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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뉴드로잉 프로젝트- 점 안의 우주 / 장욱진미술관

김성호



점 안의 우주 - 우주를 횡단하는 드로잉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단순미와 동심의 세계에 천착했던 장욱진의 예술 정신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이 2016년부터 진행해 온 뉴드로잉 프로젝트의 결과보고 전시인 《점 안의 우주(All in One)》가 열린다. 이번에는 6회에 이르는 이 프로젝트의 성과를 되짚는 차원에서 장욱진의 작품들과 함께 2016년 이래 역대 15인의 수상작들을 한 자리에 모아 소개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전시는 장욱진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층위를 청장년 작가들의 드로잉과 연동해서 살펴볼 수 있는 유의미한 장이 된다. 






II. 일중일절(一中一切) - 우주를 품은 점(點) 

《점 안의 우주》라는 전시명은 장욱진의 〈일중일절(一中一切)〉이라는 제명의 한 목판화 작품으로부터 기인한다. 정확히 말하면 이 작품은 그가 1970년대에 한국의 선(禪) 사상을 판화로 제작하기 위해 그려둔 일련의 목판화 밑그림들을 그의 사후 5년 뒤 장욱진기념사업회에서 판화집으로 출간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진 여러 작품 중 하나다. 밑그림 작업 이후 20년 만에 세상에 빛을 본 이 작품은 ‘천지인’을 떠올리게 만드는 다양한 이미지와 더불어 상기한 한자와 올일원(All in one)이라는 영어가 병기된 이미지/텍스트의 결합체인 아이코노텍스트(Iconotext)의 유형으로 되어 있다. 

주지하듯이, 이 작품은 『화엄경』의 가르침을 210자로 요약한 의상(義湘, 625~702) 대사의 「법성게」 가운데 제7구인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의미의 일중일절다중일(一中一切 多中一)을 간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단순미 가득한 목판화는 이어지는 법성게 제8구인 “또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곧 하나다”라는 의미의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과 제9구인 “한 티끌 속에 온 세상이 다 들어있다”는 의미의 ‘일미진중함십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는 가르침을 모두 끌어안는다. 

이러한 차원에서 법성게의 제7~9구의 가르침에서 추출하고 장욱진의 작품인 〈일중일절〉에서 길어 올린 이번 전시 《점 안의 우주》는 ‘점’이라는 하나의 메타포를 잉태한다. 점의 메타포라니? 점은 평면의 좌표 위에서 자신의 위치만을 표시하는 가장 하등의 존재가 아니던가? 움직이지 못하니 방향을 갖고 있지 못하고 좌표에서 위치만 지니고 있으니 면적조차 갖고 있지 못하는 열등의 존재! 그것은 좌표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생을 연장할 뿐 어디로든 떠나지 못한다. 점은 또 다른 점을 만나 그 사이에 운동하는 흔적인 1차원 존재인 선을 만들지 않는 한  언제나 혼자로 남아 있는 ‘외로운 정주자(定住者)’로서의 존재이다. 그것은 혼자서 2차원의 면적을 만들지 못하니 태생적으로 다른 무엇을 손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조차 갖고 있지 못한 외롭고 고독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다. 점이라는 것은 자신의 몸을 선-면-입체로 확장하는 근원적 지평의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점은 서구 전통의 사유로 말하면, 일종의 근원적인 모나드(monad)이지 않던가? 라이프니츠(Leibniz)에게서 모나드란 “넓이나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무엇으로도 나눌 수 없는 궁극적인 실체”를 지칭하는 단자(單子)이자 단원(單元)인 만큼, 전시 《점 안의 우주》에서 ‘점’이란 모든 존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존재의 근원적 지평이다. 

점은 티끌처럼 작은 존재이지만 동시에, 장욱진의 다음 진술처럼, 우주를 품은 거대한 세계이기도 하다: “하나의 안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의 안에 하나가 있다. 너는 오직 하나를 그렸으나 너의 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나의 것들 조차 그 한 부분이다. 우주, 세계, 인생...모든 것이 하나이고 하나이다.” 점이 곧 우주인 셈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 전시는 점 안에 우주를 품는다는 ‘일중일절’이라는 화엄경의 사유를 실천하려는 작가 장욱진의 작품 세계와 맞닿아 있다. 





