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영혼을 길어 올리는 뿌리 회화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이춘영의 작업은 그간 회화를 통해 자연의 생명성을 탐구하는 일에 진력해 왔다. 때론 씨앗 형상을 통해 식물/동물의 생명력을 함께 탐구하거나, 자연의 풍광 속 씨앗, 식물, 강물 그리고 최근의 뿌리에 대한 탐구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생명성을 드러내는 일에 천착해 왔다.
특히 최근작은 이전의 형상 재현(representation)이나 표현(expression)의 방식에서 실제 뿌리를 오브제로 사용하는 제시(presentation)의 방식을 결합함으로써 재현/표현/제시가 한 덩어리를 이룬 회화 탐구에 이르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변화의 지점은 무엇이며, 그녀의 최근 회화가 추구하는 근원적인 미학의 방향성은 어떠한 것인지 살펴본다.
II. 뿌리 회화 - 보이지 않은 곳에서 온 물질
이춘영은 자연의 생명성을 탐구하는 최근 작업에서, 식물 뿌리 형상을 흙으로 만들어 화면 위에 부착하거나 황토를 펴 바르는 등 실제 자연의 물질성을 형상화하는 방식으로 회화의 부조화를 실험해 왔다. 이러한 실험의 과정에서 작가가 만난 것은 닥나무 뿌리였다. 한지를 만드는 재료인 닥나무에서 뿌리가 버려지는 상황을 목도하고 영감을 받은 작가는 실제의 닥나무 뿌리를 화면 위에 올려붙이는 방식으로 이전에 시도되었던 회화의 부조화를 한층 더 깊게 천착해 들어간다. 이전의 부조적 회화가 흙과 미디엄으로 ‘의사(擬似) 질료화’를 도모했던 것이라고 한다면 최근의 그것은 닥나무 뿌리로 ‘실제 질료의 현현(顯現)’을 도모한 것이라고 하겠다.
뿌리는 식물이 씨앗으로부터 싹을 틔운 후 자라는 과정에서 줄기와 가지를 만들고 열매를 맺게 하는데 필수적인 영양분과 수분을 제공하는 모태(母胎)로서의 존재이다.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땅의 심층에 자리 잡은 채 중력과 토질에 순응하면서 자란다. 그것은 줄기와 잎의 생장을 지속시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어두움의 공간에 거하며 끊임없이 물과 영양분을 찾아 그 더듬이를 생육시킨다.
뿌리가 자리한 공간을 생각해 보라. 그 곳은 자유롭지 못하다. 헤쳐 나가야 할 땅속의 자갈 등은 물론이며 힘겹게 돌아가야 할 바위 같은 장애물을 만나기도 하고 더 이상 뻗어나갈 수 없는 낭떠러지의 끝에 도달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뿌리의 존재적 위상은 측은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는 뿌리에 대한 동정심을 뿌리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뿌리는 땅 밑의 어두운 공간을 ‘밝음보다 못한 곳’이라 여기지 않고 자연의 질서에 묵묵히 순응하며 넉넉한 자연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춘영은 이러한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했던 닥나무 뿌리를 캔버스 위 ‘보이는 곳’으로, 그리고 ‘자연의 공간’에서 ‘예술의 공간’으로 전이(轉移)를 감행하는 ‘뿌리 회화’를 실험한다. 주지하듯이, 한지의 재료는 닥나무 줄기를 증기로 찐 다음 껍질을 벗긴 백피(白皮)와 표피층에 근접한 인피(靭皮) 섬유만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뿌리는 한지 제작에 있어 마땅히 버려질 존재이다. 가히 일상의 영역에서 필연적으로 ‘버려진 존재’가 된 닥나무 뿌리를 이춘영은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와 자기 자신의 회화 안에 과감하게 편입시킨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춘영 작품에 오브제로 사용된 닥나무 뿌리는 비유적으로 말해 ‘보이지 않은 곳’에서 온 ‘예술적 물질’ 혹은 ‘예술적 질료’라고 칭할 만하다. 아울러 닥나무 뿌리를 장소 전이하는 이춘영의 작품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뿌리 회화’라고 부를 수 있겠다.
