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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심영철 / 춤추는 정원 (화집 2부)

김성호



춤추는 정원 - ‘현실화된 유토피아’에서의 사랑  (2부)



김성호(미술평론가)


(1부에 이어서 ...)




III. 댄싱 가든 - 사랑을 위해 

2023년 선화랑에서의 개인전은 작가 심영철이 일구어온 40여 년 작품 세계를 종합한다. 1층부터 4층에 이르는 화랑 전관에 새롭게 선보이는 대규모 설치 작품을 통해서 앞서 언급했던 모든 가든 연작뿐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의 모든 작품이 함유한 미학의 정수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심영철의 전작들에서 나타난 ‘현실화된 유토피아’, ‘예술, 테크놀로지, 멀티미디어 연금술’, ‘인간과 자연환경의 공존/공생’과 같은 주제 의식을 한꺼번에 품는 미학의 정수는 무엇인가? 이 글은 심영철의 전작들이 함유하는 미학의 정수를 다음의 진술에 근거해서 ‘사랑’이라고 해설한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언제나 나의 예술에 있어서 그 바탕을 이루는 것으로 신의 섭리요. 만남의 섭리이다. 인간과 신이 만나는 것 역시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능하고 이러한 섭리는 또 자연을 다스리며 인간과 세계를 통합한다.”


심영철의 모든 작품이 함유하는 ‘사랑’이란 기본적으로는 신의 사랑에 관한 것이다. 신의 섭리에 따른 사랑! 그것은 본질적으로 나르시시즘이라는 자기애가 아닌 에로스(Eros)나 아가페(Agape)와 같은 ‘타자’를 향한 사랑이다. 달리 말해 자기애(自己愛)이기보다 ‘타자를 향한 사랑’이라는 대상애(對象愛) 그리고 ‘타자를 위한 사랑’이라는 이타애(利他愛)로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작업이 함유한 주제 의식인 사랑이란 ‘자기희생’마저 감내하는 이타적인 무엇이다: “인간사회란 배신도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이시다. / 예수님은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사랑하고 용서하셨다. / 못난 나도 그분께 빚을 갚을 수 있을까? / 받기만 했던 삶, 부끄러운 이기심, 다 버릴 수 있을까?”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라는 오랜 아포리즘(aphorism)처럼, 사랑의 실천이 어려운 까닭은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도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모든 것을 견뎌야 하는 오랜 가르침처럼 ‘나의 희생’마저 감내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심영철이 작품 속에서 모색하는 사랑은 헤겔(G. W. F. Hegel)의 언급처럼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주관적이고 고립적인 즉자존재(卽自存在)’로부터 벗어나 ‘자기를 대상화한 의식적 존재자로서의 대자존재(對自存在)’의 위상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리라.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르트르(J. P. Sartre)가 언급하는 ‘타자에 대하여’ 혹은 ‘타자에 있어서’ 존재하는 대타존재(對他存在)로 확장하는 ‘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인간에게 있어, 신에 대한 사랑이나 타자에 대한 사랑이란 어렵다. 비인격적이고 본능적인 자아인 이드(id)와 이성적이고 정신적인 초자아인 슈퍼에고(superego) 사이에서 중간 역할자로서 자아(ego)가 끊임없이 갈등하고 싸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K. Marx) 관점에서 인간의 본질은 ‘개별적인 인간에게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고 ‘현실 속 사회적 관계의 총체’인 ‘갈등하는 사회적 인간’인 까닭이다.

심영철의 ‘댄싱 가든’은 이러한 대타적인 자아가 이타적인 사랑을 만나는 장이다. ‘댄싱 가든’은 2012년 그녀의 에세이집 제목인 『춤추는 정원』에서 시작되고 2014년 전시 《블리스플 가든》으로 이어진 것이다. 2014년 당시에는 전시 영문을 ‘댄싱 가든’이 아닌 ‘더없이 행복한’이라는 의미의 블리스플(blissful)을 사용해서 ‘블리스플 가든’으로 작명했는데, 그 이유는 ‘댄싱 가든’이라는 한글 용어가 단순하고도 가벼운 의미로 해석되는 것을 작가가 원치 않았던 까닭이다. 