III. 인연생기(因緣生起) - 우주를 운행하는 선(線)과 획(劃)

전시 《점 안의 우주》가 한편으로는 장욱진의 드로잉적인 작품 세계를 잇는 것이라면 또 한편으로는 2016년부터 진행해 온 청년작가들의 뉴드로잉 프로젝트의 결과보고전인 만큼 양자 사이의 만남과 연(緣)은 이 드로잉 전시를 풀이하는 키워드가 된다. 즉 이 전시는 “모든 인연은 이어져있고 정해져 있다”는 의미의 인연생기(因緣生起) 개념과 맞닥뜨린다. “모든 사물은 그 자체로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조건과 관계 속에서 임시로 연결된 채 존재한다”는 것으로 해설할 수 있는 인연생기는 ‘사물의 존재양식을 무명(無明), 무지(無知)에서 노사(老死)에 이르기까지 12개 항목으로 제시한 십이연기(十二支ㆍ十二因錄)’와 맞물린다. 즉 어떠한 결과는 그것에 대한 원인(因)과 조건으로서의 간접적 원인(緣)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이 사유는 거꾸로 말하면, 연기공(緣起空), 즉 “이 세상에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불교의 무아(無我) 또는 공(空)의 사상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即是空 空即是色)이라고 했던가? 모든 것이 연을 맺고 있다는 것은 거꾸로 존재/부재를 함께 아우르는 ‘비어 있는(空)’ 무한한 우주 공간이며, 만물을 낳는 기본수인 0(zero)의 의미를 함유한다. 

그런 면에서 앞서 언급했던 ‘점’을 장욱진의 작업이 화두로 삼은 철학적 메타포라고 한다면 ‘선’과 ‘획’은 장욱진 작업과 뉴드로잉 프로젝트를 잇는 조형적 메타포라고 할 만하다. 또한 전시명 ‘점 안의 우주’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의미의 일중일절의 의미를 응축한 것이라고 한다면 선과 획은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곧 하나”라는 의미의 일즉일체의 개념과 더불어 “모든 것이 연을 지닌다”는 인연생기의 개념을 은유하는 메타포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장욱진 작업의 기본 조형 언어는 1차원의 ‘선’이 기조를 이룬 것이자 그것을 확장하는 ‘획’의 과정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것은 뉴드로잉 프로젝트에 수상작들의 작품 세계와 연동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자. 동양 전통 화론에서 제기하는 ‘획’의 사전적 정의는 “글씨나 그림에서, 붓 따위로 한 번 그은 줄이나 점”이다. 여기서 “줄이나 점”은 ‘한편으로는 1차원의 선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0차원의 점이기도 한 무엇’의 범주를 품어 안는다. 마치 일필휘지의 옛 서화(書畵)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0차원 점의 정체성을 변주하고 1차원으로 확장한 선이자 그 경계 사이를 오가는 무엇이다. 그것은 천부경(天符經)에서 발견되는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이란 글이 “하나가 셋으로 분할되어 드러나도 근본은 역시 하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듯이 외양적으로 다른 듯 보이는 무엇이든 우주 안에서 다를 바 없다는 ‘불이(不二)’의 세계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게다가 이 선과 획은 결과물에 머물지 않고 움직이는 무엇으로 자리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획은 우주를 운행하는 행위 과정의 총체인 셈이다. ‘획’은, 한자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글(書)과 그림(畵)을 만나게 하고 통섭한다. 획은 점과 선, 글과 그림뿐만 아니라 공간과 시간, 형식과 내용, 주체와 타자, 인간과 자연, 구상과 추상, 음과 양, 전통과 현대라는 이원대립적 요소를 하나의 개념 안에 끌어안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유동성의 존재로 자리한다.  