III. 뿌리 회화 - 물질적 이미지와 오브제 색면 추상
이춘영의 ‘뿌리 회화’는 새로운 실험에 나선다. 이전 작업이 열매 속 씨앗이 발아해 식물을 키워내는 초현실주의적 형태, 씨앗이 품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생명 모태로서의 형태, 식물이 동물성과 혼성하면서 강력하게 등장하는 자연 생명력의 형상과 같은 ‘형태적 이미지 표현’에 집중해 왔다면, 최근 작업은 실제 뿌리를 통한 ‘물질적 이미지의 제시’라고 하는 방식으로 보다 심층적으로 생명의 근원에 대해 탐구하는 방식으로 변모하고 있다.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식으로 말하면 이춘영의 최근작은 ‘형태적 이미지’(image formelle)를 벗고 형태 내면의 심층으로 잠입하는 ‘물질적 이미지’(image matérielle)를 실험하는 것이라 하겠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대상의 표면에 집착하는 ‘형태적 상상력’(imagination formelle)이란 얼음의 외형처럼 고정화된 것이지만, 대상의 표면과 내면이 함께 침투하는 ‘물질적 상상력’(imagination matérielle)이란 얼음, 물, 수증기처럼 끝없이 변화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춘영의 최근 작업은 ‘형태적 상상력’을 통해 ‘형태적 이미지’를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자연을 탐구하던 방향으로부터 ‘물질적 상상력’을 통해 ‘물질적 이미지’의 본성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전이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그녀의 작업에서, 이전의 형태적 상상력에 의한 이미지가 주로 형태 외부로 똬리를 틀고 자라는 것이라고 한다면, 최근의 물질적 상상력에 의한 이미지는 물질 내부로 깊이 잠입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관점은 그녀의 작업이 아주 우연한 기회에 닥나무 뿌리를 맞닥뜨리는 경험을 한 후, 그간 형태적 이미지의 변주를 통해 '형상 미술(figurative painting)'의 다양성을 캔버스 표면 위에서 실험하는 것에서 자연스럽게 탈주하고 물질적 이미지의 변주를 통해 '추상 미술(abstract painting)'의 단순하지만 깊은 내면으로 파고드는 결과를 낳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러한 변모는 그녀의 회화를 추상적 영역으로 이동하게 만든다. 오늘날 추상과 구상의 구분이 모호해진 만큼, 이춘영 작업의 최근의 변화를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변화’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그녀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있어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이춘영은 작가 노트에서 최근의 변화에 직면한 심정을 다음처럼 토로한 바 있다: “삶이 어느 순간 꼬여가는 것 같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이런 게 아닌데, 이렇게 살고자 한 게 아닌데...... 그럴 때면 나의 삶 어느 지점에서 시작된 엉킴인가 가만 가만 들여다본다. 나를 지탱하게 하는 것은 무엇을 향한 욕망인가.”
어찌 보면, 이춘영 작업에서의 추상적 양상으로의 변화는 ‘혼돈과 불안을 낳은 욕망 그것에 대한 성찰이 담긴 변화의 결과’인 셈이다. 빌헬름 보링거(Welhelm Woringer)는 그의 저작 ⌜추상과 감정이입⌟에서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에서 불안을 느끼고 극도의 정신주의로 몰입할 때 추상적 충동이 발생한다’고 고찰한 바 있다. 또한 보링거가 미국식 추상표현주의 실체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 제창했던 추상과 표현주의와의 연계성을 상기해 볼 때, 이춘영의 작품에서 등장한 ‘모노크롬 페인팅(monochrome painting)’, ‘색면 추상’, 혹은 오늘날 회자되는 ‘포스트-단색화’의 요소는 '추상적 정신성'이 '추상적 심리주의'로 발현된 것으로 풀이해 볼 수 있겠다.
