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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최윤정 / 관동 헤테로토피아 – 회화 속 현실화된 유토피아

김성호




관동 헤테로토피아 – 회화 속 현실화된 유토피아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완벽한 이상향이란 없다. 그것은 현실 속에 거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유토피아(Utopie)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이 되고 숭고의 가치로 전이된다. 작가 최윤정은 이러한 유토피아의 세계관을 회화의 표면 위에 담는다. 환영을 창출하는 마술적 효과를 담는 언어가 재현이라고 할 때, 재현에 기초한 최윤정의 평평한 화면은 이러한 유토피아를 담기에 제격이다. 유념할 것은 그녀의 유토피아가 ‘관동산수(關東山水)’, ‘관동유람(關東遊覽)’, ‘관동유랑(關東流浪)’ 등 연작명에서 드러나듯이 대관령 동쪽 지역인 ‘관동’의 현실적 풍경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그녀의 작업이 ‘현실의 지평에 기초한 유토피아’라는 점에서 필자는 최윤정의 최근작을 푸코(M. Foucault)가 언급했던 ‘현실화된 유토피아’라는 의미의 ‘헤테로피아(hétérotopies)’로 읽고자 한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고 분석해 보자.





II. 관동산수 - 현실의 지평에서 포착한 마인드스케이프  

오늘날 회화의 언어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투시원근법, 음영법 등을 통해 현실 재현을 최고의 기술로 간주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는 오늘날 더 이상의 의미를 읽고 한편으로는 하이퍼 리얼리즘의 극단으로 질주하거나 또 한편으로는 반대의 방향인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언어로 달려가면서 회화의 진폭을 넓혀 온 것이 사실이다. 최윤정의 재현에 기초한 회화가 여전히 유의미한 까닭은 ‘현실 반영’과 ‘현실 변주’를 동시에 꾀하면서 유토피아와 현실의 간극을 좁히고자 부단히 실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자. 최윤정의 회화는 관동을 대상화한 진경산수(眞景山水)의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하되, 파스텔 톤의 화사한 색감으로 현실적 풍경을 환상적으로 변주한다. 또는 야생의 생태를 담되, 약육강식의 질서를 탈주하는 야수와 초식 동물의 공존을 담은 유토피아의 세계를 펼쳐 보이기도 한다. 그뿐인가? 재현의 규칙을 따르되, 원근법, 음영법의 기술을 배반하는 색의 변주를 도모하거나 그림자 없는 형상을 전면에 배치하기도 한다. 또는 재현 형상을 드러내되 동시에 반짝이는 빛과 같은 비재현 도상을 상징처럼 맞물려 화면에 나란히 병치하기도 한다. 


이처럼 최윤정의 작업에는 현실적 지평에서 시작했으되 그것을 유토피아 세계관과 혼합하는 다양한 회화 장치와 실험이 공존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고향인 강릉을 중심으로 관동 지역을 세세히 들여다보고 그것을 시각화의 장으로 끌고 나오는데서 기인한다. 관동 풍경은 그동안 그녀에게 보이지 않던 것들이었으나 고향인 강릉에 내려와서 작업실이 있는 고성을 오가면서 비로소 다시 보게 된 것들이다. 그것은 마치 존버거(John Berger)의 ‘보기의 방식’이 일깨우는 시지각 담론을 확증하려는 듯이 보인다. 즉 본다는 것은 대상의 선택이고 그 선택은 결국 한 주체의 사물을 지각하는 태도를 구체화한다는 것 말이다.

 

그녀의 작업은 차창 밖으로 맞닥뜨리거나 차를 멈추고 오르내린 산속에서 직접 맞닥뜨린 관동 풍경을 화폭에 가져왔다는 점에서 실경산수(實景山水)의 전통을 많은 부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정선이 실경산수에 남종화 기법을 접목해서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창출했듯이 최윤정 또한 실경을 캔버스 위에 유화로 옮기되, 선묘로 나뉜 형상의 단면을 자신이 해석한 색면으로 채워나가면서 실경산수의 전통을 재해석한 자신만의 풍경을 만든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녀가 자신의 ‘캔버스 유화’ 연작에 관동풍경 대신 관동산수로 이름 지은 까닭을 이해할 법하다. 


최윤정의 관동산수 연작은 관동의 자연환경에 자기의 마음을 주고 마음을 빼앗긴 결과물이다. 마음을 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던가? 이러한 차원에서 최윤정에게 있어 관동산수 연작은 그녀가 떠났던 고향에 되돌아와 그곳에 마음을 주면서 비로소 열리게 된 풍경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그녀의 작업을 마음이 기억하고 있던 이미지를 캔버스에 옮겼다는 점에서 베르그송(H. Bergson)이 언급하는 기억-이미지(Souvenir-Image)이면서 동시에 현실적 지평에서 마음으로 그린 풍경이라는 점에서 ‘현실 지평으로 포착한 마인드스케이프(mind scape)’라고 부를 만하다. 그것은 눈으로 보는 풍경(landscape) 위에 마음으로 보는 풍경을 덧입힌 무엇이다.


