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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전시대의 도래

김달진

민전시대의 도래 (民展時代의 到來)

 

김달진

 

때는 바야흐로 민전시대에 돌입해서 한국일보사의 ‘한국미술대상전’ 전남매일신문사의 ‘전매미술대상전’ 동아일보사의 ‘동아미술제’ 중앙일보사의 ‘중앙미술대전’ 전시계의 ‘한국전시미술대상공모전’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의 ‘신라미술대전’ 및 각 그룹공모전등 민전이 성시를 이룬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국전도 문화공보부에서 주관해오던 것을 민간기구인 문화예술진흥원으로 이양된다고 한다.

그간 국전에 대해서는 많은 병폐와 문제점이 지적되오고 있었다. 이에 1976년 10월 5일 조선일보에서는 「현시점에서 ‘국전의 체질 개선은 절망적’이라고 보는 화가가 많다. 그만큼 국전이 비대해진데다 미술계의 딱한 권력자들의 권력행사와 권력을 파는 아성을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국전 폐지론이 강하게 일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국전세력이 그만큼 확고해 화단에서 화가로 행세하자면 국전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 이란다」 고 밝히고 있다.

미술평론가 김윤수씨는 미술과 생활 1977년 11월 ‘선전의 잔재와 그 극복’에서 「국전을 폐지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의 건강한 정서생활을 위해 마련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국민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민중의 생활과 미적이상과는 거리가 먼, 미술가들만의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나라가 자유국가이니까 개인이 어떤 미술을 하건 상관할 바 아니지만 민중에 기여못하는 제도, 예술가, 예술(양식)을 위해 막대한 세금이 쓰여져야 할 논거는 아무데도 없다. 이 밖에도 더 많은 논거를 지적할 수 있지만 요컨대 오늘의 국전은 이미 낡은 것이므로 폐지해야 옳다. 제도도 낡았고 사람도 낡았고 예술의 분배방식도, 예술양식(특히 아카데미즘)도 낡았다」며 국전 폐지론을 역설해 주고 있다.


국전의 불신으로 낙선전이 1954년 11월 화신화랑에서 정진철, 김화경, 윤재순, 김정환, 박사일씨 등이 참여 열려었다.-이구열씨 한국근대미술년보(한국근대미술60년전 도록 P251) 참고

1957년에는 문교부의 연구보고서(예술계1–1974년)를 보면 낙선작가전이 변관식을 중심으로 화신화랑에서 열렸다고 나오고 허영환씨 「한국현대동양화운동고찰(한국의근대미술3호 P15)」에서 국전의 초대작가이며 대화가인 소정 변관식이 파벌과 정실에 얽힌 고발문인 「공정잃은심사」를 조선일보에 발표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경성씨는 「근대한국미술가논고 소정 변관식편 P68」에서 「공정잃은심사」를 1957.10.21. 동아일보에 발표하고 11월에 화신화랑에서 낙선작가전을 가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사상계사에서는 국전선외선을 1962.11, 1963.11, 1964.12, 1965년 12월호 지상에 발표하며 심사불신으로 대항했다.

1963년 12회 국전에서는 서양화부 심사위원이 목우회 일색이란 불평속에 미대학생들이 낙선전을 64년에는 사진부문 입상자 3명이 심사위원의 심사에 불만 수상을 거부하고 전시작품을 철수하는 소동을 벌이고 국전 개막을 앞두고 서울대 미대생들도 경복궁미술관에 몰려들어 전시중인 작품의 반환을 요구했단다.-국전의 추태(조선일보 1976 10.8 참고)

16회 국전 낙선작품전시회가 1967.10.12.~22 덕수궁 옆 소전각에서 이경수, 이석구, 이영수(전년도 백양회최고상)씨 등 25명이 출품 전시했었다-조선일보 1967.10.19 참고

그리고 16회 국전 대통령상을 받은 김진명씨가 이듬해는 출품해 입선도 되지 못하는 넌센스를 보여 화제를 모았었단다.-이경성씨 「국전이야기(주부생활 1971 12월호)」참고

어쨌든 전년도에는 최고상을 받은 사람이 다음해에는 낙선될만큼 실력이 하락됐겠는가?