실제의 닥나무라고 하는 ‘물질적 이미지’와 ‘색면 추상의 바탕’이 만난 이춘영의 새로운 작업은 가히 ‘오브제 색면 추상’이라고 할 만하다. 표피적으로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양자가 품은 심연의 공유 본성으로 인해 양자의 만남은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니다. 그녀가 작가 노트에서 “뿌리는 생명의 근원이자 모든 현상의 본질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듯이, 추상 역시 회화의 근원적 성찰이자 본질적 면모이기 때문이다. 즉 뿌리 오브제와 드리핑 기법을 통한 추상이 ‘무엇의 본질’이라는 공유 지대에서 작가의 추상적 심리주의라고 할 만한 욕망의 밑바닥 혹은 근원적 심연과 닮은꼴을 한 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IV. 뿌리 추상 - 생명력을 견인하는 물질의 자발성
이춘영의 작업이 품은 주제는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탐구’로 일관되지만, 조형적 변화는 그야말로 총체적인 새로움과 맞닥뜨린다.
형태적 이미지에서 물질적 이미지로의 변모, 형상 회화에서 오브제 색면 추상으로의 변모뿐만 아니라, 기존의 표현주의적인 붓질을 통한 ‘이젤 페인팅’은 이제 안료와 미디엄을 섞어 화면 위에 물감을 직접 붓는 ‘드리핑 페인팅(dripping painting)’으로 변모했다. 중력에 저항하듯 꼿꼿하게 서 있던 이젤 페인팅이 중력에 순응하는 뿌리의 본성을 닮아 드리핑 페인팅으로 중력 위에 드러누운 셈이다.
닥나무 뿌리가 화면에 단독으로 혹은 쌍을 이루며 배치된 캔버스 위에 안료와 수용성 미디엄을 혼합해 만든 질퍽한 점도를 지닌 물감을 붓는 행위는 이전의 형상을 하나둘 만들어가는 과정을 전복하고 레이어가 쌓이는 과정으로 전이된다. 때로는 얇은 물감층을 만들어 반복적으로 레이어를 쌓아 올리거나 때로는 캔버스가 출렁일 정도로 많은 양의 물감을 붓고 농도가 뒤섞이는 미세한 마블링(marbling) 효과를 시도하는 드리핑은 ‘물감의 자발성’을 이끈다.
'물감의 자발성'이라니?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물감이 마르고 굳는 동안 형성되는 ‘자율적인 물감의 운동성’과 같은 것이다. 건조되는 물감층을 유동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운동성은 투명 수채화의 맑은 투영 효과와 더불어 불투명 수채화의 탁한 중첩의 효과가 겹쳐지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형성된다. 흥미롭게도, 작가에 의해 조정된 타율적인 물감의 움직임과 함께 물감 농도, 중력과 같은 동인(動因)에 의해서 자율적인 물감의 움직임 또한 우연적으로 형성된다. 물질의 자발성이 만드는 이러한 우연성은 그녀의 작품을 생명력 가득한 화면으로 만들어낸다. 물감을 붓고, 캔버스를 기울여 다시 흘리고, 젖은 상태에서 물감의 흐름을 반복해 만들면서 지난했던 노동의 흔적을 고스란히 쌓아 올리는 것이다.
즉 이춘영은 화면 위에 먼저 부은 물감이 마른 후에 그 위에 투명하게 겹쳐 올리는 글래이징(glazing) 기법은 물론이고, 캔버스를 적신 물감이 마르기 전에 이리저리 캔버스를 움직여 물감의 흐름을 만들면서 작업하는 웨트 온 웨트(wet-on-wet) 기법을 병행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드러내기를 한편으로는 감추기를 실행한다. 그것은 마치 동양 수묵의 적묵법(積墨法)과 더불어 발묵법(潑墨法) 혹은 파묵법(破墨法)을 병행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드러낸다. 여기에 물감이 마른 후 최종적으로 화면 위에 형성되는 ‘투명한 피막(被膜)’과 같은 코팅 효과는 화면 위에서 쟁투를 벌였던 물감의 운동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투명한 피막은 레이어 만들기와 마블링 효과가 순차적으로 혹은 동시에 시도되면서 물감의 자발성을 이끌었던 ‘드러내기’와 ‘감추기’를 변주한 미묘한 흔적을 마치 유리처럼 맑게 투영해 낸다.