조선시대 정선의 재해석만큼이나 최윤정 또한 관동 실경에 마음을 주고 마음을 빼앗긴 채 자신의 작업에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강릉의 경포대를 위시한 관동팔경과 대관령, 진부령, 한계령, 미시령과 같은 고갯길을 아우르는 관동 실경을 대면했던 자신의 기억과 마음의 상태를 캔버스에 전이한 결과는 사실적 화풍과는 다른 환상적인 화면을 구축한다. 실경에 기초한 형상과 대비되게 비현실적인 화려한 색상, 보색 대비가 맞물리는 구성, 그러데이션으로 표현한 평면, 기하학적 패턴, 그리고 반짝이는 빛을 표현한 마름모꼴의 디자인적 도상 등은 최윤정의 관동산수를 현실에 기초하되 비현실적인 풍경으로 유감없이 전환한다. 게다가 반원의 무지개와 곡선의 산등성이 그리고 동물들의 한쪽 눈을 가린 얼굴과 더불어 그들의 중성성의 표정은 또 어떠한가? 


작품에서 가려진 눈을 통한 장애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비가시적 본질에 대한 메시지 그리고 동물들의 중성성(neutralité) 혹은 중립성의 표정과 같은 특징은 현실이면서 동시에 비현실이거나 혹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어디에 그녀의 작품을 위치하게 만든다. 또는 그녀의 관동산수는 현실의 지평에서 출발하고 작가가 그리는 상상의 세계에서 비현실의 풍경으로 서식하는 존재라고 해설할 수 있겠다.   





II. 관동유람 - 현실화된 유토피아, 헤테로토피아 유람 

최윤정은 관동팔경을 비롯한 다양한 풍경을 회화적 설치로 모은 ‘관동유람’ 연작을 선보인다. 이 연작은 관동산수에서 선보였던 관동의 풍경들과 함께 야생의 동물들을 입간판 모양의 입체로 일으켜 세워 만든 동물 군상이다. 이 연작에는 호랑이, 사자와 같은 육식의 맹수뿐 아니라 코끼리, 사슴, 노루 등 초식동물이 어울려 한 자리에 모여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기독교 성서가 그리는 천국의 세계처럼 약육강식이 사라진 모습이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이사야 65장 25절) 


이 연작에는 더러는 장난감 열차가 지나는 기차 철로가 굽이치게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동식물과 풍경 그리고 인간이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 최윤정이 관동유람으로 명명한 이러한 현실/비현실이 혼재된 설치 풍경이 만든  세계를 우리는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최윤정의 작업에서, 현실/비현실의 접점은 어떤 면에서는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장편 소설 제목으로부터 기인하는 ‘낙원의 이편(the side)’과 ‘낙원의 저편(the other side)’ 사이에 자리한 접점의 공간을 연상케 한다. 먼저 ‘낙원의 저편’은 낙원이 실현되는 공간이다. 천국, 극락정토, 무릉도원, 유토피아의 공간이다. 반면 ‘낙원의 이편’은 비현실의 낙원을 꿈꾸지만, 결코 도달하지 못한 채 좌초(坐礁)하는 중도(中途)의 세계이다. 이곳은 불교에서 생사의 고통과 괴로움이 가득한 곳으로 지칭되는 이 땅의 현실계, 즉 차안(此岸)이자, 사바세계(娑婆世界)이다. 그런 면에서 관동의 현실계의 지평에서 유토피아를 탐구하는 최윤정의 작업은 현실계라는 ‘낙원의 이편’에서 이상계인 ‘낙원의 저편’을 바라보면서 시각화한 ‘유토피아 지향에 대한 염원’이라고 할 것이다. 


최윤정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보다 적절한 비유가 있다면, 그것은 푸코가 언급했던 헤테로토피아(Hétéopies)일 것이다. 그것은 다른(hétéros)과 장소(topos)가 결합한 용어로 ‘현실화된 유토피아, 혹은 국지화된 유토피아(utopies localisées)’로 풀이되는 공간이다. 그것은 현실의 지평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모든 실재하는 장소의 바깥에 있는 ‘또 다른 공간’ 혹은 ‘반공간(contre-espace)’으로 표상된다. 푸코가 낙원을 구현한 휴양촌, 과거의 지식의 보고인 도서관 등을 헤테로토피아의 구체적인 예로 거론하기는 했지만, 푸코조차 자신이 제창한 헤테로토피아의 개념을 명료하게 정의하지는 못한 까닭에 후학들로부터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낳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해설되는 헤테로토피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겹쳐진 복수의 공간, 전통적 시간과의 단절, 열림과 닫힘의 체계 등’, 


최윤정의 작업에서는 이러한 헤테로토피아적 특성이 어렵지 않게 읽힌다. 실재하는 관동풍경과 시원(始原)의 자연에서 불가능해 보일 만큼의 여러 동물의 평화적 공존의 풍경이 상호 겹친 현실/비현실의 복수의 공간, 역사적이고 순차적인 시간을 탈주하고 비선형적인 상상의 내러티브가 운위되는 시간 단절, 그리고 우주로 열리는 빛나는 풍경과 현실의 지평에 직립한 채 닫히는 풍경이 병치된 체계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중력에 이끌린 채 현실화된 유토피아의 위상을 선보이는 헤테로토피아의 세계는 이러한 공간의 재배치와 균열을 통해 새로운 상상의 공간으로 열리고 닫힌다. 이처럼 평면의 확장과 더불어 서양화적 재료와 동양화적 정신을 한데 어우러지게 한 그녀의 설치 작품들은 가히 ‘관동 헤테로피아’라고 불러봄 직하다. 