1968년에는 대통령상을 비롯한 특상작의 선정에 말썽이 일어나 서양화부문심사위원장 남관씨가 퇴장하는 사태를 빚었는데 이유는 최종심을 하기 이틀전부터 대통령상은 서예부문이라는 묵계가 나돈데다 돌려먹기식 시상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문공부장관상을 받은 이승조씨가 시상안배설을 내세워 한때 수상거부와 함께 심사모순에 반기를 들었다.-조선일보 1976.10.8 참고

1974년 대통령상수상작(양진니) 75년 국무총리수상작(김사달)인 서예에 오자가 나오는 등 심사에서 실수를 드러냈는데도 끝내 관전의 체면유지를 위해 입상을 취소하지 않아 여론을 들끓게도 했다. - 조선일보 1976.10.8. 참고

그 후에도 해마다 되풀이되다시피 하는 국전서예부문의 오자에 대한 말썽이 잇따랐다.

항상 국전심사에 연결된다는 지연이니 학벌이니 파벌이니 하는 인맥에 따른 ‘작품보다 작가 이름을 앞세운다’느니 ‘돌려먹기식’이라느니 거기에 뒤따르는 잡음 말썽, 수상에 따른 뇌물, 정치, 담합, 협상 등 예술작품과는 거리가 먼 어휘들이 만재 했었다. 이제 국전도 모든 모순과 벽을 깨뜨리고 과감하게 개혁할 때가 온 것 같다.

하지만 관전이 아닌 민전은 지금 생긴게 아니라 벌써 오래전부터 있었다 없어지며 싹트고 있었다. 크고 작은 공모전들이 때로는 1회로 끝이 났지만 그것들이 발아되서 오늘의 민전시대에 도래하게 만든게 아니겠는가? 앞으로 민전은 중단없게 기대를 걸면서 과거에 있었던 단체전의 공모전 그리고 민전을 돌이켜 보기로 한다.

 

■ 협전(서화협회전람회)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민전으로 우리는 1920년대 왜정치하에서 개최되었던 서화협회의 협전을 들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침략 통치기관이었던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문화정책의 하나로 1922년부터 1944년까지 선전(조선미술전람회)을 개최했었다. 선전으로 화단 등용문의 권위를 지녔었지만 협전은 민족의식을 지닌 민전으로 명맥을 유지해오다 결국은 일제의 탄압, 재정문제, 회원의 무성의로 끝을 보게 된 것이다. 협전을 살펴보면 최초로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고희동씨가 주동이 되어 1918년에 조석진, 안중식, 정학수, 김응원, 강필주, 김규진, 이도영, 정대유, 오세창, 강진희, 김경희, 나수연(또는 현채)

<주> 이경성씨는 나수연(한국예술총람, 한국근대미술연구) 이구열씨는 현채(한국근대미술산고, 근대한국미술의전개)로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13명이 발기한 서화협회에서 1921년부터 첫회는 중앙고보에서 7회까지는 보성학교 8회에서 1936년 15회까지는(1932년은 안열렸음) 휘문고보에서 개최되었는데 그당시 시대정세가 그러했다지만 민족의식이나 역사의식이 빈약해 선전의 영광을 얻기위해서만 급급했지 협전에만 협력하는 화가는 드물었으며 출품해도 무성의 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의 작가군을 ‘이구열’씨는 선전의 형성과 전개(미술과 생활 1977년 11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자세히 밝혀주고 있다. 「선전에 출품 추천작가까지 된 작가는 1935년 이상범 이영일 김종태 1936년 김은호 1937년 이후로 김기창 이인성 심종구 김인승 김경승 제씨」고 백윤문 장우성 이유태 조중현 최근배 정말조 정종녀 나혜석 김중현 강신호 김주경 임응구 김용조 손일봉 이마동 박영선 조병덕씨 등(17명은 필자 주)이 활약이 컸다.