이러한 이중의 기법이 교차하는 그녀의 화면은 마치 축축하게 습기를 먹은 듯 되살아나는 푸르른 하늘 또는 노을 진 붉은 하늘 풍경을 만들거나 물감비(色雨)가 내려 세상을 씻어 내린 듯한 녹색의 자연 풍경을 선보이기도 한다. 여러 색으로 된 그것은 분명 자연의 구체적 이미지가 아님에도 닥나무 뿌리가 제시하는 구체적 물질성으로 인해, 자연을 상정하는 ‘하나의 이미지 덩어리’로 현현하면서 ‘자연의 본성적 이미지’를 넉넉하게 구축한다. 가히 ‘생명력을 견인하는 물질의 자발성’이라고 할 만하다.
V. 에필로그
이춘영은 자연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고 씨앗, 뿌리 형상의 변주를 통해 자연에 대한 생명력을 탐구하는 가운데 최근 닥나무 뿌리를 캔버스 화면에 콜라주 형식으로 부조화하고 캔버스 전체를 색면화하는 작업에 천착한다. 자연의 강력한 상징이자 기호로 작동하는 닥나무 뿌리를 자신의 예술 세계로 전이시켜 부조화한 그녀의 회화는 땅속의 보이지 않은 곳으로부터 온 물질로부터 ‘형태적 이미지’와 ‘물질적 이미지’를 혼성한다. 일명 ‘뿌리 회화’라고 칭할 만한 그녀의 최근작은 ‘물질적 이미지’와 ‘오브제 색면 추상’이 오묘하게 맞부딪힌다.
작품을 보라. 이춘영의 최근작이 저마다 다른 색상으로 미묘한 색의 울림 효과를 내는 것은 여러 층의 물감이 겹을 이루어 밀집된 부분과 흐릿한 잉여의 부분이 위로 쌓이는 것만이 아니라 캔버스의 올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는 물감의 배면으로의 깊은 침투가 한데 어우러진 까닭이다. 마치 뿌리가 땅 속 깊은 곳에서 수분과 영양분을 빨아 끌어 올리듯이, 그녀의 회화는 캔버스 배면의 심연의 세계로 물감을 침투시키고 그 속에서 색의 울림을 끌어 올린다.
드러내기/감추기의 물감 운용이 만드는 효과는 닥나무 뿌리가 콜라주 기법으로 부착된 부조적 지대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닥나무 뿌리가 외형적으로 강렬한 ‘형태적 이미지’를 품고 있지만 자신의 몸 안으로 물감을 흠뻑 뒤덮은 캔버스 표면과는 달리 닥나무 뿌리는 굴곡진 몸체 위에서 흡수의 정도를 달리한 까닭에 주변에 물감을 엷게 올린 채 ‘물질적 이미지’를 강하게 드러낸다. 희미한 영역에서 아스라하게 퍼지는 ‘빛과 색’의 기운이 자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닥나무 뿌리 주변의 이미지는 오히려 형(形)이기보다는 광(光)으로 드러나는 셈이다.
“우연히 내게로 온 페인팅 방식 - 캔버스에 물감을 붓기, 심상(심연)의 깊은 바닥으로부터, 뜨거운 욕망의 불길 속으로부터 걸러 나온 어떠한 응어리. 이것과 물성의 조화를 연구해야만 했다.”
이춘영의 작가 노트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녀의 최근작은 안료와 미디엄의 혼성 그리고 닥나무 뿌리의 만남 가운데 시작된 것으로, 이질적 물성의 조화를 도모하는 ‘물질적 상상력’으로부터 잉태한 것이라고 하겠다. 뿌리 혹은 추상의 깊은 심연에서 길어 올리는 상상과 어떠한 응어리, 그것은 물질과 맞닥뜨린 한 화가가 내면의 심연으로부터 견인하는 예술을 향한 영혼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한 만큼, 결과보다는 ‘포이에티크(poïétique)라고 하는 과정으로서의 창작’ 자체가 더욱 주요해진 그녀의 작업이 향할 미래적 포트폴리오가 자못 궁금해진다.
이 글의 제목 ‘생명의 영혼을 길어 올리는 뿌리 회화’처럼 향후 그녀의 작업이 이미지와 물질의 관계라는 회화의 근원적 고민에 집중하면서도 동시에 많은 관객에게 ‘예술과 자연 생명의 영혼’에 관한 따스한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하길 기대한다. ●
김성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