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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히로유키 하마다(Hiroyuki Hamada) / 무의식에서 길어 올린 원형 추상

김성호

무의식에서 길어 올린 원형 추상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한국에서 처음 개최된 히로유키 하마다(Hiroyuki Hamada, b. 1968)의 전시는 국내 미술인에게 비구상과 추상의 회화, 조각 유형을 통해 구조적 미, 흑과 백의 미학 등 예술 내부의 담론으로 깊이 천착해 들어간 내적 추상 또는 원형 추상의 세계를 선보인다. 그의 작업은 피상적으로 동시대 미술이 교조적(敎條的)이라는 이유로 폐기하려고 시도했던 모더니즘 미술의 구조적 조형을 지닌 추상과 얼추 맞물려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시각예술의 원형뿐 아니라 조형예술의 경계를 확장하는 다양한 예술 언어에 관한 깊은 성찰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II. 무의식에서 온 내적 추상 

하마다의 작업은 비구상 혹은 추상의 외형을 지니고 있다. 화면을 격자형으로 분할한 평면적인 조각, 모서리가 둥그런 형태를 띠고 있는 유기적 형상의 부조, 때론 사각과 타원이 결합하거나 함몰과 돌출이 미묘하게 얽혀있는 회화와 부조는 이러한 우리의 규정을 쉽게 용인하게 만든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Untitled Painting 022〉(2016)에서 동물 형상을 선보인 만큼, 그의 모든 작업을 비구상 혹은 추상으로만 규정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형적으로는 뚜렷해 보이는 그의 추상, 비구상적 조형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그것은 혹자에게는 막 껍질을 벗고 나오려는 듯한 애벌레, 반이 잘린 면을 보이는 사과, 초원에 자라는 나무, 알 수 없는 동물과 같은 자연으로부터 온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몽골 텐트 같은 이동형 건축적 구조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고깔모자, 조명등, 이불장 위에 접어놓은 이불, 손잡이와 부챗살이 맞물린 손부채와 같은 사물의 형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양자는 자연 혹은 사물을 닮았음에도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특정할 수 없는 모호하고도 기묘한 형상 때문에 구체적인 의미 규정에 있어서 미끄러짐을 지속한다. 판단할 수 없는 기묘한 형상은 역설적으로, 하마다의 조형 언어를 풍부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관자에 따라 달리 보이는 하마다의 작품은 변화, 변신이 가능한 존재로 자리하거나 특정 형상으로 현실화되기 이전의 잠재태(潛在態)로서 기능한다. 


하마다의 작품을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무의식의 심층 속에서 펼쳐지는 ‘잠재된 기호’의 운동이라고 할만하다.1) 


 달리 말해 그것은 언어화되지 않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체가 펼치는 변화의 운동이라고 풀이된다. 프로이트에게 의식의 세계란 곧 언어의 세계인 반면에, 무의식의 세계는 기호(sign)의 세계인 까닭이다. 기호의 세계는 지표(index)처럼 무엇을 가리키거나, 도상(icon)처럼 상사성(相似性)의 닮은꼴을 열거나, 상징(symbol)처럼 본질에 육박하는 광폭의 대응 관계를 열면서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가 분리되지 않는 모호한 의미의 이미지 덩어리로 뜀박질한다. 


하마다의 작업에서 ‘모호한 의미의 이미지 덩어리’는 무의식의 세계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만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 혹은 사물을 닮은 형상들은 무엇이라 특정할 수 없는 모호한 의미의 이미지 덩어리로 기표와 기의로 분절되지 않는/할 수 없는 무의식 세계의 심층에 자리한 비언어적 생산물로 표상된다. 기표와 기의의 덩어리 결합체 혹은 기의 자체가 탈각된 기표로 표상되는 이것은 감탄사와 같은 의성어이거나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소음과 같은 소리 이미지, 혹은 분절되지 않는/못하는 비언어로 드러난다. 이 세계에는 ‘나무’ 혹은 ‘애벌레’라는 기의로 특정하면 이내 나무 혹은 애벌레 이길 거부하고 미끄러짐이 작동하는 불구의 기표만이 작동한다. 하마다의 ‘형상 아닌 형상’은 가히 무의식의 세계에서 온 내적 추상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III. 공동체의 기억을 일깨우는 원형 추상 

하마다의 작업에서 ‘무의식에서 기인한 내적 추상’이란 분명 그의 것이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공동체의 무의식으로부터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아래 작가 노트를 보자. 