이 전시에서 심영철은 ‘블리스플 가든’ 대신 ‘댄싱 가든’이라는 주제어로 가든 연작의 다차원적 의미를 새롭게 담아내고자 한다. 이 용어에 대한 다차원적 의미란 ‘벚꽃’이라는 소재와 제재를 화두로 제시하면서 제기된 것이다. 주지하듯이, 그녀의 모든 ‘가든’ 연작에서 미적 대상으로 탐구했던 ‘꽃’은 자연의 상징이자 생명성의 표상이다. 특히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되면 어김없이 피어오르는 ‘벚꽃’은 그녀에게 있어 “찬란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생명의 위대함을 일깨워 주는 존재”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댄싱 가든’은 그녀가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았던 과거 어떤 날의 특별한 감정을 표현한 전시”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진술을 보자: “당시에는 벚꽃이 피고 떨어지는 광경이 아름답지만은 않았지요. 벚꽃이 필 때마다 살을 저미는 아픔으로 몸살을 앓으며 지나갔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이제는 그 아픔을 내 인생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세월이 된 것 같습니다. 이제는 그 벚꽃을 하나하나 풀어내며 마주하려고 합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았던 과거의 체험적 인식이 반영된 개인전 《댄싱 가든》은 그래서 그녀에게 사랑으로 인한 기쁨, 슬픔, 아픔의 감성이 교차하는 무엇이 된다. 사랑에 관한 처연한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작가는 벚꽃을 통해 길어 올리는 사랑에 대한 이러한 복합적인 감성을 전시에 듬뿍 담아 1층에서 4층에 이르는 전시장을 다음처럼 구성했다: 1층) 꽃비 정원(Flower-Rain Garden), 2층) 흙의 정원(Soil Garden), 3층) 물의 정원(Water Garden), 4층) 하늘 정원(Sky Garden).

작가는 2009년 선화랑 개인전에서도 층별로 ‘땅, 흙, 물, 하늘’로 소주제를 나눠 전시했었는데 이러한 설치 경험을 살펴 이번에도 네 층을 네 섹션의 스토리텔링으로 각기 나눠 공간 연출을 했다. 이제, 작가 심영철의 안내를 받아 스토리텔링에 따라 층별로 나뉜 전시 《댄싱 가든》을 순차적으로 살펴보자. 



IV. 꽃비 정원 - 1층

전시장 초입에는 여백의 공간이 자리한다. 

이 공간을 지나 꽃비 정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커다란 벚나무 형상이 자리한다. 벚나무의 옹이구멍을 키워 만든 것처럼 보이는 입구를 지나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관객은 어두운 공간을 수놓는 신비로운 벚꽃 영상을 맞닥뜨린다. 마치 흩뿌리는 비처럼 벚꽃이 흩날린다고 해서 ‘꽃비 정원’이라 작명된 이 공간에는 벚꽃 영상이 육면체 전시장 전면에 투사되면서 몽환적인 분홍빛 분위기를 한껏 선사한다. 관객의 눈을 뺏고 마음을 뺏는 이 공간은 하나의 거대한 인터랙티브 공간이다. 관객의 발밑으로 벚꽃이 모이거나 쓸려 나가고 벽면의 특정한 지점에 관객이 가까이 다가서면 벚꽃들이 닫힌 봉오리를 열면서 관객을 맞이하기도 한다. 또한 관객은 전시장 천장에서 입구의 벚나무 형상을 타고 올라간 가지들이 뻗어나간 자리에 달린 진주 빛의 화사한 자개를 붙여 만든 벚꽃 조각들을 만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낙화하는 전 방위 영상이 투사되는 전시장 한쪽 끝에 벚꽃 모양을 한 거대한 거울 방이 자리하는데, 관객은 금빛 가득한 내부의 거울 장치로 인해 그 안에 달린 사과 하나가 무수히 반복하고 있는 무한대(infinity)의 이미지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미지가 실제로 무한대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다. 무한대란 영원성(eternity)과 같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상태의 시간성’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 안에서 투과체의 작은 하트 모양을 무수히 집적해서 만든 사과 하나가 붉은 조명을 내뿜으면서 자기 몸을 무수히 증식해 나가는 인피니티 이미지를 목도하면서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신화가 촉발했던 인류 문명의 시원을 유추해 보는 경이로운 경험 말이다.      

