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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김기주 / 이야기가 있는 풍경

김성호



이야기가 있는 풍경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대구문화예술회관의 《2023 올해의 중견작가전》의 일환으로 펼쳐진 김기주의 개인전이 내세운 테마는 ‘이야기가 있는 풍경’이다. “자신이 경험한 지난 일이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남에게 일러 주는 말”을 이야기라고 정의할 때, 그의 개인전이 펼치는 이야기란 다분히 그의 ‘그때, 그곳’에 관한 경험이나 ‘지금, 여기’에서의 생각에 관한 것으로 유추해 봄 직하다. 조각적 설치 혹은 설치적 조각의 유형으로 펼치는 그의 이야기를 필자는 ‘그때, 그곳의 풍경’, ‘당신의 풍경’, ‘예술가의 풍경’이라는 소제목으로 살펴본다. 









I. 그때, 그곳의 풍경 – ‘추억 이미저리’
이야기에는 화자가 있고 화자가 청자에게 들려주는 ‘누구 혹은 무엇’에 관한 기승전결의 줄거리가 있다. 여기서 이야기의 대상인 ‘누구 혹은 무엇’은 기호학파의 커뮤니케이션 모델에서는 ‘지시 대상(referent)’으로 호명된다. “어린 시절 짝사랑했던 옆집 소녀와 그녀가 자주 갔던 바닷가”는 누구 혹은 무엇으로 대별되는 지시 대상이다. 김기주에게 있어, 이러한 지시 대상은 그가 어린 시절 성장했던 ‘그때, 그곳의 풍경’으로부터 기인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시골, 바다, 섬이라는 ‘그곳’으로부터 소환되는 어린 시절의 ‘그때’ 즉, 시골길과 바닷가를 늘 접하면서 자랐던 어린 김기주 그리고 다듬이질하시던 어머니와 다듬잇돌이라는 ‘누구 또는 무엇’과 같은 존재로서 말이다. 
‘그때, 그곳’은 대개 ‘지금, 여기’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때로는 망각 속에 잠들지 못하고 추억이 된 채 가슴 속에 들어와 살기도 한다. 정겹고 포근하게 혹은 아련하고 애절하게 말이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애틋했던 ‘그때, 그곳’의 시공간은 그렇게 ‘지금, 여기’에 소환되어 되살아난다. 그래서 기억은 망각 속에서 삐쭉이 머리를 내밀고 우리에게 되돌아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김기주는 섬, 바다, 시골의 풍경이라는 그때의 그곳을 지금의 여기에 불러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조각적 몸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선보이는 섬, 바다, 시골 이미지와 그것이 품은 이야기는 실존했던 혹은 실존하고 있는 장소이면서도 작가의 상상이 맞물린 허구의 장소이기도 하다. 레진으로 만들어진 조각 몸체의 표면에 청동빛이나 은빛의 안료를 튀겨 꼼꼼하게 도포하거나 노란색으로 덧칠한 ‘섬이 있는 바다 풍경’이나 ‘바다 물결 자체를 클로즈업한 풍경’은 대개 사실적 풍경에 기초한 것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작가의 상상력이 부가된 허구의 것이다. 어디서 본 듯한 바다 풍경이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섬과 바다! 
이러한 차원에서 필자는 김기주의 작품을 ‘추억 이미저리(imagery)’로 부르기로 한다. 이미저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육체적인 감각이나 마음속에서 발생하여 언어로 표출되는 이미지의 통합체”로 해설된다. 대상을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재현한 것을 우리는 흔히 이미지(image)로 통칭하지만, 이미저리는 ‘심안으로 그리는 이미지’, 즉 심상(心像)으로 번역되는 ‘내적 형상’와 같은 것으로서 이미지와 변별된다. 
이와 같은 이미저리는 김기주의 작품 도처에서 발견된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바다 위를 날고 있는 노란색 갈매기, 하얗게 표백된 색상의 등대가 있는 풍경, 원형 프레임으로 재단한 바다 풍경과 같은 그의 조형 언어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작동하는 마인드 스케이프(mind scape)와 같은 것이자, 과거와 현재 사이를 오가는 ‘추억 이미저리’로 평가해 볼 만하다.  