“인간은 하나의 종(種)처럼 사회적인 동물이다. 우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공동체를 형성한다. 각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 또는 그 안에 속하는 개개인과 복잡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다른 이들의 경험의 일부가 되고, 미지의 누군가의 심장에서 계속해서 공명한다.”


우리의 논의인 ‘공동체의 무의식에서 기인한 내적 추상’이란 분석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의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이 일깨우는 ‘원형(archetype)’이라는 개념과 맞물린다. 상기한 하마다의 작가 노트에서 언급된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 혹은 개개인과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형성하는 공명’이란 굳이 언어화하지 않아도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상태인 집단 무의식이 성취하는 공유적 인식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집단 무의식이 야기하는 원형이란 융의 논의에 따르면, 옛 선조들의 생활에서 반복되던 경험 형태들의 심리적 잔존물로서, 문학 작품을 비롯하여 신화, 종교, 꿈 등에 등장하는 공통의 원초적 심상(primordial images)이다.2) 


 이러한 원형은 무수한 문학, 예술 작품 속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서술 구조나 인물 유형 혹은 심상으로 드러난다. 즉 다양한 문화 현상 속에 공통적으로 내재한 동질성 혹은 유사성의 구조이자 심상이라는 원형(또는 원형상)은 일련의 보편적이고 원시적이며 근원적인 구조들을 반영한다. 융의 집단 무의식이 야기한 원형이란 남성이 지닌 여성성이라는 ‘아니마(anima)’와 여성이 지닌 남성성이라는 ‘아니무스(animus)'와 같은 대립적 속성의 원형 외에도 이성적인 본성을 가진 개별적인 인격 존재자로서의 ‘페르소나(persona)’, 자아를 보완하는 작용을 지닌 원형으로서의 ‘그림자’와 같은 다양한 원형이 의식 속 유일한 원형인 ‘자아’와 만난다. 3) 


하마다가 작가 노트에서 언급하는 ‘공동체와 개인 사이의 공명’이란 융의 집단 무의식이 견인하는 원형을 만나는 작가 하마다의 모습을 우리에게 떠올리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를 대면하고 있는 예술가 개인인 하마다가 집단 무의식에서 추출하는 원형을 통해 관객들과 소통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미지의 차원에서 하마다가 공동체 혹은 집단 무의식으로부터 추출하는 원형이란 어떠한 이미지일까? 융이 이미 땅, 불, 하늘, 물, 원, 길과 같은 일정한 패턴 구조의 원형을 언급한 바 있듯이, 4)  하마다의 작업 속에서 발견되는 원형 혹은 원형상이란 가장 기본적인 원과 직선 사이에서 발견된다. 직선인 듯한 곡선과 곡선인 듯한 직선이 주를 이룬 캔버스 속 형상의 실루엣과 조각의 몸체, 그리고 모듈화된 개별체들이 모여서 이룬 형상과 같은 이미지는 융이 언급하는 ‘집단 무의식 속 원형’ 그리고 하마다가 언급하는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 이루어지는 공명’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하마다의 기묘한 비구상 혹은 추상 작업을 공동체 기억을 일깨우는 원형(적) 추상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IV. 21세기 다원화 추상과 경계의 범주 