이 섹션의 특징 중 하나는 ‘벚꽃 조형과 영상’을 ‘자연’이라는 ‘원형 상징(Archetypal Symbol)’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특히 낙화(落花) 영상은 자연의 생성소멸을 표상함으로써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고 스스로 생겨나거나 존재한다”는 자연의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의 본성은 ‘한 것이 혹은 할 것이 없다’는 도가사상의 ‘무위(無爲)’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우리말의 ‘자연스럽다’처럼 인위와 작위 그리고 꾸밈의 인공세계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다. 따라서 인공의 미디어아트로 만든 벚꽃 조형과 영상을 자연이라는 원형 상징과 만나게 하는 그녀의 작업은 하나의 역설이다. 인위와 거리 두기하는 ‘자연’은 장자(莊子)가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라고 부른 무한한 자유의 세계이지만, 마치 인공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끌어안으면서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예술’의 세계와도 닮아있으니까 말이다.

꽃비 정원의 특징 중 또 하나는 전시장 전체를 관람객과 소통을 도모하는 미디어 체험 공간으로 꾸몄다는 것이다. 현실의 공간에서 맞닥뜨린 가상의 시뮬라크르(simulacre)! 천장에 매달린 조각적 오브제인 진주 빛 자개 벚꽃과 커다란 벚꽃 모양의 건축적 조각인 무한대의 방이라는 ‘실재’가 있고 그 표면 위에 투사되거나 반영되는 ‘가상’이 공존하는 이 섹션은 하나의 가상현실 공간이기도 하다. 움직이는 영상과 함께 연동되는 사운드를 통해 관객은 이 섹션에서 공감각으로 몰입하는 가상현실 체험을 만끽한다. 

관객은 이 공간에서 마치 중국 송(宋)나라 시대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면서 물아의 구별 없음과 실재와 가상의 탈경계를 경험했다는 장자의 제물론(齊物論) 속 호접지몽(蝴蝶之夢) 이야기 혹은 1989년 제론 레니어(J. Lanier)가 들려주는 인간이 무수한 사물과 동물로 변모를 거듭하는 가상현실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체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두 이야기는 우리가 실재와 가상, 현실과 비현실의 관계에서 그려지는 유토피아를 성찰하게 만든다. 

주요한 것은 오늘날 멀티미디어 상황은 실재와 가상이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이 대립하다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서로 겹쳐 있는 ‘이중 현실(Dual Reality)’의 세계에 일찌감치 들어와 있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심영철의 벚꽃 영상이라는 시뮬라크르는 혹자에게는 더 이상 허상으로 존재하기보다 현실을 넘어서는 메타 리얼리티(Meta Reality)로 불리는 ‘또 다른 현실’로 인식된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춤추는 꽃비 정원은 모두에게 함께하자고 손짓하면서 희망을 전하지만, 누군가는 환희를, 누군가는 처연한 슬픔을 읽는 중이다. 저마다 개성이 다른 관객이 그녀 작업의 의미를 넓히는 셈이다. 한편, 슬픔을 읽는 이에게 여전히 희망은 있다. 현대인에게 에덴동산이란 결코 실낙원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 구현할 ‘현실 속 영원한 낙원’ 혹은 ‘헤테로토피아’이기 때문이다.    



V. 흙의 정원 - 2층

이 섹션은 흙으로부터 발원하는 커다란 규모의 두 작품과 함께 가상현실로 체험하는 아카이브 연작을 선보인다. 

하나는 흙을 주제와 내용으로 담은 작품이다. 한국의 산하를 담은 전통 산수화의 형상을 차용하되, 크고 작은 스테인리스 스틸 볼을 가로 10미터, 세로 2미터 크기의 패널 위에 산수화의 형상대로 부착해서 만든 작품 〈그림자 산수(Shadow Sansu)〉가 그것이다. 스테인리스 스틸 볼이 조명을 받아 자연스럽게 패널 위에 드리운 그림자가 산수화의 수묵처럼 드러나도록 만든 이 작품은 스테인리스 스틸이라고 하는 지극히 산업적이고 서구적인 재료를 통해 한국의 자연 풍경을 동양적인 미감으로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해볼 수 있다. 관객은 마치 파노라마처럼 전시장 벽면을 널찍하게 차지한 이 작품을 통해서 한국의 실제 산하를 직접 대면하듯이 실감 나게 관람할 수 있다.  