 





III. 관동유랑 - 공존을 향한 명상과 치유의 예술

최윤정의 ‘관동산수 혹은 관동풍경’은 서프보드와 같은 유기적인 형상의 셰이프드 캔버스와 4~5단의 병풍 모양으로 자리한 복수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 ‘관동유람’의 정서를 넘어 자유로운 유목의 여정을 연상시키는 ‘관동유랑’의 메시지를 한꺼번에 전한다. ‘유람’과 ‘유랑’에 있어 둘 사이의 큰 차이는 없지만, 유랑이 좀 더 자유로운 노마드적 행보를 지향한다는 점 정도가 차이라 할 것이다. 


그녀의 작품이 지금까지 현실/비현실의 경계를 탐구하는 헤테로토피아적 세계관에 집중해 왔다면, 이번 전시는 이러한 세계관 안에서 현실 속 난제에 대한 치유와 정화를 모색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예술가로서의 노마드적 행보는 구속 없는 자유로운 여정을 상정한다. 마치 그녀의 그림 속 그림자 없는 존재들처럼 말이다. 그림자가 없는 세계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은 비현실적 세계를 표상한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가 보편적 원리가 작동하는 자연을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으로 보았듯이, 최윤정이 만든 그림자 없는 세계는 현실에 구속되지 않는 능산적 세계라고 할 수 있겠다. 마치 동양의 산수화가 그림자 없는 인물을 그려 넣어 인간의 보편적 존재를 강조하는 것처럼, 그녀는 그림자 없는 동물 군상을 통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보편적 존재로서의 생명성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또한 그녀의 전 작업에 드러난 고명도, 저채도의 파스텔 색조는 어떠한가? 마일드 핑크(mild pink) 혹은 라이트 핑크(light pink)와 같은 따스한 색조가 화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색상 배열은 전체 작품을 흰색이 섞여 혼탁한 가운데서도 빛을 닮아있는 온화한 분위기로 가득 채우는 기능을 한다. 투명한 색을 겹겹이 올려 부드러운 파스텔 색조를 만든 마일드 핑크 계열의 색상은 그녀의 작품을 온화한 판타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가히 ‘노마딕(nomadic) 마일드 핑크’가 만든 신비주의적 세계라 할 것이다. 잔잔한 수평과 수직의 구도, 안정감 있는 동세 등은 그녀의 그림을 그림자가 없음에도 위태로운 무엇으로 이끌기보다 몽롱한 초현실적, 비현실적 풍경을 통해서 우리의 각박한 현실 속에 도드라진 복잡다기하고 첨예한 문제들을 잠시나마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작가 최윤정은 말한다. 


'나에게 예술은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에 대해 명상하는 일입니다.'


그녀는 작가 노트의 진술처럼, 비현실/현실을 잇는 헤테로토피아 또는 양극단을 만나게 하는 부드러운 공존의 세계관을 함유한 '관동산수', '관동유람', '관동유랑' 연작을 통해 스스로 명상의 시간을 자청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작업을 통해서 오늘날 포스트 팬데믹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관람자에게 공존과 위로 그리고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은 덤이다. 





IV. 에필로그 

최윤정의 이번 개인전 ‘관동유랑’은 이전의 평면작인 ‘관동산수’와 설치작인 ‘관동유람’과 같은 연작을 통합하는 작업으로 구성된다. 관동이라는 지역의 현실의 지평에 기초한 채, 유토피아와 같은 현실 너머의 공간 혹은 헤테로피아와 같은 비현실/현실이 겹쳐진 공간을 탐구하는 그녀의 작업은 자가 치유를 위한 명상을 거쳐 많은 관람객에게 공존을 향한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녀는 관동풍경을 동양 전통의 관동산수로 해석하여 바라보면서 현실의 지평에서 포착한 마인드스케이프의 세계를 선보인다. 수평의 안정적 구조 위에 공존, 상생의 동물 군상과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색상을 통해서 현실에 기초하되 온화한 판타지적 세계를 지향하는 또 다른 공간을 진지하게 탐구한다. 그것은 작가에게 자아 성찰을 통한 명상의 시간을 그리고 관람자에게는 희망을 꿈꾸는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를 전한다. ‘관동 헤테로토피아’로 명명하기에 족한 최윤정의 작업이 향후 더욱더 다양한 조형 언어를 통해서 또 다른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하기를 기대한다. ●

 






출전/

김성호,「관동 헤테로토피아 – 회화 속 현실화된 유토피아」, 『최윤정』, 카탈로그 서문, 이상원미술관, 2022. 

(최윤정展, 2022. 11. 01~2023. 01. 29, 이상원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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