하마다가 작가 노트에서 언급하는 ‘공동체’는 어디에 있는가? 도쿄에서 태어나 18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그의 삶의 맥락을 참조할 때, 뉴욕 이스트 햄프턴(East Hampton)을 기반으로 글로벌 지평을 넓히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도, 일본과 미국이 그의 예술적 토양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가 형성하고 있는 네트워크로서의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관건은 그가 21세기 다원주의 미술의 시대에 천착하고 있는 비구상 혹은 추상 미술의 세계가 과연 무엇인지를 검토하는 일이다. 생각해 보자. 서구에서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예술을 매체의 특성으로 결정되는 변별의 기준을 만들고, 이것을 준수하는 추상표현주의 경향의 미술을 '비대중적 아방가르드(non-popular avant-garde)' 또는 ‘좋은 미술’로 지칭했던 1950년대만 하더라도, 추상미술은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그렇지만 아서 단토(Arthur Danto)가 앤디 워홀(Andy Warhol)의 1964년 개인전을 기점으로 ‘예술 종말’을 선언한 1980년대 이후의 다원주의 미술의 시대에 추상 미술은 일견 서구에서도 동력을 잃은 듯이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마다가 20세기의 산물로 간주해 온 추상 회화에 여전히 천착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하마다의 비구상 혹은 추상의 언어는 직간접적으로 1960년대 일본의 모노파(物派)가 서구 모더니즘의 추상 형식을 물려받으면서도 내용은 전혀 다른 동양 전통의 미감이나 정신성 탐구에 골몰하면서 새로운 추상을 지향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던 일련의 맥락을 계승한다. ‘해 아래 새것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동시대에 그가 골몰하고 있는 새로운 비구상 혹은 추상의 언어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마다의 작품 속 조형 언어는 경계의 범주를 확장하는 일련의 시도와 닿아있다. 넓게는 탈장르 다원주의 미술이라는 시대적 맥락을 읽어내면서 추상 속에 비서구적 사유를 견인하는 것이며, 좁게는 곡선/직선이 창출하는 집단의 무의식적 원형상으로부터 자연물/사물, 선/틈, 요/철, 골/마루, 접힘/펼침, 겹/결 그리고 흑/백 사이의 경계를 오가는 것이다. 


융의 원형상이 물(物)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기보다, 구조와 형태에 관심을 드러내는 것인 만큼, 하마다의 원형상은 1차원의 곡선/직선이 2차원의 원/사각형으로 차원을 넘어서는 끊임없는 조형적 변주를 다양하게 시도한다. 그것은 일련번호로 작품명을 만든 것처럼, 미학 외부의 메시지를 차단하고 미학 내부의 세계로 잠입한다. 작품을 살펴보자. 〈#32〉(2001), 〈#95〉(2021), 〈#85〉(2019), 〈#90〉(2020)처럼 캔버스나 나무판 혹은 레진의 평평한 피부 위에 격자무늬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긁히거나 그려진 선묘가 올라서기도 하고, <#85>,〈#90〉, 〈Untitled Painting 027〉(2016)처럼 화면 속에 선과 면이 만나는 접점에서 접히거나 펼쳐진 형상이 보이기도 한다. 


선과 선, 선과 면, 그리고 평면과 입체가 연접하는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경계의 범주는 자기 몸속으로 파고드는 네거티브의 구조나 자신의 몸 밖으로 쌍생아를 밀어내는 포지티브의 구조를 생산한다. 특히 면과 면 사이에서 생성된 폭이 좁은 길쭉한 ‘사이 공간(interspace)’인 틈은 무엇과 무엇 사이의 사이 공간이자, ‘접점의 공간(interface)’으로 기능하면서 선의 2차원으로부터 3차원으로 경계의 범주를 확장한다. 회화에서는 선으로, 조각에서는 틈의 정체성으로 드러나는 이 접점의 공간은 크랙(crack)이나 갭(gap)의 경우처럼 미세하게 패인 오목의 공간을 만든다. 즉 틈은 하나의 몸체가 균열하거나 이지러지면서 만들거나, 여러 몸체가 이웃하면서 그 사이에서 만들어진 결여와 소외의 공간이라는 네거티브의 위상을 획득한다. 


한편 그 접점의 공간에서 마치 이탈한 지층처럼 삐죽이 튀어나온 3차원의 입체는 포지티브의 위상을 획득한다. 즉 하마다의 작품에서 평면/평면 혹은 평면/입체를 연접하게 하거나 하나의 입체를 접을 때 형성되는 틈과 같은 네거티브의 존재는 그 연접의 공간에서 튀어나오는 포지티브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만나게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선의 이격(離隔)으로 말미암은 골이라는 네거티브 공간은 마루라는 포지티브 공간과 연접한 채 경계의 범주를 형태라고 하는 물리의 영역으로부터 소통이라는 정신의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확장한다. 