이처럼 장욱진의 작업이 조형적으로 선의 형식을 띠면서도 내용적으로 획의 정신을 실천하는 지점은 앞서 언급한 인연생기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점이 선/획과 연결되어 있고 점이 우주를 담고 있듯이, 거꾸로 우주란 곧 점과 같은 미시적 세계 안에서 그리고 그것의 무수한 네트워크 속에서 목도된다. 이와 같이 드로잉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장욱진의 작업과 청장년 작가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이번 전시는 한마디로 말해 인간과 인간이 잇고 있는 ‘연’의 개념을 움직이는 무엇으로 바라보면서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라 하겠다. 






IV. 필도필무(筆圖筆舞) - 계획과 행위라는 드로잉

장욱진의 드로잉적 회화가 지닌 단순미와 뉴드로잉 프로젝트 수상작들이 공유하는 지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먼저 가장 대표적인 공유점은 장욱진의 드로잉이 ‘구체적인 재현을 위한 대상을 미리 재현해보는 밑그림, 비대상적 표현을 위한 추상적 시도의 초벌 그림, 완성을 위한 출발점과 습작 그리고 보조적 예술 수단’이라는 과거의 드로잉 개념을 탈주하고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위상을 획득했던 것처럼 뉴드로잉 프로젝트 수상작들 역시 이러한 위상을 횡단한다는 것이다. 코샤츠키(W. Koschatzky)는 드로잉을 회화나 조각을 위한 필수적 전(前)단계에 필요한 보조적 예술 수단으로 평가하면서 회화나 조각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한 바 있다. 그러나 20세기 조각가 발라흐(Ernst Barlach)가 조각만으로 불충분해서 드로잉을 하고 글을 쓴다고 했듯이 드로잉은 이미 예술 자체로 인식된다. 뉴드로잉 프로젝트 수상작들은 ‘시작/끝, 미완성/완성작, 형식/내용’이라는 간극을 오가면서 드로잉 자체가 예술 작품이 되는 위상을 지향한다.  

두 번째 공유 지점은 양측 모두 이른바 생물 드로잉(life drawing)과 산업 드로잉(industrial drawing)으로 분별되어 온 두 드로잉 개념을 통합해서 선보인다는 것이다. 다빈치(Leonardo da Vinci), 루벤스(Peter Paul Rubens),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의 드로잉이 대개 움직이는 인물 또는 생명체를 대상으로 한 크로키나 해부학적 도상이라는 생물 드로잉에 골몰해 왔던 것처럼 장욱진 역시 가족과 민초와 동식물의 모습을 담은 생물드로잉뿐만 아니라 건물이나 풍경과 같은 일련의 산업 드로잉을 방기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지점은 뉴드로잉 프로젝트의 역대 수상작들에서도 공히 드러난다. 특히 이 작품들은 인물, 동식물과 같은 생물 드로잉뿐 아니라 기계, 전자, 사물, 테크놀로지를 다룬 산업 드로잉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어 북 디자인, 가구 디자인, 패턴 드로잉, 그래픽 추상 그리고 퍼포먼스의 영역까지 아우르는 복합적인 테마로 확장한다. 수상작들이 선보이는 뉴드로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오늘날은 드로잉 대상의 무한 확장이 실험된다고 할 수 있겠다. 

