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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질문의 온도展 / 온도에 대한 질문들

김성호

온도에 대한 질문들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I. ‘질문의 온도’ 혹은 ‘온도에 대한 질문’  

영등포문화재단이 2019년부터 진행해 온 ‘우정과 환대의 예술제’는 예술가들이 맞닥뜨린 지역의 이슈를 짚어보는 시각예술 축제이지만 축제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아픔이 곳곳에 배어 있다. 결코 같지 않은 예술가들의 다양한 시각적 발언을 짚어보았던 ‘만 개의 풍경 만 개의 이야기’전, 숨을 욱조여온 코로나 시대에 대한 치유를 염원했던 ‘해독’전 그리고 예술과 기술의 만남을 다양하게 풀이했던 ‘술술이술술’전이 그것들이다. 


 

한편, ‘제4회 우정과 환대의 예술제’는 ‘질문의 온도 : 불편한 시간에 대한 열여섯 개의 답변’이라는 주제로 펼쳐진다. 여기서 ‘질문의 온도’는 ‘온도에 대한 질문’으로 읽힌다. 발열 측정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온도에 대한 질문’은 타자에 위협을 가하는 코로나19(COVID-19)라는 초유의 바이러스 감염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공동체의 통제 시스템이자 동시에 이러한 공동체를 영위하는 개별 주체들의 자가 생존 확인 방식이 된다. 머리와 손목의 발열 상황을 점검, 진단함으로써 ‘바이러스 감염’으로부터 안전한지 여부를 묻는 ‘온도에 대한 질문’을 수시로 행하면서 이어가는 오늘날 일상이란 불편함 그 자체이다. 이미 오염된 일상에서 나 역시 오염되지 않았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면서 강박적으로 삶을 이어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2022년 11월 현재 국내에서 코로나19 누적 확진자가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다는 뉴스가 회자되지만, 날마다 수만 명에 이르는 감염자가 새로이 보고되면서, 모든 사림이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로울 것으로 기대되는 ‘집단 면역’의 상황이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사람들은 여전히 마스크를 낀 채 타인과 지인을 대면하고 수시로 살균소독제로 손을 적시면서 바이러스가 쌓아올린 너와 나 사이의 경계의 벽을 매번 점검하고 또 점검한다. 

그렇지만,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모든 사람을 괴롭혔던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우리의 경계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둔화되었다. 감염자 수가 코로나 발생 초기보다 확연히 늘어났음에도,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통제의 언어는 느슨해졌고, 일상의 회복을 바라는 자영업자들과 소상공인들의 분주한 삶 속에서 사회적 거리두기와 같은 공적 기제는 많은 부분 희석되었다. 혹여 타인에게 비난을 받는 것이 두려워 확진 이력을 밝히기 꺼려했던 많은 이들은 이제 감염 상태를 일상의 대화 속에 공공연하게 올려놓는다.  


오늘날 코로나19가 몰고 온 풍경은 저마다 다르다. 누구에게는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후유증이나 감염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기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구에게는 재택근무로 인한 편리함이나 비대면 소통으로 인한 원활한 상호작용을 선사하기도 한다. ‘위드 코로나’를 천명한 작금에도 혹자는 힘들어 하고 혹자는 즐거워한다. 코로나가 야기한 답답한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네거티브 감성을 각인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포지티브 감성을 선사하기도 한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코로나 감염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가 던지는 ‘온도에 대한 질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코로나 걸린 적 있으세요?” “군대 간 아들은 괜찮다나요?”, “재택 근무하시나요?”, “휴일에 등산가셨나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와 같은 코로나 시대의 수많은 질문들! 어쩌면 그 ‘질문의 온도’는 냉랭하기도 하지만 가슴 뜨겁기도 하다. 