「고희동 오일영씨가 한 두 번 출품으로 선전을 외면했고 뒤이어 허백련 변관식 노수현 박승무씨가 외면했다. 서양화부에서는 고희동 김은호 이종우 오지호씨가 초기에 참가하다 외면했고 꼭 강한 민족 주체의식에 의했다고 할 수 없겠지만 선전같은 관전을 외면 나가서 무시로 일관한 작가로 구본웅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 이규상씨 등이며 전혀 인연을 맺지 않은 화가로 도상봉 이병규 임용연씨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인 작가의 내면, 그들의 작품활동의 시대순응기록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문제는 간단치 않다.」고 밝히고 있다.

 

■초대전

과거의 현대작가초대전과 문화자유초대전이 오늘날 커다란 공을 세웠다고 평가받는 기획전이다. 한국일보사에서는 초대전과 공모전을 매년 번갈아 개최하더니 지명공모와 일반공모를 병행 실시하며 중앙일보사에서는 초대, 공모전을 동시 개최한다고 하는데 운영의 묘만 살리면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1. 한국현대미술전

작가들이 약력등에서 가장 앞세우는 초대전으로 1958.2.25.~3.22 뉴욕 월드하우스화랑에서 개최 고희동 이상범 박래현 이응로 김기창 장선백 도상봉 김환기 박수근 함대정 유강열 남관 김영주 김흥수 김병기 김훈 김상대 문학진 박서보 변종하 문우식 안영일 유경채 이세득 장욱진 정창섭 천병근 최영림 등

 

2. 현대작가초대전

조선일보사 주최로 1957년 1회전을 갖고 1969년 13회 전시로 폐지되었는데 일종의 재야전 성격을 띠었으며,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전반에 걸친 추상운동의 거점으로 많은 기여를 했다. 1회는 서양화만 2회는 동양화 조각까지 3회를 보면 동양화가 45, 서양화가 79, 조각가 25, 전부 149명 초대되었고 범위도 넓혀지고 6회는 동양화 서양화 조각 판화에 외국작가도 11명이 초대되었으며 8,9,11회는 공전되었다. 5,6,7회는 일반 공모전도 함께 해 5회(1961년) <심사위원-홍종인, 김영주, 권옥연, 유영국, 이세득> 입상작에 민병영, 장려상에 김기원, 정해일, 6회(1962년) <심사위원-민경갑, 김영주, 전상범, 이항성> 장려상에 김인중, 곽훈, 양주석, 정관모, 오창성, 7회(1963년) <심사위원-이희세, 권옥연, 김영학, 이상욱> 신인상에 권승연, 장려상에 장상의, 이광하, 권진규, 오창성씨가 수상했다.

1회 초대자

이응노 김경 김영주 김훈 김흥수 나병재 문우식 변영원 변희천 안영목 이세득 정규 정준용 정창섭 조병현 천병근 최영림 황규백 김병기 한봉덕

2회 동양화 초대자

금동원 김화경 박인경 성재휴 윤영 이응로 이희세

2회 조각초대자

강태성 김교홍 김영학 박철준 배형식 백문기 유한원 이정구 전뢰진 전상범 최기원 김정숙(불참)

13회 판화초대자

13회는 마지막 회로 회화부 32, 조각부 16, 판화부 10, 전부 58명이 초대되었다. 1969 7.1~10 국립공보관

강환섭 김민자 김상유 김정자 배융 유강열 윤명로 이상욱 이성자 정규

 

3. 문화자유초대전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본부가 주최한 초대전으로 1962년 1회전이 열리고 65년 4회까지 계속된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한 기획전이다.

<주>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기구(1961.4)

「우리는 인류가 자유를 가진이와 못 가진 이로 갈라져 있는 한 안정된 세계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자유인 선언을 내세운 기구로

위원장 오종식

임원 인문분과-황산덕 자연분과-권영대 예술분과-임원식

사무국장 김용구

동 기구의 명칭을 춘추회

1회전 1962.6.21.~27 중앙공보관

권옥연 박래현 김기창 박서보 김영주 서세옥 김창렬 유영국

2회전 1963.5.6.~12 중앙공보관

권옥연 김기창 김영주 김창렬 박래현 박서보 유영국 김종학 손동진 윤명로 정상화 정창섭

3회전 1964.11.2.~11 신문회관

권옥연 김기창 김영주 김창렬 박서보 유영국 정영열 조용익 건축-김중업 조각-최기원 한용진

4회전 1965.11.14.~20 예총회관

권옥연 김영주 박서보 유영국 윤명로 변종하 전성우 하종현 판화-유강열 조각-최기원 박종배

 

■단체전의 공모전

공모전에 수상을 하게 되면 회원이니 회우로 받아들여지는데 착실하게 단체전을 통해 발판을 굳혀가는 작가도 많이 있다.