두 번째 공유점은 첫 번째 공유점과 맞물려 ‘계획과 행위’라는 드로잉의 양면적 특성을 두루 아우르는 것이다. 오늘날의 뉴드로잉은 비유적으로 말해 필도필무(筆圖筆舞)를 실천하는 드로잉이라고 하겠다. 필도필무는 ‘붓의 노래, 먹의 춤’이라는 의미의 서예가 견지하는 ‘필가묵무(筆歌墨舞)’ 개념을 필자가 변용해서 작명한 것이다. 즉 오늘날 드로잉은 드로잉 매체로 ‘계획된 도면(圖)’을 구상하는 디자인의 영역뿐만 아니라 ‘춤추듯 자유로운 표현적 행위(舞)’을 추동하는 실험적 순수 미술의 영역을 통섭하는 종합 드로잉을 두루 횡단한다. 아울러 계획된 도면이란 디자인 영역만이 아니라 순수 미술의 영역에서도 작동한다. 솔 르윗(Sol LeWitt)의 <월 드로잉(Wall Drawing)> 연작은 무한 반복되는 격자틀의 변화를 규정하고 지시하는 계획 도면으로부터 잉태했다. 그것은 월드로잉을 위한 밑그림이자 그 자체로 작품이 된다. 이처럼 오늘날의 드로잉은 실행을 위한 계획도면 혹은 원화를 완성하기 위한 스케치, 혹은 밑그림과 같은 미완성된 상태의 출발 지점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시작과 끝 그리고 미완성과 완성을 부단히 횡단하면서 드로잉 자체로 예술 작품이 되길 기대하는 것이다. 

뉴드로잉 프로젝트의 역대 수상작들이 장욱진의 드로잉과 변별되는 지점은 드로잉의 기존 범주를 훌쩍 뛰어 넘어 회화, 조각, 판화, 사진, 도조, 설치, 애니메이션, 미디어아트에 이르는 다장르의 영역을 실험한다는 것이다. 드로잉 재료 차원에서도 펜, 연필, 색연필, 목탄, 먹, 잉크, 마카, 돌가루, 크레용, 수채, 아크릴, 오일, 스프레이와 같은 다양한 드로잉 재료를 사용한다. 여기에 부가하여 핸디코트, 젯소, 오공 본드 등이 ‘미디엄’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비닐, 박스 테이프, 스카치 테이프, 동물의 털, 철사, 아크릴, 전구, 선풍기 등 ‘일상의 오브제’도 드로잉 작품 안으로 훌쩍 뛰어 들어온다. 드로잉이 안착하는 바탕인 지지대는 또 어떠한가? 모조지, 갱지, 장지, 트레싱지, 모눈종이, 가죽, 하드보드지, 캔버스, 광목천, 나무 패널, 조합토, 유리처럼 드로잉 지지대의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오늘날 드로잉은 ‘스케치, 밑그림, 에스키스’는 물론이고, ‘삽화, 드로잉’ 그리고 나아가 ‘설계도, 산업 드로잉, 멀티미디어 드로잉’ 등과 같은 개념들을 한데 아우르면서 확장한다. 오늘날 드로잉은 더 이상 회화의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 채 회화를 기웃거리는 미완성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장르인 회화, 조각은 물론 다원주의와 탈장르의 다양한 조형 언어로 변주한다. 




















V. 다시 점 안의 우주로 - 공간 연출과 드로잉 출품작 분석  

전시 《점 안의 우주》는 미술관 1층의 기획전시실을 ‘장욱진 존’과 ‘뉴드로잉 존’으로 나눠 대별하면서 장욱진 예술이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지 다양한 방향성을 선보인다. 