V. 오프 화이트(off-white)의 중성성과 오프 블랙(off-black)의 활유적 메타포 

하마다의 작업의 주요한 특성은 1차원의 곡선/직선이 2차원의 원/사각형으로 변주하는 원형적 추상이라는 것 외에도 검정과 하양이 만나 대립과 조화를 이룬 구조적 추상이라는 점이다. 특히 하마다의 작품 속 하양은 하양이 아닌 하양이다. 즉 그의 작품에서 하양은 어떤 색에 흰색을 혼합하여 만든 유사 백색 또는 의사 백색이라는 의미의 오프 화이트로 드러난다. 흰색의 혼합 비율에 따라 거의 백색으로 보일 만큼 밝은색이 되기는 하지만 흰색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색조를 띄기도 하는 색인 오프 화이트는 그의 작업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렇듯 그의 작품 속 하양은 피상적으로는 빈티지 분위기를 담은 미색 또는 연베이지색으로 불러도 무방할 만큼, 표피의 색상이 흐릿하게 때가 타거나 누렇게 퇴색한 듯한 오프 화이트가 주조를 이룬다. 어떤 면에서는 모든 색을 뺀 채 세월을 먹어 퇴락한 상태로 남겨진 백색이라고 할만하다. 

평면 작업은 대개 아크릴 물감의 혼색으로만 이러한 효과를 낸 것이지만, 때로는 레진, 에나멜과 같은 산업 재료와 아크릴 물감의 혼용으로 오프 화이트를 만들기도 한다. 입체 작업에서는 나무판을 바탕으로 한 부조형 조각이나 만들어진 오브제 혹은 오브제처럼 만든 조각 위에 올려 바른 플라스터나 레진, 에나멜 나아가 왁스와 같은 혼용의 질료들로 인해 오프 화이트가 구현된다. 


하마다의 오프 화이트는 이름만 화이트일 뿐 화이트가 이미 아님을 가시화한다. 여러 재료가 미세하게 덧입혀진 상태로 인해 이미 낡고 퇴색한 것처럼 꾸며져 있는 그의 오프 화이트는 이미 화이트가 아니지만, 더 더럽혀지고 더 때가 타서 다른 색상의 무엇으로 오염될 변화의 가능성을 늘 전제한다. 그래서 하양도 검정도 아닌 무수한 단계의 회색과 같은 중성성 혹은 중립성(neutralité)의 상태를 공유한다. 다만 인접한 곳에서 검정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오프 화이트가 지닌 중성성의 상태는 블랙으로의 변화까지는 이르지 않으려는 오프 화이트의 범주를 충분히 가늠하게 한다. 


유념할 것은 하마다의 하양이 순결의 화이트가 아니듯이 검정 역시 순결의 블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의 검정 역시 오프 블랙이라고 정의할 만하다. 거의 검정으로 보일 만큼 어두운색이지만 검정과 약간의 차이가 나는 색으로서의 오프 블랙이란 쉽게 말해서 모든 색을 한데 품은 검정이 아니다. 그것은 하마다의 작품에서 목재, 석탄, 석유 따위의 유기물을 건류 또는 증류할 때 생기는 검고 끈끈한 액체인 타르와 흑연, 숯, 목탄을 덧바르고 미세하게 갈아입힌 후 표현되는 검정이다. 검정에 가까운 짙은 회색을 우리가 차콜 그레이(charcoal gray) 혹은 그래파이트 컬러(graphite color)라고 부르듯이, 하마다의 작품에서 오프 블랙은 타르, 숯, 흑연과 같은 유기물의 잔해가 만든, 차콜 그레이 혹은 그래파이트 컬러와 같은, 완벽한 검정이 아닌 검정색으로서 자리한다. 