또 하나는 흙을 주제와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2미터 높이의 커다란 고려청자 모양을 만들어 전시장 중앙에 설치한 조각 작품 〈빛의 도자기(Ceramics of Light)〉가 그것이다. 스테인리스 스틸 판을 조심스럽게 망치로 두드리는 단조의 방식으로 만든 이 거대한 도자기 형상의 표면에는 빛이 투과할 수 있도록 구멍들이 뚫려 있고 군데군데 벚꽃 형상이 투과체로 새겨졌다. 아울러 작가는 이 도자기 조각을 받치고 있는 좌대를 별자리가 표현된 고인돌의 형상으로 만들어 전통의 시원을 선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했다. 최종적으로 이 작품은 조각 내부에 장착한 조명으로 인해 투과체의 조각 몸체로부터 유연하게 움직이는 신비로운 빛을 산란하면서 정점을 이룬다. 

이러한 흙의 정원은 세 가지의 특징을 가시화한다. 하나는 흙의 메타포이고 또 하나는 불과 빛의 메타포이다. 마지막 또 하나는 문명과 문화예술에 대한 상징으로 대별된다. 

먼저 흙의 메타포라는 특징을 보자. 흙이 곧 한국의 산하이고, 흙이 불을 만나 소성된 것이 도자기라는 점에서 흙이라는 메타포는 자연스럽게 작동한다. 동양에서 흙은 오행(五行) 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인 요소로 인식된다. 즉 흙을 ‘불(火), 물(水), 나무(木), 광물(金)’을 모두 품는 존재로 수렴하는 것이다. 아울러 흙은 인간이 떠나온 자연으로서의 원시향(源始鄕)이자, ‘지금 여기’에 소환되는 근원의 세계로 간주된다. 한편, 흙은 인간이 ‘주검’의 상태로 다시 회귀하는 운명을 예정한 인간의 중간 기착지이기도 하다. 즉 ‘흙’이란 인간이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지금, 이곳’의 차안(此岸)이라는 리얼리티의 세계이자, ‘나중, 그곳’을 상정하는 피안(彼岸)이라는 상징의 세계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해,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간접 경험’으로 인식되는 세계라는 점에서, 이 ‘흙’의 세계는 차안을 포함하되 차안과 피안을 잇는 기착지로서의 중간계, 혹은 ‘현실계’와 ‘현실계 이후’를 연결하는 중간계라는 말이 가능할 수 있겠다.  

두 번째로 불과 빛의 메타포라는 특징이다. 도자기가 불의 작용으로 생성되었듯이, 불은 땅속에 늘 서식하면서 땅 위에서 출현과 소멸을 반복한다. 불이 생명을 멸한 땅 위에서 하나둘 식물의 생육과 동물의 번식이 재개된다는 차원에서, 불은 재생을 도모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신으로부터 선사 받은 불은 인간을 지구의 주인으로 만든 은인이기도 하다. 불로 현현한 헤브라이즘 신화 속 야훼,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광야 속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던 야훼, 천상에 간직한 제우스의 번개로부터 탈취한 불씨를 인간에게 전한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접목취화(接木取火)로 불을 인간에게 전한 중국 고대 신화의 삼황(三皇)이었던 수인씨(燧人氏)를 생각해 보라! 하물며 빛은 어떠한가? ‘빛’이란 어둠과 악을 물리치는 밝음과 선의 존재로 표상된다. 여러 색을 혼합할 때 검은색으로 변하면서 명도가 낮아지는 ‘감산혼합(減算混合)’의 효과를 일으키는 물감의 혼색과 달리, 빛의 경우, 파장이 다른 여러 빛이 혼합되어 마치 흰색처럼 명도가 높아지는 ’가산혼합(加算混合)’ 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은 심영철의 ‘흙의 정원’을 이러한 밝음과 선(善)의 메타포로 해설하도록 이끈다.    

