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순수의 시대에서 성찰하는 순수의 미감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I. 비순수의 시대에서
맥아트 미술관(Mac art museum)의 기획전인 《Pure》전이 표방하는 주제어 ‘퓨어(pure)’는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음, 오염되지 않음, 순전함”을 전제한 순수한 상태를 지칭한다. 그것은 이질성 자체가 없는 동질성 자체의 순수성(purity)을 지향한다. 그런 만큼 순수미술(pure art or fine arts)의 반대 지형에서 응용미술(applied art)로 대별되어 온 공예를 통해 순수함을 탐구하는 이번 기획전은 하나의 역설이다. 공예적 속성의 예술이 태생적으로 실제적 효용성과 기능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순수함과는 거리를 둔 예술로 평가받아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공예가 순수를 이야기하고 그 미학을 탐구하는 이번 전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비순수의 장에서 순수의 미학을 찾고자 함인가?
이러한 질문 앞에서 우리가 유념할 것은, 오늘날 공예나 디자인은 순수를 내세웠던 파인아트 혹은 퓨어 아트의 영역으로 넘어온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공예가 순수를 이야기하는 것에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하나 검토되어야 할 사항이 있다. 근대까지 논의되었던 순수미술의 위상은 오늘날 현대미술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라! 오늘날 다원주의 미술의 세계에서는 장르의 벽을 허물고 서로를 넘나드는 이종 혼성의 혼혈이 된 지 오래되지 않았던가? 현대미술은 그간 음악, 무용, 문학과 결혼하는 것은 물론이고, 건축, 생물학, 과학과 연애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무한히 확정해 왔다. 오늘날 다원주의 미술의 세계에는 이질성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단일 혈통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시장의 논리가 미학의 세계에 잠입하는 현대미술의 장에서 순수와 응용은 구분은 더 이상 무의미해진 시대가 되었다. 엄밀히 말해, 다원주의 미술의 시대인 오늘날 순수미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비순수가 가득한 세상에서 순수를 지향하는 예술적 활동이 있을 따름이다.
기획전인 《Pure》는 이러한 지점에서 비순수 다원주의 미술의 장에서 공예적 속성의 뿌리를 지닌 현대미술을 통해서 순수의 미학을 성찰한다. 비순수의 시대에서 순수를 성찰하는 기획전 《Pure》은 출품작들의 다양한 조형 언어가 우리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하는지 유심히 살펴보도록 이끈다.
노열
II. 중력에 순응하는 순수
노열의 작업이 탐색하는 순수 미학은 무엇인가? 그것은 작가의 노동력과 지구의 중력이라는 자연의 에너지가 함께 만드는 시각예술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 안에서, 이러한 인간 실존의 환경이자 맥락인 ‘중력’이 지닌 비가시성을 가시성으로 견인하는 일에 주목한다. 그가 중력조각(Gravity Sculpture)이라고 부르는 작업은 캔버스와 같은 이차원 평면뿐 아니라 의자, 테이블, 접시, 그릇과 같은 삼차원 오브제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된다. 그 방식이란 표면 위에 안료와 미디엄을 섞은 특수한 물감을 칠하거나 적셨다가 중력 방향을 향하여 거꾸로 걸어두어 물감이 떨어지게 하고 물방울처럼 맺힌 표면이 마르면 다시 그 위에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는 과정을 거쳐 작업을 완성하는 것이다. 행위가 반복될수록 물방울 같은 형상은 중력에 따라 그 몸을 연장하면서 고드름처럼 길이를 늘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물방울과 고드름 사이에 위치한 것처럼 보이는 그의 작품 〈FLOW – SUMMER〉(2023)는 흰색의 바탕 위에 무수히 맺힌 물방울이나 돌기를 통해 중력에 순응하는 질료의 순수 미학을 탐구한다. 이러한 작업의 창작 주체는 분명 작가 노열이지만, 그의 작업을 완성하는 또 다른 창작 주체는 중력이라는 순수 에너지이다. 물감이 마른 후 다시 덧칠하는 작가 노열의 단순하지만, 무수히 반복되는 지난한 노동과 오랜 기다림은 필수 사항이며, 이러한 작업을 펼치는 전제는 중력의 작용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작업은 가히 순수 중력의 시각적 현현(顯現)이자 물감의 물질감에 기이한 순수 질료의 현시라고 할 만하다.