II. 당신의 풍경 – 어머니 혹은 다듬잇돌 
김기주가 들려주는 또 다른 이야기는 우리의 작명인 ‘당신의 풍경’과 관계한다. 그것은 내가 아닌 타자의 눈으로 세상을 배운 후 다시 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풍경이다. 작가는 어머니가 다듬이질할 때 일상으로 사용하던 다듬잇돌 위에 어머니의 눈으로 보고, 읽은 세상의 풍경을 이야기한다. 
김기주는 자신의 어머니가 사용했거나 누군가의 어머니가 사용했을 다듬잇돌이라는 ‘발견된 오브제’를 작업 안으로 이끌어 캔버스로 삼고, 타자의 풍경을 그리고 만들면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한다. 아울러 다듬잇돌 형상을 스티로폼으로 만들고 색을 입힌 ‘만들어진 오브제’ 또한 타자의 풍경과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는 또 다른 장이 된다. 세월의 흔적을 남긴 ‘발견된 오브제’나 새로운 창의적 영감으로 된 ‘만들어진 오브제’는 그의 작업에 있어 매우 주요한 조형의 바탕이다. 그의 다듬잇돌은 파랑, 노랑, 빨강의 원색뿐 아니라 검정과 하양의 색 면들을 얹거나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드리핑을 올리는 회화의 장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표면을 침식하거나 파내는 요철의 부조나 각종 오브제들이 올라서는 환조의 바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작품을 보자. 파란색의 수면 위에 하얀 뱃길을 내면서 지나는 한 척의 배를 담은 풍경, 노란색의 물결을 저부조로 선보이는 추상적 풍경, 다듬잇돌의 표면을 오목하게 연마해서 만든 피아노 건반 풍경, 표면에 요철이 가득한 빨래판으로 변신한 풍경과 같은 회화나 회화적 부조 그리고 다듬잇돌을 기초로 한 채 조각적 볼륨이 올라선 작품들도 있다. 얇은 동판을 단조로 만들어 세운 가로수, 변형된 모양의 다듬잇돌 방망이, 누군가 오래 사용하였던 실제의 말발굽에 금색을 입힌 ‘발견된 오브제’, 폐기된 캔을 잘라 만든 갈치 형상의 ‘만들어진 오브제’, 마치 수풀처럼 빼곡하게 도열해 올린 이쑤시개가 그러한 예들이다. 그뿐인가? 다듬잇돌의 형상 내부로 마치 분화구처럼 움푹 팬 네거티브의 공간을 만든 작품들도 있다. 
그렇다. 김기주의 다듬잇돌은 자연 풍경을 담은 캔버스가 되거나 옛 추억을 소환하는 저장소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음악을 실은 악보, 때로는 일렁이는 물결을 안은 바다, 때로는 깊은 그늘을 만든 수풀, 때로는 봉긋하게 솟은 섬, 때로는 기다란 가로수 그림자를 남긴 시골길이 되기도 한다.  
김기주의 다듬잇돌 위에 올라선 이러한 풍경 회화, 풍경 조각은 마치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언급하고 있는 ‘기억으로서의 의식’이자 체험적 기억인 ‘순수기억’(mémoire purifiée)을 길어 올리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 무수한 이야기가 무수한 다른 조형의 버전들로 지속적으로 생산되어 왔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다듬잇돌을 통해서 어머니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읽고 추억하던 김기주만의 특별한 기억은 이제 타자들의 삶과 공유되는 보편적 기억으로 확장한다. 다듬잇돌의 무수한 변주를 통해서 그 기억은 이제 나만의 기억이 아닌 당신의 기억이 된다.  








III. 에필로그 - 예술가의 풍경  
김기주의 이번 개인전은 바다, 섬, 시골 풍경 그리고 다듬잇돌과 연관된 ‘그때, 그곳’의 기억을 ‘지금, 여기’에 소환해서 이야기가 있는 풍경을 관객에게 선보인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작업실에 있는 장면을 전시장에서 변주하여 선보이기도 한다.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솟은 진열장을 짜고 자신의 작업실에 있는 소품들을 특별한 분류 없이 한꺼번에 선보이는 것이 그것이다. 작업실과 전시실의 모호한 경계 지점에 관객을 초대해 자신의 작업이 지니고 있는 현재적 고민을 나누고 함께 이야기하고자 한 시도라고 평가해 볼 수 있겠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높낮이가 다르고 모양도 제각각인 철제 좌대나 건축용 블록을 사용한 좌대를 다양하게 설치하는 시도를 통해 작품과 어우러지는 전시의 유형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관련한 이야기도 관객과 나누고자 한다. 또한 그는 둥글고 각진 프레임에 대한 조형적 성찰, 그리고 바닥이 아닌 벽면에 작품을 설치하는 조각의 가능성도 여러모로 실험한다. 어떤 면에서는 이번 전시 ‘이야기가 있는 풍경’은 작업실에서의 생각을 전시장으로 연장하는 예술가 김기주의 희로애락이 듬뿍 담겼다는 점에서 가히 ‘예술가의 풍경’이라고 또 달리 부를 만하다. ● 



출전 /
김성호, 「이야기가 있는 풍경」, 『김기주』, 서문, 2023.
(2023올해의 중견작가-김기주전, 2023. 08. 03 ~ 2023. 09. 09, 대구문화예술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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