그의 검정이 아닌 검정은 타르, 숯과 같은 유기물의 잔해를 작업의 재료로 삼아 죽음과 그것을 극복하는 삶에 대한 메타포를 강하게 드러낸다. 마치 숯이 죽은 나무로 만들어진 검은 주검이지만, 이내 불을 품어 새로운 삶을 예약한 검은 부활체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하마다의 오프 블랙은 가히 활유(活喩)의 메타포라고 할만하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마다의 작품이 완벽한 하양과 검정에 각각 이르지 못한 오프 화이트와 오프 블랙의 대립으로 출발하지만, 그 안에서 수많은 화이트-블랙의 변주가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하마다는 퇴색한 하양과 검정을 통해 우리에게 오프 화이트의 무수한 중성성과 오프 블랙의 다양한 활유가 꿈틀거리는 메타포를 선물한다고 해설할 수 있겠다. 






VI. 물질, 시간, 관객이 맺은 관계 미학 

하마다의 작업에서 활유는 오프 블랙에만 머물지 않는다. II 장과 IV 장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그의 자연 혹은 사물을 닮았음에도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특정할 수 없는 모호하고도 기묘한 형상을 지닌 내적 추상 혹은 원형 추상에서나 선/틈, 요/철, 골/마루, 접힘/펼침, 겹/결과 같은 형태가 만든 경계의 범주나 오프 블랙/오프 화이트와 같은 색이 만든 경계의 범주에서도 이러한 활유의 메타포는 작동한다. 


조각의 형상이라는 것이 물질이 잉태하여 낳은 것이라는 점에서, 이제 하마다의 작업이 함유한 활유의 메타포는 형태로부터 물질로 이동하는 본질의 세계로 더욱더 깊이 침투한다. 그것은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식으로 말하면 ‘형태적 이마쥬(image formelle)’를 벗고 되찾은 ‘물질적 이마쥬(image matérielle)’인 셈이다. 5) 


 바슐라르에 의하면 대상의 표면에 머무르는 ‘형태적 상상력(imagination formelle)’이란 얼음의 외형처럼 고정화된 것일 뿐이고 대상의 표면과 내면이 함께 침투하는 ‘물질적 상상력(imagination matérielle)’이란 얼음, 물, 수증기처럼 변화할 수 있는 ‘이미지의 다변화적 운동의 상상력’을 넉넉히 드러낸다. 6) 


이러한 차원에서, 하마다는 캔버스 위에 목탄이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회화 방식을 고수하면서도, 목판 혹은 만들어진 오브제 위에 플라스터, 레진, 에나멜, 타르, 왁스와 같은 산업용 재료를 사용하는 등 조각의 다양한 질료 연구를 통해 물질적 상상력에 몰입한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게다가 퇴락한 듯한 오프 화이트뿐 아니라 흑연, 숯과 같은 다양한 층위의 오프 블랙을 통해 시간이 개입한 물질의 미학을 탐구한다. 마치 오래된 듯이 빛바랜 오프 화이트와 오프 블랙은 시간의 흐름이 물질에 부딪히거나 침투한 시간의 흔적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뿐인가? 하마다는 자신이 구축한 낮은 채도의 빛바랜 물질의 바탕 위에 구멍을 내거나 미세한 스크래치를 남기는 방식으로, 과거의 무수한 사건들이 집적된 흔적을 구현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야기된 감정적 상흔을 소환하고 기억을 투사하는 흔적을 만든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이러한 흔적은 의식의 연쇄로부터 이탈한 구멍, 간극, 단절, 실수와 같은 모습으로 무의식의 심연에 깊게 자리 잡은 존재라는 점에서 ‘무의식적 기억 흔적(trace mnésique inconsciente)’이라고 할만하다. 7)  이처럼 물질 위에 이미지로 각인된 흔적은 관객에게,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언급하는 ‘이미지-기억(image-souvenir)’처럼 강렬한 과거 경험을 역동적으로 지금, 여기에 소환한다.8)  그렇게 함으로써 관객에게 하마다의 작품 속에 각인된 이러한 흔적들이 야기하는 물질 속 시간 개입의 의미를 저마다 떠올리게 하여, 잠재태로서 자리한 이 기억 흔적이 잔잔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모습으로 현실화될 가능성을 상상해 보게 만든다. 이른바 시간, 물질, 관객이 이번 전시에서 함께 맺은 ‘관계 미학’인 셈이다. 