 

1. 한국미술가협회전

대한미협회서 탈퇴한 서울대 미대학장 장발 중심 미술인과 대한미협에 미참가한 서예 사진의 미술인이 결성한 단체로 동양화 서양화 조소 응용미술 서예 사진 건축 회원 117명, 1회전은 1956 9.21~9.30 휘문고보에서 열렸는데 특선에 김교만-응용미술 김형록-사진, 입선에 동양화 15, 서양화 65, 조소 20, 응용미술 21, 서예 37, 사진 34, 건축 9점이었고 2회전은 1961.4.27.~5.14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렸으며 국무총리상 최욱경-서양화, 한국미술가협회상 김영길-동양화, 서울특별시장상 신석필-조각 예술원장상 홍완수-서예 문교부장관상 한규성-사진

 

2. 신상회 공모전

모던아트협회 주류, 창작미협의 이탈자, 신조형파의 일부, 그리고 무소속이 합류 서양화가 조각가 23명이 1962년 창립 2회부터는 디자인부를 신설했다.

창립동인 김창억 박석호 유영국 이봉상 이대원 이정규 임완규 정건모 조병현 한봉덕 황규백 박창돈 박항섭 유영필 이달주 이수재 이준 장욱진 최덕휴 황유엽 손동진 김영중 김영학

2회 디자인부 한홍택 조병덕 권영휴 등

회원과 회우제를 두고 공모전도 개최 1회에 이주영./2회 최고상 하종현, 차석상 이동웅 조성묵(조각), 장려상 이광하./3회전에 윤주숙. /5회전에 손영성./ 7회전에 이두식 장려상-백금남(디자인)씨가 수상했으며 1968년 해체되었다.

 

3. 백양회 공모전

1957년 김기창 김영기 김정현 박래현 이유태 이남호 장덕 조중현 천경자 9명이 창립한 동양화 단체 모임으로 공모전은 1회(1964년) 송계일/ 2회(1966년) 이영수/ 3회(1968) 유영열/ 4회(1969년) 박미연/ 5회(1970년) 김철성/ 6회(1971년) 최응규/ 7회(1973년) 정하경/ 8회(1974년) 김보희/ 9회(1975년) 김이경/ 10회(1976년) 이귀임/ 11회(1977년) 박영대씨가 최고상인 백양회상을 받았다.

 

4. 목우회 공모전

1958년 17명에 의해 창립된 서양화단체로 뒤에 조각도 참여되었다.

창립동인 이종우 이병규 도상봉 이동훈 손응성 임직순 김종하 김형구 심형구 김인승 박득순 박상옥 이종무 최덕휴 박희만 나희균 박광진 공모전은 1회(1963년) 양인옥/ 2회(1964년) 홍정자/ 3회(1966년) 송기성/ 4회(1967년) 박춘애/ 5회(1968년) 김수현-조각/ 6회(1969년) 박남재/ 7회(1970년) 오승윤/ 8회(1971년) 박각순/ 9회(1972년) 김양묵/ 10회(1973) 최예태/ 11회(1974년) 유영교-조각/ 12회(1975년) 정승주/ 13회(1976년) 정태수-조각/ 14회(1977년) 김암기/ 15회(1978년) 김흥수씨가 최고상을 수상했다.

 

5. 구상전 공모전

1967년 새로운 의미의 구상을 지향하는 서양화 단체로 19명이 창립했다.

창립동인 김영덕 박고석 박석호 박창돈 박항섭 송경 신석필 정건모 홍종명 강우문 김희재 박성환 박영성 안영일 이봉상 전상수 정규 정준용 공모전은 1회(1969년) 이우복/ 2회(1971년 오세열/ 3회(1972년) 김현옥/ 4회(1973년) 박무웅/ 5회(1974년) 장순업/ 6회(1975년) 박종해/ 7회(1976년) 김정자씨가 금상을 수상했다.