먼저 장욱진 존은 ‘점 안의 우주’라는 전시명을 해설하듯이, 마치 하나의 ‘점’을 감싸 안고 있는 듯한 반원형의 공간에 구축했다. 아울러 이 공간 안에 ‘점 안의 우주’라는 전시명과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도록 하나 안에 여러 이미지가 담기는 거울이나 프레임 장치를 통해 관객이  작품을 공감각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장욱진 존’에 선보인 작품들은 대개 가족과 이웃을 모티브로 한 인물 형상과 동식물 그리고 집으로 대별되는 건축물이 그 대상이다. 장욱진 존은 앞서 언급했던 목판화 작품 〈일중일절(一中一切)〉로부터 시작한다. 점 하나에 모든 것이 담겨 있음을 전하는 메시지답게 이 작품은 간략한 이미지와 텍스트가 복합된 드로잉인 아이코노텍스트의 전형을 선보인다. 또한 팔과 다리를 벌리고 있는 인물 형상을 마치 상형 문자처럼 포착한 작품 〈사람〉(1957)과 〈아이〉(1972), 그리고 눈, 코, 입을 간략한 선묘로 시각화한 작품 〈얼굴〉(1962)은 인물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드로잉 미학을 선보인다. 아울러 달 아래 희미한 실루엣을 드러내는 산속에 앙증맞게 자리한 새를 표현한 작품〈달과 새〉(1960), 그리고 회색조 나무에 앉은 까치와 그 아래 자리한 밝은 옷을 입은 인물 형상을 표현한 작품 〈나무와 까치〉(1988)는 장욱진 회화의 단순미를 선명하게 선보인다. 평면도로 포착한 집의 한 방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간결하게 표현한 작품 〈집과 아이〉(1959)나 집 안팎의 두 인물을 한 화면에 담아낸 작품 〈무제〉(1974)도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미시적인 삶의 풍경을 담백하게 표현한 장욱진의 드로잉 회화 즉 ‘드로잉 같은 회화’는 마치 작은 점이 우주를 끌어안듯이, 인간-자연-우주를 작은 화폭 안에 넉넉히 품어 안는다.  

둘째로 ‘뉴드로잉 존’은 뉴드로잉 프로젝트 역대 수상자 15인의 작품 30여 점으로 꾸려졌다. 장욱진 존이 점을 감싸 안은 공간처럼 구성된 것에 반해, 뉴드로잉 존의 공간 연출은 선과 획이라는 개념을 가시화하듯이 미술관의 기다란 선적 공간에 마련되었다. 장욱진의 단순미의 계승과 확장이 어디까지 어떻게 가능한지를 가늠하는 문제의식 속에서 출품작들은 조형의 형식과 내용에 따라 정교하게 범주화된 채 배치되었다. 특히 뉴드로잉 존에는 드로잉 결과물에 집중하기보다 과정과 행위가 강조되는 작품들이 대거 선보인다. 전통적인 드로잉의 개념에 충실한 회화적 드로잉에서부터 조각과 설치를 아우르는 드로잉, 퍼포먼스와 개념이 맞부딪히는 드로잉, 그리고 시간적 움직임을 실험하는 비디오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선보이는 뉴드로잉의 지평은 광활해 보인다. 

먼저 회화적 드로잉이라 할 만한 작품들을 살펴보자. 인왕산을 대상으로 한지에 연필로 드로잉 실험을 지속한 김민영, 사람들이 부재한 공간 속 사물의 관계를 담담한 필치로 추적한 윤정원, 부적의 조형성, 무속적 상징, 불의 형상을 순지에 혼합재료로 표현한 김하림, 어린 시절 도축을 목도했던 기억을 소환해서 동양화 기법으로 담담하게 표현한 박가연의 작품들은 드로잉 자체가 작품이 되는 ‘회화적 드로잉’을 선보인다.

전시에는 드로잉이 견지하는 회화적 범주를 조각 및 설치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작품들 역시 선보인다. 종이에 수채화 기법으로 작업한 평면을 해체하고 입체로 재구축한 황문익의 작품은 대표적이다. 질환의 고통 속에서도 따뜻한 가을 햇살을 만끽하는 림프종 환자를 와이어와 공사장 결속선을 용접해서 표현한 윤정민의 작품은 부조이면서도 회화적 효과를 고스란히 지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빗물의 생성 소멸하는 변화를 설치 드로잉으로 추적하는 곽윤경의 작품이나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을 이미지화한 조형 설치물을 선보인 김보은의 작품도 흥미롭다. 더 나아가 서로 다른 물성을 담은 콜라보 오브제로 설치적 조각을 시도한 이현주의 작업이나 골판지로 해체된 건물 내부 풍경을 만든 조윤국의 작품은 조각의 몸체 위에 강력한 드로잉 개념을 덧입힌다. 