마지막으로 문명과 문화예술이라는 특징이다. 문명의 공간은 들뢰즈(G. Deleuze)가 살피고 있듯이, 자연의 매끈한 공간(l'espace lisse) 위에 ‘틈’을 만든 ‘홈 파인 공간(l'espace strié)’처럼 자연을 훼손하고 그 위에 정주를 꾀하면서 구축된다. 비바람과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구축했던 피난처로서의 셸터(shelter)는 오늘날 거주하기 위한 집과 빌딩이 되었고 자연을 훼손하면서 인공적임을 선언한 모든 것이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이 외에도 흙의 정원 섹션에는 상기한 두 작품 외에 전시장 한쪽에 관객이 작가 심영철의 이전 작업들을 실감 나는 〈VR 아카이브(VR Archive)〉로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해 두었다. 



VI. 물의 정원 - 3층

이 섹션은 물이 점유하는 공간이다. 

관람객은 검은색 물이 채워진 커다란 수조 안에 스테인스 스틸로 만들어진 세 송이의 커다란 꽃이 마치 연꽃처럼 자리한 풍경과 마주한다. 검은 수면에 반영된 꽃 이미지로 인해 물의 정원은 실재와 허상을 서로 만나게 하면서 마치 쌍둥이처럼 두 간극을 하나의 덩어리로 품어 안는다. 스테인리스 스틸 꽃잎을 샌딩한 후 산뜻하게 도색을 한 대형 꽃들은 어떤 것은 투과체로 어떤 것은 잎맥 하나하나가 세밀하게 표현된 채로 각기 다른 모습을 생동감 있게 드러낸다. 이 꽃들의 조각 내부에 설치된 조명에서 발하는 빛은 전시장 주변을 온통 변화 가득한 빛의 물결로 물들인다. 꽃의 몸체를 빠져나온 여러 색상의 빛이 신비로운 변주를 거듭하는 까닭이다. 또한 관객은 천장에 매달린 투명 유리로 제작된 물방울들을 보면서 빛의 투과와 굴절 그리고 반사 효과로 인한 다양한 변화를 목도한다. 커다란 수조와 세 송이의 꽃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유리 물방울이 선보이는 조화로운 변화의 풍경 속에, 이 섹션은 또 다른 변화의 장면을 추가한다. 수조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려 퍼지면서 침묵의 공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 그것이다. 관객들은 수조에 물방울이 실제로 떨어지는 모습을 봄과 동시에 물방울이 수면과 맞부딪혀 생기는 파동의 순간을 증폭한 소리를 들으면서 조용한 심미감에 젖는다.   

‘물의 정원’이 함유한 몇 가지 미학적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순환하는 자연, 생명수, 파장과 결, 명상’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물이 지닌 고유한 자연 속성으로부터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심영철이 이 섹션에 구성한 독특한 조형 언어 안에서 유발한 것이기도 하다.  

첫째, ‘순환하는 자연’이라는 특징이다. 꽃, 흙이 그러하듯이 물 또한 자연으로 대별된다. 그중에서 물은 응결과 증발을 수시로 행하는 얼음과 수증기 사이의 중간 존재로 현현되는 까닭에 우리는 물로부터 ‘순환적 자연’이라는 특징을 자연스럽게 발견한다. 우리는 순환 운동을 하는 물의 존재론적 위상을 들뢰즈의 철학을 빌어, ‘현실태(actualité)로 변주되는 주름(pli) 속 잠재태(virtualité)’로 바라본다. 달리 말해 ‘물’을 얼음이나 수증기로 변환하는 운동을 함유한 잠재태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물’이 얼음이나 수증기로 변환하는 과정을 ‘현실화의 과정’으로 본다면, 얼음 혹은 수증기로 변환된 순간 이후의 존재론적 위상을 우리는 현실태로 규정할 수 있다. 풀어 말하면 물의 입장에서 ‘잠재태(물) - 현실화의 과정 - 현실태(수증기 혹은 얼음)’이라는 변환 과정에서 순환하는 자연이라는 위상이 가능해진다. 