 

〇 국제사진살롱(1963.5)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사진살롱」은 예총경북지부 주최로 신라문화제 한 행사로 열렸었는데 10여개국 106점의 외국작품, 국내초대작 38, 국내일반공모 입선 36점, 모두 180점의 작품을 대구 서울 부산에서 순회전시도 가졌다.

우수상 입상자

샹창셍 (자유중국)

키청탓 (싱가폴)

차우 청 (월남)

이창환 (한국 서울)

정태영 (한국 대구)

 

■ 민전(대한민국국민미술전)

1965.7.10.~7.24 부산 동아대학교

부산미협이 주관 재부 실업가들의 뒷받침으로 열렸으며 초대작가 출품이 있었고 학생실기대회도 병행하였다. 심사위원은

동양화-서세옥 이석우/ 서양화-유영국 이세득 이준 임직순 임호 박서보 정창섭 조동벽 추연근/ 공예-유강렬/ 조소-백문기/ 서예-손재형 정현복 김광업

최고상 (상금 5만원) 김인중

동양화-수석특선 장상의

특선 원문자 김덕영 임재민 고호상

서양화-수석특선 강정완

특선 이자경 황영성 김종근 박승범 남혜숙 강정자 오춘란 임민자 함종섭 서계림 박숙자

조소-수석특선 전준

특선 김청정 이정자 조국정

공예-수석특선 황행자

특선 송정인 김성자

서예-수석특선(2만원) 이동영

특선 양진니 이만우 배재식

 

■동아국제미술전

1968.8,1~8.20 부산 동아대학교

동양화 서양화 조각 공예 서예 사진의 6개부분

심사위원장 손재형

대상(상금 30만원) 이승조-서양화

국회의장상(10만원) 김봉근-조각

국무총리상(8만원) 주영도-조각

수석상 금기풍-서예 송수련-동양화

노영애-서양화 양두환-조각

조일상-공예 김석봉-사진

장려상 이영찬-동양화 황주양-공예

김테레사-사진

 

■서울국제판화비엔나레(동아일보사주관)

제 1회 1970. 11.2~30 국립현대미술관 세계 23개국 69명 192점

심사위원 외국 2, 한국인 4(최순우 이경성 이일 유준상)

동아대상 (상금 10만원)

김상유/에드와르드 파올로지(영국)/첸팅쉬(중국)/요시다 가츠아키(일본)

제 2회 1972.6.1.~20 국립현대미술관 세계 30개국 156명 437점

심사위원 외국 2, 한국인 3(이일 임영방 유강열)

동아대상 (상금 미화 300달러)

송번수/로페스(포르투갈)/요시다(일본)/밀톤(미국)

 

■한국미술대상전(한국일보주관)

제 1회 1970.6.9.~7.6

일반공모작과 추천작가 출품

심사위원장 남관

대상 (상금 100만원) 김환기

국무총리상 (40만원) 심문섭-조각

우수상 (20만원) 김동수-동양화 여운-서양화 송번수-판화

문교부장관상(10만원) 김원세-동양화

문공부장관상(10만원) 김선회-서양화

서울시장상(10만원) 김현실 최상철 주영도

제 2회 1971.5.10.~6.9

심사위원장 남관

부위원장 김기창 유경채

대상-없음

최우수상 (상금 25만원)

장상의-동양화 정문현-서양화 엄태정-조각 최혜영-판화

우수상 (15만원)

심경자 이봉열 유산호 김현실

특별상 (10만원)

김동수 최은희 이경석 이반 남길희 이태현 강정완 강환섭 고정수

제 3회 1976.11.3.~11.22

심사위원장 유영국

금상-없음

은상 (상금 150만원과 파리왕복항공표) 오세열 배동환

특별상 (100만원)

동양화-오용길 유민자 김석중

서양화-홍정희 김종근 장순업 김태호 우제길 김진석 박동인

제 4회 1977.6.7~6.17

초대전으로 동, 서양화 55명과 일본작가 3명 심사없이 출품작 전시

제 5회 1978.11.13~11.22

심사위원 서세옥(위원장) 박서보 이일 유준상 오광수

대상: 지명공모(300만원 파리왕복항공표) 윤형근,  일반공모(200만원 파리왕복항공표) 진옥선

최우수상 (100만원): 지명공모-최명영 서승원, 일반공모-김홍주 김진석 

우수상(50만원): 지명공모-없음, 일반공모-김용익 이동엽 

장려상: 지석철 박은경 윤익영 신정희 김용진 정재학 송윤희

 