VII. 에필로그 

글을 맺자. 히로유키 하마다의 이번 개인전은 2001년부터 2021년까지 제작된 회화, 조각을 함께 소개한다. 아크릴 물감과 목탄이 혼재된 회화와 더불어 레진, 에나멜, 타르, 왁스와 같은 산업용 재료를 사용한 부조형 조각은 직선과 곡선과 교차하고 변주하는 비구상, 추상의 유형으로 관객에게 다가선다. 관객에게 다양한 사물이나 자연을 닮은 대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추상의 형태는 작가의 무의식 심연에서 길어 올린 내적 추상이자, 사회 공동체의 집단 무의식이 공유해 온 원형상을 찾아 나선 ‘원형 추상’이라고 할만하다. 날렵한 직선, 매끈하고 유려한 곡선이 혼재된 구조적 추상의 외피 그리고 오프 화이트와 오프 블랙이 창출하는 시간의 흐름을 머금은 깊이의 화면, 창조적 노동이 집약된 밀도 등, 그가 관객에게 선보이는 조형 세계는 조용하면서도 힘이 있다. 


21세기 다원화 미술의 시대에 20세기 미술의 산물이라 여겨지는 추상 미술에 여전히 천착하는 하마다의 작품이 유의미한 까닭은 외형적으로는 미학 외부의 메시지를 차단하고 미학 내부의 세계로 잠입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인간 삶을 투영하고 은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적 요소들의 상호 작용은 인간이 끊임없이 공동체를 형성하며 시공을 초월하여 복잡한 방식으로 연결된다고 말하는 그의 연기(緣起)적 세계관에 맞닿아 있다”는 기획자의 진술은 그래서 타당하다. 외형적으로 부분과 전체가 연결된 채 반복적 패턴을 통해 서로의 경계의 범주를 부단히 확장하는 데 골몰하는 그의 작업은 본질적으로 인간 공동체를 은유하고 연기적 세계관을 함유한다. 그의 작품에서, 부분과 전체, 그리고 반복적 모듈이 창출하는 선, 틈과 같은 사이 공간이, 양자가 공유하는 경계의 범주를 지속적으로 확장하면서도 그 경계의 양상을 물질-시간-관객의 관계 속에서 다채롭게 변주하는 까닭이다. 




주석/

1) Jean-Michel Quinodoz, Sigmund Freud: An Introduction (London, New York: Routledge, 2017), 24. 

2) Carl Gustav Jung. Collected Works Vol 9 Part 1 Archetypes and Collective Unconscious (London: Routledge and KeeganPaul, 1968), 42-72.

3) Anthony Stevens, On Jung: Updated Edition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9), 32. 

4) Robert McParland, Science Fiction in Classic Rock: Musical Explorations of Space, Technology and the Imagination, 1967-1982 (Jefferson, N.C.: McFarland, 2017), p. 50. 

5) Jacques Gagey, Gaston Bachelard: ou, la conversion à li̓maginaire (Paris: Éditions Marcel Rivière, 1969), 208

6) Carol S. Altman, Enfance--: inspiration littéraire et cinématographique (Birmingham: Summa Publications, Inc., 2006), 195.

7) Dominique Bourdin & Sabina Lambertucci-Mann, La psychanalyse de Freud à aujourd'hui: histoire, concepts, pratiques (Rosny-sous-Bois: Editions Bréal, 2007), 27. 

8)  Henri Bergson, Matière et Mémoire, 26e éd. (Paris: Félix Alcan, 1929〔1896〕) 136. 


출전/

김성호, 무의식에서 길어 올린 원형 추상, Hiroyuki Hamada, 카탈로그, 2022. 

(히로유키 하마다 Hiroyuki Hamada展, 2022.09.29.~10.23, 가나아트 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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