여기 그러한 질문을 던지면서 시간을 보냈던 열여섯 작가의 기록이 담겨 있다. 답답함, 번잡함. 불편함, 고통스러움, 비루함과 같은 네거티브한 감성이 오가는 포스트 팬데믹 시대를 ‘즐거운 창작 시간’을 통해 슬기롭게 헤쳐 온 예술가들이 있는가 하면, 전시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작업실에서 창작만 이어나가야 하는 ‘즐겁지 않은 상황’을 용납하지 못한 채 심각한 우울의 늪에 침몰해 있는 예술가들이 있기도 하다. 예술가들의 그간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온도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코로나 시대를 해석하는 이들의 작업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II. 불편해지면 보이는 것들

불편해지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건강을 잃고서 깨닫게 되는 몸의 소중함, 가족과 이별하고 나서 비로소 보이는 사랑의 마음, 한바탕 논쟁으로 인해 소원해진 동료와의 관계에서 비로소 보이는 나의 옹졸함 같은 감정들이 그러하다. 손가락에 박힌 채 빠지지 않는 가시 하나가 타이핑에 애를 먹일 때, 잇몸에 생긴 염증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할 때, 삐딱하게 닳아버린 구두 뒤축이 걸음걸이를 방해할 때, 출근길 만원 버스가 한 치의 거동도 못할게 할 때 우리는 건강, 균형, 자유로움을 비로소 갈망한다.   


불편해지면 보이는 것들은 대개 그동안 너무 익숙한 것들이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쾌적한 공기, 내 몸의 자유, 친구의 우정, 부모님의 사랑과 같은 것 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야기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타자와 나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밀쳐 내고 심리적 거리마저 멀리 이격시킨다. 불편해져서 비로소 보이게 된 타자들의 존재! 그것은 그동안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었으나 이제는 구속으로 인해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대상이 된다. 결핍과 결여가 낳은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낳고 키워내면서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심연 안에 그 몸뚱이를 겹쳐 쌓아올린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불청객은 ‘강제적인 방식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예술가들을 전시로부터 이격하고, 예술가들이 작업실에서 고립된 채 창작에만 전념하게 만들기도 한다. 예술 행사의 폐지 혹은 축소, 전시의 취소와 연기, 관람객의 무관심과 관람 열의의 감소가 낳은 풍경은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다. 최근에 다시 활성화되고 있는 다양한 전시 행사에서 코로나19는 극복할 대상일 뿐,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번 전시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침입으로 인해 불편해진 상황 속에서 보이기 시작한 많은 것들을 추적한다. 이 글에서는, 열여섯 명의 참여 작가들이 제기하는 ‘온도에 대한 질문’ 또는 이들이 모색하는 ‘불편해지면 보이는 것들’이 어떠한 것들인지 전시의 동선 순서대로 분석해 본다.  


홍정임

홍정임은 작품 〈밤에 노동하지 않은 자〉를 통해서 전시가 줄줄이 취소되는 코로나 상황 속에서 예술가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창작임을 되새기게 한다. 전시 대신 창작을 위해서 모임이나 다른 사람과의 만남으로부터 자발적인 고립을 선택한 예술가들은 창작 노동으로 밤을 하얗게 지새우기도 하지만, 반대로 창작을 무한정 쉬고 하릴없이 무노동의 시간을 지속하기도 한다. 홍점임은 여러 동료 작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기억에 남은 작업실 이미지를 파편적으로 화면 안에 구성한다. 마치 식물원처럼 식물로 가득 찬 작업실, 그로테스크 풍의 작업실, 투병 생활로 이주한 북쪽 끝 작업실, 노동하지 않는 불 켜진 작업실의 파편적 이미지가 마치 초현실주의 풍으로 재조합된 작품들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불편해지면서 보이게 된 것’들이 무엇인지 천천히 곱씹듯 선보인다. 


이정인은 작품 〈메모리 스트럭처 Memory Structure〉가 담고 있는 우연성의 조형 언어 안에서 오늘날 코로나 상황을 겹쳐 읽는다. 작가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야기한 생각지 못한 변수, 그것으로 인한 차단과 통제, 낯선 순간, 인간의 삶을 불편하게 만든 일상의 변화를 목도하면서 자기 작업에 등장하고 있는 다양한 조형 언어가 이러한 코로나 상황과 닮아 있음을 간파한다. 작품 속 무규칙성, 우연성의 변주, 하나의 이미지에 개입하는 또 다른 이미지의 충돌과 조화, 삽입하는 이미지와 연계하는 이미지 사이의 균형과 균열과 같은 조형 세계는 코로나가 야기한 무수한 사건들을 하나의 메타포로 읽어내기에 족하다. 