■동아미술제

「새로운 형상성」을 내걸고 동아일보 동아방송주최

제 1회 1978.3.30.~4.12

운영위원-김영중 안동숙 윤명로 이일 이구열 오광수 유준상 손세일 정영복

심사위원-김영중(위원장) 김기창 성재휴 안동숙 변종하 권옥연 윤명로 정관모 최종태 이일 이구열 오광수 유준상

동아미술대상(100만원) 변종곤 회화2부(현대회화) 동아미술상(작가기금상 50만원) 회화 1부(전통회화)-오용길 이상원 김천영 회화2부-박팽년 최종림 회화3부(판화 수채화 드로잉 기타)-한운성 조각부-박기옥 이승택 이상갑

 

제 2회 1979.4.4~4.17

운영위원-김영중 김응현 예용해 정도선 정환섭 이명동 손세일 정영복

심사위원 사진부-임응식 김광석 이형록 임석제 홍순태 공예부-권순형 김원용 임홍순 정시화 최승천 서예부-송성용 이기우 김제인 석도륜 임창순 동아미술대상 (100만원) 차용부(사진) 박원규(서예) 동아미술상(50만원) 사진부-이관조 김수군 공예부-정계선 이은오 서예부-안근준 신덕선 여원구

그리고 동아일보사에는 노대가들의 회고전을 개최해왔고 동아공예대전, 동아국제사진살롱, 동아사진콘테스트를 개최해오고 있다.

 

■중앙미술대전

중앙일보·동양방송주최 초대 공모전 동시개최

제 1회: 1978.6.3~6.22

운영위원-장우성 박노수 권옥연 박항섭 최기원 최만린 이경성

추천위원-최영림(위원장) 이종상 윤명로 정관모 최종태 이구열 유근준 유준상 오광수

심사위원-동양화: 이경성(이원장), 이종상, 김동수 서양화: 오광수, 이대원, 문학진 조각: 김찬식 강태성 엄태정

대상(300만원): 강대철

장려상(100만원)-동양화: 박대성, 이숙자, 정종해, 김아영, 서양화: 홍정희, 신범승, 이호철, 지석철, 조각: 신옥주

특선-동양화5, 서양화8, 조각7점

제 2회: 1979.6.4~6.17

운영위원-이경성(위원장), 성재휴, 최만린

추천위원-이일, 오광수, 김윤수

심사위원-동양화: 오태학, 이영환, 오광수, 서양화: 임직순(위원장), 윤명로, 이일, 조각: 오종욱, 정관모, 유근준

대상(300만원)-박대성: 동양화, 백철수-조각

장려상(100만원)-동양화: 김호석, 서양화: 윤익영, 김창영, 조각: 김효숙, 무감사-7점, 특선: 동양화4, 서양화7, 조각3점, 초대작가: 동양화14, 서양화26, 조각13작가

주: 무감사-중앙미전의 규정에 따라 전년도대회 수상자의 출품작은 자동적으로 무감사로 입선권에 든다. 이 무감사 작품중에서도 대상·장려상 수상권에 들 경우에는 수상한다.

 

■전매미술대상전

·전남매일신문사 주관

제 1회: 1977. 12. 12~21 광주학생회관

심사위원-동양화: 김옥진, 김형수, 나상목, 성재휴, 조방원, 서양화: 오지호, 김원, 정영열, 최영림, 이구열, 서예: 김기승, 구철우, 송성용, 정환섭

금상(상금 100만원)-최영훈: 서양화

은상-(30만원) 이동관: 동양화, 김종주: 서예

동상(10만원)-기영숙: 동양화, 김종일: 서양화, 박원규, 김명실: 서예

제 2회 1979. 12. 12~12. 25

 

■한국전시미술대상공모전

전시계주최

제 1회: 1978. 12. 4~12. 10

전시회를 서예는 여의도 여성백인회관, 동양화 엘칸토미술관, 서양화 디자인포장센터에서 나누어 가졌다.