둘째, ‘생명수’라는 특징이다. 수조에 담긴 검은 물은 깊은 샘물처럼 보이면서 생명의 원천 혹은 은혜의 생명수로 간주된다. 생명수는 “영적으로 목마른 모든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신의 은혜를 상징한다. 값없이 주는 생명수, 그리고 목자가 어린 양을 샘물로 이끄는 것으로 비유되곤 하는 생명수의 내러티브는 심영철의 ‘물의 정원’에서도 전개된다. 이러한 생명수 내러티브는 인간에 의해서 환경오염이 자행되고 지구가 몸살을 앓게 되기에 이른 오늘날 누구에게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리라. 

셋째, ‘파장과 결’이라는 특징이다. 수면 위에 돌이 던져지거나 빗방울이 떨어질 때, 잔잔하던 수면에는 파동이라는 변화가 생긴다. 만남의 사건이 만든 에너지의 변화 현상인 파동은 그 중심부에서부터 골과 마루를 만들면서 퍼져나가는데, 우리는 이 마루와 마루 사이 혹은 골과 골 사이의 길이를 파장이라고 부른다. 이 파장이 길수록 수면은 잔잔하다. 또한 만남의 사건이 유발하는 파동은 소리를 만드는 중심이기도 하다. 즉 수면의 시각적 변화라는 파동은 소리라는 청각적 변화라는 또 다른 파동과 연동한다. 이 소리도 파장을 만드는데, 파장이 길면 길수록 낮은 소리가 난다. 

심영철의 물의 정원에는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로 인해 긴 파장을 만들면서 잔잔한 물결과 낮은 소리를 이끌어 낸다. 여기서 파장은 우리가 일상에서 언급하는 ‘결’과 같은 말이다. 즉 마루와 마루 사이 혹은 골과 골 사이의 거리를 일정하게 반복하는 무늬인 셈이다. 그래서 파장이 길이가 일정하면 일정할수록 잔잔한 결을 만든다. 심영철의 물의 정원에서 우리는 파장이 길고 일정한 ‘백색 소음(white noise)’을 듣는다. ‘수면을 유도하는 좋은 소음’으로 간주되는 백색 소음은 관객에게 느릿한 움직임으로 다가가 정서적 평정심을 선사한다. 

마지막으로, ‘명상’이라는 특징이다. 잔잔한 물결과 소리의 파장으로 인해 관객은 번민에서 벗어나는 평정의 마음 상태를 견지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특징은 물의 정원이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생성된 자연스러운 결과가 된다. 



VII. 하늘 정원 - 4층 

하늘 정원에는 거대한 규모의 한 작품이 자리한다. 하늘로 오르거나 내려오는 것으로 보이는 두 인물이 가느다란 여러 와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천장에 매달려 있는 조각적 설치 작품이 그것이다. 서로 포옹한 채 입맞춤을 하는 형상의 한 쌍의 남녀는 작은 원형의 스테인리스 스틸 판이 한데 모여 조각의 몸체를 이룬 것이지만, 그 주위에는 조각 몸체로부터 떨어진 무수한 원형의 스테인리스 스틸 판들이 공중에 산포하듯이 흩뿌려져 있다. 이러한 설치 형식은 한 쌍의 남녀가 마치 어떠한 에너지가 자석에 의해 끌려가는 것처럼 흩어져 있다가 모여들면서 비로소 인간 형상을 구성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여기서 원형의 스테인리스 스틸 판들은 마치 존재와 현상의 기초 요소인 ‘입자’들처럼 보이고 이 판들의 운동적 배치는 마치 어떤 에너지의 ‘파동’처럼 보이지 않는가? 이글의 도입부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오늘날 양자역학은 “모든 물질이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지닌다”고 하는 ‘파동-입자 이중성’을 공식화하면서 입자와 파동을 하나의 개념 안에서 탐구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스테인리스 스틸 판들을 멀티플 아트처럼 집적, 구성한 심영철의 작품 ‘하늘 정원’에도 이러한 ‘파동-입자 이중성’이 잘 드러난다. 그도 그럴 것이 핑크색과 금색 계열로 나뉘어 도색된 두 인물 형상의 표면은 각도를 각기 달리하는 스테인리스 스틸 원형 판들에 투사되고 반사되는 빛의 효과로 인해 신비로운 반짝임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짝이는 외양의 고귀한 풍모와 자태를 드러내는 천상의 남녀 한 쌍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형상화한 것일까? 흙을 빚어 만들었다는 인류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일까? 아니면 1년마다 오작교로 서로 만난다는 견우와 직녀일까? 두 인물은 보기에 따라 신화, 설화 속 인물 혹은 현실 속 인간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리라. 사랑은 욕망과 배신, 환희와 비애가 오가는 가슴 먹먹한 무엇이다. 오랜 경구처럼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면서도 모든 것을 견뎌야 하는 까닭’이다. 그런 면에서 심영철의 ‘하늘 정원’은 두 사람을 위한 치유와 사랑의 공간이기도 하고, 인간이 떠났던 신과 대면하는 화해와 사랑의 공간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하늘 정원’이 함유하는 특징은 무엇인가? 낙원 혹은 유토피아, 사랑과 같은 것이다. 