이은정의 작품 〈주름진 공간〉은 종이 위에 잉크와 파스텔로 연속되는 주름 패턴을 그린 드로잉을 잘라 비정형의 이미지 파편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바느질로 재조합해서 만든 가벼운 조각이다. 2차원 평면을 3차원 조각으로 치환한 이 작품의 표면에는 사람이나 동식물 그리고 사물의 피부에 새겨진 주름 이미지가 빼곡하게 담겨 있다. ‘사람 피부의 주름, 나무의 주름, 오래된 건물벽의 주름, 수분이 빠진 감자의 주름, 낡은 운동화의 주름’처럼 시간의 흐름이 각인한 주름이란 오늘날 코로나19의 상흔처럼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모종의 사건 흔적이자, 상처이다. 전 세계의 질서를 코로나19 이전과 이후의 시대로 재편 중인 이 시점에서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를 시각화한다면, 골과 마루를 만들며 짙은 상흔을 남긴 주름과 같은 것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혜인은 작품 〈도시의 어떤 것들 1, 2〉을 통해서 인공의 도시와 같은 정형의 틀 속에서 자라는 유기적이고 비정형적인 자연의 인공 세계와의 공존을 탐구한다. 특히 코로나19로 가속화된 아파트 공간 속에서의 칩거와 자발적 격리와 같은 삶이 야기한 ‘식물 기르기’는 화분들을 일정한 방향을 향해 도열해 놓는 것이었다. 인간이 자연을 구속하고 인간의 취향대로 구성해 나가는 일을 지속하는 한, 코로나19와 같은 자연이 내리는 형벌 역시 지속될 것이다.  


신나운은 작품 〈Condensed Accumulation 2, 3〉을 통해서 버려진 것들의 소환과 재생을 노래한다. 이 작품은 갈색 냅킨들을 재료로 삼아 만든 것인데, 4년 동안의 실험작, 실패작, 방치된 작업을 한데 모아 다시 만든 것이다. 작가의 과거 유산을 소환해서 새로운 무엇으로 탄생시킨 이 작품은 자연의 생성, 소멸의 생애 주기를 시각화했다고 할 만하다.


문해주

  

문해주의 작품 <마주침의 연주-당신>, <마주침의 연주-편지와 시> 는 나무 의자의 조각들을 재구성해서 하나의 의자인 듯 보이는 두 개의 의자를 만들고 그 사이에 금속으로 된 윈드 차임을 설치해서, 관객이 의자에 않을 때 미세한 소리를 내도록 구성한 작품이다. 금속의 부딪히고 떨리는 소리를 통해 개인의 내밀한 고백을 엿듣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코로나19 이후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 시대에 소통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를 되묻게 한다.  


하정주


하정주는 작품 〈Like A Dream〉에서 그린다는 단순한 행위에 담긴 유의미성을 탐구한다. 우리가 종이와 색연필이라는 가장 흔한 재료를 통해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일련의 회화 행위에 주목하는 까닭은 미술에 있어서 그려진 형상보다 그리는 행위가 더욱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치 코로나19가 낳은 구체적인 사건들보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무엇보다 주요한 것처럼 말이다. 


추유선의 각기 다른 제목의 출품작들은 함축적인 서사가 주도하는 이미지들로 구성된다. 작품 〈첫 번째 아이〉는 남자 형제들을 대학 보내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해외의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첫째 딸아이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작품 〈붉은 옷을 접어서 개어〉는 1910년대 하와이 이주노동자의 결혼을 통한 서사를 이야기한다. 혹여 평범한 일상이 담긴 작품이라고 할지라고도 서사의 주인공에게는 매우 커다란 사건일 수 있다. 코로나19가 상기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홍준호


홍준호의 작품 〈허락없이 배포하여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는 코로나 팬데믹 위기 속에 드러난 종교의 탐욕을 고발한다. 불법 대부업 전단지 위에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화투 이미지를 찍어 내고 십자가 이미지로 연상되도록 격자형 무늬를 벽면에 투사시킨 이 영상 설치 작품은 코로나19가 한국에 상륙했을 때, 논란을 일으켰던 한 사이비 종교 집단의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아울러 교회 집회를 자제시켰던 방역 당국에 대항해서 대면 예배를 강행했던 일부 교회들의 탐욕도 어른거린다.  