명예대회장-김은호, 대회장-박승무

운영위원-김기승(위원장), 김기창, 김영기, 지성채, 박세원, 허건, 조병덕, 이대원, 김경승, 최학천, 김용운

심사위원-서예: 김기승, 고봉주, 김사달, 이기우, 이철경, 동양화: 김상철, 박봉수, 지성채, 이석우, 서양화: 조병덕, 이대원, 박성환, 이항성, 박옥순

대상(100만원)-박종만: 동양화

금상-공영석: 동양화, 김영인: 서양화

은상-서예: 조영자, 김동명, 동양화: 이영수, 장인수, 서양화: 임간경, 이건옥

동상-서예: 정종원, 정해천, 사군자: 임덕화, 동양화: 우찬무, 오영후, 변아나, 서양화: 정학영, 이명춘, 최상선

제 2회: 1979. 12. 8~12. 14

 

■신라미술대전

경주시 신라문화선양회

제 1회: 1979. 10. 8~11. 8 경주 서라벌문화회관

운영위원회-위원장: 김창곤(경주시장) 일반위원: 박상근, 전문위원: 김창락, 김영재, 이의주, 정점식, 황영성, 배형식, 박재호, 서석규

심사위원 동양화-조중현·오태학 서양화-김창락 이의주 서창규(예총경북지부장) 박재호(예총경주지부장) 조각-배형석 홍성문, 공예: 박성삼(위원장), 정담순, 서예: 조수호, 송성용, 오제봉

대통령상(150만원 일본여행권 30만원)-조필제-동양화

국무총리상(70만원)-이필언: 서양화

문화공보부장관상-김길석: 조각, 김기천-공예: 한영구: 서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작가시비로 동양화부 특선을 차지한 연당 이규원씨가 출품한 <연지>가 작년도 국전에서 입선을 차지한 우경 이상찬씨 작품을 낙관만 찍어가지고 교환한바 있었는데 이 낙관을 긁어버리고 자신의 작품인양 출품해서 특선을 차지했고 재미있는 것은 작년도 국전 심사위원을 한 모씨가 이 심사를 맡았다는데 많은 작품을 대하다보니 선별해내지 못한 것일까?

 

재야단체

대한미술원-김영기씨를 중심으로 박생광, 이남호, 박봉수, 조복순, 김재배, 정홍거, 김인곤, 김진황 9명이 창립

2회전을 1977. 10. 27~11. 1 미도파화랑, 2회전 1978. 10. 8~10. 22 미도파백화점 장미홀, 3회전 1979. 3. 23~3. 28 대구한성회관, 4회전 1979. 10. 13~10. 19 덕수미술관에서 열렸으며 재야단체로 뚜렷한 성격을 가지고 발전하고 있다.

 

이상 과거에 있었던 초대전·단체전의 공모전, 민전과 현재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언론기관의 민전을 돌이켜보았다. 미흡하긴 하지만 미술사에 등장하는 민전의 자료로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민전은 국전처럼 관전이 아니기 때문에 어필하고 있는데 어설프게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시선을 끌기보다는 과거처럼 한 두 번의 공모전으로 끝나지 않고 다져나가서 민전의 새로운 가능성을 깊이 새겨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민전의 문제점으로 ☆남이 주최하니깐 따라하는 모순을 드러내지 말고 나름대로의 각 민전 성격을 굳혀가며 ☆심사위원 선정문제에서 국전의 재판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운영되어야 할 것이며 ☆신인 발굴에 그치지 말고 키워주는 지원에 인색하지 말고 ☆매스컴은 국전수상자만 대서특필할게 아니라 단체전의 공모전 수상자 이름이라도 실려주는데 인색하지 않도록 해야 될 것이며 ☆작가들도 꼭 국전을 통하여 명성을 얻는다는 관념을 버려야 할 것이다. 한가지 더 오늘날 높이 평가받는 허백련, 이중섭, 김환기, 권진규씨는 국전에 그토록 연연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해두고 싶다. 

                                                                                                                          - 월간 전시계  197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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