첫째, 낙원 혹은 유토피아와 관련한 특징이다. 한 쌍의 남녀가 거하는 공간은 낙원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어디일까? 두 인물은 거하는 하늘 정원이라는 이름의 공중은 우리에게 현실도 아니고 비현실도 아닌 공간을 막연히 상상하게 만든다. 현실/비현실의 접점은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장편 소설 제목으로부터 기인하는 ‘낙원의 이편(this side of Paradise)’과 ‘낙원의 저편(the other side)’ 사이에 자리한 접점의 공간처럼 보인다. ‘낙원의 저편’은 낙원이 실현된(되는) 공간이다. 따라서 천국, 극락정토, 무릉도원, 유토피아라는 이름의 공간과 얼추 맞물린다. 반면 ‘낙원의 이편’은 비현실의 낙원을 꿈꾸지만, 결코 도달하지 못한 채 좌초하는 중도(中途)의 세계이다. 이곳은 불교에서 생사의 고통과 괴로움이 가득한 곳으로 지칭되는 이 땅의 현실계, 즉 차안(此岸)이자, 사바(娑婆) 세계이다. 

차안 혹은 ‘낙원의 이편’에 어찌 고통과 괴로움만 있을까?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고 괴로움을 위안하면서 맞이하는 행복 또한 있지 아니한가? ‘낙원의 이편’에 행복은 잠깐이고 고통과 괴로움이 대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좌절하지 말자. ‘낙원의 이편’에 거하면서 ‘낙원의 이편과 저편’ 사이 접점의 공간을 찾는 일을 지속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 접점의 이상적 모델은 이미 있다. ‘현실화된 유토피아’의 공간이 그것이다. 현실 위에 신의 축복과 행복을 구하는 헤브라이즘적 신앙과 사유가 이미 현실화된 유토피아를 제시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푸코가 언급했던 ‘현실화된 유토피아’라는 의미의 ‘헤테로토피아’로 대치된다. 현실에 존재하되, 실재하는 장소의 ‘바깥’에 있는 ‘또 다른 공간’인 헤테로토피아는 우리 주변의 도처에 있다. 다만 유념할 것은 헤테로토피아가 모두를 위한 ‘현실화된 유토피아’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만의 헤테로토피아가 무엇인지를 찾는 부단한 노력이 우리에게 요청되는 대목이다.  

둘째, 사랑이라는 특징이다. 심영철의 하늘 정원은 ‘현실화된 유토피아’, 그리고 ‘헤테로토피아’로 작동한다. 푸코가 밝히고 있듯이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실재하고 있는 자신의 현실적 몸에서 유토피아를 느끼는 지점이다. ‘몸’의 장소는 타자의 손길과 입술로 인해 기존의 내 안에 겹친 채 묻혀 있는 감각이 살아나거나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유토피아의 감각을 바깥에서 내 안으로 가져와 실현하는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이다. 역으로 말하면 사랑은 내 몸의 헤테로토피아를 가능하게 만드는 원인 제공자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심영철의 ‘하늘 정원’은 아담과 하와 혹은 견우와 직녀와 같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현실화된 유토피아를 체험하는 공간이 된다. 한편, 그곳은 신의 사랑이 충만한 공간으로 해설된다. 설사 고통과 괴로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늘 신의 사랑으로 치유하는 공간인 셈이다. 그래서 심영철에게 있어 하늘 정원은 신의 사랑을 실천하고, 자기희생마저 껴안는 이타적 사랑으로 타자와 공생하는 공존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VIII. 에필로그  