두눈


두눈 작가는 〈두눈프로젝트〉라 명명한 다양한 제명의 작품들에서 기부 받은 손톱으로 작업하면서 미와 추, 버림과 쓰임,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의 의미를 탐구한다. 코로나19가 야기했던 개인들, 집단, 국가에 이르는 공동체의 함의를 아우르면서 기부하는 자와 기부를 받는 자의 관계뿐 아니라 백신, 접종, 방역 등의 메시지를 그의 작업에서 유추해 볼 수 있겠다. 


한솔비는 작품 〈세 여신〉을 통해서 동물 형상을 한 세 여신을 창출한다. 종교의 제단화처럼 구성한 삼면화에는 깃털과 발굽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반인반수의 여성이 자리한다. 그녀들은 작가가 만든 신화와 오늘날 현실 속에 동시에 몸담고서 싸워나가는 여신이자 모성의 존재로 자리한다. 


사랑해는 회화 〈살고 싶어서 죽는 사람〉을 통해서 상처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단채널 영상 〈차라리 내가 디딘 땅에 발을 붙이고〉를 통해서 소수적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병적이고 더러운 것으로 치부하는 규정된 시선 속에서 소수적 삶은 늘 아프다. 작가는 중력에 직립하는 인간의 본질이 평등의 생태학적 담론 속에서 구현되기를 요청한다. 

 

심효선은 뫼비우스 띠와 회오리 모양의 원통과 톱니바퀴가 맞물린 설치작품과 더불어 여러 회화 작품을 통해서 현실 속 인간의 삶을 소우주와 대우주의 만남으로 은유한다. 작가가 표현한 7개의 내장기관은 각기 다른 인간 군상을 표상하면서 생, 사, 생성과 소멸, 구축과 파괴의 메시지를 한데 아우른다. 


조혜령은 〈Maybe, there's a clue〉 연작에서 목련의 씨앗주머니를 추상적 조형 언어로 담은 회화 작품을 선보인다. 기괴한 덩어리 형상의 이것은 순환하는 생명의 에너지를 잉태하고 있는 근원이다. 생명의 모성상을 유추하게 만드는 목련의 추상적 형상은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함유하는 모성 원형과 다를 바 없다고 하겠다.  


유지환은 페철을 레진으로 담은 〈후유증〉이라는 제명의 조명 설치 작업을 통해서 폐기된 것들이 품은 불안의 다양한 심리적 상태를 시각화한다. 전쟁과 권력, 동북아시아의 불안한 정세를  유추하게 만드는 이러한 설치의 언어는 현대 사회에 만연한 불안과 같은 부정적 현실을 드러내면서 우리로 하여금 이에 대한 조속한 해결을 기대하도록 만든다.  


이말용


이말용의 작품 〈나는 찰나와 만났다〉는 플라타너스 잎을 바느질해서 이어 붙여 만든 노인의 형상이다. 지하철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굽은 등의 할머니는 작가에게 암흑 속 동굴 혹은 바위처럼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옴과 동시에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각인되었다. 작가는 노인이 맨 큰 가방과 거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보따리를 형상화하면서 자본주의의 세상을 사는 한 노인의 소외의 극단을 읽어낸다. 불편함이 비로소 보이게 한 현실의 풍경인 셈이다.   



전시장



III. 에필로그

16인의 참여 작가가 제기하는 ‘질문의 온도’ 혹은 ‘온도에 대한 질문’은 코로나19가 야기한 포스트 팬데믹 시대를 해설하는 은유이자 화두로 자리한다. 발열 체크가 더 이상 의무와 필수가 아닌 시간이 올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언제일지는 불투명하다. 우리의 일상을 전복해 버린 이 시대에 불편해져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건강, 우정, 사랑 등 인간이 끊임없이 찾아왔던 보편적 가치 말이다. 코로나19의 상황은 그동안 우리의 일상에서 너무나 흔하고 익숙해서 미처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것들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느닷없이 깨닫게 해주었다. 16인의 작가가 이야기하는 저마다의 ‘불편해져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제각각이지만, 이 전시는 관람자들로 하여금 익숙하지만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성찰해 보는 기회를 선사한다는 차원에서 유의미하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



사진 : 작가 두눈 


출전 /

김성호, 「온도에 대한 질문들」, 『질문의 온도』, 전시 카탈로그, 영등포문화재단, 2022 

(제4회 우정과 환대의 예술제 – 2022 질문의 온도: 불편한 시간에 대한 열여섯 개의 답변展, 2022.10.21 ~ 11. 3, 영등포아트홀 전시실 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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