노열
편종필의 작품, 〈소나기〉(2023)는 중력에 따라 하강하는 빗방울의 군집을 시각화하는 독특한 설치 언어를 통해 관객에게 ‘순수 중력, 순수 질료에 대한 다양한 미감’을 선사한다. 빗방울이 지닌 투명함이라는 시각적 특성을 공유하는 유리 공예는 이러한 주제를 표현하기에 제격이다. 편종필은 램프워크(Lampwork)라고 하는 ‘유리 불기’ 방식과 3,500도의 토치 열로 녹이는 방식의 작업을 통해서 유리 빗방울을 하나하나 만들고 이것들의 군집적 설치를 통해서 한국 어느 지역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한여름의 소나기 풍경’을 펼쳐 보인다. 투명한 빗방울을 ‘봉규산 유리’로 제작한 까닭은 유리라는 투명한 물질성과 더불어 물질의 변화 없이 고열을 견디는 내열성이 지닌 유리의 질료적 순수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그의 작업은 소나기라고 하는 자연현상을 유리라는 내열성의 물질이 지닌 순수성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시각화한 결과물이라고 할 만한다.
편종필
서명수의 작업은 중력에 순응한 채 막 떨어지고 있는 빗방울 혹은 물방울과 같은 자연으로부터 온 유기적 형상을 유리 예술로 탐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유리를 불어서 만든 ‘Blown Glass’로 된 작품 〈Flowing〉(2020)은 흑경처럼 검은색을 지닌 물방울 형상을 통해 자연현상으로부터 추출해 낸 유기적 원형상이 무엇인지를 추적한다. 반투명의 반영과 투영이 한데 어우러진 채 흑경의 착시 효과를 보이는 이 작품 외에도 투명한 하얀 피부를 지닌 작품 〈Drop〉(2020)과 〈Cohesion〉(2020) 또한 구체적 형상을 벗어난 원형상의 또 다른 버전들처럼 보인다. 물방울 혹은 빗방울처럼 보이는 모듈이 슬럼핑 기법으로 접합, 집적된 꽃 모양의 이미지나 물방울 안의 물방울 이미지는 마치 자연스러운 물의 흐름을 연상케 만든다. 원형상에 대한 시각적 변주가 지속되는 물의 흐름처럼 말이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자연의 순수 정수가 물방을 형상을 통해서 풍경 아닌 정물의 양상으로 선명하게 자리 잡은 것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서명수
III. 중력에 직립하는 순수 관계
장민호의 작업은 중력이라는 자연현상에 순응하기보다 중력 위에 직립한 인간 문명처럼 사회화한 유리 예술의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선보인다. 창유리 및 병유리 제조에 사용되는 일명 ‘소다 석회 유리’라고 하는 탄산나트륨을 원료로 사용한 유리를 불어 만드는 ‘Soda-Lime Glass blown’ 기법으로 완성된 이 작품들은 모두 모듈과 모듈의 만남을 선보인다. 때로는 셔츠처럼 보이거나 그릇처럼 보이는 사물의 형상은 기다란 유리 모듈들이 둥그런 모듈을 사이에 두고 만나 연접해 가면서 이룬 것이다. 이러한 2010년대 이후의 〈Draw a Circle〉 연작은 하나의 사물 형상 안에 각기 다른 모듈들이 자리한 채 사물의 관계 지형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성찰하도록 이끈다. 그것은 중력에 직립한 사회적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반복적 행위를 통해 올려진 모듈들이 만드는 장민호의 순수 사물 형상은 이처럼 인간 본성과 인간관계를 은유하는 것으로 확장함으로써 모든 우주 존재에 대한 변화, 운동성과 같은 성찰로 전이해 나간다.