설치미술가 심영철의 가든 연작은 그녀의 모든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무엇이다. 2023년 또 하나의 가든 연작이 추가되었다. 2023년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댄싱 가든’은 벚꽃을 제재와 소재로 삼아 4층에 이르는 전시장마다 색깔 있는 풍경을 선보인다. 심영철은 층별 전시장이 자연스럽게 네 개의 소주제로 녹아들 수 있도록 스토리텔링을 구성하고 각 전시장의 특징에 부합하는 사운드와 향기를 더함으로써 오감 가득한 전시를 완성했다. 매 개인전에 했던 새로운 퍼포먼스도 선보인다. 출품작들은 대개 전시 공간을 넓게 점유하는 대규모의 것이지만, 전시장에 여백을 남긴 몇몇 벽면에는 벚꽃 형상의 유리 조형이나 한지 조형의 작은 작품들이 빛과 어우러진 채 설치되어 관객을 살포시 만나기도 한다. 이처럼 ‘댄싱 가든’은 전체적으로 거시와 미시가 조화를 이룬 풍경을 만든다. 그 풍경은 혹자에게는 생기발랄한 축제처럼 여겨지거나 혹자에게는 미디어아트와 설치미술이 당면한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의 장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어떤 이에게는 아름답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처연한 무엇으로 다가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의 가든 연작을 ‘현실화된 유토피아’ 혹은 ‘또 다른 헤테로토피아’로 정의하고 해설했던 관점은 2023년 개인전, ‘댄싱 가든’에도 여전히 적용된다. 헤테로토피아가 철학자 푸코가 끝내 미완의 과제로 남겨둔 철학 개념이었다는 점에서 이 용어는 불명료한 채로 남겨져 있지만, 다른 이들의 사유를 먹으면서 오늘도 스멀스멀 자라는 중이다. 필자 또한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심영철의 ‘댄싱 가든’을 해설하는데 이 불명료한 작업에 사유 하나를 보탰다. 

이 글은 2023년의 ‘댄싱 가든’이 ‘현실화된 유토피아’이자 ‘또 다른 헤테로토피아’인 것으로 해설하면서도 그 위에 ‘사랑’을 올려놓는다. 물론 사랑이라는 테마의 발화자는 작가 심영철이다.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테마는 인간, 자연환경, 신을 향한 것이자, 작가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생각해볼 것이 있다. 그동안 복합 채널 혹은 멀티미디어 설치를 통해서 테크놀로지를 예술에 접목하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 성(性)과 성(聖), 인간과 인간, 신과 인간 사이에 전개되는 ‘사랑’과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했던 심영철의 작업이 함유한 심층적 주제 의식을 ‘현실화된 유토피아’ 또는 ‘또 다른 헤테로토피아’,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 몇 개로 규정하기에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과거의 작품들과 새롭게 선보이는 이번 개인전을 아우르는 또 다른 해설이 지속해서 생산되길 기대한다.  

글을 마무리하자. 심영철의 향후 작업이 어떻게 전개되어 갈 것인지 필자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앞으로 어떠한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작업을 전개할 것인지 고민할 과제는 누구보다 작가에게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필자는 평론가로서 한 예술가의 현재를 알면 늘 그 미래가 궁금해진다. 그녀의 가든 연작이 향후 어떠한 모습으로 전개될지 자못 기대된다.●  



출전 /  

김성호, 「춤추는 정원 - ‘현실화된 유토피아’에서의 사랑」, 『심영철』, 화집, 2023. 

(심영철-춤추는 정원展, 2023. 03. 31~2023. 04. 29, 선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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