 생명체’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남기성의 사진은 형식적으로 조명 장치를 통해 극적 효과를 노리는 메이킹 포토(making photo)를 구현하면서도, 살롱사진(Salon Picture)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픽토리얼리즘(Pictorialism)’에 더욱더 근접한다. 살롱사진이 유연한 회화적 효과의 예술 세계를 흉내 내는 차원의 사진이었다면, 남기성의 사진은 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알레고리가 품은 ‘역설의 미학’과 ‘극적 회화 효과’를 실천하는 포토리얼리즘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벤야민(W. Benjamin)에 따르면 알레고리란 건설과 파괴, 미몽과 각성, 실재와 허구처럼 ‘화해할 수 없는(혹은 화해하지 않는) 대립항 속에서 생겨난 예술 형식’이다. 남기성은 죽음의 실체로부터 삶을 지향하고 극적 회화 효과를 도모하는 재현적 사진 언어로부터 ‘다른(allos) 말하기(agoreuo)’를 지향하는 ‘알레고리아(allegoria)’를 실천한다. 가히 ‘극적 사진으로부터 모색하는 뉴 바니타스’라고 할 만하다. 
  

이빨자국Series 갈비탕 1인분#02. 2020




V. 에필로그 
대상을 카메라 앵글에 피사체로 가두어 빛의 효과를 혼성하는 사진 예술은 회화나 오늘날 설치, 미디어의 예술 양식보다 한계가 명징하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남기성이 실험하는 사진 작업은 바니타스 회화의 전통과 바로크 미술의 형식을 차용하면서도 현대적인 의미의 ‘픽토리얼리즘’을 실천하는 ‘뉴 바니타스’라고 평할 만하다. 잔여의 음식물로부터 인간 탐욕의 허상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메시지를 함유하면서도 형식적으로 하찮고 비루한 대상으로부터 미적 가치를 견인하는 그의 사진이 품은 리얼리티의 미학이 향후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


출전 /
김성호, 「‘이빨자국’ - 인덱스로서의 사물 흔적과 뉴-바니타스 미학」, 『남기성』, 
카탈로그 서문, 2022.
(남기성, 2022. 8. 23~8. 28, 수원미술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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