장민호
준.GK는 소다유리, 스테인리스 스틸, 그리고 가마 성형으로 만들어진 〈명사에서 동사로〉(2021) 연작을 통해서 “정의로만 굳어진 명사의 목적이 아니고 동사로서 행해지는 목적으로 정의되는 능동적 행동”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주지하듯이 동사, 형용사 등의 품사는 명사에서 파생되었지만, 명사의 아류적 품사가 아니며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실행하는 존재임을 강력히 드러낸다. 아니, 나아가 그의 작품명에서 보듯이 작가 준.GK는 명사보다 동사의 고유한 역할을 더 주요하게 간주한다. 격자형 유리 패널을 구축하고 특수 지점을 강조한 조형 언어와 그것으로부터 연결된 녹아내린 지점을 마치 그림자가 드리운 것처럼 연출한 작업을 통해서 그가 움직임을 부여하는 동사의 가능성을 조형적으로 성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력에 직립한 인간 현실계에 대한 반영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그의 작품에 나타난 움직임이 실제가 아닌 시각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그가 해설하는 ‘동사’의 담론은 인간관계가 복잡미묘하게 얽혀 있는 현실을 투영한 ‘잠재적 운동성’에 대한 조형적 실험으로 풀이해 볼 수 있겠다.
준 GK
김수연의 작업인 〈Forest of the stools〉(2023) 연작은 중력에 직립한 인간 사회의 면모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유리 패널 위에 인간 사회를 다양하게 상징하는, 팔걸이, 등받이가 없는 의자인 스툴(stool) 형상을 통해서 ’무수한 동일 사물의 군집‘ 이미지를 유리실(Glass Stringer)를 이용해 시각화했기 때문이다. 시점에 따라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무수한 스툴의 이미지는 주체와 타자가 중력에 직립한 채 한데 어우러져 사는 현실의 문명계를 연상하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생성소멸을 거듭하는 인간 사유의 과정을 은유하기도 한다. 다른 작품 〈Forest of the stools: Invisible〉(2023)은 유리 패널 위에 투명 안료를 올려 스툴의 모습이 조명의 세기와 각도에 따라 그림자가 각기 달리 나타나도록 꾸민 작품이다. 또 다른 작품 〈세로 보기〉(2022) 연작 또한 이러한 시점의 변화를 다루면서 현실 속 인간관계에서 야기되는 불안과 순수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찰하게 만든다.
김수연
정길영의 작업은 중력에 직립한 인간 문명 현실을 도조 인물상을 통해서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의 작업 중 〈다른 시간 다른 장소〉(2022), 〈MAN〉(2023)과 같은 작품들은 수영 혹은 다이빙을 하거나 수영복을 입은 채 수영장에서 책을 읽고 있거나 쉬고 있는 해학적인 인물 형상을 다룬 것이다. 중국 전통 도조에 대한 계승과 그것의 현대적 변주를 실험해 온 그의 도조 작업이 지향하는 ’순수‘는 이러한 풍자적인 형상 조각을 통해서 오늘날 현대 문명을 직관적으로 비판하는 무변별지(無分別智)의 세계와 연동한다. 외적 대상을 향한 언어적 분별을 요청하는 분별지(分別智)와 달리, 무변별지의 세계는 이미지를 통해서 가슴이 이야기하는 비판적 메시지를 한 덩어리로 품는다. 나와 너에 대한 언어 분별적 구분보다 나와 너에 대한 직관적 이해가 이미지의 저변에 깔린 작업을 통해서 그는 오늘날 인간관계를 읽는 순수의 무변별지의 세계에 천착하는 중이다.
정길영
IV, 순수의 미학
이종 혼성과 다원주의 미술의 시대에서 유리 공예를 중심으로 연접한 미학을 탐구하는 현대미술가들을 초대해서 선보이는 순수의 미학이란 불확정적이다. 그것은 언제나 기획자나 참여 작가들의 작품 세계 속에서 변주한다. 다만 필자는 그것을 인간 실존의 현실적 맥락이자 한계인 중력을 키워드로 한 채 그것에 순응하는 순수의 미감과 그것에 도전하고 직립하면서 일구어 나간 순수 관계에 관해서 기술하고자 했다. 인간에 의해서 생산되고 인간에 의해서 감상되는 현대 예술에서 순수의 담론은 이제 다양하게 확장한다. 맥아트 미술관의 기획전인 《Pure》전 은 비순수의 시대에서 순수를 성찰하는 기획을 통해서 우리에게 순수함, 순연함과 관계하는 미감과 미학이 무엇이고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안내한다. ●
출전 /
김성호, 「비순수의 시대에서 성찰하는 순수의 미감」, 『Pure』, 카탈로그 서문, 2023.
(Pure전, 2023. 09. 05~12. 03 맥아트미술관)
*참여 작가 김수연. 노열. 서명수. 장민호. 정길영. 준 지케이. 편종필
김성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