한편 ‘선과 획’의 개념에 부합하려는 듯, 뉴드로잉 존의 출품작들은 과정과 행위가 강조된 작품들을 다수 선보인다. 가히 ‘퍼포먼스가 혼성된 개념 드로잉’이라고 할 만하다. 남다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본어를 필사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텍스트가 이미지로 치환되는 다다(dada)적인 전복을 실험한다. 마요네즈 병에 유화 물감을 채워 마요네즈를 그린 후 다시 마트 진열대에 전시했던 손유화의 작품은 그려진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면서 일상과 예술 사이의 경계에 대해 질문하는 개념적 퍼포먼스라 할 만하다. 자동차 극장에 설치된 스크린에 헬륨 풍선을 띄워 예측 불가능한 드로잉 퍼포먼스를 실험하는 루트호프(박진희, 송근도)의 작품은 또 어떠한가? 여기서 풍선은 예술가의 통제를 벗어나 자유로운 드로잉을 실현하는 주체가 된다. 

마지막으로 몇몇 작품은 선과 획이 품은 시간 과정과 드로잉이 지닌 운동성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가우션그래프(gaussian graph)를 활용해서 빛의 파장과 잔상 효과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실험하는 장민경의 비디오 인터랙션 작품이나 싱글채널비디오를 통해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을 실험하고 그 의미를 되묻는 박다예의 작품은 드로잉이 품은 시간의 운동성을 탐구한다. 





VI. 에필로그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의 ‘뉴드로잉 프로젝트’가 어느덧 6회에 이르렀으니 뉴드로잉 프로젝트의 결과보고전으로 기획된 《점 안의 우주》에 참여하고 있는 몇몇 작가들은 이제 청장년의 세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미 중견의 나이에 이른 작가도 있고, 이전 작품 세계와는 확연히 다른 차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도 있다. 물론 장욱진이 생전에 나이와 상관없이 단순미와 동심의 세계를 일관되게 천착해 왔듯이, 뉴드로잉 프로젝트 수상작들 역시 일관된 주제의식으로 자기 세계를 펼쳐 보인다.  

장욱진이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의미의 일중일절을 화두로 삼아 단순한 선의 미학을 평생 구사해 왔듯이, 이번 전시 《점 안의 우주》는 ‘우주를 품은 점’의 의미와 선과 획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특히 결과가 아니라 과정과 행위를 중시하는 드로잉의 속성을 잘 드러내는 획의 미학은 장욱진에서 뉴드로잉 프로젝트 참여 작가들에게로 계승되면서 ‘인연생기’의 의미를 실감하게 한다. 가히 ‘우주를 횡단하는 드로잉’이라고 할 만하다. 

대개 순수미술의 장에서 탐구되었던 생물드로잉이나 디자인의 영역에서 모색되었던 산업드로잉은 이제 현대미술에서 서로 분별될 만한 것이 아니다. 건조하고 차갑지만 단단하고 이성적인 계획의 드로잉(筆圖)나 마치 춤사위처럼 뜨겁게 분출하는 표현주의적 드로잉(筆舞)은 이제 현대 미술 속에서 ‘필도필무’의 한 몸으로 서로의 장을 오간다.  

장욱진이 가족과 이웃 그리고 정겨운 동식물과 집의 풍경을 테마로 삼아 자신의 단순미를 드로잉적인 회화를 통해 선보여 왔듯이, 뉴드로잉 프로젝트 역대 수상작들 또한 드로잉을 자신의 미학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탐구한다. 그것들은 무척 다양하다. 전통적 개념의 드로잉으로부터, 조각, 설치, 퍼포먼스, 개념, 영상을 아우르는 다양한 드로잉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시각예술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서 원화의 밑그림이나 스케치로 존재하던 시절을 탈주하고 종횡무진 달려 나가는 오늘날 드로잉의 위상이 이번 전시를 통해서 재평가되고 관련한 연구와 행사가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



출전/

김성호, 「점 안의 우주 - 우주를 횡단하는 드로잉」, 『점 안의 우주(All in One)』, 카탈로그 서문, 2023.  (점 안의 우주(All in One)展, 2023. 03. 02~06. 11, 장욱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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